글 - 칼럼/단상2016. 9. 1. 16:42

 

삼례 책 마을을 다녀와서

 

 

 

책이 없어 곤궁하던 어린 시절부터 책이 넘쳐나는 지금까지 책과 뗄 수 없는 것이 내 삶이다. 남의 책들을 사 읽고 모으며, 가끔은 책을 펴내는 게 내 일 중의 큰 부분이기 때문이다. 내가 막 학계로 진출하던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30여 년 동안 우리 사회엔 책이 넘쳐나게 되었다. 지식인들의 수와 지식정보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지식정보의 유통과 저장을 위해 책의 효용가치는 절대적이었다. 책 하나 펴내지 못하면 행세를 하지 못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마구 변하여 모든 지식정보는 디지털의 공간으로 이동함으로써 이제 크고 무거운 책이 거추장스런 시대가 된 것이다. 어린 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하루 24시간을 구부정하게 스마트폰만 들여다 보는 시절이다. 종이 위의 깨알 활자들이 어찌 이들에게 매력적일 수가 있겠는가.

 

누구의 한탄대로, 한국의 대학가에서 서점이 사라졌다. 책이 빠져나간 공간을 옷 가게, 음식점, 술집, 커피 집 등이 파고들었다. 가끔씩 커피 집 창문으로 책을 읽거나 컴퓨터 작업 하는 사람들이 보이긴 하나,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 대다수는 잡담을 나누거나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 대학에서 책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지성의 샘도 말라버린 것이다.

 

대학의 권력도 대부분 힘 있는 이공계가 잡고 있다. 총장도 보직교수들도(그 가운데 도서관장도) 책이 무언지 모르는 시대가 되었으니, 어린 학생들 탓만 할 수는 없다. 도서관의 장서를 전자책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있으니, 도서관에서 값나가는 인문서적들이 차떼기로 퇴출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다. 이렇게 반학문적, 반지성적 만행들이 수시로 나타나는 현장이 대학이다. 그래서 종이책만이 책임을 믿으며 대학인으로 살아가기가 참으로 면구스럽다. 책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 종이책을 찾는 사람들이 바야흐로 멸종을 눈앞에 둔 천연기념물이 된 것이다.

 

이런 시대에 완주군 삼례읍은 특이하고 고결한 고장이다. 아주 오래된 비료창고를 문화공간으로 변모시키고 각박한 삶에 지성의 문채(文采)를 입힌, 이 고장 사람들의 지혜가 참으로 소중하다. 2016829일은 이 땅에 타오를지도 모를 대한민국 판 르네상스가 바로 이 고장에서 점화된, 역사적인 날이다. 책을 잃어버려 마음도 희망도 잃어버린 대한민국에 갈 길을 제시한 등대로 우뚝 선 날이다.

 

이 날 몇몇 지인들과 책 마을 개관식에 참석했다. 시가지에 들어서자 삼례는 책이다!”라는 현수막이 수줍은 듯 조그맣게 매달려 있었다. 삼례성당 좌측 창고에는 책 박물관, 박물관 건너편에는 목공학교가 가동 중이었다. 이 부분이 책 마을의 중심이었다. 박물관은 아동도서와 교과서, 만화 등 2~3개 주제의 상설전시와 매년 1~2회의 기획전이 열리게 되는 공간이었다. 박물관 건너편의 김상림 목공소도 책 마을의 전통성을 보태주는 좋은 공간이었다. 전통 목공의 도구들을 살펴볼 수 있고, 목수들의 작업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곳. 그곳 역시 멋진 공간이었다. 박물관에서 나와 삼례역 방향으로 걸어가니 북하우스, 한국학 아카이브, 북갤러리 등 세 동의 건물이 눈 앞에 나타났다. 북하우스는 고서점과 헌책방, 북카페로 구성되었고, 한국학 아카이브에는 각종 연구 자료들이 비치되어 있으며, 북갤러리에는 전시실과 강연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북하우스로 들어가니 고서점 호산방이란 이름 아래 한국학 관련 고서, 신문, 잡지, 사진, 음반자료, 중국일본서양 관련 고서 등이 비치되어 있고, ‘책마을 헌책방1층에는 아동도서와 향토문화 관련 도서 등이, 2층에는 인문도서들이 비치되어, 10만권의 빛나는 책들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헌책방의 1층 한쪽에 카페가 마련되어 독서와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기도 했다.

