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2. 9. 29. 16:29

 

 

 

<조선학회 간친회(懇親會)장에서, 앞 줄 왼쪽이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 교수)  발표 후 이자카야(居酒屋)에서 만난 일본 학자들일본 천리시의 정갈한 호텔방

일본을 어찌 할 것인가?

 

 

                                                                                                                                                               백규 

작년 늦가을, 일본 천리대학에서 열린 조선학회에 발표자로 참석했다. 첫날 저녁 이자카야의 선술집에서 몇몇 일본학자들과 어울렸다. 술잔이 오고 가던 중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한국학을 하는 일본인들은 모두 친한파(親韓派)’라고 하자 다른 학자들이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다. 좌중의 유일한 한국인인 나를 의식한 ‘외교적 언사’임을 모르진 않았지만, 그 후에도 ‘친한파’란 말의 여운은 오랫동안 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가끔 ‘친한파’와 ‘지한파(知韓派)’란 용어의 같고 다름을 혼자 헤아려 보며 고개를 갸웃하곤 한다.

 

 그간 우리 언론들은 일본 정치인들에 대하여 툭하면 ‘지한파’란 용어를 갖다 붙이곤 했다. 요즈음 등장하는 정치인들이야 대개 전후(戰後) 세대로서 일본 우익(右翼)의 입맛에 맞게 ‘맞춤식으로 사육(飼育)된 전사(戰士)들’이 대부분이지만, 내가 자랄 때만 해도 나름대로 ‘선이 굵은’ 정치인들이 일본을 이끌어 왔다. 그래서 그랬던가. 그들이 정권을 잡을 때마다 우리 언론들은 그들의 이름 앞에 ‘지한파’란 용어를 붙이기 일쑤였다. 그러나 한-일 양국이 충돌하는 경우 그들이 예외 없이 보여주는 ‘몰역사적(沒歷史的) 파렴치’를 목격하며, 나는 ‘지한파’란 용어의 불순한 함축성을 깨닫게 되었다. 말하자면 ‘친한(親韓)’과 ‘지한(知韓)’은 현격하게 다른 의미를 갖고 있으며, ‘친한’이든 ‘지한’이든 적어도 일본인들과 우리 사이에는 운명적으로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는 사실 또한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총독부의 철권통치를 통해 ‘악랄하다’ 할 정도로 철저하게 우리를 집어삼키고자 한 일본. 우리의 국토나 해양을 이 잡듯 뒤진 일이야 만인 공지의 사실이니 그 극악함은 재삼 반복할 필요 없을 것이다. 최고로 명민한 자국 학자들을 동원하여 우리의 정신문화를 철저히 연구⋅분석해온 저들의 자취를 찾아가다 보면 정말로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 일본 어용학자들은 이 땅의 젊은 학자들을 자신들의 도구로 끌어들여 이른바 ‘식민사관’을 공고히 했고, 지금까지 우리의 정신문화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남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길러낸 어용학자들이나 그들의 후예를 ‘지한파’로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적어도 다른 나라나 민족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정신까지 속속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우리의 내면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지한파’ 일본인들을 어떻게 우리의 친구로, 선린(善隣)으로 가까이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하여 제대로 항변할 줄 아는 강단의 사학자들을 목격하기 어려운 것도 그 원초적인 씨앗이 이제 큰 나무로 자라나 우리의 땅을 뒤덮고 있다는 무서운 증거일 것이다.

 

