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 전공자료2008. 9. 9. 19:53

“오직 공도(公道)만을 지켜 신명(神命)을 믿노라”

-민족적 수치와 교훈의 서사미학 : 이덕형의『죽천조천록』-

 

 

노구의 정사, 끔찍한 해로사행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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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천 이덕형의 초상>

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을 대신하여 새 왕에 추대된 능양군 이종(李倧). 그가 바로 서인들에 의해 옹립된 인조다.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현실적인 외교로 전쟁을 피하고 실리를 추구해왔으나, 서인세력은 그들의 지론인 ‘친명사대(親明事大)’를 실천에 옮기고자 했다. 중원에서 승승장구하는 후금을 적대시하고 바야흐로 꺼져가던 명나라에 빌붙고자 한 서인들에게 나라의 형편이나 전쟁으로 죽어나갈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명나라의 승인을 통해 자신들이 거머쥐어야 할 정치권력만이 그들의 관심대상이었다. 망해가던 명나라로부터 인조와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이 자신들의 안위에 절대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59세의 죽천 이덕형(李德泂,1566~1645)을 주청사의 정사로 명나라 조정에 파견한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 이덕형은 광해군 말년에 도승지로 있었고, 인조반정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으며, 반정 후에도 광해군을 죽이지 말라고 주장할 정도로 강골이었다.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온 뒤 조정 대신들의 모함으로 고초를 겪은 것도 서인정권과의 거리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인조의 지우(知遇)를 받아 말년까지 비교적 순탄한 환로(宦路)를 걸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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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안도 선사포에서 배를 타고 떠날 차비를 하는 사신들과 전별을 나온 사람들>

인조 즉위 2년(1624) 6월 20일 한양을 떠나 10월 13일 북경 회동관에 숙소를 정했고, 이듬해 2월 25일 북경을 출발하여 4월 25일 복명했으니, 장장 10개월에 걸친 장도였다. 요동은 이미 누르하치가 점령하여 육로통행이 불가능했으므로, 평안도 선사포에서 산동반도의 등주에 이르는 해로가 유일한 통로였다. 이미 우참찬 유간, 이조참판 박이서, 정언 정응두 등 광해 조 때 진위사 일행이 풍랑으로 몰사한 그 길이었다. 장산도와 광록도 사이에서 만난 풍랑은 그들이 겪은 난관들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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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산도와 석성도 사이에서 만난 풍랑>

잠깐 사이에 음산한 구름이 서쪽에서 일어나 하늘색은 새까맣게 변하고 모진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일어나 큰 물결이 하늘에 닿으니 비록 옮겨 정박하고자 하나 손을 쓸 수 없어 배는 거대한 물결에 내맡겨진 바가 되었다. 백 척의 거품 끝에 곧바로 올랐다가 만 길의 심연으로 돌아 떨어지니 배 안에서 사람들은 낯빛을 잃고 서로 마주 보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부사의 배가 잘못 정박하여 머문 곳에서 순식간에 널빤지가 부러져 물이 배 안에 가득 차게 되었으나 다행히 바람이 자서 전복을 면할 수 있었다.

 

깐깐한 유학자들이 천비낭랑, 용왕신, 소성신 등에게 제를 올려 뱃길의 안위를 기원할 정도로 발해만의 파도는 높고도 험했다. 어쩌면 그것은 중국에 들어가 수행할 사명의 어려움을 예고하는 전조였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그들은 바닷길을 건너고 육로를 걸어 북경에 도착했다.

 

명나라 말기 관료들의 부패상에 진저리를 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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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경에서 외교활동을 하는 사신들의 모습>

수행원 누군가에 의해 메모가 작성되었고, 귀국한 이후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완성된 『죽천조천록』. 사행길의 견문들을 세세히 기록하지 않고, 황제로부터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받아내는 일에 초점을 맞춘 사실이 여타 사행록들과 다르다. 말하자면 다른 사행록들이 서술적이거나 묘사적이라면 『죽천조천록』만은 서사적(敍事的)이라는 것이다. 핵심 되는 하나의 사건이 이 기록을 관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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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경 자금성의 모습>

