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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4.19 지식인의 한탕주의, 그리고 금단의 열매
  2. 2007.04.10 우리시대의 위기와 인문학
글 - 칼럼/단상2007. 4. 19. 10:29
지식인의 한탕주의, 그리고 금단의 열매

                                                                                                               조규익

아무나 쉽게 얻을 수 없는 정신적 자산, 그 가운데 핵심은 지식이다. 인터넷 만능시대인 요즈음은 흔히 지식 대신 정보라는 말을 즐겨 쓴다. 그러나 도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지식과 정보는 다르다. 이 둘을 혼동하는, 무늬만의 지식인들이 대명천지를 활보하는 현실은 비극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해체나 몰락을 가속화 시키는 원인일 수 있다. 그래서 ‘앎’의 윤리성에 대한 몰각만큼 심각한 문제도 없다.

孔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라고 했다. 진실과 양심만이 앎의 본질임을 깨우치고자 한 것이 공자의 본의였다. 이 선언이야말로 허위의식 속에 매몰되어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오늘날의 지식인들이 뼈아프게 새겨야 할 금언이다. 지식인의 정직성에 중점을 둔 공자의 생각으로부터 오늘날 자행되는 표절의 비윤리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고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지식의 양 또한 폭발적으로 늘었고, 그것은 사회를 다원화•세분화시켰다. 그에 따라 전문가를 자처하는 지식인 그룹이 화려하게 등장하는 요즈음이다. 인쇄나 방송 등 각종 매체가 범람하고, 그런 매체들을 기반으로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대중의 기호나 매체의 활용 여하에 따라 지식인의 시장가치가 결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시장가치의 고하에 따라 사회적 대우가 달라지고, 그것이 금전으로 직결되는 현실이다. 상품의 질보다는 광고술이 판매량을 좌우하는 시대에 지식인들 또한 자신을 실물보다 더 낫게 치장하여 시장에 내보이려는 욕구의 포로가 되고 있다.

대중은 지식인의 내면적 가치나 덕성을 찬찬히 살피는 수고를 더 이상 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좀더 그럴 듯하게 포장된 지식인을 찾아 자신의 ‘코드를 맞추고’, 그의 말과 글을 아낌없이 사들인다. 대중의 코드에 영합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앎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지식인은 고민한다. ‘안 걸리게 잘 치고 빠짐으로써’ 자신의 시장가치를 높이거나 최소한 유지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아내려고 한다. 이 지점에서 손쉽게 빠져드는 것이 표절의 유혹이다. 이른바 지식인의 ‘한탕주의’가 표절이란 행위로 구체화되는 순간이다.

한 두 번의 표절이 쉽사리 발각되지 않는 것은 자신들이 사들이는 지식의 원산지나 생산자를 꼼꼼히 챙겨보지 않는 대중의 문제적 성향 탓이다. 이런 이유로 표절은 반복되고, 반복되다보면 결국 발각될 수밖에 없다. 구멍가게에서 담배 한 갑을 훔쳐도 ‘절도죄’라는 살벌한 죄명으로 벌을 받는 현실이다. 단순히 돈으로만 따져도 표절은 일반 절도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질 나쁜 절도행위인데, 표절범들이 거리낌 없이 이 사회를 활보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사실 우리 모두 표절에 관한한 공범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표절범이나 우리가 ‘오십 보 백 보’의 공범들이라면, 새삼 누가 누굴 징치할 수 있겠는가.

작년 언젠가 일본 후지TV가 프로그램 표절 의혹 건으로 국내의 어느 방송사에게 항의한 사실과 국제적으로 문제가 된 우리나라 젊은 과학도의 논문 표절사건을 상기해 보라. 지난 시절 국내 방송사들이 일본 방송 프로그램들을 베껴온 사실은 왕왕 거론되어 왔지만, 대명천지 21세기에 이르도록 그런 ‘못된 관행’을 청산하지 못했다니! 사실이든 아니든 과거 ‘베껴먹기의 원조’ 일본으로부터 받은 항의이고 보면 참으로 낯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세계 유수의 학술지에 80여편의 논문을 실은 젊은 과학도의 표절행위 또한 우리 학계의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국제적 범죄다.

