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20. 7. 5. 23:01

백규서옥의 옥호[은사 연민 이가원 선생님의 유작/연민체]

 

 

                                                                                                                     조규익

2020. 6. 30. 무성산 끝자락 조용한 곳에 그동안 내 환상 속에만 존재해 오던 백규서옥을 드디어 실물로 완공했다. 만 5개월 동안의 큰 역사(役事)였다.^^ 50여 년 전 대여섯 살 무렵, 당시 젊은 부모님께서 나무와 흙으로 지으시던 고향집의 추억이 아련히 남아 있는데, 마음속의 그 그림 위에 '내 집'을 덧 지은 것이다.

 

무성산의 용맥(龍脈)이 흘러내려 혈(穴)을 맺은 곳. 그 안온한 곳을 내 최후의 은거처(隱居處)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간 제법 많은 곳들을 떠돌아다녔고, 정처 없이 그려온 노마드(nomad)의 궤적 속에 내 알량한 내면은 무거운 피로감으로 절어 온 게 사실이다. 마무리해야 할 공부들은 아직도 수두룩한데 세상은 내 뜻처럼 움직여 주지 않고, 내 사고방식이나 삶의 양식은 더 이상 세상의 추이(推移)와 맞지도 않음을 절감한다. 그럴 경우 굴원(屈原)이 그려낸 <어부사(漁父辭)> 속의 어부처럼 방향을 틀어 세상에 맞추거나 조화를 가장한 아부라도 떨어야 마땅한 일이나, 그렇게 하고서야 내 성격에 어찌 단하루인들 맘 편히 살 수 있겠는가. 내가 핍박했고 나를 핍박해온 사회에서 내 불만과 불행의 원인을 찾으려는 게 아니라, 안으로 돌이켜 나를 반성하는 데서 내 자아와 본래 면목을 찾으려는 것이니, 저 석문(釋門)의 이른바 ‘회광반조(廻光返照)’ 정신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내 자아를 다시 찾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허둥대지 않고, 이미 어긋난 세상과 나를 일치시키기 위해 궤변과 아부를 농하려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애당초의 출발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 생각으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올해 그 거사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은 학교로부터 받은 마지막 연구년 덕이었다. 그러나 일을 시작한지 몇 발짝 만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를 강타했다.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집을 짓는 일’이 난감했고 남 보기에도 미안했지만, 내친걸음을 돌이킬 수 없었던 것은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일’은 대안 없는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나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가족들을 태운 채 달리던 내 차의 핸들을 급히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고, 어려운 시기 잠시라도 내게 와서 자신의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나선 장인(匠人)들의 모습이 너무 안타깝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공사 기간 동안 참으로 성실하고 실력 출중하며 성격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담건축사사무소 남궁 담 대표, 임전수 감리사, 김병호 대목장(大木匠), 천명선・이종식・양승만・김수남・김창례 목장(木匠), 이재필 전기장(電氣匠), 고현용 조적장(組積匠), 상량문을 써 주신 서예가 우공(愚工) 이일권 선생, 나를 대신하여 모든 관리업무를 총괄해주신 유수근 사장 등 각 분야의 뛰어난 전문가들과, 레미콘・타일・벽돌・기와・철근・창호・각종 장식 돌・각종 건재・중장비・미장・설비・용접・난방・목공・페인트 등을 제공한 거래처와 도움을 아끼지 않으신 전문가들의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단계마다 노역을 제공해주신 분들의 이름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그 뿐인가.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전봇대를 세우고 전선을 이어주신 전력회사 직원들과 엔지니어들, 인력들의 맛있는 점심을 늘 시간에 맞게 제공함으로써 일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해주신 부흥식당 정연희 사장도 잊을 수 없다.

 

백규서옥의 기념 동판

 

백규서옥을 지으며, ‘집을 짓는 일’이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영혼을 일깨우는 종합예술임을 알게 되었다. 건축주와 장인들의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재료들에 숨결을 불어넣고, 그 숨결이 음표로 바뀌어 생명을 노래하고 춤추는 마술임을 알게 되었다. ‘집을 짓는다’는 건 자기만의 세계와 자아의 존립근거를 마련하는 일이다. 집이 없으면 정주(定住)할 수 없고, 정주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과 공존할 수 없으며, 자신의 변함없는 존재를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동안 백규서옥은 내 환상 속에만 존재해 왔다. 은사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선생님께서 내려주신 이 옥호(屋號)의 이면에는 이상을 품고 노력하여 그것을 현실 속에서 구현해보라는 지엄한 명령이 들어있다. 시류(時流)에 영합하여 세상 사람들과 이해를 다투지 말고, 자신의 흠결을 갈아내기 위해 수양할 것이며, 항상 근원을 추탐(推探)하여 내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보라는 것이 그 명령의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조용한 곳에서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통해 자아의 본래면목을 깨달을 필요가 있었다. 세상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건축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것이 ‘무성산 백규서옥 건축’의 정신적 바탕이다. 바야흐로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다.

