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 1. 25. 15:54

정치와 예술의 금도(襟度)

-표창원 의원께-

 

 


                          에두아르 마네-올랭피아- 1863년

 

 

 

의정활동에 얼마나 노고가 많으신지요?

 

국회의원이 되시기 전, 경찰대 교수이자 프로파일러로서 늘 주요 사건이 터질 때마다 큰 방송들의 뉴스에 단골로 등장하시어 조언을 하시던 의원님의 모습이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당시 저는 그런 사건들을 접하면서, 저렇게 탁월한 전문가들 10명만 있다면 우리나라가 많이 좋아질 수도 있을 텐데!’ 라는 비원(悲願)아닌 비원을 갖기도 했었습니다. ‘조만간 좀 더 큰일을 하는 직책으로 발탁될 수도 있겠구나!’라고 짐작하던 차, 아니나 다를까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발 빠르게 나서서 의원님을 영입했지요. 제 취향이 아닌 정당으로 영입되어 가시는 모습을 보며 일말의 서운함은 있었지만, ‘우리나라 정당 특히 야당의 격이 약간은 높아질 수도 있겠구나!’라는 기대를 갖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아시다시피 현직 대통령이 탄핵을 당해 수족이 모두 잘린 지금은 참 묘한 시점입니다. 판을 한 번 들여다볼까요? 집권당으로서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라 할 만큼 절망과 수치 속에 숨죽이고 있는 반면, ‘다음 대통령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확실한 승리의 아지랑이에 휩싸여 있는 쪽이 더불어민주당이지요. 여당이나 대통령의 입장에서야 입이 천 개라 한들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까요? 기라성 같은 율사들을 쓰러져 있는 대통령 앞에 대항마로 포진시켜 놓았지만, 무슨 수로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들을 막아내어 국면을 반전시킬 수 있을까요?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성어를 아시지요? 천하장사인 초나라의 항우(項羽)와 필부출신의 한나라 유방(劉邦)이 쟁패하던 상황이었지요. 항우에게 다가오는 운명의 날. 날랜 장수 범증(范增)마저 떠나고 동쪽으로 밀려가던 중 해하(垓下)에서 한나라 명장 한신(韓信)에게 포위되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밤, 사방에서 들려오는 구슬픈 초나라 노래. 한신이 항복한 초나라 병사들로 하여금 고향의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지요. 그 상황에 절망한 항우는 결국 오강(烏江)으로 뛰어들어 자결하고 말았다는 옛 이야기 말입니다. 국민들의 분노를 등에 업은 야당의 공격에 지리멸렬해 있는 여당이 바로 운명의 날을 향해 가는 항우 군의 모습이라 할까요?

 

상승과 하강이 이처럼 극명하게 대조되는 상황을 우리 현대 정치사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물론 상승하다가 어느 시점부터 하강의 국면으로 접어들기도 하고, 그 반대로 하강하다가 상승하게 되는 것은 세상의 다반사(茶飯事)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극적인 사변(事變)이나 외적인 충격이 있지 않고서야 바야흐로 방향을 잡은 국면이나 추세가 시간을 앞당겨 바뀌긴 어렵지요. 음양(陰陽)이 교차하는 것은 세상사의 이법이고, 제 아무리 날고 기는 영웅호걸이라 해도 그런 음양의 추세를 갑자기 뒤집기는 불가능한 게 우주의 이법이기도 하지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문재인 전 대표를 비롯한 야당의 잠룡군(潛龍群)에서 차기 대통령이 나오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일 겁니다. 말하자면, 야당 특히 더불어민주당은 지금 희색(喜色)을 억누르며 표정관리하기 어렵고, 혹시나 이 흐름이 바뀔세라 시간의 더딤을 한탄하고 있을 겁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저도 그간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때를 기다려온 야당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역사의 순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인지요? 이런 꽃놀이 판에서 자중자애(自重自愛)해야 한다는 것은 요즘 똘똘한 초등생들도 아는 행동수칙 아닌가요? 이제 열매를 손에 쥐었다고 방심한 것일까요? 열매를 딴 뒤에 벌어질 논공행상을 대비한 것일까요? ‘대통령 탄핵 청문회에서 공을 세우지 못했으니, 이런 공이라도 세워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조급한 영웅심이 발휘된 것일까요?

