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5. 29. 12:06


제주박물관에서

 

 

 

 

아, 제주!

 

 

 

모처럼의 제주행이었다. 몇 년 째 중국인들이 제주를 접수한다고 난리를 쳐도 오불관언(吾不關焉)’인 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답사에는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끝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었지만, 학생들에게 현장강의 좀 해달라는 학생회장의 부탁을 거절할 강심장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제주는 얼핏 보기에도 포화상태였다. 하늘에는 육지를 오고 가는 양 방향으로 늘 비행기가 떠 있었다. 들리는 말로는 5분 만에 한 대씩 뜨고 내린다니, 혼잡의 극치랄까. 전엔 공항 문을 나서기 무섭게 팜나무와 야자수가 내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으나, 이젠 그들도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암담한 체념의 한숨만 내뿜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말라버린 이파리들을 처리할 의욕마저 상실한 듯 공항청사 주변의 녹색은 많이 낡아 있었다. 형형색색의 자동차들, 육중한 관광버스들이 넘쳐났고, 그들이 방출하는 매연과 분주함의 독기가 제주의 인상을 시들게 했다. , 그동안 많이도 망가졌구나!

 

국립박물관 전시 유물들. 참으로 곱고 아름다워서 가슴이 따스해졌다. 갤러리 1~6, 특별전시실 등, 차분히 느끼기엔 숨이 벅찰 만큼 넓은 공간들이었다. 특별 전시되고 있는 고산리 신석기 유물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석기와 토기, 각종 생활사 자료들, 유배 지식인들의 유물 등등 어느 지역의 박물관보다 옹골찬 컬렉션이었다.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등으로 이어져 나온 삶의 모습이야 여기라고 다를 순 없을 터. 박물관이 내 상상력의 샘터임을 여기서도 재확인한다. 유약 아닌 원시인들이 뿜어낸 입김과 손때가 토기들의 안팎에 칠해져 있지 않은가. CD에 새겨진 것처럼 토기의 물결무늬엔 그들의 노랫소리 또한 새겨져 있었다. 그들의 손때를 보며 그들의 노랫소리를 듣는 것보다 더 소중한 체험이 어디에 있을까. 안타깝지만, 쌍쌍이 어울려 재잘거리는 젊음들의 뜨거운 가슴으로 어찌 수만 년 전 유물에서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으랴.

 

삼성혈의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제주의 키워드를 말해줬다. 신화, 무속, 해녀, 43과 향토문학 등을 제주라는 고운 보자기로 감싸 젊음들의 가슴에 넣어주고 싶었다. 우주창세의 과정을 보여준 설문대할망 신화, 독립된 나라를 세워 영속시키고 싶었던 삼성(三姓)’의 탐라건국신화, 무조(巫祖)의 내력을 읊어나간 무속 본풀이들, 부자간 쟁투의 현실을 통해 권력의 속성을 보여준 김녕괴내깃당본풀이. 육지에서 들어보지 못한 신화들의 성지가 제주임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결론은 늘 현실이었다. 주도권 다툼, 더 많이 갖기 경쟁, 사랑과 미움 등등... 그래서 나는 신화란 상상된 현실이며 현실이란 가시적으로 구현된 신화임을 강조했다. 부모로부터 내쳐졌던 괴내깃또가 군사를 이끌고 아버지를 치러 왔을 때, 그는 어떤 말을 건넸을까. 아들 신검에게 권력을 빼앗긴 견훤, 아들 방원에게 패배한 이성계, 평생 일군 부를 아들에게 빼앗긴 재벌 등등. 현실은 신화의 연속일 뿐이다. ‘허황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오래된 꿈이자 정신의 모습이고 현재 인간의 모습까지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언술이 신화라는 캠벨(Joseph Campbell)의 말도 있지 않은가.

 

애월의 밤. 마늘밭 가의 숙소 공터에서 우리의 젊은 풍물패들은 제주의 밤을 마구 두들기고 깨트렸다. 마늘밭 한 평에 250만원이나 한다는, 지상의 현실과는 상관없는 꿈의 난장을 벌인 것이다.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을 애월의 제주인들은 어디선가 나타난 젊은 무리들의 춤과 소리에 놀라 깨어나기도 했을 것이다. 하늘 끝 바다 끝까지 닿을 진동의 힘은 잠든 세상을 무력하게 했다. 상큼 짭짜름한 갯물 내음은 창틈으로 스며들어와 뒤척이는 잠자리를 더욱 뒤숭숭하게 만들었고, 퉁탕거리며 계단을 오르내리는 젊음의 열기까지 합세해 대책 없는 불면의 밤은 한없이 길기만 했다.