 

책은 위대한 천재가 인류에게 남겨준 유산이다. 그것은 대물림하여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손들에게 주는 선물로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된다.” 책에 관한 에디슨의 명언이다. 이제 위대한 천재들이 만든 책들이 이곳으로 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물림되어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지겠지. ‘망아지가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이 있듯 조만간 책도 사람도 삼례로 보내라는 새로운 속담이 나올 날이 머지않았다. 삼례는 책의 메카로 변신할 것이며, 대한민국 정신사의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현명한 부모라면, 아이들 손을 잡고 삼례 책 마을에 가서 잠시라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볼 일이다. 책의 의미와 책의 일생을 보고 보여주면서 말이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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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리나

    사진을 통해 책향기를 마음껏 즐기고 갑니다.

    2016.09.18 16:20 [ ADDR : EDIT/ DEL : REPLY ]

글 - 칼럼/단상2016. 2. 16. 17:28

    


원서 표지

 

 

 


번역서 표지

 

 

 

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클로디아 드라이퍼스

 

 

         대학은 아직도 지성의 유토피아인가?

-앤드류 해커클로디아 드라이퍼스의 <<비싼 대학>>을 읽고-

 

 

대학은 제한 없는 학문 탐구와 자유로운 지성 발현의 전당이어야 함을 믿는 사람들이 많고, 한동안 그 표본을 수백 년 역사의 유럽 대학들에서 찾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유럽 명문 대학들의 고색창연함보다 시대정신을 창도(唱導)한다는 점에서 미국의 유수 대학들이 훨씬 매력적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고, 내 입장도 그렇다. 나는 꽤 오래 전부터 기회가 생길 때마다 미국의 대학들을 돌아보며 그들이 누리는 풍요와 자유, 고품격의 시스템을 선망해오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공개하기는 좀 쑥스럽지만, 최근 큰 아이가 컴퓨터학 교수로 자리를 잡은 뉴욕대학의 면면을 훔쳐보면서 그런 인식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런 인식이야말로 바야흐로 붕괴되어가고 있는 우리나라 대학들의 현실을 망연자실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내 입장에서는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굴레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퇴출대상 1호로 지목되고 있는 후진국 대학의 인문학자. 우리나라의 대학을 되살리기 위해 선진국의 대학들을 열심히 벤치마킹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한 채의 집을 놓고 생각해보자. 근자 리모델링이란 기법이 유행하고 있는데, 리모델링을 잘만 해놓으면 그럴 듯하게 탈바꿈하는 경우들은 드물지 않다. 그러나 리모델링이란 것도 원본이 그럴 듯해야 가능한 공법이다. 여기를 손대면 저기가 무너지고 지붕을 고치면 구들이 내려앉는 등의 경우에야 그냥 무자비하게부숴버린 다음 새로 짓는 편이 오히려 낭비를 줄이는 일일 것이다. 뜻 있는 사람들이 한국의 대학들이 어서 빨리 망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도 그라운드 제로위에 새로운 대학들을 건설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리라.

 

최근 충격적인 책 하나를 읽었다. 그렇게도 선망해오던 미국 대학들의 속살을 사정없이 헤집으며 매섭게 질타한 저자들의 혜안과 용기가 놀라웠다. 원제는 Higher Education?: How Colleges Are Wasting Our Money and Falling Our Kids-And What We Can Do About It 이었으나, 번역자들(김은하박수련)“<<비싼 대학: 미국 명문대는 등록금을 어떻게 탕진하는가>>/강의는 뒷전인 교수, 돈만 삼키는 연구소, 대출에 허덕이는 학생교육을 우롱하는 대학!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 제목을 더욱 구체화시켰다. 번역서 표지의 굵은 글자들에 이 책의 내용은 고스란히 요약되어 있었다. 아마도 번역자들은 한국의 대학들에게 경종을 울리려 했을 것이다. 간혹 귀 있는 자라면, 그들의 말을  들을 수는 있을 것이다. 어쩌면 번역자들은 이 책의 내용이 미국 대학들의 문제점일 뿐 우리나라 대학들과 무관하다는 식의 태평함에 젖어 있을 우리나라 대학인들에게 무지막지한 비판을 가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옛날식으로 그럭저럭살아가다가 함께 벼랑에 떨어져 죽은들 어떠냐는 식의 무사안일과 기득권 의식에 매몰된 이 시대 한국의 대학인들. 선뜻 나서서 자기 혁신의 짐을 지려는 사람은 없고, 그동안 맛보던 자잘한 열매의 달콤함에만 취해 있는 이 시대 한국의 대학인들. 명목 상 지식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대학인들에게 속된 말로 몽둥이찜이라도 안겨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의 통찰을 얻게 되었다. ‘과연 일생 밥을 먹여주고 바람막이가 되어 준 대학을 환자로 삼아 냉혹한 외과적 수술을 가하는 주체가 될 수 있는가라는 원론적 질문이 그 하나이고, 세계 대학들의 롤모델이자 무흠한 상아탑으로 생각되어온 미국 대학들이 안고 있는 구조적 결함이나 비도덕적 기득권 주의, 혹은 대책 없는 비현실성을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이 다른 하나이다.

