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1. 22. 17:09

김무성 대표와 정의화 의장의 경우

-‘말의 힘아니면 말의 덫’-

 

 

 

인간의 행동 가운데 정치적이지 않은 게 없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 단 두 사람의 관계에서도 정치적인 계산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가족들 간에도 정치적 긴장이 존재함을 누가 부인할 수 있는가. 그러니 가정과 직장, 각종 모임 등을 넘나들며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회인들이 정치적일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실패로 돌아갔지만, 내가 탈정치의 삶을 실천해보려 한 것도 그 이유다. 처음엔 현실 정치인들과 그들의 말을 무대 위에서 펼치는 배우들의 대사(臺詞)와 연기(演技)’로 받아들이곤 했었다. 매체를 통할 수밖에 없으니 비평가들의 비평안을 거친 연극을 보아온 셈인데, 가끔은 엉성하고 약삭빠른 기자들이나 시사평론가들의 눈이 한심할 때도 적지 않다. 그들이 던져주는 설명들의 행간에서 정치인들의 마음을 읽고자 나름대로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최근 눈여겨 본 두 인물이 김무성 대표와 정의화 의장이다. 두 사람을 보며 과 같은 말의 힘을 발견한다. 애당초 김 대표는 전략공천은 없다고 단언했고, 정 의장은 원칙에 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김 대표의 이른바 오픈 프라이머리가 지금은 상향식 공천으로 바뀌었고 인재 영입은 없다는 부대설명이 붙긴 했지만, ‘상향식 공천에 의한 선거 혁명의 소신은 분명한 것 같다. 국회법에 없는 직권상정은 할 수 없다는 정 의장의 말도 어쩌면 그의 소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원이 되겠다고 찾아온 젊은 인재들을 소개하면서 구차하게 이들이 제 발로 찾아왔다는 김 대표의 구차한 추가멘트나, 시종일관 대통령과 여당의원들의 요구를 강하게 받아치면서 국민들을 의아하게 만드는 정 의장을 보면서 처음에 내뱉은 말에 꽁꽁 묶여 있는 그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정의장의 그런 모습이 '정치인의 신념' 아닌 '필부의 옹고집'으로 보이는 건 혹시 나의 편견일까.  그들이 내세운 이런 말들이 과연 자신들의 철학이나 신념에서 나온 것일까.

 

매체들이 보도하는 것처럼, 김 대표는 전략공천에 관한 자신의 트라우마와 대통령의 공천 개입 가능성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대권의 꿈을 갖고 있는 그로서는 의회권력의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자신을 경계하는 대통령의 보이지 않는 한 수가 두려울 것이다. 그래서 첫판부터 전략공천은 없다단언(斷言)’으로 못을 박았으리라. 또 다른 입장에서 대통령과 거리를 두고 있는 정 의장은 매체들의 표현대로 사사건건 어깃장을 놓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원칙대로 한다는 말만큼은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첫말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증 비슷한 것이다. 정 의장 자신의 고집을 통해 이익을 얻는 야당이나 일부 국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권으로 가는 수레를 마련하고자 한다고 분석하는 일부 매체들도 있는데,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간은 그의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초시간적인 실체를 갖고 있지 않다. 그의 육체도 심리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이며, 따라서 초시간적인 실체로서의 동일성은 없다. 따라서 인간이 그의 자연적인 상태에 있다면, '오늘의 나'는 벌써 '내일의 나'가 아니다. 이러한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오늘과 내일 사이에 동일성이 없기 때문에 미래를 위한 약속은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약속을 하고 지키고 그 약속을 믿곤 한다. 이것은 인간이 그의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없는 초시간적인 실체를, 약속을 지키고 그의 입에서 떨어진 말에 책임을 지는 윤리적인 노력을 통해서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약속의 말을 지키는 것은 인간이 그의 자연적인 상태의 필연적인 흐름을 초월한 불변의 실체를 이룩하고 그의 윤리적인 인격의 동일성을 지키는 것이 된다.”

 

이규호 선생의 저서 <<말의 힘>>에 설명된 말의 힘이다. ‘남자가 말을 한 번 내뱉었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야한다는 것은 그가 내 뱉은 말의 순수성, 정당성 혹은 윤리성이 담보되는 경우다. 어떤 불순한 목적이 전제되었을 경우 그 말은 불순할 수밖에 없으며, 불순한 말을 지키기 위해 고집을 부리는 것은 공동체의 재앙이다. 말이 진정한 힘을 지니려면 일종의 초월적 윤리성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이규호 선생의 설명이다.