 

돌문화공원에서 만난 설문대할망의 꿈. 그녀는 무슨 배짱으로 5백이나 되는 아들들을 낳아 놓았던 것일까. 어찌하여 무지막지한 돌을 가지고 이 아름다운 섬을 만들려고 했을까. ‘180만 년 전 신생대의 화산활동이 이 섬을 이토록 오묘하게 만들었다는 설명이야말로 너무 단순하여 재미가 없었던 것일까. 태초의 제주에서 설설 뛰던 불꽃들과, 세월이 흐른 뒤 식은 불꽃 사이를 조심조심 뛰어 놀았을 온갖 짐승들과, 불꽃이 만든 흙과 짐승들을 재료로 삶을 이어 나온 인간들의 지혜를 함께 버무려 생각하기로 하자. ‘형이하(形而下)’의 물질에만 정신이 팔린 인간의 어리석음을 질타하기 위해 설문대할망은 이 땅에 강림하신 것 아닌가. 세상을 낳은, 위대한 지모신(地母神). 오랜 세월 제주를 감싸온 그녀의 오지랖 안을 뒤지니 텅 빈 동공뿐이었다. 뱀이나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을 보며 무엇을 상상하는가. 빠져나간 몸들의 건강한 환락을 상상하는가. 아니다. 무수한 삶의 재생과 반복을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허물이다. 그러니 피가 돌지 않는다 하여, 기름기가 빠져 있다하여 그 허물들을 짓밟는 일은 옳지 못하다. 이 땅에 남겨진 허물이 없다면, 우리의 미래도 없는 법. 신화를 사랑하자. 그 옛날 그 분들의 현실과 꿈을 오롯이 갈무리하여 오늘날의 우리에게 전해주고, 우리의 끝없는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하지 않는가. 삶이 어찌 오늘의 우리만으로끝나는 일이랴. 오로지 지금을 살기 위해, 지금의 나만을 위해세상은 존재한다고 믿는,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해 신화는 존재하는 것 아닌가. 언제나 되어야 우리는 아득한 후손들을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며 현재의 내 아픔을 참아낼 수 있게 될까.

 

‘43 평화기념관은 우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분노와 부끄러움이 뒤엉겨 분출의 시기만 기다리는 잠재적 활화산 혹은 휴화산의 분화구였다. 몇몇 인간들의 욕망과 착오가 빚어낸 오욕의 역사였다. 처음은 이랬을 것이다. ‘그래, 이 복잡한 시국에 그들 몇을 죽인 것에 대해 사과하는 귀찮음을 감내할 필요가 있는가. 그럴 듯한 이유와 명분을 내걸고 눈을 부릅뜨면 그대로 진정될 것인데. 이 외딴 섬에서 힘없는 사람 몇몇을 죽여 봤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고. 그렇게 끝이 나리라 착각했을 것이다. 역사의 고비마다 늘 그랬다. 하늘같은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고도 뻔뻔함과 물리력만으로 모면할 수 있으리라 믿어온, 우리의 어리석음이었다. 그러나 그게 어찌 그렇게 마무리될 수 있는 일인가 '이성이 세계를 지배하며 세계사도 이성적으로 진행되었다'는 헤겔 식 역사의 이성을 우리가 믿는다면, 최소한 잘못된 계산을 그대로 넘길 순 없는 법. 3~4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가고도 지금껏 쉬쉬하는 권력의 속성을 민초들은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뒤엉긴 시신들의 사진 앞에 몇몇 젊음은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깨달음을 문장으로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비리와 부조리의 현장이 어찌 이곳뿐이랴.

 

해녀들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물 깊은 바닥에서 건져 올린 소라며 전복이 꿈틀거리는 좌판. 그 좌판 언저리엔 가쁜 숨을 모아 만들어낸 숨비 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값을 깎아보려는 사람들에게 핀잔을 건네는 할머니 해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그 마음은 해녀박물관에 역사로 남아 이들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었다. 설문대할망에서 시작된 제주 여성들의 기운이 해녀들에게 고스란히 투영된 것이나 아닐까. 호흡이 허락되는 그 짧은 순간에 단단히 뿌리박힌 소라와 전복을 따내야 하는 건 생존경쟁 원리의 극적인 현시아닌가. 그 힘이 지금 남자들을 능가하는 한국 여성들의 힘으로 현실화하고 있는 것 아닌가.

