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12. 7. 12:20

FM도 몰랐던 박근혜, 깜빡 속은 국민들

 

 

 

올해 돌아가신 어머니는 당신의 판단과 주장에 놀라울 정도의 확신을 갖고 계신 분이었다. 힘들었던 시절, 조랑조랑 5남매를 베이비부머 세대의 일원으로 낳아 기르신 이 땅 어머니들의 일반적인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 초겨울쯤이었다. 찾아 뵈온 자리에서 내 손을 꼭 잡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자네, 박근혜를 찍어야 하네! 생각해보게. 박정희 대통령 덕에 우리가 이만큼이나 살게 되었고, 아베 어메 다 잃고도 꿋꿋하게 살아남아 대통령에까지 나오게 되잖았는가. 그러니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꼭 박근혜를 찍게!”

 

, 이처럼 절절하고 영향력 있는 선거운동원이 있을 수 있을까. 그저 지나가는 촌로의 말씀으로 들어 넘기기에는 너무나 간결하면서도 확고한 호소였다. 그 앞에서는 알았어요. 어머니 말씀대로 하지요!”라고 시원한 대답으로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렸지만, 그 말씀은 대선 판에서 흔들리던 내 마음을 꽉 잡아두는 효과를 발휘한 것이 사실이다. 당시 문재인에 대해서도 뭐라 말씀하셨는데, 내용이 너무나 부정적이었으므로 굳이 이곳에까지 옮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2012년 대선에서 맞붙은 박근혜와 문재인. 그 선택의 기로에서 헤맨 것이 나뿐 만은 아니었으리라. 베이비부머 세대인 나로서는 같은 시대를 살아오며 공주의 이미지로 남아있는 박근혜와,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문재인 사이에서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내 마음 속에 공주로 남아 있던 박근혜를 선뜻 찍기가 망설여졌고, 안보 관련 측면에서 문재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최선보다는 차악(次惡)을 선택하는 것'이 선거라지만, 사실 그들 모두 최악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내 고민은 컸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박정희 전 대통령과 시대를 함께 한 내 어머니 세대의 노인들과 그 노인들의 자식들인 베이비부머 세대의 확고한 지지 덕에 박근혜는 문재인을 이길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나 스스로 이제 남성 대통령의 시대를 잠시 접고, ‘깨끗하고 푸근한모성의 리더십이 힘을 발휘할 때라고 믿음으로써 내 선택을 정당화하기로 했다. 어째서 남성 대통령들은 임기 말만 되면 측근이나 식구들과 함께 권력과 물신(物神)의 포로가 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얼렁뚱땅 술 한 잔에 넘어가기 쉬운 남성과 달리 꼼꼼하고 다사로운 모성으로 무장한 여성은 무언가 다를 것이라고, 무엇보다 혼자 사는 박근혜는 분명히 다를 거라고, 근거 없는 확신에 사로잡혔던 것이 사실이다.

 

그 뿐인가. 베이비부머 세대의 특징은 근면과 안보의식인데,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사상이 불투명한 사람()과 달리 안보를 맡기기에도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개표가 끝난 다음, 이 땅의 베이비부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등극한 2012년 대선은 동정(同情)과 감정이입(感情移入)’의 광풍(狂風)이 빚어낸 결과였다.

 

그 환상이 참담하게 깨진 지금. 누굴 원망할 수 있을까. 감히 그에게 민족통일이나 선진국 진입 같은 국가와 민족의 도약을 가능하게 할 경국(經國)의 웅략(雄略)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저 대과(大過) 없이, 측근들과 친인척에 의해 자행되던 임기 말의 비리만이라도 없었으면 하는 것이 박근혜 지지자들의 대체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나로서는 그가 깨끗하게 임기를 마치고 상큼하게 물러나서 고귀한 대통령직(noble presidency)의 모범적 선례를 만들어 놓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취임 초기부터 인사문제 등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일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터져 나온 게 비선 최순실의 국정농단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 역시 분통 터질 만큼 폭 속아넘어간 일이 있는데, 바로 '통일 이야기'다. 통일에 대한 그의 허황한 구호야말로 대대로 회자될 역대급 코미디가 아닐 수 없으리라. 독자 여러분은 얼마 전부터 그가 난데없이 부르짖던 통일대박이란 말을 기억하실 것이다.

 

 “, 분명 무언가가 있다! 대통령이 그토록 대중국외교에 공을 들이더니, 드디어 무언가 확실한 끈을 잡았구나. 그저 깨끗했던 대통령직의 선례나 만들어 놓으면 그걸로 대만족이라 생각했는데, 민족통일의 위업까지 이루겠다니!”