 우리는 일본이 독도를 갖고 ‘장난을 친다’고 여긴다. 말도 안 되는 일에 억지를 부리는 그들의 꼴이 우리의 눈에는 우습게 보이기 때문일까.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역사 기록들이 꽤 많으니 걱정할 일 없다는 것일까. 그들에게 내 땅을 통째로 빼앗긴 채 40년 가까운 세월을 허송한 바로 직전의 역사는 앞 세대의 일일 뿐, 지금의 나[우리]와는 상관없다고 보기 때문일까.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라. 그들은 수시로 독도에 잽을 날리는 일을 ‘목숨을 건 도박’으로 생각한다. ‘장난을 치는 일’에 목숨을 거는 바보는 없다. ‘목숨을 건 도박’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일본이 독도를 거론할 때마다 한심하고 딱하다는 듯 ‘저 새끼들 또 지랄한다’는 반응을 보이기 일쑤다. 그냥 대꾸하지 않고 넘기다 보면 장난꾼이 제풀에 지쳐 그만 두듯 포기하리라 믿는 것이다. 순진한 한국인들은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일부 극우주의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필요 때문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짓들을 벌인다’고 말하며, 사태를 아주 낙관적으로 보기 일쑤다. 이 이상 더 ‘대책 없이 순진한 낙관주의’가 있을 수 없다. 그들이 언젠가 있을지 모르는 ‘독도대첩(獨島大捷)’을 위해 해⋅공군력을 무한 증강하고 그 칼날을 벼려 온 역사가 얼마인데, 우리들 가운데 일부 불순한 무리들은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만드는 일조차 필사적으로 막으려 한다. ‘평화’를 위해 해군기지를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우리 스스로 무장해제를 해가면서 어떻게 이웃의 강도들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방어한단 말인가.

 

 최근 일본총리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란 자가 앞장서서 ‘독도 분란’와 댜오위다오(釣魚島) 분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그 덕분에 그는 꺼져가던 그의 정치생명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황당하기로 노다에 비해 한 술 더 뜨는 아베신조(安倍晋三)란 자는 최근 자민당의 총재로 선임되었다. 나이를 갖고 따지는 일이야말로 젊은이들이 흔히 비칭으로 사용하는 이른바 ‘꼰대’들의 잘못된 관행이겠지만, 노다는 나와 같은 1957년생(56세), 아베는 약간 위인 1954년생(59세)이다.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겪은 일제시대, 대동아 전쟁, 6⋅25 동란 등을 한 번도 겪지 않고 등장하여 나라의 경영을 맡게 된 첫 세대가 바로 내 또래의 정치인들이다. 말하자면 일본이나 우리나 ‘철따구니 더럽게 없는’ 세대가 바로 우리 또래들이다. 전후에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역사의 노폐물들을 접하며 현실적 이해관계의 잣대나 들이대며 ‘불뚝거리는’ 세대가 바로 지금 나라를 경영한다는 내 또래의 정치인들이다. 제대로 된 철학도 경륜도 갖추지 못하고 감정과 투쟁의 혈기만 넘치는, 바로 그 세대다.

 

그런데, 노다의 정치생명 연장이나 아베의 총재 취임은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는가. 바로 일본 국민들에 의해서다. 그간 순진한 우리나라 언론들은 독도 분란이나 댜오위다오 분란이 일부 일본의 극우세력에 의해 야기된 일이라고 떠들어 댔다.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 언론들의 무책임한 선정성이나 과도한 낙관주의는 참 기네스북에 올려도 될 정도다. 지금도 노다나 아베의 재등장을 일부 극우주의자들의 작품이라고 떠들 자신이 있는가? 아니다. ‘독도도 댜오위다오도 자신들의 것이었으면’ 하는 것이 일본 국민 전체의 마음이라는 것을 이제 깨달아야 한다.

 

그런 가운데 최근 일본의 일부 지성인들이 자국의 위험한 움직임에 대하여 경고의 멘트를 날린 것은 다소 위안이 되는 일이다. 핏발 선 눈으로 미쳐 날뛰는 극우주의자들, 인간의 탈을 쓰고 차마 겉으로 말은 못하면서 ‘우리 것이었으면’ 하는 욕심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대다수 일본 국민들과 달리, 그들이 잘못 된 길을 가고 있음을 지적한 소수 지식인들은 세계 지성사에 아로새겨야 할 ‘보석 같은 존재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소수가 무슨 힘이 있는가. 과연 그들의 양심이나 양식이 거대한 집단의 흐름을 막는 보(洑)가 될 수 있다고 보는지?