 

제주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러나 많이 망가져 있는 것도 사실인 듯 했다. 몸이 망가지면 마음도 온전치 못한 법. ‘이제 제주를 떠나고 싶다, 한 제주친구의 음울한 말을 공항에서 전화로 듣게 되었다. 물론 제주의, 제주인의 프라이드를 이제 거의 상실한 상태라는 그의 말이 육지인인 내게 아직은 생소했다. 제주의 하늘과 바다는 여전히 푸르렀고, 바람결 또한 싱그러웠기 때문이다. 해녀들이 물질해온 갯것들도 상큼하고 달았다. 새 공항이 생기고, 자동차들이 내뿜는 매연만 줄인다면, 아니 무엇보다 인간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의 부피만 줄인다면, 설문대할망과 함께 제주는 영원할 것이다.

 

 

 


고려조의 청자, 조선조의 백자, 분청사기 등


 


근대 제주의 '곰박(석자), 솔박(되), 도고리(함지박), 국자' 등 

 

 


물질의 도구인 태왁망사리

 

 


해녀물질의 도구들

 

 


용담동 무덤 유적에서 출토된 '이음독널'

 

 


각종 청자들


 


원삼국시대의 각종 토기들

 

 


삼성혈

 

 


애월의 멋진 숙소(힐링팰리스)

 

 


차에서 내리는 학생들

 

 


돌문화공원에서 만난 '나무가 빠져나간 화산석'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어서 오세요 많이 반가워요 또 오세요!'랍니다.

 

 


돌문화공원 밖에서 만난 하르방님들

 

 


돌문화공원 밖에서 만난 제주의 옹기 및 기와들

 

 


민속마을에서 만난 제주의 옛집들

 

 


제주 43 평화기념관

 

 


멋진 조화(이경재 교수와 학생들, 그리고 하늘과 바다)

 

 


해녀박물관에서 만난 '빛 바랜 기념사진들

 

 


해녀박물관 밖에서 포즈를 취한 아름다운 여학생들

 

 


해녀박물관을 떠나며

 

 


돌문화공원 밖에서, 선남선녀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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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4. 1. 27. 06:44

 

 


오클라호마와 텍사스를 거쳐 뉴멕시코로 연결되는 I-40을 비롯한 각종 도로들

 

 


오클라호마의 길가에서 흔히 보이는, 목장과 유전이 어우러진 모습

 

 


오클라호마에서 텍사스로 들어가는 입구

 

 


텍사스의 도로

 

 

뉴멕시코의 남성미, 오클라호마의 여성미

 

 

아름다움이란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변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시기나 장소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질 수 있다.’

 

걸출한 철학자이자 미학자이며 인기있는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가 그의 저서 <<미의 역사>> 머리말에서 강조한 미학의 원리다. 그렇다. 아름다움이란 그렇게 상대적인 것이다. 에코 뿐 아니라 현대 미학자들 가운데 아름다움의 상대성을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아름다움에 관해 겨우 아마추어 수준의 인식을 갖고 있는 백규에게조차 미의 상대성론은 부담감 없는 상식이다.

 

***

 

오클라호마 체류 기간 끝 부분에 뉴멕시코를 다녀오기로 했다. 머나먼 길을 운전하여 텍사스를 거쳐야 갈 수 있는 곳이라서 더 매력적이었다. 오클라호마 인디언들을 대충 만나 보았으니, 그곳에 옛 모습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는 푸에블로(Pueblo) 인디언들을 보고 싶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나마 세 개 주의 인상(印象)을 비교해보고 싶은 것이 내심의 욕구였다. 무엇보다 역마살을 사랑하는 내가 새로운 길을 만나는 일을 마다할 리 없으니, 그야말로 일타삼피(一打三被), 일석삼조(一石三鳥), 혹은 One Serve, Triple Purposes’의 쾌거 아닌가.

