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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6. 11. 30. 20:42

블로그의 빗장을 다시 열며

 

 

 

연구실의 오후. 나른함을 느끼는 찰나, 옛 제자로부터 까톡!’이 왔다. ‘이제 블로그에 글을 안 올리시느냐는 항의성 채근이었다. ,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도 있었구나!

 

한동안 의욕상실증에 걸려 있었다. 대통령의 어이없는 비정(秕政)이 만인의 공분(公憤)을 불러왔고, 촛불의 행렬이 거리를 메우는 나날이다. 촛불을 들고 나가든, 촛불 대신 글을 적든, 무언가를 하는 게 옳았으리라. 그러나 저 휩쓸리는 인파 속에서 내 몸을 곧추세울 자신이 없고, 가슴 속 밑바닥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토해내려 책상에 앉아본들, 큰창자 저 밑에 똬리 튼 토사물을 끌어올릴 자신이 없는 게 요즈음이다.

 

미개구착(未開口錯)!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해봐야 부질없음만 절감할 뿐이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이니, 얼마나 지났을까. 제법 큰 신문들을 통해 어쭙잖은 글 나부랭이들을 써내곤 하던 시절이었다. 사실 나 같은 흙수저에겐 그의 등장 자체가 희망이었다. 그가 기득권층을 다독이며 이 땅 흙수저들의 입지를 다져 나가길 맘속으로 기원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지나치게 말을 잘했고, 말하기를 좋아했다. 가끔은 할 말을 가슴에 묻어두고 있거나 조용히 다른 쪽의 진영을 미소로만 대했어도, 그런 일은 피해갈 수 있었으리라. 아쉬웠다. 그러나 더 후회스러운 것은 나였다. 좀 더 진득하게 애정을 갖고 지둘려야했었다. 깊은 뜻을 헤아리기도 전에 할 말 못할 말을 쏟아내며,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대는 데 일조를 보태고 만 나였다.

 

허탈함이 컸다. 말의 부질없음에서 오는 회한일 것이다. 적어도 밖을 향해서는 한동안 묵언(默言)으로 일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이었다. 성격은 다르지만, 최근 한두 달 사이의 일도 내겐 그와 같은 의미의 사건일 뿐이다. ‘말을 매우 잘함말을 되게 못함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두 사람. 그러나 두 경우 모두 구설(口舌)은 화환지문(禍患之門)’이라는 옛말을 입증하는 사례들일 뿐이다. 노 대통령은 말을 너무 잘해서, 박 대통령은 말을 너무 못해서 모두 화를 자초했다고 한다면, 현상을 너무 단순화시킨 것일까. 내 느낌에 노 대통령은 어느 경우에도 막힘이 없었다. 독서량도 많았다지만, 구변이 청산유수였다. 만약 그 구변의 70%만 발휘했다면, 어땠을까. 반면에 박 대통령은 참 눌변(訥辯)이다. 오죽하면 별로 호감이 안가는 언론인 출신의 전직 국회의원으로부터 베이비토크(baby talk)’란 비아냥조의 놀림마저 받았겠는가. 세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펑퍼짐한 강남아줌마를 비선(秘線)의 스피치라이터로 쓰고 있던 일만 보아도 말을 못하는 데서 오는 콤플렉스가 얼마나 컸었는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촛불의 망망대해에 내던져진 대통령이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그 결과 또한 스스로 감당해야 할 터. 애시당초 감당할 수 없는 자리에 올라, 자신을 망치고 국민을 힘들게 하며 나라를 휘청거리게 만들었으니, 모두를 기만한 그 죄가 매우 크고 무겁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구약성서󰡕 잠언2813)는 성서의 구절. 그가 향해야 할 회개의 광야가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는가. 둔사(遁辭)와 은폐의 덫에 스스로를 가둠으로써, 더 이상 만인을 부끄럽고 참담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내가 닫아걸었던 블로그의 빗장을 열고, 세상과 소통을 재개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두 버리고자 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다는, 자명한 진리를 다시 깨달았기 때문이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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