 

국회 건물 안에서 펼친 대통령 나체화 전시회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접하며 참으로 기가 막히고 부끄러워 이틀 연속 혀만 차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평생 문학을 공부하며 예술 쪽도 곁눈질을 해왔습니다만, 그걸 만들어놓고 예술의 자유, 창작의 자유운운하시는 모습을 보며, ‘소가 웃다가 코뚜레 부러지는 일이 바로 여기서 재현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항상 예술이 대중의 미학을 선도한다고는 하나, 저같이 우매한 민중에게 그것도 예술임을 강변하려 한다면, 솔직히 번지수를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은 것이지요. 무엇보다 그걸 국회로 끌고 와서 난장을 벌인 장본인이 좋아하던 표 의원님이었다니!

 

우리 현대사의 고비를 목격하고 느끼며 나이를 먹어 온 베이비부머 세대의 일원으로서, 저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심한 내면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정치 풍자와 예술을 가장한 폭력행위까지 국회의사당에서 스스럼없이 자행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이제까지 제가 공부해온 미학의 상식과 바탕이 송두리째 부정되는 현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있는 중입니다.

 

풍자나 은유가 필요하거나 힘을 발휘하는 것은 정치권력의 폭압으로 민중이 할 말을 하지 못할 때뿐입니다. 입 달린 사람이면 누구나 대통령을 욕하는 지금, ‘풍자예술을 통해 달리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다는 건지요?

 

사실 예술에 대한 해석이나 미학에 대한 논의도 보편적 상식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 것이지요. 현 대통령의 얼굴과 150여년 전 마네의 작품을 합성하여 만든 작품 아닌 작품으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면, 그 자체가 풍자예술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을 뿐 아니라단순한 분풀이 이상의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의원님의 판단착오로 가능했던 그런 행사가 정치적으로 누구에게 손해이고 누구에게 이득인지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시대 정치인들의 의식수준이 매우 저급하고, 행동거지 또한 너무 경망하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 점이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정치인이기에 앞서 멋진 지식인이자 유능한 전문가로 알아 왔던 의원님이 그 동네에 들어간 이후 그렇게 표변했는지,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의원님을 거울로 삼아 언행에 신중을 기해야겠다고 우리 스스로 다짐할 수만 있다면, 이번의 사건이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중언부언(重言復言)한 제 말씀이 부디 의원님께 불쾌감을 드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8. 1. 09:29

중국은 무도(無道)한 깡패국가, 세계 평화의 최대 걸림돌이다.

 

                                                                                                                                           백규

 

근자 중국의 마수(魔手)로부터 가까스로 풀려나 귀국한 김영환 씨에 의해 중국의 치부가 만천하에 폭로되었다.

 

중국을 다녀 왔거나 그들과 공식적인 거래를 해본 사람들은 대충 알고 있겠지만, 그들이 아직 원시적 야만의 의식수준에서 헤매고 있음은 분명하다. 세계에서 국가 공권력이 공공연하게 고문을 자행하는 나라의 대표적 사례가 북한과 중국이다. 공자와 맹자, 주자와 같은 훌륭한 선조를 모시고 있는 나라의 못난 후손들이 벌이고 있는 야만적인 폭거는 그들의 행태로 미루어 앞으로 몇 세기가 흘러도 청산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미개국을 이웃으로 두고 있는 대한민국.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해야 할까. 툭하면 잡아다 고문을 해도 모르는 척 하면서 '잡혀 들어간' 우리 국민의 '기민하지 못함'만 탓해야 할까. 어떻게든 덩치만 큰 '깡패국가' 중국의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아야겠는데, 당장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없다. '정신 바짝 차리는 것'만이 그나마 그런 깡패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 모두 함께 지혜를 짜 내야 한다.