 

오클라호마의 중심을 서남쪽으로 뚫고, 텍사스의 팬 핸들(Panhandle)을 가로질러, 앨버커키(Albuquerque)와 산타페(Santa Fe), 반들리어(Bandlier), 타오(Taos) 등 뉴멕시코의 북부 일대를 돌아오는, 총연장 2천 마일에 가까운 장도(壯途)였다. 오클라호마 주는 우리나라[남한] 면적의 두 배인 181,195, 텍사스 주는 7.8배인 696,241, 뉴멕시코 주는 3.5배인 315.194이니, ‘눈물겹도록광활한 땅 아닌가. 비록 그 면적의 작은 부분들만을 거치는 노정이었으나, 그 장대함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2014. 1. 19. 오전 8시 스틸워터 출발. 타고 가던 35번 하이웨이를 오클라호마 시티에서 40번으로 갈아타면서 쾌속의 질주를 계속했다. 르노(El Reno), 엘크(Elk), 세이어(Sayre) 등 오클라호마 구간을 지나자 풍광이 바뀌면서 I-40은 텍사스로 접어들었다. 주 경계를 넘어 텍사스 경내의 전망대 겸 휴게소에 들어서니 사방에 돌투성이의 언덕들과 까마득하게 늘어선 야산들이 보였으나, 그로부터 빠져나와 잠시 달리자 이내 오클라호마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텍사스의 벌판이 펼쳐졌다. 그렇게 텍사스의 팬 핸들 지역을 몇 시간 동안 달리자 66번 도로(Historic Route 66)’ 상의 핵심도시 아마리요(Amarillo)’가 나오고, 그로부터 두어 시간 더 달려 뉴멕시코에 들어섰다.

 

매혹의 땅 뉴 멕시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New Mexico, Land of Enchantment]’라고 도로를 가로질러 세운 경계표지가 인상적이었으나, 그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확연히 달라진 풍광이었다. 오클라호마에서 텍사스까지 끝없이 펼쳐지던 벌판들, 비옥해 보이진 않았으나 온갖 식물들을 키워내던 땅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척박한 돌투성이의 땅에 깔리듯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사막식물들의 삶터가 무한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텍사스와 뉴멕시코를 변별(辨別)하는 표지야말로 경계표지가 아니라 이런 경관의 변화였다.

 

경계표지를 지나자마자 만난 글렌리오 뉴멕시코 관광 비지터 센터[Glenrio Visitor Center NMDOT]’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은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 늘 그렇게 해왔다는 듯, 우리의 인사에 응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지도를 펼치면서 묻지도 않는 관광명소들을 일사천리로 설명했다. 관광 비수기이긴 했으나, 우리가 보고자 한 포인트들은 가까스로 겨울철 폐장을 하루 이틀 앞두고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곳이 바로 시간 변경대인 듯 직원은 우리 시계의 시침을 한 시간 뒤인 3시로 되돌리라고 했다.

 

미국에는 동부 시간[Eastern Time], 중부 시간[Central Time], 산악 시간[Mountain Time], 태평양 시간[Pacific Time] 등 네 개의 시간대가 존재하는데, 우리가 출발한 오클라호마는 텍사스와 함께 중부 시간대에 속해 있었고 뉴 멕시코는 산악 시간대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 먼 곳을 가는 길에 한 시간 벌었구나! 쾌재를 불렀으나, 태양은 이미 저 멀리 지평선 바로 위에 걸려 있었다. 한 시간을 벌긴 했으나, 앨버커키까지 세 시간이 넘어 걸린다는 비지터 센터의 직원 말에 오후 4시쯤 도착하여 느긋하게 숙소를 정하리라 생각한 우리의 계획이 멋지게 빗나갔음을 알게 되었고, 가끔씩 속도제한[Speed Limit] 상한선 75마일을 넘기며 달려 나갔다.

