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광주의 찻집에서
친구를 보내며
백규
다정하던 친구 김성원이 이승을 떠났다.
내가 마지막으로 다녀 온 다음 날부터
그는 급격히 혼돈에 빠져들었고,
드디어 12일 새벽 돌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오늘 아침 이른 시각
너무나 짧은 발인식을 마치고
그는 뜨거운 불의 정화(淨化) 의식을 거쳐 저승으로,
나는 현실의 원리가 작동하는 일터로 다시 돌아왔다.
눈을 감기 나흘 전
병원으로 그를 찾았다.
그는 나를 보고 싶어했고
나 역시 그가 몹시 궁금했다.
서로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우리는 힘주어 몇 마디 말을 나누었다.
밝은 웃음이 모처럼 그의 얼굴에 번졌다.
언젠가 그에게 처음으로 이런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학교 졸업 후 지금껏 나는 인천 방향으론 소변도 보지 않았노라!”고.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 같지만,
사실 그 속에는 어린 시절 그곳에서 겪은 고통과
마음의 상처가 듬뿍 실려 있었다.
그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일까.
그동안 나의 그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음을
병상 머리맡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는 갑자기 폰을 집어 들더니
어느 부분엔가 저장해 놓은 사진 한 장을 찾아 더듬거렸다.
마지막 순간 내게 보여주려고 잘 갈무리해 두었겠지만,
정신이 혼미해진 탓인지 결국 사진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어릴 적 동생을 안고 있는 사진이라는데,
무뎌진 손끝과 흐려진 정신으론 끄집어 낼 수 없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엉망이 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통해
마지막으로 내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려는, 속 깊은 마음씀이었으리라.
그 뿐 아니다.
모든 면에서 참 사려 깊은 그였다.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친구들 일이라면 빠진 적 없었고,
함께 어울리기 좋아한 그였다.
자신이 정한 원칙은 한 치도 어김없이 지키려 했고,
적당히 타협하지 않으려 했다.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해주길 원하다 보니,
그들 역시 때로는 지치고 힘들었으리라.
그래도 늘 넉넉한 웃음으로
모임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곤 했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만,
삶과 이승에 대한 애정이 유독 도타운 친구였다.
그래서인가.
이렇게나 빨리 홀로 먼 길 나선 그가 안쓰러울 뿐이다.
붙잡는 이승의 손길을 지긋이 뿌리친 채,
그는 떠났다.
삭막한 세상을 함께 할 친구 하나가 줄어든 것이다.
이 상실감이 제대로 치유되지 못한 채 절망으로 연결된다면,
그 때문에 나 또한 세상을 뜨게 되리라.
허무의 심연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나 또한 이승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리라.
오늘
햇살은 이리도 좋은데,
그대는 어디쯤 가고 있는가.
길가에 주막 한 채라도 있거든
병마 탓에 그동안 끊었던 막걸리 한 사발이라도 사 마시며
얼큰 취한 목소리로 <희망가> 한 자락이라도 불러 보시게나,
사랑하는 친구여!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앉아서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풍 중에 또다시 꿈같도다.“
2018. 3. 14.
성원을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