어두운 면이 정확히 오버랩된다는 점에서 미국대학들을 벤치마킹하다가 지쳐 널브러진 한국 대학들의 현재는 암울하고, 그 현재를 바탕으로 만들어가야 할 미래는 이미 잿빛으로 변해버린 채 신기루가 사라진 사막의 생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책은 미국 대학들의 잿빛 속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그 중심에 교수 집단의 그악스런 이기주의가 자리 잡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저자들은 대학의 많은 불편한 사실들을 이 책의 도처에서 고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의 핵심은 결국 학생학부모에 대한 착취와 대학교수집단의 부도덕한 기득권으로 요약된다. 이 책의 특이한 장점은 뒷부분에 추가한 우리의 제안에 있다. 본문 속에 늘어놓은 장황한 고발들을 결국 이러한 제안으로 요약하여 독자들의 뇌리에 각인시키고자 했으니, 저자들이야말로 책을 통해 이루어지는 전달의 메커니즘을 꿰고 있는 존재들이 아닌가.

 

그들의 제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대학의 존립 이유는 교육이다.

2. 대학의 등록금을 내기 위해 대출에 의존하는 삶을 그만 두어야 한다.: 대학의 각종 활동, 직원, 교수 때문에 생기는 비용 문제로 치솟는 등록금, 은행 빚을 얻어 등록금을 충당하는 관행은 이제 청산해야 한다.

3. 학생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보편적 대학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교수들은 자신이 썼거나 쓰고 있거나 쓸 예정인 논문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

4. 대학은 직업훈련소가 아니다.: 학부생 때는 흥미를 돋울만한 지적인 사람들을 많이 접해야 한다. 그래야 이전에는 해보지 못한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절반이 넘는 64%의 학생들이 직업훈련을 전공으로 삼고 있다. 비실용적인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 대학에서 더 현명하게 시간을 보내는 길이며, 궁극적으로는 더 유용한 투자가 된다. 철학, 문학, 역사 또는 물리학 대신 대다수 학생들은 말() 관리학, 용접술, 패션 마케팅 같은 분야를 선택하는데. 모두 명문대에 개설된 전공들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학부 시절에 수익을 계산하지 않고 걱정 없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지성을 마음껏 뻗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5. 종신교수제를 폐지해야 한다.: 아무런 명분도 없는 종신교수제를 폐지하고, 다년 계약제로 대체해야 한다.

6. 유급 안식년 제도를 없애야 한다.: 학자들은 7년마다 정신적으로 재충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쓸모없는 연구를 제한해야 한다.

7. 시간강사들의 노동 착취는 그만 해야 한다.: 안정된 직장에 정착한 교수들과 똑같이 수업하는 사람에게 교수의 6분지 1의 연봉만 주는 것은 비윤리적이고 부적절한 짓이다.

8. 특급 명문대학들의 가치를 제대로 따져 보아야 한다.: 자녀들이 명문대에 진학하기를 바라는 부모는 자식을 걱정해서라기보다 부모 자신의 출세 지향주의를 자식에게 투영했기 때문이다. 대학의 간판 너머를 보아야 한다.

9. 총장은 공공의 종복(從僕)이다.: 이사회에서 연봉 100만 달러 혹은 그와 비슷한 수준을 주겠다고 하면 총장은 고맙지만 사양하겠다고 말해야 윤리적이다.

10. 의대와 연구소를 대학에서 분리해야 한다.: 대학은 캠퍼스 내 연구소나 산하기관 뿐 아니라, 의과대학과의 고리도 끊어야 한다.

11. 테크노 티칭, 첨단 기기를 활용한 강의에 주목해야 한다.

12. 기부가 필요한 곳에 기부해야 한다.: 재정 여건이 훌륭한 대학들에만 기부가 편중되는 것은 옳지 않다. 기부금이 많은 대학의 동문들과 여타 기부자들은 진정으로 기부금이 필요한 다른 대학을 골라 기부하는 것이 좋다.