 

나는 감격했다. 귀찮게 투표소까지 찾아가 붓 뚜껑을 농()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웬걸? 그 말은 그냥 말 뿐이었음이 최근 밝혀지고 말았다! 그 말의 지적 소유권이 최순실에게 있네, 무슨 위원회에 있네논란을 벌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한동안 끝 모를 자기모멸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날마다 언론매체들에는 대통령의 비정(秕政)들로 넘쳐나고 있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추행들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코흘리개 어린애들까지 대통령을 웃음꺼리로 삼는다 하니, 다시 무슨 말을 더 보태랴. 그런 그에게 '세월호 7시간동안 무엇을 했느냐고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런 순간에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몰랐으리라는 누군가의 지적이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적시하고 있지 않은가. 배에 갇힌 300여명의 어린 학생들이 눈앞에서 수장되고 있는 순간에 대통령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타고난 순발력이 있을 턱이 없고, 얼른 들춰볼 규정집도 없었을 것이며, 평소 무게를 잡으며 멀리하던 참모들에게 새삼 물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저 하염없이 머리만 매만지며 시간을 보낼 뿐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기본적인 FM(field manual)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무토막을 왕으로 모시고 행복하다고 여긴 연못 속의 개구리들처럼 그런 청맹과니를 대통령으로 모신 채 우리는 한동안 희희낙락 잘 살아온 것이다.

 

***

 

청와대 공주로 살아서, 대통령직의 FM을 꿰고 있으리라 믿은 국민들만 불쌍하게 되었다. 원래 알고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를 찍지 않은 국민들은 그것 봐라!’며 고소해 하고 있으리라. 고소해 하며 그에 대한 욕을 퍼붓는다고 나라가 좋아질 리는 없다. 그를 욕하면서도 나라는 나라대로 건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모든 것을 빨리 이루어온 장점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FM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아예 무시하기 일쑤다. 일을 당하고 나서야 FM을 펼쳐 보지만, 그 때 뿐이다. 박근혜도 그랬을 것이다. FM을 모르면, 주변의 참모들에게 일일이 자문했어야 한다. 대통령의 말 한 마디면 모든 게 이뤄지던 그의 아버지 박정희 시대와 완벽하게 다른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 때도 대통령의 FM이 없었는데, 그 때 배운 관행을 지금에 와서 반복하려니 탈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조그만 자동차 하나를 사도 웬만한 사전 크기의 매뉴얼 북이 따라온다. 제대로 된 운전자라면 그 책을 한 번 쯤 통독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제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들의 업무수칙이나 매뉴얼 북을 모두 달려들어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한때의 인기몰이로 대통령에 당선된 자라도 대통령에 취임하기까지 그 FM을 학습해야 하고, 학습 여부를 테스트하기 위한 청문회(함량미달의 국회의원들을 제외한 사계의 권위자들이 주관)를 열어야 한다. 청문회에 통과하기까지는 임시 대통령의 호칭만을 부여하도록 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

 

박근혜는 보내도, 대한민국은 영원해야 한다. 지금 자기 세상 만났다고 날뛰는 몇몇 인간들은 빼고, 제대로 된 사람을 대통령으로 발탁하여 나라의 운명을 맡겨야 할 절체절명의 시점에 도달했다. 우리에겐 더 이상 갈팡질팡할 시간이 없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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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4. 1. 29. 15:15

 

 

 


애코머 푸에블로 등 앨버커키 인근 도시들이 표시된 지도

 

 


스카이 시티 이정표

 

 


스카이 시티 가는 길

 

 


스카이 시티 입구의 돌기둥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

 

 


스카이 시티 문장(紋章)

 

 


컬츄럴 센터에서 스카이 시티로 출발하는 셔틀 버스들

 

 

 


밑에서 올려다 본 메사의 주택들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와 스카이 시티, 그리고 푸에블로 인디언

 

 

내 나이 또래의 한국인으로서 푸에블로(Pueblo)’란 이름을 기억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참 오만했던 북한이 간첩들을 활발하게 남파하여 우리나라를 흔들다가 급기야 청와대 폭파와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김신조 등 무장공비들을 내려 보낸 것이 1968117. 그 바로 일주일 후인 1968123일엔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정보 수집함 푸에블로 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되었다. 필자 나이 당시 11. 간첩들이 내 고향 동네의 훌륭한 청장년 두 명을 밤에 죽이고 내뺀 사건으로 몸서리치고 있던 차, 김신조와 푸에블로 호 사건은 북괴에 대한 불신과 증오의 대못을 내 마음에 박고 말았다. 푸에블로란 명칭의 원조를 미국에 와서 만난 것이다.

