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카야'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2.09.29 일본을 어찌 할 것인가?
  2. 2007.10.13 조선 통신사와 함께 한 '사행 길 1만리'
글 - 칼럼/단상2012.09.29 16:29

 

 

 

<조선학회 간친회(懇親會)장에서, 앞 줄 왼쪽이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 교수)  발표 후 이자카야(居酒屋)에서 만난 일본 학자들일본 천리시의 정갈한 호텔방

일본을 어찌 할 것인가?

 

 

                                                                                                                                                               백규 

작년 늦가을, 일본 천리대학에서 열린 조선학회에 발표자로 참석했다. 첫날 저녁 이자카야의 선술집에서 몇몇 일본학자들과 어울렸다. 술잔이 오고 가던 중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한국학을 하는 일본인들은 모두 친한파(親韓派)’라고 하자 다른 학자들이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다. 좌중의 유일한 한국인인 나를 의식한 ‘외교적 언사’임을 모르진 않았지만, 그 후에도 ‘친한파’란 말의 여운은 오랫동안 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가끔 ‘친한파’와 ‘지한파(知韓派)’란 용어의 같고 다름을 혼자 헤아려 보며 고개를 갸웃하곤 한다.

 

 그간 우리 언론들은 일본 정치인들에 대하여 툭하면 ‘지한파’란 용어를 갖다 붙이곤 했다. 요즈음 등장하는 정치인들이야 대개 전후(戰後) 세대로서 일본 우익(右翼)의 입맛에 맞게 ‘맞춤식으로 사육(飼育)된 전사(戰士)들’이 대부분이지만, 내가 자랄 때만 해도 나름대로 ‘선이 굵은’ 정치인들이 일본을 이끌어 왔다. 그래서 그랬던가. 그들이 정권을 잡을 때마다 우리 언론들은 그들의 이름 앞에 ‘지한파’란 용어를 붙이기 일쑤였다. 그러나 한-일 양국이 충돌하는 경우 그들이 예외 없이 보여주는 ‘몰역사적(沒歷史的) 파렴치’를 목격하며, 나는 ‘지한파’란 용어의 불순한 함축성을 깨닫게 되었다. 말하자면 ‘친한(親韓)’과 ‘지한(知韓)’은 현격하게 다른 의미를 갖고 있으며, ‘친한’이든 ‘지한’이든 적어도 일본인들과 우리 사이에는 운명적으로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는 사실 또한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총독부의 철권통치를 통해 ‘악랄하다’ 할 정도로 철저하게 우리를 집어삼키고자 한 일본. 우리의 국토나 해양을 이 잡듯 뒤진 일이야 만인 공지의 사실이니 그 극악함은 재삼 반복할 필요 없을 것이다. 최고로 명민한 자국 학자들을 동원하여 우리의 정신문화를 철저히 연구⋅분석해온 저들의 자취를 찾아가다 보면 정말로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 일본 어용학자들은 이 땅의 젊은 학자들을 자신들의 도구로 끌어들여 이른바 ‘식민사관’을 공고히 했고, 지금까지 우리의 정신문화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남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길러낸 어용학자들이나 그들의 후예를 ‘지한파’로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적어도 다른 나라나 민족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정신까지 속속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우리의 내면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지한파’ 일본인들을 어떻게 우리의 친구로, 선린(善隣)으로 가까이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하여 제대로 항변할 줄 아는 강단의 사학자들을 목격하기 어려운 것도 그 원초적인 씨앗이 이제 큰 나무로 자라나 우리의 땅을 뒤덮고 있다는 무서운 증거일 것이다.

 

 우리는 일본이 독도를 갖고 ‘장난을 친다’고 여긴다. 말도 안 되는 일에 억지를 부리는 그들의 꼴이 우리의 눈에는 우습게 보이기 때문일까.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역사 기록들이 꽤 많으니 걱정할 일 없다는 것일까. 그들에게 내 땅을 통째로 빼앗긴 채 40년 가까운 세월을 허송한 바로 직전의 역사는 앞 세대의 일일 뿐, 지금의 나[우리]와는 상관없다고 보기 때문일까.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라. 그들은 수시로 독도에 잽을 날리는 일을 ‘목숨을 건 도박’으로 생각한다. ‘장난을 치는 일’에 목숨을 거는 바보는 없다. ‘목숨을 건 도박’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일본이 독도를 거론할 때마다 한심하고 딱하다는 듯 ‘저 새끼들 또 지랄한다’는 반응을 보이기 일쑤다. 그냥 대꾸하지 않고 넘기다 보면 장난꾼이 제풀에 지쳐 그만 두듯 포기하리라 믿는 것이다. 순진한 한국인들은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일부 극우주의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필요 때문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짓들을 벌인다’고 말하며, 사태를 아주 낙관적으로 보기 일쑤다. 이 이상 더 ‘대책 없이 순진한 낙관주의’가 있을 수 없다. 그들이 언젠가 있을지 모르는 ‘독도대첩(獨島大捷)’을 위해 해⋅공군력을 무한 증강하고 그 칼날을 벼려 온 역사가 얼마인데, 우리들 가운데 일부 불순한 무리들은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만드는 일조차 필사적으로 막으려 한다. ‘평화’를 위해 해군기지를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우리 스스로 무장해제를 해가면서 어떻게 이웃의 강도들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방어한단 말인가.