 

 

비지터 센터를 나온 우리는 목적지인 앨버커키(Albuquerque)까지 3~4백 마일을 더 달려야 했다. 엔디(Endee), 바드(Bard), 투쿰카리(Tucumcari) 등 연도의 대소 도시들을 지나고 앨버커키에 도착하기까지 주변에 펼쳐지는 풍광을 표현할 말이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황량함이란 말 은 사전에 나오겠지만, 그 말도 결국 우리 인식의 한계만 드러낼 뿐이었다. 약간씩 오르내리는 구릉들을 제외하고 산은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지평선에 아련히 보이는 것이 바로 버날리요(Bernalillo) 카운티와 샌도발(Sandoval) 카운티에 걸친 샌디아 산맥[Sandia Mountains]일 것인데, 그마저 저녁 어스름과 아련히 피어오르는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다가 앨버커키에 들어서기 위해 넘을 때에야 그 산맥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곳을 포함하여 뉴멕시코 전역의 평균 높이가 해발 1710m이고, 가장 낮은 지역도 852.6m에 달하니 뉴멕시코에 들어오면서 우리는 내내 1천 미터가 훨씬 넘는 산길을 타고 있는 셈이었다. 이 넓은 땅을 덮고 있는 것은 거무튀튀한 돌들, 그 사이에 모습을 내민 블랙 그래머(Black Grama), 아리스티다 퍼푸리아(Aristida Purpurea), 크레오소트 부쉬(Creosote Bush) 등 사막식물들 뿐이었다. 사람이나 짐승이 깃들만한 교목은 한 그루도 보이지 않고, 기껏 쥐나 프레이리독 같은 작은 짐승들이나 몸을 숨길만한 식물들이 듬성듬성 성장을 멈춘 채 사막의 맨살을 가려주고 있었다.

 

 


텍사스에서 뉴멕시코로 들어가는 입구

 


끝없이 펼쳐진 뉴멕시코의 평원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Rio Grande 강과 George Bridge 주변에 펼쳐진 사막지대

 

 


샌디아 산맥Sandia Mountains)과 앨버커키(Albuquerque) 사이의 사막지대

 

 


샌디아 산맥의 보호를 받고 있는 앨버커키 시가지

 

 


앨버커키 인근 스카이시티 가는 길에 만난 황량한 평원

 

 


스카이시티 가는 길에 만난 어도비 건축양식의 천주교 성당

 

 


성당 옆쪽에 마련된 성모상

 

 


애코마(Acoma) 푸에블로(Pueblo) 스카이시티에서 내려다 본 관광안내소

 

 


뉴멕시코를 달리며 찍은 황량한 모습

 

 


뉴멕시코의 황량한 벌판

 

 


뉴멕시코의 끝없는 지평선 너머로 아련한 여운을 남기면서 해가 지고 있다.

 

 

해발 1,619.1 m의 고지대에 위치한 앨버커키에 도착하자 붕 뜬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그만큼 기압이 낮은 때문일 것이다. 1박을 한 다음날 찾은 곳은 스카이 시티(Sky City). 예의 그 광활한 평원 한 복판에 잔구 형태의 돌덩어리들과 엄청난 규모의 돌산이 서 있고, 그 위에 만들어진 애코마 푸에블로(Acoma Pueblo) 인디언들의 공동체가 바로 그곳이었다.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돌 주거지. ‘그로테스크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그곳에서 상상되는 그들의 삶 역시 우리의 상식을 배반하는 모습이었다.

 

그 다음 날 만난 아름다운 산타 페(Santa Fe) 역시 2,134 m 의 고도(高度)를 자랑하는 도시였다. 앨버커키보다 기압이 더 낮은 때문일까, 자동차에 넣어 갖고 온 과자 봉지가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산타페 산맥에 안겨 넓은 평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대도시. 이곳 역시 뉴멕시코의 주 건축양식인 어도비(Adobe) 일색의 건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앨버커키도, 스카이시티도, 산타페도, 타오(Taos), 그 도시들 사이사이에서 만나는 주택들도 대부분 어도비 양식이었다. 어도비란 모래, 진흙, , 막대기, , 동물의 배설물 등 섬유질이나 유기질 재료 등을 섞어서 벽돌을 만들고 햇볕에 말리는 공법으로 짓는 건축양식이다. 볼그레한 땅 색깔과 어울리게 지은 어도비 건축물들이야말로 자연에 맞추어 살려는 이 지역 주민들의 미학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직선과 기하학에만 익숙해 있던 내게 곡선과 흙빛의 따사로움을 갖춘 이 건축양식이 첨엔 좀 생소했지만, 눈에 익을수록 미학이란 결국 자연과의 위대한 조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평범한 이치의 깨달음으로 연결되었고, 결국엔 정겨움을 느끼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비록 일부분이나마 뉴멕시코의 광활한 대지를 누비고 나서야 그곳에 차원 높은 아름다움이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럴 듯한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돌투성이의 사막이 아름다울 수는 없다. 수만 년 웅웅거리며 쓸어오는 바람결 외에 움직임 하나 없는 이 벌판을 전통 미학의 기준으론 추하다고 보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왜 이 벌판을 달리면서 감동과 함께 울고 싶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을까. 나는 이미 오클라호마 북부의 오세이지(Osage) 인디언 구역에서 대초원[Tall Grass Prairie]을 만나 연암 박지원의 호곡장(好哭場)’을 떠올린 바 있다. 광대한 요동 들판을 걸어가던 박지원은 그곳을 가히 울어볼 만한 곳이라 말하고, 인간 7(七情)의 발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기도 했다.