 

그간 틈 날 때마다 인디언들을 찾아 다녔으나, 시간부족역부족을 느낄 뿐이었다. 미국 전역에 564, 오클라호마에만 39개 종족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데, 나 혼자 어느 세월에 그들을 다 만난단 말인가. ‘문명화된 5개 종족[The 5 Civilized Tribes/체로키(Cherokee), 치카샤(Chickasaw), 촉토(Choctaw), 세미놀(Seminole), 크리크(Creek)]’을 포함 10개 정도의 인디언 종족들을 만나면서 힘과 의지의 소진(消盡)을 절감하게 되었고, 바깥으로 눈을 돌리던 중 뉴멕시코에 푸에블로 인디언이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사실 오클라호마에서 만나는 인디언들은 그들의 정체성[identity]을 의심할 정도로 미국화[Americanization]되었다는 것이 그간 내린 내 판단이다. 내 느낌으로 이 점은 이른바 문명화되었다는 5개 종족 뿐 아니라 여타 종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영어를 사용하고 미국인들의 생활양식으로 살며 미국 정치체제 속의 일원으로서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의 실현을 추구하는 인디언들에게서 그들만의 종족적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인디언들을 만난다면서 박물관이나 찾아다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좌절을 느낀 것은 그런 깨달음의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물론 박물관은 한 종족이나 민족, 국가의 과거현재미래가 통합되어 숨 쉬고 있는 생명의 공간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긴 하다. 그러나 분명 주변에 인디언들이 살아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왜 나는 한사코 화석화된 것처럼보이는 박물관만 찾아다니는가. 그런 회의가 엄습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미국화 된 인디언들은 외모만 인디언의 모습을 띠고 있을 뿐, 문명사회나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이 누구보다 강하다. 그건 미국사회의 여타 마이너리티들인 유색인들이 그런 욕망을 갖고 노력하는 것과 똑 같다. 재미 한인들에게 미국화 되지 말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견지(堅持)하라는 정신 나간 주문을 할 수 없는 것은 인디언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인디언 문화와 역사의 탐사에 나선 내 행로가 암초를 만난 것은 분명하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필요가 절실할 때 홀연 나타난 것이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인디언들이었다.

 

그들을 만나러 앨버커키로 가는 하이웨이의 주변은 키 낮은 식물들과 크고 작은 돌들이 깔린 사막지대였다. 그리고 몇 마일씩 간격을 두고 다양한 이름의 푸에블로 인들이 살고 있는 구역이 우리의 시야를 거쳐 지나갔다.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종류가 이렇게도 많단 말인가. 뉴멕시코에 오기 전만 해도 푸에블로는 단일민족인 줄 알았던 내 무지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장이었다. 오밤중이나 되어서야 앨버커키에 도착, 호텔에 1박을 하면서 다음 날 가기로 한 스카이 시티의 기록들을 점검했다. 그 동안은 매혹적인 이름에 정신이 팔려 그곳이 애코머 푸에블로(Acoma pueblo)’ 인디언들만의 거주구역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그곳에 가면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하나만 갖고 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차를 타고 오면서 많은 푸에블로 인디언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스카이 시티에 살고 있다는 애코머 푸에블로도 그들 중 하나일 뿐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 지역에서는 스카이 시티의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나는 것에 초점을 두기로 한 것이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은 앨버커키에서 서쪽으로 60 마일쯤 떨어진 곳의 스카이 시티, 애코미터(Acomita), 맥카티스(McCartys) 등 세 마을에 살고 있었다. 원래 푸에블로가 점유해온 땅은 500만 에이커에 달하는데, 실제로 현재는 그 면적의 단 10%만 소유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스카이 시티가 바로 올드 애코머(Old Acoma)’의 원래 거주지다. 미국정부의 2010년 통계에 따르면, 5000명 정도의 애코머 인들이 종족적 정체성을 갖춘 사람들로 확인되며, 그들이 이 지역을 800년 이상 계속 점유해온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푸에블로애코머란 말들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앨버커키에 와서 들은 바에 의하면, ‘푸에블로마을[village]’이나 작은 도시[town]’를 가리키는 스페인 말이며, 미국 서남부의 사람들 혹은 그곳의 독특한 건축을 가리키는 뜻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애코머란 말도 스페인어에서 나왔는데, ‘항상 있었던 장소[the place that always was]’ 혹은 화이트 락의 주민들[People of the White Rock]’을 뜻한다고 한다. 뉴멕시코 샌 후안 카운티(San Juan County)의 나바호(Navajo) 인디언 정착지가 바로 화이트 락 캐년(White Rock Canyon)인데, 그렇다면 원래 그곳에 살던 애코마 푸에블로 인들이 나바호 인들을 피해 이곳으로 온 것인지 현재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애코머 푸에블로 사람들은 건축물이나 농사짓는 양식, 혹은 도자기 등에 나타나는 예술성으로 미루어 아나사지(Anasazi), 모골론(Mogollon), 기타 다른 고대 부족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종족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메사(mesa)에서 내려다 본 경관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메사의 주택가 골목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모습