 

김 대표나 정 의장의 말이나 고집이 과연 순수하고 정당하며 선한 윤리의식으로부터 나왔다고 할 수 있는가. 그 두 사람에게 과연 불변의 실체를 담보하며 윤리적 인격의 동일성을 지키는 보루일 수 있는가. 지금 두 사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관찰이 왜 이렇게 부정적이고 회의적인가. 차라리 애당초 내뱉은 말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는 즉시 잘못 되었음을 시인하는 게 정답이다. 명분 없이, 혹은 어떤 의도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첫말을 지키려 한다면, 필연코 둔사(遁思)와 꼼수를 쓸 수밖에 없다. 둔사와 꼼수를 반복하다간 필연코 퇴로 없는 덫을 만나, 꼼짝없이 걸려들게 되어 있다.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두 분은 이쯤 깨달을 필요가 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7. 8. 14:04
정치인들도 교육에 동참하라!

이른바 ‘잠룡(潛龍)’들이 뛰어나와 하나밖에 없는 승천(昇天)의 티켓을 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지금. 온갖 술수가 난무하여 혼란스러운 ‘2007년 6월의 공간’을 뜻 있는 사람들은 난세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모두가 ‘정치’를 탓한다. 정치만 있고, 양식(良識)에 바탕을 둔 도덕이나 인간미가 상실되었다 한다. 제대로 된 정치나 정치인을 만나본 적이 없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정(人情)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한비자(韓非子)는 말했다. 인정이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마음, 또는 생각’이 인지상정이다. 물고 뜯으며 싸우는 것은 ‘나만 깨끗하고 너는 더럽다’는 고집스런 편견을 대전제로 한다. 그래서 제 허물은 덮어두고 남의 흠집만 캐내어 세상에 광고하기 바쁘다. 남의 흠은 작은 것이라도 크게 부풀리고 자신의 것은 감추면서 남을 깎아내리려 한다. 이 대열에 후보들은 물론 전·현직 대통령, 국회의원 등 이른바 정치인들이 뒤질세라 끼어들고 있다.

정치적 권위가 형성되는 핵심은 정책 결정자 또는 기관이 정통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정치집단이 정통성을 확보하려면 사회의 일반적 윤리를 바탕으로 정치집단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옳다는 관념이 국민들 사이에 보편화 되어야 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베버의 설명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윤리를 외면하고 술수로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일에만 몰두하는 우리의 현실은 비극이요 재앙이다.

지더라도 멋지게 지는 모습, 비록 적이라도 장점을 칭찬해주는 금도(襟度)가 실종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내뱉는 오물 같은 증오의 언사들이야말로 그들의 적만 듣고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져 있음이 분명하다.

이쯤 우리의 걱정을 털어놓아보자. 우리의 교육이 걱정이다. 어른들보다 훨씬 영악하게 세상을 배워가는 것이 이 땅의 2세들이다. 그들은 발달된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의 힘으로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의 언행을 거의 실시간으로 접한다. 강단의 선생들이 내뱉는 고답적인 말보다 전투적이고 상스러운 정치인들의 말을 훨씬 빨리 받아들인다.

지금의 선생들은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에 대해 일종의 열등감을 갖고 있다. 선생의 가르침보다 매스 미디어의 총아들이 보여주는 언행이 훨씬 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있는 사실 없는 사실 까발리고 부풀려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려는 정치인들에게도 자식들은 있을 것이다.

한 점 흠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검증의 당위성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라도 검증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자는 그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 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남을 검증하려면 철저한 자기검증이 우선되어야 한다. 정치인들이 자기검증만 제대로 한다면 굳이 남을 검증할 필요 없고, 그에 따라 ‘네거티브 전략’이란 저급한 용어가 등장할 필요도 없다. 네거티브 전략은 우리 사회의 신뢰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린다. 그 결과는 교육의 황폐화로 이어진다.

아이들은 그저 폐쇄된 학교 울타리 안에서 교과서만 읽는 로봇들이 아니다. 어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복사하듯’ 배운다. 무슨 거창한 교육정책을 세워주길 기대할 만큼 정치인들의 자질을 믿는 우리도 아니다. 다만 평균적인 윤리의식이나 양식 위에서 자신의 생각을 펼치되, 자신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 자식들의 교과서로 수용된다는 사실만이라도 명심해달라는 것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5. 7. 13:08
 

교수들은 담론 생산의 주체로 거듭 나야 한다


                                                                                             조규익

제1회 숭실 인문학 포럼의 성공을 보면서 대학의 본질과 가능성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고자 한다. 진부한 말이지만, 대학은 교육과 연구의 중심이고 그 핵심에 교수들이 있다.


해당 분야의 체계적인 지식과 창조적인 능력을 지녀야 전문가가 될 수 있다면, 대부분의 교수들은 1차적으로 전공분야의 전문가들이다. 그러나 교수들이 전공의 협소한 분야에 갇혀 좀 더 넓은 세계나 현실을 보지 못할 때, 그 지식이나 창조력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상아탑 속의 존재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시대는 더 이상 아니다. 전공분야에 대한 탐구와 함께 세상과의 소통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교수들이 고도의 윤리의식과 해박한 전문가적 식견을 통해 공동체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데 일조하길 바란다. 그러나 현재의 교수집단은 다원화 된 현실 속에서 왜소한 지식인 군상으로 전락되어 가고 있다. 초라한 지식상(知識商)들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눈초리는 차갑다. 그들로부터 아무런 비전도, 철학도, 노력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번 교수집단에 들어가고 나면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한 모습이나 보여주기 일쑤인 점은 더욱 한심한 노릇이다.