북경에 도착하여 4개월여 동안 부패한 명나라 관료들의 온갖 방해를 극복하고 황제로부터 고명과 면복을 받아낸 죽천은 서사체『죽천조천록』의 프로타고니스트요, 명나라의 관료들은 안타고니스트였다. 이처럼 선악의 갈등과 대립으로 압축되는 것이 그 서사체의 구도이다. 선의 입장에 서 있던 죽천은 어떻게든 황제로부터 고명과 면복을 받아 조선의 반정에 명분을 부여하고 현실정치를 안정시켜야 했다. 그것은 그들이 항상 입에 달고 다니던 ‘충(忠)’의 구체적 실천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재물을 탐하여 그런 충의 실천을 가로막는 명나라 관료들은 부패와 악의 전형이었다. 단계마다 뇌물이 필요했고, 뇌물의 공여를 전후하여 갈등은 조성되었다. 기록자는 뇌물이 횡행하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옥하관에 돌아와 예부 복계를 주야로 기다리되 금일 명일 하여 동짓달이 반이 지나도 국가 대사를 이룰 기약이 없어 민망으로 지내니 각 마을 서리 이르되 “너희 나라 이 대사를 이루려 하면 인삼과 금은을 상서와 시랑에게 많이 봉송하여야 일이 될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옥하관에 십년을 있어도 일을 이룰 기약이 없으리라” 하니 대저 천조(天朝) 인심이 말세 되어 탐풍(貪風)이 대작하니 대소 관원이 회뢰(賄賂)를 들이지 않는 이가 없어 대소 정사를 재리(財利)로 이루어내고 염치를 알지 못하여 봉책으로 기화를 삼아 날마다 하배로 하여금 관에 와 토물을 구하니 인삼과 은이 아니면 달피(獺皮)와 표피(豹皮)와 종이와 모시와 베와 무명이라. 아침에 수응하면 저녁에 또 달라 하여 말하기를 만일 일을 수이 이루어 주면 고기 낚을 데가 없다 하여 천연세월하여 달라기를 마지아니하고...

 

바리바리 마소에 등짐을 지우거나 꼬박꼬박 봇짐으로 지고 간 토산품들이 명나라 관리들에게 회뢰의 자료로 탕진되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기록이다. 일이 이루어지는 단계마다 이런 뇌물이 오고갔으며, 뇌물의 유무나 많고 적음에 따라 적지 않은 갈등도 생겨났다. 상대하던 명나라의 관리들이 때로는 방해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조력자가 되기도 하는 등 갖은 우여곡절을 경험하면서 죽천 일행은 천신만고 끝에 사명을 이룰 수 있었다. 조선이 요동에 출병하여 누르하치를 쳐주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를 인정하겠다는 것이 명나라의 공식적인 제의였다. 그러나 조선으로서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새 왕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이 급선무였다. 명나라의 관리들은 그런 약점을 지렛대 삼아 더욱 많은 물자를 뇌물로 요구한 것이었다.

 

무수한 수모 끝에 사명을 이루다

 

『죽천조천록』의 프로타고니스트 죽천 이덕형. 그가 당시 부패의 천국 명나라 관리들에게 비교적 좋은 인상을 준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인상을 줌으로써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인간적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수모를 무수히 겪은 것도 사실이다. 수시로 바뀌는 상서와 시랑 등을 상대하며 뇌물로 그들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일이 북경에서의 일상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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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 자금성의 또 다른 모습>

추운 겨울날 이른 아침 각로들이 출근할 때 길거리에 서서 읍하는 자세로 그들과 접촉을 시도한 경우도 있었고, 도찰원으로 오라는 말만 듣고 찾아갔다가 “드러 내치라”는 육각로의 대갈(大喝)에 “대조(大朝)의 노야(老爺) 대인들은 적선(積善)하시라”고 사정하며 섬돌을 붙든 채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뇌물 공여와 함께 이런 일들이 거듭되면서 명나라 관리들의 마음은 움직였고, 결국 황제로부터 고명과 면복을 받아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은 면복 아닌 엉뚱한 옷을 내줌으로써 한 번 더 죽천을 희롱하기도 했다. 즉 그들이 내준 웃옷에 호문(虎紋)과 봉문(鳳紋)이 있을 뿐 용문(龍紋)과 일월(日月)이 없음을 보고 죽천이 문제를 제기하자, 한참동안 죽천을 희롱하다가 그들 가운데 허각로란 자가 “이는 희롱함이라”하고 용포를 내어준 사건이었다. 학식과 경륜을 갖춘 59세의 정사 죽천을 상대로 그들은 어린아이를 상대하듯 희롱한 것이었다.