 

 


스카이 시티의 주택들

 

 


전통 어도비 양식의 주택들

 

 


메사에서 내려다 본 황야

 

 


스카이 시티의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과 앞 뜰의 공동묘지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의 내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마을 앞 좌판에 팔려고 늘어놓은 도자기들

 

 

아침 일찍 앨버커키의 숙소에서 나온 우리는 복잡한 산길 60마일을 달려 넓게 펼쳐진 분지 속의 스카이 시티에 산다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을 찾았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Sky City Cultural Center)’에 당도하여 긴 시간을 기다리고 난 11시 반에야 가이드 투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살아온 메사(mesa) 꼭대기가 평평하고 주위가 벼랑인 돌 잔구는 높이가 365피트[111.3m]나 되는데, 길은 잘 나 있었지만, 관광객들이 개인적으로 그곳에 접근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셔틀버스로 이동하여 가이드의 안내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셔틀버스를 타고 센터로부터 돌덩어리들 사이를 10분 정도 달려 올라가니 오랜 옛날부터 있어 온 듯 메사 위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전통 주거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모든 집들이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것은 물론이고, 대체로 33층으로 이루어진 아파트 양식의 건물들이었는데, 모두 남향이었다. 이 건물들을 보며 이른바 어도비 양식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즉 서까래, 풀 짚, 회반죽 등으로 덮은 지붕을 대들보가 가로질러 밖으로 삐죽삐죽 나오게 한 다음 어도비 벽돌로 벽면을 마무리하는 공법이었다. 1층 집의 지붕은 2층 집의 바닥이 되고, 2층 집의 지붕은 3층 집의 바닥이 되니, 실로 멋진 상호의존적 건축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집들의 사이사이에 조성된 광장에서 각종 전통 행사들이 열렸으리라. 

 

2층이나 3층집을 오르내릴 땐 반드시 나무 사다리를 사용했다. 만약 위에서 사다리를 치워버리면 그 집에 올라갈 수 없으니, 그것은 일종의 외적에 대한 자위(自衛) 수단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기 전에는 평지에서 메사를 오르내리던 통로라 해야 기껏 돌 표면을 파서 만든 가파른 계단뿐이었을 것이니, 그곳만 막으면 외적들이 메사 위의 주택가로 올라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집들 앞에는 그들의 전통 빵을 굽는 흙 화덕이 만들어져 있고, 개중에는 최근에 빵을 구은 듯 그을음이 밖으로까지 번져 나온 경우도 보였다. 서남쪽 벼랑 위엔 엄청난 크기와 규모의 어도비 건축물 성 이스테반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이 있고, 그 앞마당엔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사진은 성당의 겉면만 찍을 수 있었고, 그나마 공동묘지 근처에서는 카메라를 조작조차 못하게 막는 것으로 보아, 성당 내부나 공동묘지가 그들에겐 성역(聖域)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종교나 신앙에 관한 궁금증은 전형적인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인 가이드의 설명으로 대부분 해소되었다. 그는 애코머 인들의 전통 신앙은 인간의 삶과 자연 사이의 조화를 강조한다는 것, 태양은 창조주 신을 대리하는데, 공동체를 둘러 싼 산들과 그 위에 떠 있는 태양 그리고 그 아래의 땅이 균형을 이루어 애코머의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 전통 종교 의례는 충분한 강우를 비는 데 중심이 있었으므로 날씨에 많이 좌우된다는 것, 그런 제의에서 카치나(kachina) 댄서들이 춤을 춘다는 것, 푸에블로 거주지에는 종교 의례를 행하는 방 즉 카이바(kiva)들이 있다는 것, 각 푸에블로의 지도자는 공동체 종교의 지도자이거나 추장의 지위를 갖고 있는데, 추장은 태양을 관찰하여 종교의례의 스케줄을 짜는 지침으로 사용한다는 것, 많은 애코머 인들이 가톨릭 신도들이며 그들의 행사에 가톨릭 정신과 전통 종교가 혼합된 모습이 보인다는 것, 아직도 많은 제의들이 살아 있는데, 9월에는 그들의 수호신인 스테판 성인(Saint Stephen)을 기리는 축제가 있다는 것, 그날에는 메사가 대중들에게 개방되어 2천명 이상의 순례객들이 축제에 참여한다는 것등을 열심히 설명했다.