자고나면 불거지는 가수들의 표절, 이름 있는 학자들의 표절, 공모전 입상자의 표절 등 우리는 표절들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사실 표절 아닌 것을 찾아내는 일이 쉬울 정도로 표절이 일상화 되고, 그것이 관행처럼 여겨지는 세상이다. 인터넷을 뒤져 남의 글을 듬뿍듬뿍 퍼다가 ‘짜깁기’한 것을 논문이나 리포트로 제출하고 좋은 학점을 요구하는 세상이다. 강의 시간중에 제출하는 리포트의 표절의혹을 가리는 일은 포기한 지 이미 오래고, 이젠 각종 학위논문의 표절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참고문헌들과 논문의 본문을 일일이 대조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주제나 논지의 타당성, 문장의 정확성 등은 이제 더 이상 1차적 심사의 대상이 아니다. 문장이 눈에 띄게 미끈하면 ‘이거 어디서 베껴온 것이나 아닌가’를 의심해야 하는 실정이다. 서툰 문장, 어설픈 논지가 오히려 반갑게 생각되는 것은 그것들과 참고문헌들을 일일이 대조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표절의 원본으로 삼고 있는 인터넷 속의 텍스트는 과연 온전한가. 그것들 역시 상당 부분은 표절의 수법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러니, 어느 텍스트를 원본으로 인정해야할지 난감한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렇게 우리를 ‘표절 불감증’으로 몰아 넣었을까. 바로 사회에 만연한 ‘결과 지상주의’ 때문이다. 과정의 정당성 여부보다는 결과물의 수량만이 유일한 평가의 척도로 적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논문의 편수가 금전적 보상이나 승진의 절대적 조건인 상황에서 문장을 따오든 아이디어를 베끼든 표절의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청률만으로 성패를 가름하는 상황에서 일본의 TV라도 표절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끈한 문장과 번지르르한 장정만을 보고 학점을 주는 상황에서 인터넷 속의 글을 짜깁기하여 리포트로 제출하려는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한 것은 표절행위가 입증된 경우에도 그 뒤처리가 유야무야된다는 점이다. ‘그저 운이 나빠 걸렸을 뿐’이라는 판단은 우리 사회에 표절행위가 만연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생각이다. 모두 표절의 혐의를 나누어 갖고 있다는, 공범의식의 결과가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비록 표절을 당한 사람이라 한들 그 사실을 선뜻 공개할 수 없다. 모두 베껴먹고 사는 사회에서 그런 사실을 공개하는 일이야말로 좀스럽고 치사하지 않으냐는 비아냥이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단계에서 주저앉느냐 한 단계 도약하느냐는 국민들의 창조적 역량에 달려 있다. 국민들의 창조적 역량을 높이기 위해서는 그들의 창조적 작업이나 결실이 철저히 보호되어야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나 상품을 내놓기가 무섭게 표절된다면, 누가 영혼을 불사르는 창조적 작업에 나설 것인가. 국민들의 창조적 열기가 식어버리면 산업이나 과학의 발전은 그 순간에 멈추어 버린다. 정부가 2만불 시대를 고창하고 있지만, 표절문제에 미온적인 한 1만 불의 현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표절을 중죄로 다스리기 위해 법을 보완하고, 감시 기구의 기능을 강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범국민적인 양심 회복 운동이다.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완벽하다해도 국민 각자가 마음을 바로 먹지 않는 한 표절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한 번 빠져버린 표절의 함정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절은 금단의 열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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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10. 11:19
우리시대의 위기와 인문학