 

정면에서 바라본 백규서옥

 

백규서옥 문앞에서 백규

 

 

백규서옥 기념동판 앞에서 포즈를 취한 관계자들[왼쪽부터 임미숙・임효수・대목장 김병호・백규・총관리 유수근・목장 이종식・전기장 이재필・목장 김창례. 중앙에 유 사장의 상추도 함께 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7. 1.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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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얼마 전, 아끼는 후배 하나가 연구실로 찾아왔다. 40을 넘긴 나이. 공부를 할 만큼 했고, 연구력도 인정받고 있는 그였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그는 매우 지친 낯빛이었다. ‘이제 밀려드는 삶의 피곤함을 어쩔 수 없노라’고, 처음으로 그에게서 진한 푸념을 들었다. 지방에 있는 한 명문 공대의 ‘글쓰기’ 계약교수 채용에서 ‘물먹고 돌아온’ 패장의 행색이었으나, 비굴하진 않았다. 내 앞에서 그는 막 사라지려는 자존심의 끝자락이나마 부여잡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의 낙담한 표정과 절망적인 언사들이 화살이 되어 내 심장을 콕콕 찔러댔다. 아, 이 모진 바늘방석이여!


 아무리 어려워도 궁티를 내보이지 않는 게 전통적인 선비들의 법도였고, 그것은 이 땅에 인문정신의 바탕으로 굳어져 내려왔다. 몇몇 존경하는 국문학계의 대선배들은 세상의 잇속으로부터 초연할 줄 알았고, 그런 정신은 지금도 국문학의 바탕에 얼마간 남아있다. 그러나 세상은 많이 변했고, 우리들의 생각도 크게 달라졌다. 선배들은 꺼낼 엄두마저 내지 못하던 푸념을 나 스스로 늘어놓을 수 있게 된 것도 시대가 변한 덕분일까.


 산업화로 치닫던 70년대를 거쳐, 지속적 성장의 기반을 마련하고 신기술 개발과 제품의 고급화를 추구하던 80년대. ‘아랫도리가 찢어지게 가난하여’ 어렵사리 학부와 대학원에서 국문학 공부를 마친 필자는 ‘좋았던 시절’의 막차에 가까스로 뛰어오를 수 있었다. 5공과 6공이 번갈아 정권을 장악한 엄혹하던 시절이었다. 88서울 올림픽이 열렸고, 정보화의 물결은 도도하게 이 땅을 적시며 흘렀다. 경제의 팽창은 해외여행으로 사람들을 들뜨게 했고, 프로 스포츠와 컬러텔레비전의 도입, 성욕 표현의 무한한 자유는 사람들의 손에서 책을 앗아갔다. 미처 전통학문의 굴레를 빠져 나오지 못한 국문학이 유례없는 도전에 부닥치게 된 것이다.


 짧은 기간 우리가 경험한 것은 바로 ‘격변’이었다. 그 물결에 대응하는 국문학자들의 모습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필자 자신이 ‘제대로 공부하는’ 주류의 대열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나손 김동욱, 연민 이가원 등 한 시대를 이끌던 큰 학자들의 어깨 너머로나마 그 분들의 마지막 숨결을 느낀 건 행운이었다. 비록 그 숨결 속에 움트고 있던 새 시대의 기운을 읽어내지는 못하고 말았지만.


 국문학이 지리멸렬해질수록 그 분들의 통합적 사고나 거시적 안목만큼은 꼭 붙들었어야 했는데, 자잘하고 고만고만한 후학들이 힘들여 잡은 건 ‘썩은 동아줄’에 불과했다. ‘학제 간의 연구’나 ‘통섭’을 논하며 그것들이 흡사 하늘에서 떨어진 보배라도 되는 양 대견해하는 모습들을 보며, 좋은 전통을 제대로 잇지 못한 우리의 현실에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는 나날이다.


 사회가 정보화를 담론하고 ‘디지털’만이 살 길이라고 고창(高唱)할수록, 국문학이 그들에게 양질의 원료를 공급하고 떡 부스러기 정도나 얻어먹는데 만족하는 현실은 엄청난 수치다. 한갓 ‘제국주의자들’의 원료 공급기지로나 전락하고 말았으니, 이걸 일컬어 ‘국문학의 식민지화’라 할 수 있을까. 국문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디지털 기술자들이 국문학자들로부터 제공받은 콘텐츠로 만들어낸 제품을 다시 사다가 후학들에게 먹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다. 급기야 ‘국문학과’의 간판을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다는 몇몇 대학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오죽하면 이름까지 바꾸었을까만, 내실까지 바뀌지 않을 경우 간판만 보고 찾아온 어린 학생들이 실망할 건 불을 보듯 뻔하다. 그 다음엔 또 무엇으로 바꿀 것인가.


 고리타분하다 꾸중하겠지만, 공자가 말씀한 ‘정명(正名)’은 이 경우에도 합당하다. ‘이름과 실질의 일치’가 정명인데, ‘국문학’의 어디가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우리 민족의 문학’이 국문학이다. 그 말 속에 우리가 배워야 할 내용과 지켜야 할 책무가 포괄되어 있으니, 국문학은 그저 ‘국문학’일 뿐이다. 몇 해 농사를 지어먹곤 또 다른 산판으로 이동하여 불을 놓는 화전민처럼 쉽게 이름이나 바꾼다고 풍요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변화에 대응하는 ‘철학’이고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끈질긴 탐색이다. 실력 있는 국문학자들에게 밥이 보장되지 않는 문제적 현실. 그 근저에는 상황 판단의 성급함과 가벼움, 그리고 철학의 상실이라는 우리 모두의 병통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은 <교수신문> 2008년 6월 30일자의 '학이사' 칼럼에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