 

성당에 이르기 전 중앙 광장에는 세 개의 흰 색 통나무들을 엮고 위쪽에 가로막대를 댄 사다리 모양의 제구(祭具)’ 두 개가 가옥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었는데, 가이드에게 용도를 물으니 일종의 기우제의(祈雨祭儀)’에 쓰이는 물건들이라고 했다. 즉 세 개의 통나무는 빗줄기, 위쪽에 댄 가로막대는 비구름을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사막지대에서 늘 물이 모자라 고통을 받던 그들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제구였다. 말하자면 가톨릭과 전통 제의가 공존하던 신앙의 형태를 현장에서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가족 형태는 어떨까. 모계사회인 애코머 인들에게는 대략 20개의 클랜(Clan)들이 있었고, 오늘날에는 19개의 클랜들이 살아 있으며, 각각의 클랜에 따른 상징동물들이 있었다. 클랜의 상속에 대하여 물으니 서로 다른 클랜 출신의 남녀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을 경우 모계사회인 만큼 아이의 클랜은 어머니의 것을 따른다고 했다. 이들의 결혼은 모노가미(monogamy) 즉 일부일처제로서 이혼은 매우 드물며, 사람이 죽은 경우 4일 낮밤을 새운 뒤 매장한다고 했다.

가이드를 따라 이동하는 곳곳에 애코머 여인들이 좌판을 벌이고 앉아 있었다. 주로 그들이 직접 구은 도자기와 비드(bead) 및 수예 등 전통 수공예품들이었다. 아이들도 자신들이 만든 아기자기한 도자기들을 갖고 나와 파는 것을 보며, 공예기법이 부모로부터 자녀들에게 전수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요는 하지 않았으나, 이들 좌판에 연결되도록 가이드의 이동경로는 교묘하게 짜여 있었다. 카지노 등의 독점 사업으로 쉽게 돈을 버는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술을 바탕으로 자립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가 매우 바람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애코머 인들에게서 미국화(Americanization)의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다. 물론 현재 메사의 전통가옥에 사는 주민들은 극히 일부분이고 도시로 나가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가이드가 보여준 것처럼 그들 역시 미국인인 만큼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긴 하지만, 자신들의 정체성만큼은 어떻게든 붙잡고 있으려는 그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스페인이 지배하던 멕시코의 한 부분이었으므로 미국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이 지역은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였다. 그들의 지배를 받아 가톨릭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전통 신앙을 버리지 않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었다. 인근 부족들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자신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메사의 고지대에 거주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다. 어도비라는 건축양식을 통해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생활미학을 구현하고 뉴멕시코의 지역 미학으로 승화시킨 점은 무엇보다 먼저 강조되어야 할 그들의 공로였다. 그들은 아름다운 도자기와 각종 수공예품들을 직접 생산하여 지금도 외부인들에게 팔고 있었다. 또한 아직도 5천에 가까운 애코머 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이 지역 혹은 그 인근에 살고 있으며, 외부와의 통로를 열어놓은 채 자신들의 미래를 가꾸고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비록 이 사회 마이너리티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삶의 의지와 미래지향적 성향을 확인하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기우제의에 사용하던 도구[세 개의 기둥은 빗줄기를 가로막대는 구름을 상징함]

 

 


이 도시의 전형적인 어도비 양식 주택

 

 


메사에서 내려다 본 아래쪽 경관

 

 


메사의 주택가 좌판에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진열하고 있다.