 

2005년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지금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김문수 지사가 국회의원으로 있던 당시였다. 그가 중국에서 탈북자 문제인가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그 현장에서 무도한 중국의 공권력으로부터 테러 비슷한 폭행을 당했다. 한 나라의 독립된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은 어느 나라에 가서든 최소한 외교관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김 의원을 잡범 다루듯 한 일은 국제법의 관례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김 의원을 탓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무도함을 먼저 탓했어야 할 이 땅의 정치인들 혹은 지식사회가 억울한 김 의원을 비난한 것은 뿌리 깊은 '노예근성'의 발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종북주의자들'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필자는 당시 분노를 금치 못하고 아래와 같은 칼럼을 <<조선일보>>(2005. 1. 17.)에 기고한 바 있다. 그 글을 통해 위정자들에게 '민족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최소한의 방책이라도 마련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 나라를 이끌어 간다고 하는 위정자 그룹의 '대책없음'이 우리를 분통 터지게 만드는 요즈음이다. 지금 여야를 막론하고 대권을 꿈꾸는 이른바 잠룡(潛龍)들은 무엇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갖고 있어야  한다. 깡패국가의 볼모로 전락한 국민이나 국가의 대통령이 된들 무슨 영광이겠는가? 얻어 맞으면서도 배만 부르면 그만인 '돼지'로 만족할 것인가?

 

당시의 글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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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자존심

 

 

▲ 조규익 교수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중국의 공권력에 폭행을 당했다. 국가 간의 이해(利害)가 개입된 문제라고는 해도 ‘때린 놈’이나 ‘맞은 놈’ 모두 우습게 되었다. 더욱 희한한 일은 때린 놈의 역성을 드는 집단이 우리들 속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점잖다 해도 ‘불량배에게 맞고 들어온 자식’을 꾸중하는 부모는 없다.

 


사실 중국을 지렛대로 북한을 움직이려면, 중국과 우리의 이해관계가 맞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란 어렵다. 북한의 체제를 유지하도록 도와주면서 남한으로부터 경제적 이득까지 챙기려는 중국인들의 계산법은 천하공지(天下共知)의 사실이다. 분단된 우리 민족을 뒤에서 조종하며 실익을 챙기자는 그들의 ‘꼼수’를 우리는 민족사 최대의 수치로 받아들여야 정상이다.

 

따라서 이번 일을 국제화 시대의 나라들 간에 일어날 만한 외교적 사건으로 단순화 시킬 수는 없다. ‘민족적 자존심’의 원칙적 잣대는 어느 나라와의 관계에서도 최우선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특히 중국에 대해서는 그 잣대가 좀더 복잡하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80년 전의 일을 떠올려 보자. 반정(反正)으로 인조(仁祖)를 옹립한 서인(西人) 정권은 정통성을 인정받아야 했다. 중국으로부터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받지 못하면 국내에서 반대파를 누르고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누르하치의 기세가 바야흐로 명(明)나라의 숨통을 끊어갈 무렵이었다. 이덕형(李德泂)을 정사(正使)로 하는 주청사(奏請使)가 명나라 조정에 파견되었고, 그들은 넉 달 가까이 북경에서 온갖 수모를 겪는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정사가 ‘시랑(侍郞)’ 정도의 관리들에게 농락을 당하기 일쑤였고, 자신들의 뜻을 요로에 전하기 위해 뇌물을 밥 먹듯 써야 했다. 북경의 혹심한 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새벽부터 길거리에 꿇어 엎드려 출근하는 각로대신(閣老大臣)들에게 손을 비비던 노구(老軀)의 정사는, 바로 역사 속에 그려진 우리 민족의 자화상이다.

 

 

그뿐인가. 천신만고 끝에 각로들을 만난 정사. 그들의 괜한 트집으로 섬돌에 내동댕이쳐져 울부짖던 그 참상을 다시 무슨 말로 표현할까.


 

역사에서 가정(假定)은 부질없다지만,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무자비하고 철저하게 ‘농락해 온’ 저들의 무례함을 제때 제대로 징치(懲治)했더라면 현대사는 좀더 다른 방법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징치’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우리가 ‘자존심’을 세우는 방법만이라도 강구했었다면 지금 이렇게 온 국민이 참담함을 되씹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망해가는 명나라에게 빌붙어 국내에서 권력을 장악하려던 일부 무리들의 ‘꼼수’는 결국 민족의 자존심을 망치고 그후 조선에 잦은 전란을 초래한 원인의 하나가 된 것만 보아도, 통치 집단의 지혜로움은 분명 민족사 전개의 향방을 가르는 지표로 작용하는 게 사실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세상사,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겉모습은 달라져도 본질은 변할 리 없다. E H 카(Carr)의 말처럼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가 역사임에도, 우리는 역사로부터 배운 것 없음을 만천하에 보여주고 말았다. 특히 21세기 초입의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집단들이 매우 우매(愚昧)하고 게으르다는 점, 국민으로서는 그것이 못내 통분하다.