                                                                            조규익

전통 왕조시대의 종말과 함께 식민 상황에 접어들었고, 식민 상황의 종말과 함께 분단 상황으로 접어들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현대사는 크게 왜곡된 모습을 보여준다. 비정상적인 역사의 흐름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혼란의 요인들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어느 나라이든 역사적·사회적 변화에는 가치관이나 인식의 변화가 수반된다. 그러나 그  변화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전통의 계승이 순조롭고, 지속적인 발전 또한 이루어질 수 있다. 대대로 같은 공간에서 삶을 이어온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지나치게 혁신적이거나 이질적인 규범을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런 점에 비추어 본다면 조선왕조에서 근대국민국가로 이행되었어야 할 시점에 식민 상황을 맞이했고, 식민 상황에 이어 분단 상황을 맞이함으로써 정상적인 가치관은 형성될 겨를이 없었다. 특히 6·25 전쟁 후 반세기 동안 농경에서 산업화의 단계로, 산업화에서 정보화의 단계로, 정보화에서 고도 정보화의 단계로 숨차게 달려온 우리 사회다. 한 사회의 가치관이 바람직하려면, 그것이 개인적 욕구를 자제하고 공동체의 이상 실현을 위해 구성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수 있어야 한다.
세대의 차이, 빈부의 차이, 사회적 지위의 차이, 남녀 간의 차이 등을 넘어 사회의 질서를 잡아주는 안전판 역할을 하는 것이 공동체의 이념이고, 바람직한 가치관 또한 그로부터 생겨난다. 전통 가치관을 고수하려는 기성세대와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신세대 간의 갈등, 부와 권력을 독점하면서도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않는 특권층과 박탈감에 고통 받는 서민층 간의 갈등, 가정과 사회의 억압구조를 중심으로 하는 남녀 간의 갈등 등, 현재 우리는 다양한 갈등 속에 살고 있고, 그것을 해소시킬 만한 이념이나 가치관 또한 갖고 있지 못하다. 우리 사회의 혼란과 위기는 여기서 빚어진다.
양과 질에서 남보다 우세한 정보만이 경제적·사회적 성공의 유일한 열쇠라고 믿는 시대정신은 고도 정보화 사회의 부정적 소산이다.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무한 경쟁이 벌어지고, 그런 경쟁이 가속화 될수록 인간의 정신은 황폐해지기 마련이다. 좋은 책을 읽고 저자의 생각을 곰곰이 생각하며 자신의 생각을 넓히고 깊게 하는 것이 인문학의 본질이라면, 이미 형성된 인터넷 만능의 현실은 인문학의 존립에 가히 재앙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성숙이나 완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던 대학교육은 이제 재화 창출만을 지향하는 직업교육으로 탈바꿈되고 말았다. 당장 돈벌이에 소용되지 않는 지식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직업교육에 가까운 각종 응용학문들이 대학의 핵심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전통적으로 중시되어오던 기초학문이나 인문학은 설 자리를 잃었다. 기성세대, 젊은 세대 모두 나름대로의 이유를 들어 인문학을 기피한다. 인문학이 ‘당장 재화를 안겨주지 않는다’는 근시안적 시각 때문에 우리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인문학은 홀대받고 무시된다. 인간의 정신이나 문화 등을 주 대상으로 연구·분석하기 때문에, 인문학은 정신과학이자 인간과학이다.
인간의 본질과 사상을 전반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인문학의 쇠퇴야말로 ‘인간의 소외’를 초래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인간의 소외는 공동체를 물질 지상(至上)의 비인간적 공간으로 전락시킨다. 이구동성으로 인간의 소외나 인간성의 말살을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인문학을 죽이는 일에 앞 장 서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행태다. 시대의 병리현상을 절감하긴 하지만 그에 대한 고민을 게을리 하기 때문이다. 그토록 대학에서 직업교육을 철저히 받았음에도 사오십 대만 되면 현장에서 축출되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는 사오십 대를 상품가치가 없다고 축출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비인간화의 대표적 사례다. 인문학을 홀대하는 사회 분위기가 빚어낸 부정적 행태라고 할 수 있다.
인문학은 인간을 폭 넓은 가능태로 만드는 학문이다. 처음부터 직업교육만을 받을 경우, 그 효용가치가 다하는 날 인간도 폐기될 수 있다. 그러나 가능태의 인간은 창조적인 인간으로서, 자기 쇄신과 수련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자신의 몸값을 높여나갈 수 있다. 대학이 폭 넓은 인간을 길러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인문학의 고유 영역은 인정되어야 하고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어느 분야의 학문이든 인문학을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제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시대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바야흐로 죽어가는 인문학을 되살려야 한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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