 

책을 마치면서 이 책의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두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은 글을 쓰는 교수였고, 한 사람은 기자이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날 이 나라의 대학을 지켜보는 일은 마치 공사판에서 그 어떤 목표나 목적도 없이 제멋대로 바닥을 깔아뭉개며 달리기만 하는 증기 롤러를 보는 듯 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침통한 마음을 가누며 이 책을 썼다.() 특히 고집 센 교수 집단이 모인 대학이란 곳에서, 교수들과 직원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관행을 지키려고 완강히 버텼다. 이 책의 출간을 열렬히 환영해 준 대학 밖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반응이었다. 대학에 몸 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현재 학생들이 학비를 낸 대가로 얻는 것이 별로 없고, 이 문제의 책임은 캠퍼스에서 개인의 실적을 쌓는 데만 여념이 없는 어른들(즉 교수들)에게 있다고 생각했다.”(316쪽)

 

그렇다. 대학을 바꾸기 위해 최대의 기득권 집단인 교수들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은 미국의 대학들이나 우리나라의 대학들이 다르지 않다. 대학의 개혁! 벌써 서산에 해는 지는데, 할 일은 많고 갈 길도 멀다.

 

 

 


 Holyoke Center에서 바라본 하바드 캠퍼스(Harvard Yard) 

 

 

 


예일대학교 올드 캠퍼스(Yale Old Campus)의 이른 봄 풍경

 

 

 


UCLA의 로이스 홀(Royce Hall)

 

 

 

뉴욕대학교 건물들 한 복판에 있는 Washington Square Park의 아치

 

 

 

교토대학 정문

 

 

 


연세대학교의 언더우드 홀(Underwood Hall)

 

 

 


숭실대학교 정문

 

 

 


서울대학교 정문의 학교 마크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교(Washington University Saint Louis)의 브루킹스 홀(Brookings Hall Qu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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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8. 2. 5.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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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한국’이나 로스쿨이나...

                                        
                                                                 조규익

작년 하반기에 출범한 인문한국(Humanities Korea) 사업과 지금도 논란중인 법학전문대학원(이하 로스쿨) 선정 과정은 지식사회의 철학 부재와 민족의 미래에 대한 국가적 아젠다 실종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다.

 전자의 경우 탈락의 이유나 명분을 상당수의 대학들이나 학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아카데미의 권위를 상징하는 총장과 교수들까지 교육부에 몰려가 시위를 벌일 만큼 후자의 경우 또한 결과 자체가 석연치 못하다.

 두 사업이 갖는 표면적 의미는 단순하다. 인문학 진흥을 위해 ‘가능성이 보이는’ 몇 개의 대학들을 선정하여 국가의 재정을 듬뿍 풀겠다는 것이 전자이고, ‘가능성이 보이는’ 몇 개 대학들을 선정하여 국가 권부의 한 축인 법조계 인맥의 공급처로 삼겠다는 것이 후자이다. 

 이제 로스쿨은 단순히 ‘법학 교육’만의 문제는 아니다. 교육수요자들이 이것을 학교전체에 대한 평가의 잣대로 원용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대학인들은 로스쿨의 유무가 대학 생존을 결정하는 날이 조만간 도래할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인문한국이든 로스쿨이든 주관 부서에서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았다고 하는 그 ‘가능성’이 미래지향적 의미를 크게 지녔다고 볼 수 없으며, 그런 기준에 대하여 우리의 지식사회가 제대로 공감하거나 수긍하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다.

 인문학을 새롭게 진흥시킨다거나 새로운 패러다임의 법학 교육을 시키자고 하는 마당에 그에 입각한 아젠다나 철학 혹은 참신한 아이디어 등을 따지지 않고, 예컨대 과거의 업적이나 인프라에 무게중심을 두거나 기존의 사법시험 합격자 수를 중요한 기준으로 적용시키는 등의 일이 지식사회의 미래지향적 구도에 그다지 합목적성을 지닌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 점 때문에 선정결과의 발표를 서너 차례 연기했을 만큼 인문한국 사업은 시작부터 갈팡질팡했으며, 로스쿨 역시 ‘정치적인 고려’ 등 본질적인 철학 부재의 함정에 빠져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양자 모두 권력의 향배와 무관하지 않은 대학의 현실을 그 결정적인 요인으로 거론하는 인사들도 많다.

 국가나 대학의 조직은 매니지먼트의 측면에서 공통되며, 그 자연스런 결과로 평가에 관한 기준이 물적 인프라의 규모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는 점도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자칫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과거부터 누적되어오는 물적 인프라의 기준에 밀려 평가의 후순위로 밀리기 쉽다는 점은 큰 문제다. 큰 대학들은 늘 국가적 혜택을 받는 반면, 작은 대학들의 경우 제대로 도약의 계기를 얻을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잘 하는 쪽을 밀어주는 것은 잘 나가는 집단의 지혜일 수 있다. 그러나 ‘잘 하고 못함’을 가르는 기준이 미래 지향적 의지를 담아내지 못할 경우, 그것은 ‘힘 있는 세력’의 떳떳하지 못한 자기 합리화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철학 없는 기준에 바탕을 둔 ‘승자독식(勝者獨食)’이야말로 ‘만년 우등/만년 열등’의 구조를 고착시키게 되고, 그것이 국가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할 것은 당연하다.