 

 최근 일본총리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란 자가 앞장서서 ‘독도 분란’와 댜오위다오(釣魚島) 분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그 덕분에 그는 꺼져가던 그의 정치생명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황당하기로 노다에 비해 한 술 더 뜨는 아베신조(安倍晋三)란 자는 최근 자민당의 총재로 선임되었다. 나이를 갖고 따지는 일이야말로 젊은이들이 흔히 비칭으로 사용하는 이른바 ‘꼰대’들의 잘못된 관행이겠지만, 노다는 나와 같은 1957년생(56세), 아베는 약간 위인 1954년생(59세)이다.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겪은 일제시대, 대동아 전쟁, 6⋅25 동란 등을 한 번도 겪지 않고 등장하여 나라의 경영을 맡게 된 첫 세대가 바로 내 또래의 정치인들이다. 말하자면 일본이나 우리나 ‘철따구니 더럽게 없는’ 세대가 바로 우리 또래들이다. 전후에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역사의 노폐물들을 접하며 현실적 이해관계의 잣대나 들이대며 ‘불뚝거리는’ 세대가 바로 지금 나라를 경영한다는 내 또래의 정치인들이다. 제대로 된 철학도 경륜도 갖추지 못하고 감정과 투쟁의 혈기만 넘치는, 바로 그 세대다.

 

그런데, 노다의 정치생명 연장이나 아베의 총재 취임은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는가. 바로 일본 국민들에 의해서다. 그간 순진한 우리나라 언론들은 독도 분란이나 댜오위다오 분란이 일부 일본의 극우세력에 의해 야기된 일이라고 떠들어 댔다.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 언론들의 무책임한 선정성이나 과도한 낙관주의는 참 기네스북에 올려도 될 정도다. 지금도 노다나 아베의 재등장을 일부 극우주의자들의 작품이라고 떠들 자신이 있는가? 아니다. ‘독도도 댜오위다오도 자신들의 것이었으면’ 하는 것이 일본 국민 전체의 마음이라는 것을 이제 깨달아야 한다.

 

그런 가운데 최근 일본의 일부 지성인들이 자국의 위험한 움직임에 대하여 경고의 멘트를 날린 것은 다소 위안이 되는 일이다. 핏발 선 눈으로 미쳐 날뛰는 극우주의자들, 인간의 탈을 쓰고 차마 겉으로 말은 못하면서 ‘우리 것이었으면’ 하는 욕심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대다수 일본 국민들과 달리, 그들이 잘못 된 길을 가고 있음을 지적한 소수 지식인들은 세계 지성사에 아로새겨야 할 ‘보석 같은 존재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소수가 무슨 힘이 있는가. 과연 그들의 양심이나 양식이 거대한 집단의 흐름을 막는 보(洑)가 될 수 있다고 보는지?

 

***

 

 우리의 무책임한 낙관주의는 재빨리 청산되어야 한다. 상대방이 창을 들고 나서면 우리는 두꺼운 방패로 막은 다음 더 강한 창을 마련해야 한다. 제주에도 두어 군데 해군기지를 만들어 두 방향에서 밀려오는 적[일본과 중국]을 막아야 한다. 우리가 도서관 서고에서 찾아낸 옛 문서를 들고 아무리 흔들어도 일본의 독도 침탈은 막을 수 없다. 댜오위다오를 두고 일본과 싸움을 벌이는 중국이 싸움을 걸어올 다음 차례는 우리의 이어도다. ‘역사가 반복된다’는 경험칙만 바라보며 넋을 잃고 앉아 있을 틈이 없다. 오나라의 부차와 월나라의 구천이 남긴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교훈을 우리 스스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중국와 일본에 의해 당한 구한말의 치욕은 바로 오늘의 일로 재현될 수도 있다. <2012. 9. 27.>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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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사진자료2007.10.13 09:10

조선 통신사와 함께 한 '사행 길 1만리'