 

대초원 앞에 선 나도 연암선생이 느꼈던 그 심정을 이곳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기쁨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미움이 극에 달해도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쳐도 울게 되니, 답답하고 울적한 감정을 확 풀어 버리는 것으로 소리 쳐 우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이 없다.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 뇌성벽력에 비할 수 있는 것이니, 북받쳐 나오는 감정이 이치에 맞아 터지는 것이 웃음과 다를 게 뭐겠는가.”라는 연암 선생의 논리야말로 뉴멕시코의 대평원 앞에 선 내 감정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감정적 여과를 거치고 나서야, 뉴멕시코 대자연의 추함은 결국 아름다움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극도의 추함이 아름다움과 합치될 수도 있다는 미학의 상대성이야말로 뉴멕시코의 황량한 사막으로부터 터득하게 되는 진리 아닌가.

 

***

 

잠시 오클라호마에 체류하면서 평원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고, 텍사스를 보고 나서 그 아름다움의 선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뉴멕시코의 사막 벌판을 만나면서 새로운 미학을 덤으로 깨닫게 되었다. 오클라호마의 평원에는 나무가 많고, 돌보다는 기름 진 흙이 많다. 기름 진 흙으로 나무를 키워내는 것이야말로 여성성(女性性)’의 본질 아닌가. 오클라호마의 대지를 달리다 보면 식물을 키우고 인간을 길러내는 지모신(地母神)’의 속삭임을 듣게 된다.

 

이와 달리 돌투성이의 사막, 뉴멕시코의 대지에서는 쩌렁쩌렁 울리는 거친 남성의 포효를 들었다. 뉴멕시코를 달리면서 눈물 나는 감동으로 긴장하다가 오클라호마에 들어오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따뜻해지는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숭고와 비장의 남성 미학적 공간에서 부드럽고 우아한 모성 미학의 공간으로 입사[入社, initiation]했기 때문이리라. 다른 시간대 즉 Mountain Time에서 Central Time으로 넘어가면서 미학적 차이까지 경험하게 된 내 가슴에 희열이 넘치는 순간이다.

 

 


애코마 푸에블로 인디언 스카이시티의 광장에서
(기우 제의에 쓰이는 사다리-세 개의 기둥은 빗줄기를, 상부의 가로막대는 구름을 각각 상징한다 함.
비가 부족한 이곳의 상황을 보여주는 물건임) 

 


스카이시티에 있는 성당[16세기에 스페인 사람들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음)

 

 


앨버커키의 푸에블로 문화센터(Indian Pueblo Cultural Center)에서
공연을 마친 푸에블로 남성 무용수와 함께

 

 


앨버커키를 떠나 산타페에 들어가는 중. 멀리 보이는 것이 산타페 산맥이며
그 앞에 널리 퍼진 것이 산타페 시가지임.

 

 


산타페 시내의 산 미구엘(San Miguel) 성당. 미국 최초의 어도비 양식 성당임.

 

 


어도비 양식의 호텔 산타 페 


 


타오(Taos) 시내 어도비 양식의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

 


타오 시내의 '랜처 장로교회[Rancho's Presbyterian Church)

 


타오 시 외곽에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전통 가옥

 


푸에블로 인디언의 전통가옥. 앞에 있는 둥근 것이 빵을 굽는 화덕임.


타오(Taos)로부터 로건(Logan) 가는 길에 지나온 Angel Fire Mountain 속의 농장 입구

 


타오(Taos)에서 로건(Logan) 가는 길에 지나온 Angel Fire Mountain 속에서 만난 사슴떼.
환상 속의 한 장면 같지요?

 


뉴멕시코의 카운티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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