 잘못된 학문정책을 바로잡으려 노력하는 대신 구태의연한 기준에 따라 공동체의 미래가 걸린 일을 단 한 번의 망설임 없이 감행하면서도 ‘할일을 했다’고 자부하는 우리나라 지식사회. 현실에 대한 진단과 반성이 결여된 지식사회의 행태가 우리 시대 최고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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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12. 17:54
헛다리 짚어온 대학개혁


우리는 개혁을 지나치게 좋아한다. 개혁이 무언지도 모르면서 개혁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마누라만 빼고 모두 바꾸어야 한다고 열을 올리는 사람도 있다. 가관인 것은 개혁의 대상이 주체를 자처하고 나서는 일이다. ‘남의 눈에 든 티는 보면서 제 눈에 든 대들보는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칼자루를 휘두르는 세상이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부쩍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항간에는 이 정권의 풋내기들이 할 줄 아는 것이 ‘개혁’ 이란 말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개혁은 이미 ‘한물 간 유행가’로 전락했다. 대학에 몸담고 있으면서 지겹게 듣는 구호가 ‘대학개혁’이다. 흡사 개혁 강박증에 걸린 사람들처럼 자고 나면 개혁해야 한단다.
 모조리 새 것으로 바꾸자는 말일 텐데, 정작 버려야 할 자신들만은 예외로 두는 그 논리가 고약하다. 그러니 해가 갈수록 대학사회는 개혁과 멀어진다. 우리는 정말로 대학이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저 ‘남이 장에 간다고 하니 거름 지고 나서는’ 격이다.
 결론부터 말하자. 지금 대학에서 개혁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구성원들이 제 자리만 찾으면 된다. 총장은 총장의 할 일을, 교수는 교수의 할 일을, 직원은 직원의 할 일을, 학생은 학생의 할 일을 제대로만 하면 된다. 요즘 들어 우리나라 대학들은 비전이나 구호 내걸기를 좋아한다. ‘구호 좋아하는 놈’ 치고 제 일 제대로 하는 놈, 역사에 있어본 적이 없다. 제 일 제대로 못하면서 남들 보고 잘 하자고 외치는 놈 치고 변변한 인간 없다는 게 고금의 진리다.
 대학을 대학답게 놔둔 역사가 없었다는 것, 대학을 대학답게 지켜낸 대학인들이 없었다는 것, 제 일 제대로 하는 대학인들이 없다는 것. 이것들이 우리의 문제다.
 중세 말엽 유럽에서 대학은 시작되었고, 대학의 이념이나 정신 또한 그 시기에 싹을 보였다. 그들의 정신은 자율과 자치를 바탕으로 한 보편성의 추구에 있었다. 완벽한 자유를 전제로 하는 자율이나 자치, 그것이 변함없는 대학정신이다.
 그러나 지금 오도된 신자유주의 탓에 대학은 어설픈 교양인만 양산하고 있다. 젊은이들을 전인(全人)으로 키우는 것이 대학의 사명이고, 무한한 가능태의 인간상이 전인이다. 최근 일부 기업들이 대학에 '맞춤형 교육'을 요구하고 있다. 그야말로 대학의 정체성에 대한 놀라운 도전이며 대학 말살의 흉계다. 전인을 만들기는 어렵고 시간도 많이 들지만, 기능인은 단 기간에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 기능인들을 끌어다 한동안 써먹곤 쓰레기처럼 버리는 것이 한국의 기업들이다.
 상당수의 대학인들은 기업의 요구에 맞추어 주는 것이 대학개혁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입맛과 눈치를 살피느라 전전긍긍이다. 그러면서 열심히 헛구호, 헛 비전만 남발한다. 빈 수레가 요란한 격이랄까. 대학개혁이란 별 게 아니다. 그동안 교수노릇 잘 못 했으면,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가르치고 연구하면 된다. 직원 노릇 잘 못 했으면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학교 행정에 헌신하면 된다. 잘 하는 교수·직원들 포상하고 연구비나 ‘삥땅 쳐 먹는’ 교수라면 가차 없이 자르는 것도 총장의 할 일이다.
 수십 년 간 부르짖어온 대학개혁이 허사였다면, 바로 정신 못 차린 우리에게 그 원인이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비로소 개혁의 꿈★은 이루어진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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