***

사명을 수행하고 난 뒤 사람들이 용하다는 관상쟁이 장전천(張前川)을 데리고 오자 “인간만사를 처음 태어난 날 부여받았나니/영화와 욕을 그대와 더불어 의논할 마음이 없노라/벼슬이 재상에 이르고 이제 머리가 희어졌으니/오직 공도만을 지켜 신명을 믿노라”고 시를 지어 대꾸한 죽천. 과연 그는 그 순간에도 조선 선비로서의 꼿꼿한 기개를 잃지 않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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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8. 5. 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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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주의, 그 걸러지지 않는 역사의 노폐물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얼마 전 모 대학 교수로부터 들은 이야기 한 토막. 2005년 베이징에서 우리나라 국회의원 두 명이 탈북자 인권문제로 기자회견을 하려다 중국공안 당국으로부터 폭행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함께 있던 우리나라 외교관들도 폭행을 당한 건 물론이다. 정당한 이유 없이 주재국 공권력에 의해 다른 나라 외교관이 폭행을 당한, 상식 이하의 사건이었다. 예상대로 당시 우리 정부는 묵묵부답,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가 피해자인 우리의 인사들을 질책하는 분위기였다. 분개한 어떤 인사가 그 사건을 들어 모 일간지에 칼럼을 썼고, 감명 받은 그 교수는 그 글을 당시 대학원에 재학하던 외국 학생들의 한국어 시험 지문으로 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끼어있던 중국 학생들이 그 내용에 반발하여 시험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듣게 된 그 교수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중국의 저의를 분석한 다음, 잘못 된 처사에 말 한 마디 못 건네고 있는 우리 정부의 처사를 꾸짖은 글이었다. 당사자인 중국의 국민이라면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거나 반성의 빛이라도 보이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학문을 배우러 이 나라를 찾아온 젊은이라면 더더욱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기는커녕 그들은 사무실로 찾아와 기세등등하게 항의를 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안하무인의 불량배로 만들었을까. 요즘 하기 좋은 말로 그들이 ‘자유분방한 인터넷 만능시대의 총아(寵兒)’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중국에 법제화 되어 있다던 ‘독생자녀제(獨生子女制 ; 1가구 1자녀 원칙) 출신의 이른바 ‘소황제(小皇帝)들’이라서 그렇게 된 것일까. 아니다. 바로 그들의 피에 흐르고 있는 ‘중화주의’의 DNA 때문이다.


 역사에도 대사작용(代謝作用)이 있는 법. 새로운 시대사조나 발전적 비전을 받아들여 과거의 노폐물을 걸러내는 작용은 역사에도 필수적이다. 대사작용이 멈춰버린 한-중 외교사의  흐름 속에서 중화주의라는 노폐물을 걸러내지 못한 중국인들은 21세기의 시대정신을 왜곡하며 ‘자민족 우월주의’의 망상에 빠져 있다. 그러니 시험지를 들고 대학원 사무실로 항의 차 몰려온 아이들이나 이번 성화 봉송에서 집단으로 행패를 부린 그들의 행동양식은 한 틀인 셈이다. 그것은 부모나 조상들로부터 대물림 받거나 교육된 의식이거나 행동양식일 뿐이니, 말하자면 '역사의 조건화(conditioning)'라고나 할까. 자극과 자극 또는 자극과 반응 간의 연합을 통해 특정 행동이 유발되거나 학습되어지는 과정이 ‘조건화’다. 한 번도 우리나라와 선린(善隣)의 관계 설정에 나서본 적이 없는 가해자로서의 중국은 우리나라에 대한 ‘지배의식’을 대대로 학습해 물려주고 있으니, 그게 바로 ‘역사의 조건화’다.

 자기 절제를 통해 착한 이웃 혹은 세계시민으로 살아가는 방법과 태도를 교육하는 것이 현대 국가의 금도(襟度)다. 그런데 이번 일로 그들은 양식 있는 교육을 받지 못한 국민임을 만천하에 드러낸 셈이다. 그간 한-중 관계사는 외교적 상식에 비추어 유쾌하지 못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다. 지정학적인 면에서 우리는 중국 내부의 정치적 변동에 늘 영향을 받아야 했고,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중국이 한동안 우리에게 세계를 향한 창문 노릇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왕조가 새로 들어설 때마다 그들은 ‘강-약’과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늘 확인하고자 했고, 우리는 언제나  ‘화(和)/전(戰)’의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했다. 땅이 넓어 물산이 풍부하고, 세계와 인접해 있어 각종 문물이 다양하니 대륙의 변방인 우리로서는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조 내내 사신들을 줄기차게 파견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저들과의 전쟁을 미연에 막아야 했고, 우리에게 부족한 물건이나 문화를 도입해야 했으며, 중국의 상징적인 힘을 국내 정치에 활용해야 했다. 우리가 저들의 속국이나 식민지라서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비록 외교적 생존술이었다 해도, 그것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그릇된 인식을 갖게 한 단초였음이 분명하다. 현실적 이익은 차치하고라도 우리의 사신 파견이 굴욕적인 일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명나라 때의 사신행차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는데, 하물며 우리가 오랑캐라고 질타해온 청나라 때 사신행차들의 굴욕이야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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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천 이덕형의 사행을 기록한 죽천행록>

 


