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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8.02 책 도둑
  2. 2009.03.09 스페인 기행 7-4 : 스페인의 보석, 바르셀로나와 가우디 1
글 - 칼럼/단상2016. 8. 2. 16:54

책 도둑

 

 

 

 

 

 

최근 긴요한 책 한 권을 샀다. 한 달 평균 두어 번씩 여러 권의 책들을 사지만, 이처럼 긴요한 책은 모처럼이다. 고전 자료들을 읽다가 풍수지리학 용어만 나오면 그 난해함에 의욕이 다운되곤 하던 터. 먼 지방의 서점에서 그에 관한 사전을 팔고 있었다. 대금을 지불한지 하루 만에 책이 배달되어 왔다. 만져보고 넘겨보니 좋았다. 알아야 할 것들이 빠짐없어 좋았다. 늙은 아빠, 늦둥이 어루만지듯 그 무거운 걸 집으로 들고 가서도 사랑스러워했다.

 

집에서 다시 학교로 옮겨 놓은 지 이틀. 그만 책이 사라졌다. 누군가 집어간 것이다. 가슴이 텅 비는 느낌이었다. 삼엄한 경비 시스템! 엘리베이터 앞엔 카메라, 문에는 세콤이란 게 걸려 있는데... 누구였을까. 내가 방심한 채 문을 열어놓는 순간들을 되짚어 보았다. 가끔 화장실에 다녀오는 5, 세면실에 가서 설거지하는 5~10분이 전부인데. 그렇다면 그는 그 틈을 노린 것일까. 출입문 바로 앞의 티테이블에 그 책은 놓여 있었다. 사실 가끔씩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내가 이 책을 사랑하면 남들도 사랑할 수 있을 텐데, 괜찮을까? 그 걱정이 현실화된 것이었다. 열린 문으로 한 발짝만 들여놓으면 책을 안을 수 있었다. 그러니 누굴 원망하랴? 내가 바보였다.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나만큼 누군가도 그 책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는 점에 안도하기로 했다. 그저 정가보다 몇 푼 낮춰 팔아버릴 책장사만 아니라면 다행이리라. 불현 듯 책 도둑(The Book Thief)’이란 소설이 생각났다. 영화로도 나왔으니, 책은 꽤 많이 팔렸을 것이다. 마커스 주삭(Markus Zusak)의 작품. 2005년에 첫 출간되었고, 브라이언 퍼시벌(Brian Percival) 감독의 영화는 2013년에 나왔다. 세상에! 도둑을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낸 예술이 있을까. 나찌 치하 독일에서 남동생과 함께 입양된 소녀 리젤의 이야기다. 동생은 죽고, 숨어 지내던 유대인 청년 맥스와 교감하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고립된 맥스에게 책을 구해다 주고 세상일을 들려주는 리젤. 그러니 그 책 도둑은 더 이상 도둑이 아니다. 책은 영혼이고 도둑은 영혼의 소유자 혹은 매개자일 뿐. ‘훔친 책을 읽는 책 도둑은 아름다운 연금술사다. 도둑질을 통해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그들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꿔놓지 않는가. 내 책을 가져간 이가 눈꼽 만큼이라도 책 도둑’만 같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책이 짐이어서 아무도 책을 원하지 않는 줄로만 알았다. 책을 내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쉽사리 증정 못하는 이유다. 그래서 주기 전에 조심스레묻곤 한다. “책 한 권을 냈는데, 혹시 한 부 증정해도 될까요?”라고. 혹시 고맙지만, 필요 없어요!”란 대답이 나올까 두려워 조심스레묻곤 한다. 매몰찬 거절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표정에서 나는 상대방의 마음들을 읽는다. “, 또 귀찮은 짐이 하나 생겼구나!”라는 '말 없는 말'을. 그래서 그간 연구실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지냈는지 모른다. ‘그냥 집어가라 한들 누가 집어갈 것이냐, 이 무거운 짐들을이란 심정으로...