                                                      조규익(숭실대 교수)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상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아보았다. 미국, 유럽, 중국을 누비고(?) 다니면서도 까짓것 ‘일의대수(一衣帶水)’ 현해탄만 건너면 일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불쑥불쑥 터져 나오는 저들의 역사왜곡과 설쳐대는 우익들의 철없는 망동(妄動)이 지겹기 때문이었을까. 그보다는 어쩌면 그 옛날 지식 사회에 팽배해 있던 ‘조선중화주의’가 내 마음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심심풀이 땅콩’처럼 온천하러, 쇼핑하러 비행기에 몸을 싣는 이웃들의 일본행을 시큰둥하게 여겨오던 차였다. 그러나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다. 변하는 게 세상이라지만, 고전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찾아내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내 입장에서야 ‘변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했다. 동북공정이란 불순한 명분으로 우리네 영광의 역사를  왜곡하기에 바쁜 중국의 행태를 보라. 우리가 바야흐로 몰두하고 있는 연행록의 문명사적 의미에 대한 탐구가 그들의 미개한 역사인식을 바꾸어 놓을지 여부도 불투명한 지금이 아닌가. 그 옛날 조일(朝日) 간의 외교관계에서 혹시 유사한 구조로 전개되던 조중(朝中) 외교 관계의 본질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꽤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현해탄을 건너는 행차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격군들이 ‘어영차’ 노를 젓거나 바람의 힘을 이용하던 통신사 일행의 범선 대신 우람한 여객선 팬스타호에 몸을 의지하여 현해탄을 건넜다. 한여름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저기압성 강풍으로 거대한 선체조차 요람처럼 흔들리는데, 나뭇잎 같았을 당시의 배들이야 오죽했을까. 오리엔테이션에 이은 저녁식사와 여흥의 마술에 잠시 홀린 순간 배는 이미 일본의 내해로 들어와 있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감문교의 난간과 시모노세키의 야경이 넋을 잃게 한다. 아스라한 길이로 섬과 섬을 이은 아카시바시(明石橋)를 뒤로 하고 한참 만에 도달한 오사카 항. 30일 오전 10시. 부산항을 출발한 지 18시간 만이었다.

오사카 항구 인근 식당에서 점심으로 손수 튀겨 먹은 일본식 꼬지의 맛이 일품이었다. 드디어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건너오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발을 디뎠다는 그 옛날 일본의 국제항구 ‘나니와(難波)’에 도착한 것이었다. 건축미학을 자랑하는 오사카 역사박물관과 검푸른 물이 넘실대는 해자(垓字)의 오사카성은 인접해 있었으나, 일정에 쫓긴 나머지 오사카성은 고사하고 박물관 내부조차 제대로 돌아볼 수 없었다. 박물관을 나서자 쓰무라 별원의 통신사 숙박지인 니시혼간지(西本願寺)와 1711년 통신사가 상륙했다던 나니와바시(難波橋), 1764년 스즈끼 덴조에게 피살된 최천종의 위패와 김한중의 묘가 있는 치쿠린지(竹林寺), 조선통신사의 비가 세워진 마쓰시마 공원 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에게 말해줄 것이 많은 듯 치쿠린지의 주지스님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갈 길은 멀고 볼 것도 생각할 것도 많은데 시간이 짧았다. 과연 오사카에서 복잡다단했던 역사의 한 자락이라도 부여잡으려 했던 내 꿈이 푸졌던 것일까. 그저 일본답게 깨끗한 거리의 질서정연한 모습이나 까만 기모노 차림의 아가씨가 파라솔을 붙여 세운 자전거의 페달을 참하게 밟는 모습만이 추억으로 남을 뿐이었다.

저녁 무렵 도착한 교토. 말 그대로 ‘뚜껑 없는 박물관’인 이곳이 에도에서 메이지시대까지의 수도였다지만, 어찌 그리도 옛 모습이 알뜰하게 남았단 말인가. 드넓은 시가지 전체에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고풍이 흘러 넘쳤다. 아쉬운 대로 숙소 근처 이자카야 거리의 선술집에서, 대를 이어내린 일본 서민들의 차분한 낭만을 만날 수 있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우리는 숨차게 통신사의 발자취와 일본의 역사를 훑어 나갔다.  세계문화유산인 빨간색조의 키요미즈테라(淸水寺), 일본인들의 악랄함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귀무덤(耳塚), 우리의 얼이 숨 쉬고 있는 고려미술관, 쇼코쿠지(相國寺), 하치만 별원으로 통신사가 숙박했던 니시혼간지, 조선인 가도, 히코네(彦根)성과 박물관, 소안지(宗安寺), 아메노모리호슈암(雨森芳洲庵), 오가키시 향토관, 오가키성, 젠쇼지(禪昌寺) 등. 모두 조선 통신사들이 스쳐간 역사 유적들이었다.
 
