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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3.29 많은 죽음들을 기억하며 3
  2. 2015.04.14 성완종 사건을 보며 2
글 - 칼럼/단상2018. 3. 29. 18:40

 


 


흘러가는 물을 보며

 

 


부모님 묘소에서

 

 

많은 죽음들을 기억하며

 

 

                                                                                                                                조규익

 

 

두 해 전에 어머니를 보내드렸다. 올해 가까운 친구 김성원이 떠났고, 며칠 전엔 대학원 시절 함께 공부하던 정명기도 떠났으며, 최근 들어 이런 저런 이유로 비명(非命)’에 떠나는 멀고 가까운 이웃들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그간 죽음에 대한 고민이나 사색을 통해 나름대로 의미부여의 방법을 터득했다고 자신하기 때문일까. 이젠 어떤 죽음도 비교적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자연사(自然死), 병사(病死), 사고사(事故死) 모두 항거할 수 없는 상황의 산물이다. 또한 개인적사회적 이유로 인한 최근의 자살들 역시 따지고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의 산물일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반듯하게챙겨 갖고 있지 않다면, 견디기 어려운 광경들을 주변에서 자주 목격하는 요즈음이다. 사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좀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자살이다. 어쩌면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없고, 그동안 지탱해오던 사회적 자아를 유지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가 자살일 것이기 때문이다. ‘절망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키엘케골의 말도 바로 그런 점을 지적했으리라.

 

가차 없는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본능 때문에 인간은 종교에 귀의한다고 한다. 사실 죽음이 매우 두려운 것은 죽음 이후의 세상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의 삶을 예비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지금도 사람들을 교회로, 성당으로, 사찰로 이끄는지 모른다. 돈독한 논리체계로 사후 세계를 치밀하게 설계해 온 종교들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믿으라고 권유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그 세계의 주재자인 신을 받들고 있을 것이다. 그 믿음이 강할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경감되리라고 믿으면서 말이다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의 내면에 남아 있는 한 종교는 계속 번창할 것이라고 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자연물로서의 인간의 삶은 참으로 짧고, 그 가운데 가치 창조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더욱 덧없다. 하기야 한갓 미물로서 무슨 가치를 창조하겠노라뜻을 세우는 것 자체가 오만하고 가당찮은 일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저 하나의 던져진 존재라는 점을 깨닫기만 한다면, 겸손한 자세로 생명의 장()’인 세상에 폐를 끼치지 않고, 조용히 살다 사라지련만. 대부분은 주어진 생애 동안 기고만장하여 같은 공간의 동지들과 멱살잡이로 날밤을 지새우기 마련이다. 소수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을 돌아보고 깨달음을 얻지만, 대부분은 삶에 대한 헛된 집착으로 그런 깨달음조차 얻지 못하는 것 아닌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그대는) 죽어야 하는 존재임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경구(警句). 아침저녁 열심히 가꾸어 오던, 꽃 같은 얼굴이 한 줌 재로 바뀌어 풀밭에 뿌려질 때, 풍채 좋던 친구가 주검 옷에 둘둘 말려 석자 깊이의 무덤으로 내려 갈 때, 그들을 바라보며 비로소 내 모습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을 보며,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자연법칙에서 나만은 예외일 것이라는 착각으로부터 빠져 나와야 한다. 그 자리에서 시신으로 바뀐 그들과 나의 자리바꿈을 통해 비로소 삶과 죽음의 우주적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며, 그 순간부터 죽음은 두렵지 않게 될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죽어야 할까? 하나, 둘 떠나는 이웃들을 보며, 그 순번이 내게 돌아올 때까지 나는 어떤 자세로 살아갈 것이며 어떻게 그 순간을 맞아야 할지,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메멘토 모리!!!

 

 


등걸에서 새싹이...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4. 14. 14:49

성완종 사건을 보며

 

 

 

참 가관이다.