그러나 교수집단도 기회와 동기만 주어진다면, 사회의 정론(正論)을 생산하고 주도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이번 포럼은 매우 유익한 기회였다. 최근 기독교에 대한 김용옥씨의 비판적 주장에 많은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반론이나 비판이 없었던 것은 우리 지식사회에 대한 사망선고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기라성 같은 기독교 대학들이 포진하고 있음에도 어느 대학 하나 나서서 그의 문제적 논리에 반박을 가하지 못하는 현실을 목도하며 우리는 미래에 대한 일종의 ‘공포’를 경험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숭실 인문학 포럼을 통해 김용옥 논리의 시시비비를 가려 줌으로써 학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 올바른 판단의 자료를 제공해 준 것은 당사자 김회권 교수를 포함 숭실의 인문학자들이 향후 적극적인 담론 생산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쾌거였다.


이제부터라도 대학교수들은 전공책의 행간에 현미경이나 들이대는 ‘골방의 샌님’ 신세를 청산하고 사회와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가치 있는 담론을 생산해야 한다. 그것만이 자신들의 전공을 살리고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며 대학을 살리는 길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0.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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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한 검증에 간판 중시 ‘지식범죄의 온상’ 돼버려

최근 며칠째 가짜박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사건은 곪을 대로 곪은 우리 지식사회의 아름답지 못한 이면을 만천하에 노출시킨, 일종의 ‘테러’다. 피터 드러커의 설명처럼 지식 노동자가 권력을 갖는 사회가 지식사회라면 이 땅의 총체적 부패는 지식인들로부터 연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추악한 테러의 무대가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을 넘어 러시아와 필리핀까지 번졌으니 다시 어느 나라가 이 행각의 새로운 현장으로 연루될지 자못 불안하기만 하다. 한국판 지식 범죄의 국제화라고나 할까. 얼마 전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했던 우리 학자들의 표절사건, 온 국민을 망연자실하게 만든 ‘황우석 사건’ 등과 함께 이번의 가짜박사 사건으로 우리의 지식사회는 결정적인 카운터펀치를 맞은 셈이다. 우리나라의 국제 경쟁력이 하락 국면으로 접어든 것도 국가 발전을 선도해야 할 지식사회의 휘청거림과 무관치 않다.
지금 우리는 가짜박사 학위를 남발한 외국의 대학들을 나무랄 처지가 아니다. 그런 대학들에서 사온 가짜 학위로 학술진흥재단에 학위등록을 하고, 어엿한 대학의 교수직에까지 올랐으니 문제의 근원을 우리에게서 찾는 것이 옳다. 가짜박사를 교수로 채용할 정도로 진짜와 가짜도 걸러내지 못한 수준이 우리 대학들의 한심한 실태다.
 
이런 현상은 지식사회의 마비된 양식, 국가의 학문정책 부재, 대학개혁의 실패 등이 어우러진 결과다. 지금 우리나라 대학들은 개혁의 열풍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하드웨어의 치장에만 주력할 뿐 정작 개혁해야 할 본질적 대상은 초점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개혁의 목적은 대학정신의 정립에 두어야 하고, 그에 걸맞은 제도의 신설이나 보완이 그 구체적인 방향이어야 한다.

세계에서 우리나라는 박사학위 보유자 비율로 선두권에 서 있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검증 시스템이 없거나 부실한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우리나라 대학들이 필연적으로 저질박사들의 온상 혹은 가짜박사들의 은신처가 되기에 딱 알맞은 곳임을 보여주는 점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손쉽게 입수할 수 있는 지식정보가 널려 있고 표절행위 또한 여전한데, 오히려 논문의 심사단계는 전보다 간소화되고 있다. 적으면 한두 번, 많아야 서너 번의 심사가 박사논문 검증의 전부다. 박사 학위의 양산체제에 온정주의까지 가세하여, 저질논문을 걸러내기란 더욱 어렵다.

지금 기업들은 대학의 박사학위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학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관들은 반드시 박사학위를 요구한다. 아무리 실력이 출중하고 연구업적이 뛰어나도 박사학위가 없으면 아예 서류조차 낼 수 없다. 그러나 정작 채용 과정에서는 가짜박사를 걸러내지 못한다.

구태의연한 검증 시스템과 지식사회의 낮은 윤리의식, 실력보다 학위를 중시하는 인력 수요자들의 무감각이 지속되는 한 가짜박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가짜박사들은 죽은 지식사회에 기생하기 마련이다. 지식사회의 핵심인 교수들에게 보다 높은 수준의 윤리의식과 성실한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 발표된 서울대의 교수윤리헌장은 늦었지만 적절하다. 지식사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진리다. <2006. 3. 27.>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