 

***

 

 우리의 무책임한 낙관주의는 재빨리 청산되어야 한다. 상대방이 창을 들고 나서면 우리는 두꺼운 방패로 막은 다음 더 강한 창을 마련해야 한다. 제주에도 두어 군데 해군기지를 만들어 두 방향에서 밀려오는 적[일본과 중국]을 막아야 한다. 우리가 도서관 서고에서 찾아낸 옛 문서를 들고 아무리 흔들어도 일본의 독도 침탈은 막을 수 없다. 댜오위다오를 두고 일본과 싸움을 벌이는 중국이 싸움을 걸어올 다음 차례는 우리의 이어도다. ‘역사가 반복된다’는 경험칙만 바라보며 넋을 잃고 앉아 있을 틈이 없다. 오나라의 부차와 월나라의 구천이 남긴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교훈을 우리 스스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중국와 일본에 의해 당한 구한말의 치욕은 바로 오늘의 일로 재현될 수도 있다. <2012. 9. 27.>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2. 00:49
 

내 등짝에 죽비를 내려친 유럽

-그곳에 가서야 나는 내 키가 작음을 알았네-


                                                                                                                         조규익

5개월간 유럽을 돌면서 ‘내 키가 작음’을 깨달았다. 우리가 세계의 중심에 서 있지 않음도 비로소 알았다. 늘 ‘나’와 ‘우리’, 그 존재의 절대성에 매몰되어 객관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던 우리였다. 유럽인들은 우리를 잘 몰랐고, 우리가 그들에게 그리 중요한 존재도 아니었다. 그간 우리는 ‘나’와 ‘우리’에게 지나치게 갇혀 있었다. 그러니 객관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볼 기회란 없었다. 지금도 우리네 학교들은 ‘5천년의 찬란한 역사’를 강조하기에 여념이 없다. 외국사람 몇이 김치 맛을 칭찬이라도 할라치면, 우리의 언론들은 ‘한국의 먹거리가 세계 식탁의 한 구석을 당당히 차지했다’는 식으로 과장보도하기 일쑤다. 자긍심 아닌 헛된 자만에 빠져버린 영혼을 구제할 길은 없다.

 <터키 에페소의 원형극장>
대학 강단에서의 20년 세월. 그동안 젊은 친구들에게 나는 무엇을 가르쳐 왔는가. 그들이 정신적으로 ‘홀로서기’를 할 만한 언턱거리 하나라도 제공했단 말인가. 5척이 갓 넘는 단구(短軀)로 내 키가 작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이 인식의 무사려(無思慮)한 원시성. ‘5천년 역사를 그 누가 넘볼 수 있겠는가’라는 오만한 무지 속에 안주해온 그간의 세월은 일종 ‘어릿광대의 한 세월’ 쯤이나 아니었을까.

아직도 살아 숨 쉬는 기원전 수백 년의 유물·유적들을 만져보며, 그것들의 온기를 느껴보며, 상상과 신화의 탈을 벗지 못한 우리 역사의 실체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긴 세월 쌓여 내린 정신사의 적층(積層)을 목격하며, 맹목으로 살아온 그간의 세월을 새삼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있어 ‘줏대 없는 언설(言說)’이라 꾸짖어도 좋다. 그러나 허구한 날 협소한 자아에 갇혀 세상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만은 벗어나 보자. 이것이 귀중한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유럽을 다녀온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다.

강단에 서서 이미 한 세월을 보냈고, 앞으로도 한 세월을 더 보내야 하는 내 입장이다. 그래서 ‘인식 상의 전환적 계기’가 절실했다. 할 수만 있다면, 우주선이라도 타고 달나라를 가든 화성을 가든 우리의 지구를 ‘객관적 위치’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우리가 그간 자라면서 배워온 서구세계. 경우에 따라서는 편향적 세계인식의 근원이자 주범이라 할 유럽. 내 인식의 큰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유럽의 정신적 질량을 현지에서 느껴보리라는 야심이 우리의 내면엔 그득 차 있었다.

우리가 주로 찾아다닌 곳은 크고 작은 도시들의 알트슈타트altstadt. 옛날이 아직도 살아 숨 쉬는 공간들이었다. 그곳엔 그들이 가꾸어온 어제와 오늘, 그리고 이룩하고자 하는 미래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그들은 알트슈타트의 껍질을 잘 유지하면서 그 속에 들어있는 알맹이들을 하나하나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바로 그 지혜와 통찰이었다.

 <프랑스 루아르강 가의 쉬농소 성>
빽빽한 돌집들 사이엔 햇볕 한 줄기 들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 ‘남아있는 역사’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도처에 널려있는 큰 규모의 박물관과 유적들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자부심의 근거였다. 크고 작은 각종 공동체의 중심에는 늘 교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가틀릭이든 개신교이든 굳이 가릴 필요 없었다. 그런 성소(聖所)들을 중심으로 공동체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모든 예술이나 사상, 심지어 형이하학적 물질문명까지 종교나 신앙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토록 거대한 유럽문명, 아니 세계 문명권들이 근원적으로 신앙 공동체로부터 출발한 것은 아니었을까 착각할 정도였다.

