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학(碩學)이 돈 몇 푼으로 만들어지나
조규익(숭실대 교수)
우리나라 지식사회의 중심인 대학과 교수집단을 무참하게 짓밟아버린 신정아 사건. 한 계절이 다 가도록 그 본질이 명쾌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 사건이야말로 지식인들의 무사안일과 허위의식, 그로 인한 지식사회의 부패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이런 와중에 교수 정년보장심사에서 신청자들을 대거 탈락시킨 KAIST의 사례가 이른바 ‘교수 철 밥통 깨기’의 전조(前兆)로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 번 임용되면 정년이 보장되는 기존의 관습을 깨야 한다’는 이구동성(異口同聲)의 사회적 구호가 당위로 인식되는 분위기 속에서 상식을 갖춘 교수들이라면 무슨 항변인들 보탤 수 있겠는가.
근래 들어 우리 사회에서 ‘석학’의 언급이 부쩍 늘어나는 것도 이런 현실에 대한 반작용일 수 있다. 말하자면 쭉정이들 틈에서 ‘제대로 된 알맹이들’ 몇몇이라도 키워 지식사회의 건전화를 선도해보자는 발상일 것이다. 학계의 저변을 튼실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상식적 처방을 잠시 외면한 채 이른바 소수의 ‘스타교수, 스타학자’들을 찾아내어 ‘석학’이란 명함을 부여해보자는 발상은 한정된 재원을 투자하여 ‘일시적이나마’ 한국 지식사회의 저급성을 모면해보자는 고육책일 것이다.
그렇다면 석학이란 무엇인가. 과문의 소치이겠으나, 동양권에서는 예로부터 십여 년 이상 저술에 몰두해 온 ‘대학자’를 석유(碩儒)라 했고, 석유는 석학과 동의어로 쓰인 말이다. 근대 이후 학문이 다양하게 분화되면서 어느 분야에서나 석학들은 나타나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석학이란 말 속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해당 분야의 전문적 식견과 사회적 책무의 인식이나 실천이라는 복합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탁월한 학문적 깊이와 함께 지도적 인격이 구비되어야 비로소 ‘석학’의 영예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석학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며, 그런 이유에서라도 스스로가 석학이라고 나설 수 없는 것은 더더욱 당연한 일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학문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는 ‘국가석학’이란 명목으로 ‘우수학자’를 ‘모집’하고 있다. 자격을 갖춘 학회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는 단서를 달고 있긴 하나, 그 추천을 받기 위해서는 학자들 스스로가 자신이 석학임을 입증해야 한다. 몇몇 전공분야의 경우 수백명이 신청했다는 후문이고 보면 우리나라에는 ‘스스로 석학들’이 매우 많은 셈이다. 특정 연구계획으로 2~3년 간 매년 기천만원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연구를 마무리한다고 석학이 된다면 조만간 이 나라는 석학으로 가득 차게 될 것 아닌가.
조나라의 평원군(平原君)에게 스스로를 천거하여 일을 성사시킨 전국시대 ‘모수(毛遂)’의 예도 있긴 하지만, 긴 세월이 필요한 학문은 ‘단박의 술수’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차라리 권위 있는 학회들에 위탁하여 기존의 명망 있는 학자들이나 장래 ‘석학의 가능성을 지닌’ 학자들을 발굴·추천하는 일을 맡겨서 국가 예산을 효율적으로 쓰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다. 해마다 한 두 번씩 수백 명의 학자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석학이라 내세우며 어리석음을 범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백년대계를 책임져야 할 국가가 범하는 최대의 잘못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공무원들이 탁상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석학이란 단박에 돈 몇 푼으로 만들어지는 ‘물건’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