 

 


컬츄럴 센터의 식당

 

 


식당에서 주문한 푸에블로 전통음식[멕시코 풍 음식이었음]

 

 


애코머 스카이 시티 가는 길 표지판

 

 


애코머 스카이 시티 건너편 언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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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0. 7. 19. 10:28

소부⋅허유, 그리고 태공망


허유(許由)는 천하나 구주(九州)를 맡아달라는 요임금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더러운 말을 들었다고 생각하여 흐르는 영수(潁水)에 자신의 귀를 씻었다. 그 모습을 본 소부(巢父)는 허유가 은자(隱者)라는 소문을 냄으로써 명성을 얻게 된 점을 비판하고, 자신의 망아지에게 허유가 귀 씻은 물을 먹일 수 없다하여 망아지를 끌고 상류로 올라가 버렸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한 사람이 태공망(太公望)이다. 주나라 문왕이 위수(渭水)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던 여상(呂尙)을 발탁했으니, 그가 바로 태공망이다. 그는 문왕의 초빙을 받아 왕의 스승이 되었고, 무왕을 도와 상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한 인물이다.


 최근 대통령은 지방선거의 결과로 나타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청와대 안의 인물들을 바꾸었고, 조만간 내각도 개편할 것이다. 어느 나라나 비슷하겠으나, 특별히 연줄의 문화가 강한 곳이 우리나라다. 연줄 즉 혈연, 지연, 학연은 지금도 인사철만 되면 힘을 발휘한다. 연줄이 닿는 범위 안에 출중한 인사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연줄은 본질적으로 제한적이기 때문에 그 범위를 벗어나는 곳에 방치된 인사들은 더 많다.

 
 이왕이면 ‘내 부류의 사람을 써야 한다’는 고질적인 인습 탓에, 인사철을 앞두고 ‘이런 저런 면에서 촉망 받는 인사들’은 임명권자와 연결되는 줄을 찾아 헤맨다. 인사철만 되면 임명권자로부터 부름이 올까 전화통 앞에 붙어 앉아 있는 캐리커츄어(caricature)들이 약방의 감초 격으로 언론에 등장하곤 하던 것이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의 일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청와대 고위직의 제의를 거절한 유진룡 전 차관의 경우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현 정권에서 제의하는 고위직을 마다하는 모습을 보며, 지난 정권에서 자신의 자리를 걸고 윗선의 청탁을 막아 낸 결기가 가식이 아니었음을 국민들은 깨닫게 되었다. 자리의 성격이나 자신의 능력을 따지지도 않고 덤벼드는 사람들과 달리 ‘그 자리가 자신에게 맞지 않다’거나 ‘정치할 생각은 없다’고 간략하게 잘라내는 어조에서 사람들은 일종의 ‘멋스러움’을 읽어낸 것이다. 허유나 소부의 현대적 버전이라고나 할까.

 
 현재 ‘세종시’ 건으로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정운찬 총리 또한 임명 당시 여러 차례 고사(固辭)하는 바람에 임명권자의 애를 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중한 능력과 비전으로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그의 입장에서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직에 나아가 최선을 다했다. 제의를 거절한 사람이나 제의에 응하여 직에 나아간 사람이나 이런 경우들은 인재 발탁과 등용의 좋은 사례로 기록될 수 있다.

 
 사실 특정한 직에 쓰일 만한 세상의 현자들은 대체로 허유나 소부, 혹은 태공망에 속하고, 현자를 자처하는 나머지 부류는 직책의 명예만을 탐한다고 보면 정확하다. 그러나 능력과 비전을 갖고 있음에도 모두 소부나 허유의 입장만을 고수한다면, 책임 있는 태도라고 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나서서 세상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데,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세상을 향한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태공망은 요즈음의 상황에 걸맞은 인재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지만, 탁월한 재능과 비전에 도덕성까지 갖춘다면 세상을 다스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재다.

 
 연줄을 동원하여 등용되기를 도모하는 것보다 실력을 갖추고 조용히 기회를 기다리는 일이야말로 도덕적 행위 그 자체다. 사실 연줄을 동원하는 것은 재능이나 비전이 남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임명권자가 연줄을 통해 사람을 발탁하려 한다면, 그 역시 인물의 능력이나 비전보다 끼리끼리 무리 짓고자 하는 현실적 욕망 때문이다. 연줄로 인재를 등용했을 경우 일을 그르친 후에 책임을 물을 데가 없다. ‘인재가 없다’고 한탄하는 임명권자는 대부분 자신의 시야가 연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함을 스스로 드러낸다. 세상은 좁아도 연줄의 구속을 벗어나기만 하면 한 나라의 살림이나 한 부서의 책임을 맡길 만한 인재들이 제법 많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인문대 학장)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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