            <로마의 콜로세움>
유럽의 제대로 된 나라들은 ‘관광 진흥’을 자신들의 국가적 어젠더agenda로 채택, 전력투구하고 있었다. 우리처럼 말로만 떠드는 관광이 아니라,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을 세우고 실천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책들은 예외 없이 ‘역사에 대한 인간의 책무’를 철학적 바탕으로 삼고 있었다. ‘역사와 문화의 산업 자원화’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대전제로 한다. 또 그것은 자신들의 역사가 근본적으로 인류 공통의 자산이라는 인식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인류는 크게 보아 ‘하나의 역사’만을 공유해 왔을 뿐, 서로 다른 독자적 문화를 내세우며 아집과 독선으로 치달아야 할 이유가 없음을, 거대한 유럽 문화의 현장은 말해주고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아집과 편견은 있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세계질서의 파행이나 질곡 역시 그런 독선과 아집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은 분명하다. 로마제국이 거대하게 전개되고, 그것이 지금 지배적인 서양문명의 근간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타 문명이나 타 지역의 정신적 소산을 충실히 수용한 덕분이었다. 독선과 아집, 배타와 갈등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는 고대문명의 폐허들. 주로 로마문명의 흔적이었다. 그러나 그 폐허는 말 그대로 멸망의 흔적이 아니었다. 탈피에 성공한 매미는 애벌레의 껍질을 남기지만, 그 껍질은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 탄생의 증거물이다. 계속되는 허물벗기를 통해 지금의 모습을 보인 유럽문명. 바로 그 근저에 로마문명이 있었다. 그들은 ‘역사청산’ 혹은 ‘역사 바로 세우기’의 미명 아래 엄연히 존재하는 역사적 증거물들을 때려 부수지 않았다. 그 덕에 역사의 자취들은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일제의 문화유산이 부끄러운가. 일제에 부역한 조상들의 행적이 부끄러운가. 그렇다면 그 자취나 흔적을 때려 부수기보다는 잘 보존하라. 그것도 소중한 역사다. 그 흔적들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파행의 반복을 피해가는 것. 그것이 ‘역사 바로 세우기’의 본질이어야 한다. 서울 한 복판에 선 일제의 건물유적이 부끄럽다고 쇠톱으로 싹둑 잘라 버리는 문화적 야만성. 과거의 독재자가 밉다고 그가 쓴 현판들을 모조리 철거하고 수백 년 전의 임금 글씨로 바꾸려는, 그런 행위보다 더 한 ‘역사 파괴’는 없다.

▲터키 카파도키아 괴레메 시가지 전경


우리가 유럽 역사의 현장에서 읽어낸 이면적 코드는 ‘지배와 굴종’이었다. 그리고 그런 코드가 구체화된 물증들은 도처에 남아 있었다. 물론 어느 시기 지금 우리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레반 식 만행’이 저질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역사의 증거물들을 잘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있었다. 물건만 없앤다고 역사가 사라지거나 바뀌는 것은 아니다. 총독부 건물보다 더 좋은 관광자원과 교육 자료가 어디에 있는가. 박정희 글씨의 현판보다 더 생생한 역사적 증거물들이 어디에 있는가. 반복되는 것이 역사라지만, 역사의 파행을 막는 방법으로 잘못된 역사의 증거물을 보여주는 일 외에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객관적 근거를 바탕으로 남들에 의해 인정받는 만큼이 진정한 내 모습일 수 있다. 이 점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 ‘나는 내 키가 이렇게 작은 줄을 몰랐다.’ 이것은 깨닫기 이전에 갖고 있던 내 인식의 본질적 한계였다. 그래서 인식의 전환을 경험한 일이야말로 유럽과 유럽문명이 우리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프로젝트는 이 지점에서 새롭게 시작된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던져 줄 삶의 지표 또한 이 점으로부터 모색될 것이다. 그래서 유럽은 지금까지 만난 어떤 선생님보다 훨씬 위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던져 준 셈이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