그 옛날 통신사들의 자취를 찾아보려 떠나온 장도(壯途)라지만, 그러나 내게 보이는 것은 역사의 호수에 비친 오늘날의 모습뿐이었다. 어쩌면 그 시절의 통신사들도 그랬으리라. 지엄한 왕명으로 양국의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공무의 사행 길이었지만, 그들이 진짜로 보고 싶었던 것은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다 같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니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웠겠는가.
 
1763년(영조 39) 계미통신사의 삼방 서기로 따라갔던 김인겸. 그 역시 처음엔 일본을 오랑캐로 생각하여 업신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오사카를 보고 묘사하기를 “우리나라 도성 안은/동에서 서에 오기/십리라 하지마는/부귀한 재상들도/백간 집이 금법이오/다 몰속 흙기와를/이었어도 장타는데/장할손 왜놈들은/천간이나 지었으며/그 중에  호부한 놈/구리기와 이어 놓고/황금으로 집을 꾸며/사치키 이상하고/남에서 북에 오기/백리나 거의 하되/여염이 빈 틈 없어/담뿍이 들었으며/한 가운데 낭화강이/남북으로 흘러가니/천하에 이러한 경/또 어디 있단 말고”라 했으며, 나고야(名古屋)를 보고나서는 “육십 리 명호옥을/초경 말에 들어오니/번화하고 장려하기/대판성과 일반일다/밤빛이 어두워서/비록 자세 못 보아도/생치가 번성하여/전답이 고유하고/가사의 사치하기/일로에 제일일다/중원에도 흔치 않으리/우리나라 삼경을/예 비하여 보게 되면/매몰하기 가이없네”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뿐인가. 숙소인 본원사에 들어가면서는 “삼사상을 뫼시고서/본원사로 들어갈새/길을 낀 여염들이/번화 부려하여/아국 종로에서/만 배나 더하도다/발도 걷고 문도 열고/난간도 의지하며/…/그리 많은 사람들이/한 소리를 아니 하고/어린 아이 혹 울면/손으로 입을 막아/못 울게 하는 거동/법령도 엄하도다”라고 그들의 질서의식에 대해서까지 칭찬했다.

왜인들을 ‘금수 같은’ 오랑캐로 생각한 김인겸도 일본을 지나면서 생각을 바꾸었다. 실제로 그들이 사는 마을의 제도나 형편이 썩 훌륭했던 것이다. 소중화의 자존의식에 충일해 있던 김인겸 스스로 쉽게 할 수 없는 말을 아끼지 않으면서 ‘오랑캐 일본’을 추켜세웠다. 화이(華夷) 구분의 대일 의식이 관념에 불과하고 현실적으로는 그들을 멸시해야 할 근거가 없음을 그는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아메노모리호슈가 주장한 ‘성신지교린론(誠信之交隣論)’의 단서를 조선적 버전으로 바꾼 것이라고나 할까.

외교는 나와 남의 상호 소통행위다. 남을 통해 나를 아는 데까지 나가야 비로소 소통은 이루어지는 것. 통신사행에 참여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일본은 남이면서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었다. 통신사행이 거쳐 간 지역들과 우리네 도시들 사이엔 같고 다름이 분명했다. 사람들도 모습은 같았으나, 말이 다르고 드러나는 성격 또한 달랐다. 번화한 도시들에는 한 결 같이 깨끗한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역사의 어느 시기에 그들이 우리를 못 살게 굴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들은 대체 어디에 숨어 있단 말인가.

그 옛날 일본인들은 통신사들을 만날 때마다 글을 받고자 애썼다. 글을 받으려는 일본인들 때문에 통신사행이 괴로움을 겪었음은 두말할 필요 없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손이 곱도록 붓을 휘갈기며 글을 써 주었다. 상호 소통의 취지를 몸소 실천한 그들이었다.

     *  *  *

5박 6일의 여정을 뒤로 하고 다시 발을 디딘 부산항 부두. 비로소 그 옛날 통신사 일행의 고통을 실감할 수 있었다. 건너갈 땐 현해탄이 잠잠했으나, 돌아오는 뱃길을 위협한 태풍 ‘우사기’의 횡포는 대단했다. 주로 격군들의 팔 힘에 의존했을 당시의 배들을 떠올리며 그 시절에 태어나지 않았음을, 더욱이 통신사 행렬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감사해야 할까. 어쨌든 우리가 돌아본 일본 땅은 통신사 공부를 위한, ‘살아있는 텍스트’였다. 놀라운 건 그들의 노력으로 그 텍스트의 분량이 자꾸만 불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글은  <<조선통신사>>(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 2007. 9.) 18호에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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