산다는 게 무언지, 우리가 뭘 위해 사는지 참으로 많이 헛갈리는 나날이다.

돈 썩는 냄새가 천지에 진동할수록 국가를 경영하는 인간들이 죄를 짓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가소롭고 딱하다. 매에 쫓긴 꿩이 머리를 논바닥에 쳐 박고 몸부림치는 모습 같아 애잔하기까지 한 요즈음이다. 사방팔방 돈을 퍼주다가 법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게 되자, 동네사람들에게 일러바치고 목숨을 끊은 그 또한 가소로운 건 마찬가지다.

 

돈을 아끼고 불려가며 기업이나 잘 운영할 것이지. 정치에 뛰어들어 기업을 망치고 자신마저 비명에 간 일을 어떻게 변명할 수 있을까. 물론 정치인이 처음부터 정치인으로 태어나는 건 아닐 테고, 기업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정치에 한 발을 들여 놓아야 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정치판과 거리를 두고도 세계적인 기업을 이룩한 주변의 인물들이 어디 한 둘인가. 모름지기 기업을 운영하는 자라면, 기업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그 기업을 성실하게 키워가야 하는 것이 본연의 의무일 터. 만에 하나 정치 모리배들에게 돈을 퍼부어야 겨우 기업을 운영할 수 있다면, 만사 밀어두고 그 문제부터 고발하거나 바로잡았어야 옳다. 그런 일이 불가능하여 자살이란 극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그러지 않고 그럴 듯한 감투 하나를 얻기 위해 온 나라를 휘저어 놓은 것이라면, 죽음으로도 그 죄과를 씻을 순 없다.

 

나이 먹을수록 먹는 양이 줄어든다. 잘 차린 밥상을 보면 회가 동하기 전에 걱정부터 앞선다. ‘저걸 다 어떻게 먹는단 말인가’, ‘반도 못 먹고 남기면 그냥 쓰레기로 버려질 텐데...’, ‘엊그제 보도에 한 두 끼로 하루를 지내는 아이들을 보았는데...’ 등등  ‘먹는 것’의 육체적 부담과 사회적 함축의 복잡성 때문에 편치 않은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사실 고량진미의 확보에서 삶의 행복을 느끼는 단계를 넘어서야 비로소 사회적 자아가 제대로 작동되는 법이다. 열심히 먹어도 1년 동안 쌀 한 가마를 못 먹는 게 인간이다. 정치하는 게 ‘돈 쓰는 일’이라면, 돈 없는 자는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한다. 돈 받은 사람들이 모두 ‘꿀꺽했다’고 돈 준 사람은 항변했다. 정당한 정치자금으로 처리하지 않고, 사복(私腹)을 채우더라는 것이다. 참, 그 큰 뱃구레들이 부럽고, 그악스런 욕심보가 놀랍다. 하나같이 돈 받은 일 없다고 발뺌들을 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논바닥에 주둥이를 쳐 박은 꿩’의 형상이다. 애시당초 달라고 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돈 주어놓곤 어려울 때 도와주지 않는다고 앙앙불락하며 '다 까버리는' 행위도 시쳇말로 '껄쩍지근하기'는 마찬가지다.  

 

나라는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돈 받지 않은 놈 없는 정치판'은 ‘개판’으로 전락했다. 정신 제대로 박힌 인재들은 산야로 숨고, 사기꾼들만 ‘살판났다’ 활개 치는 세상이다. 정신 나간 기업인은 제가 먹여 살려야 할 종업원과 그 가족들의 미래는 안중에도 없다. 월급날이 오기만 고대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종업원 아내들의 표정을 단 한 번이라도 생각했다면, 월급날 아빠가 통닭이라도 몇 마리 사오기를 기다리는 종업원 자식들의 눈빛을 단 한 번이라도 떠올렸다면, 성완종 씨는 ‘천금 같은’ 기업을 그런 식으로 ‘아작 내지는’ 않았으리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과연 그 죄가 사해질 것 같은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