 인조 2년(1624) 기울어져 가던 명나라에 파견한 주청사행(奏請使行)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서인들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에 성공했으나 명나라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능양군을 인조로 옹립하여 반정에 성공한 서인정권이 자신들의 권력을 반석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명나라의 승인이라는 명분이 절실했다. 명나라로부터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받아오는 일이 무엇보다 다급하고 중요한 그들의 사명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주청사행은 국내정치용이었던 것이다. 정사 이덕형(李德泂)이 명나라의 관료들로부터 당한 농락과 시달림은 역사상 강대국인 중국이 약소국 조선에게 가해온 행패의 축소판이다. 예컨대 위대중이란 자는 주청사행을 괴롭힌 대표적 인물이었다. 조선이 후금의 누르하치와 같은 오랑캐 류라는 점, 인조반정은 명분이 전혀 없는 죄악임에도 ‘천자’의 조서를 받아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하는 것은 중국 조정에 대한 기망이라는 점, 누르하치에게 먹힌 요동만 회복하면 저절로 조선의 잘못된 일이 바로잡힐 수 있으므로 그 때까지 책봉의 조서를 내리지 말아야 한다는 점 등을 주장하며 주청사행의 사명 수행을 극력 저지했다. 툭하면 시랑 정도의 관료들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고, 출근하는 그들을 만나고자 추운 겨울날 새벽 길가에서 떨며 기다린 것은 물론 각로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내침을 당하자 섬돌을 붙들고 울며 사정하는 노구(老軀)의 정사는 우리 민족의 일그러진 자화상일 수밖에 없다. 가까스로 고명과 면복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정사를 상대로 마지막까지 농락하는 중국의 관료들이야말로 중화주의의 늪에 빠져 약소국을 능멸하는 불량배들의 전형이었다. 중국과 조선, 두 왕조의 외교를 담당한 것은 주로 우리 쪽에서 파견하던 사행단이었다. 연경까지 대개 비슷한 코스로 두 달 가량 걸리는, 왕복 6천리의 지겨운 길이었다. 500여명의 일행이 도보로 오가던 길. 교통편과 숙박시설이 변변할 리 없었다. 한둔하기 일쑤이던 아랫사람들보단 나았겠으나, 정사·부사·서장관 등 윗사람들이라고 크게 편안할 것도 없었다. 목욕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으며, 제때 옷 갈아입는 일 또한 분에 넘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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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행노정 답사 중 만난 하북성 노룡현의 고려포 역참에서>

 


 동지(冬至)·정조(正朝)·성절(聖節)·천추(千秋) 등 정례 사행단만 가는 게 아니었다. 왕비나 세자의 책봉에도, 왕의 죽음에도, 왕위를 물려주거나 선왕을 추숭할 때도 사신들을 보냈으며, 사은(謝恩)·주청(奏請)·진하(進賀)·진위(陳慰)·진향(進香) 등 임시 사행단은 수시로 파견되었다. 그런 역사가 조선조 내내 이어진 것이다. 중국인들의 뇌리에 박힌 것은 반복되어온 사행 파견의 불평등한 외교관계였다. 그렇게 역사가 왜곡되는 과정에서 청 말 황준헌(黃遵憲)이란 자의 ‘조선책략(朝鮮策略)’같은 글도 나타나게 되었다. “오늘날 조선은 중국 섬기기를 마땅히 예전보다 더욱 힘써서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조선과 우리는 한 집안 같음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그의 언설이야말로 올림픽 성화 봉송에서 난동을 부린 중국 청년들의 ‘한국관(韓國觀)’을 정확히 적시한 내용이다. 멀쩡한 남의 나라 외교관이나 국회의원, 언론사의 특파원을 폭행하고도 정당한 법 집행이라 강변한 중국. 자국의 배가 서해상에서 골든로즈호를 침몰시키고 도주한 사건에 대하여 ‘피해 선박이 구난장비를 갖추지 않아 인명피해가 났다’고 억지 논리를 편 중국. 그것도 모자라 이제 그들은 남의 나라에 몰려와 자신들의 국기를 휘두르며 폭력까지 행사하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은 스포츠 경기장을 제외한 그들의 영토 안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여 우리의 국기를 흔들거나 애국가를 부르도록 내버려 둔 적이 없다. 그런 그들이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수백 명의 유학생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국기를 들고 수도 서울의 한복판을 누비게 만들었으니, 그 배짱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중국을 떠나 너희가 살 수 있느냐’고 큰 소리 치는 철없는 중국의 젊은이를 보며, 그들의 만용과 만행을 가능케 한, 비뚤어진 중화주의가 세계평화의 재앙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다시 묻건대, 이런 비극을 초래한 장본인은 우리인가 아니면 그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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