 

 

역사책의 한 쪽만 넘겨 보아도 우리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진실은 그득하다. 지금 중국은 남북의 분단 상황을 지렛대로 삼아 그 사이에서 철저히 이익을 취하고 있다. 그 와중에 농락당하는 건 남북한 모두의 자존심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조선일보, 2005. 1. 17.>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7. 8. 14:04
정치인들도 교육에 동참하라!

이른바 ‘잠룡(潛龍)’들이 뛰어나와 하나밖에 없는 승천(昇天)의 티켓을 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지금. 온갖 술수가 난무하여 혼란스러운 ‘2007년 6월의 공간’을 뜻 있는 사람들은 난세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모두가 ‘정치’를 탓한다. 정치만 있고, 양식(良識)에 바탕을 둔 도덕이나 인간미가 상실되었다 한다. 제대로 된 정치나 정치인을 만나본 적이 없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정(人情)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한비자(韓非子)는 말했다. 인정이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마음, 또는 생각’이 인지상정이다. 물고 뜯으며 싸우는 것은 ‘나만 깨끗하고 너는 더럽다’는 고집스런 편견을 대전제로 한다. 그래서 제 허물은 덮어두고 남의 흠집만 캐내어 세상에 광고하기 바쁘다. 남의 흠은 작은 것이라도 크게 부풀리고 자신의 것은 감추면서 남을 깎아내리려 한다. 이 대열에 후보들은 물론 전·현직 대통령, 국회의원 등 이른바 정치인들이 뒤질세라 끼어들고 있다.

정치적 권위가 형성되는 핵심은 정책 결정자 또는 기관이 정통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정치집단이 정통성을 확보하려면 사회의 일반적 윤리를 바탕으로 정치집단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옳다는 관념이 국민들 사이에 보편화 되어야 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베버의 설명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윤리를 외면하고 술수로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일에만 몰두하는 우리의 현실은 비극이요 재앙이다.

지더라도 멋지게 지는 모습, 비록 적이라도 장점을 칭찬해주는 금도(襟度)가 실종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내뱉는 오물 같은 증오의 언사들이야말로 그들의 적만 듣고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져 있음이 분명하다.

이쯤 우리의 걱정을 털어놓아보자. 우리의 교육이 걱정이다. 어른들보다 훨씬 영악하게 세상을 배워가는 것이 이 땅의 2세들이다. 그들은 발달된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의 힘으로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의 언행을 거의 실시간으로 접한다. 강단의 선생들이 내뱉는 고답적인 말보다 전투적이고 상스러운 정치인들의 말을 훨씬 빨리 받아들인다.

지금의 선생들은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에 대해 일종의 열등감을 갖고 있다. 선생의 가르침보다 매스 미디어의 총아들이 보여주는 언행이 훨씬 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있는 사실 없는 사실 까발리고 부풀려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려는 정치인들에게도 자식들은 있을 것이다.

한 점 흠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검증의 당위성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라도 검증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자는 그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 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남을 검증하려면 철저한 자기검증이 우선되어야 한다. 정치인들이 자기검증만 제대로 한다면 굳이 남을 검증할 필요 없고, 그에 따라 ‘네거티브 전략’이란 저급한 용어가 등장할 필요도 없다. 네거티브 전략은 우리 사회의 신뢰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린다. 그 결과는 교육의 황폐화로 이어진다.

아이들은 그저 폐쇄된 학교 울타리 안에서 교과서만 읽는 로봇들이 아니다. 어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복사하듯’ 배운다. 무슨 거창한 교육정책을 세워주길 기대할 만큼 정치인들의 자질을 믿는 우리도 아니다. 다만 평균적인 윤리의식이나 양식 위에서 자신의 생각을 펼치되, 자신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 자식들의 교과서로 수용된다는 사실만이라도 명심해달라는 것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