 

두어 해 전 어떤 교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연구실을 정리하는데, 조 교수님의 책이 하나 나왔어요. 그냥 버릴까 하다가, 돌려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전화 드리는 겁니다.” 무언가가 뒷머리를 땅 치고 갔다. “그럼 학과 사무실로 보내주세요.” 간신히 대답한 뒤 한 시간 가량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처음의 야속했던 마음은 고마움으로 변했다. 내게 연락도 없이 폐기처분했다면, 쓰레기장에서 중고서적상으로 넘어가 뭇 사람들의 손때나 묻히는 광경이 우연히 내 눈에 뜨였다면... 아찔해지는 순간이었다.

 

아픈 추억 하나 더. 지난봄의 일이다. 완주군청에서 특강을 하게 되었다. 완주군과 합작으로 삼례에 책 마을을 꾸미고 있던 호산방 박대헌 사장의 부탁이었다. 책들의 계곡에서 그와 환담을 나누는데, 작업 중이던 직원 한 사람이 눈에 익은 책 한 권을 골라 내 눈 앞에 디밀었다. “교수님이 사인하신 책이네요!” 내 첫 수필집(<<꽁보리밥 만세>>)이었다. 그는 호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눈을 가리고 말았다. 숭실에서의 병아리 교수 시절. 눈에 뜨이는 몇몇 학생들이 있었다. 증정 대상은 그 가운데 한 녀석이었다. “책이란 원래 그런 거예요!” 내 표정을 살피던 박 사장의 위로 멘트였다. “그렇겠지요!” 나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가슴은 내내 아려왔다. 어쭙잖은 책들의 저자가 받을만한 마음의 상처였다.

 

***

 

방금, 내 연락을 받은 서점에서 다시 보낸 그 사전을 받았다. “누군가 집어갔어요!”라고, 어제 그 서점 주인에게 전화하자, 그 책 좋은 줄 아는 사람이군요. 재고는 있어요!” 라고 껄껄 웃으며 대꾸하고는 득달같이 보낸 것이다. 다시 받은 책은 누군가 집어간 그 책보다 가벼웠다. 몇 줌의 영혼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텅 빈 가슴의 한 구석이나마 채울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3. 9. 01:20


 아쉬움 속에 구엘공원을 떠난 우리는 길쭉한 수세미 모양의 수도국(아그바르) 건물이 멀리 바라보이는 도로를 달려 몬주익(Montjuïc)에 도착했다. ‘몬주익’이란 원래 ‘유대인들이 살던 언덕’에서 나온 말로 복잡한 역사적 맥락이 얽힌 곳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명 속에는 역사의 우여곡절이 배어 있기 마련. 이곳에서도 유태인 핍박의 역사가 있었던 모양이나 자세한 건 생략하기로 한다.

 우리는 스페인 광장을 출발, 무역 전시장과 분수대, 카딸루냐 미술관을 거쳐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렸던 주경기장에 도착했다. 주경기장은 산 조르디 스포츠관(Palau d'Esorts Sant Jordi), 기념공원 등과 함께 있었고, 올림픽 기념관은 주경기장 뒤편에 있었다. 주경기장 도로변엔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의 모습이 석판에 부조되어 있어 감회를 새롭게 했다. 주경기장의 현재 이름은 루이스 콤파니스 올림픽 경기장 (Estadi Olímpic Lluís Companys). 1929년의 엑스포를 대비하여 1927년에 최초로 만들어진 이 경기장은 1936년 하계 올림픽을 위해 보수되었고, 1992년 하계 올림픽의 주경기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1989년 재보수되었다. 경기장 수용 인원은 7만명. 체육경기 뿐 아니라 가수들의 콘서트장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롤링스톤즈, 티나터너, 마돈나, 본조비 등은 그 대표적인 가수들이다. 

 주경기장 뒤쪽으로 걸어 올라간 자리에 몬주익 성이 있는데, 그곳에 들어가자 군사박물관이 있었고, 발 아래로 바르셀로나 시가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과연 과거와 현재가 적절히 배합되어 있는 바르셀로나의 모습은 윤택과 풍요 그 자체였다.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바르셀로나. 그 속에서 예술과 문화, 전통과 현대를 함께 호흡하고 있는 시민들의 여유가 나그네의 부러움을 자아냈다. 

  ***

 언덕을 내려온 우리는 람불라스 거리(Las Ramblas)를 걸었다. 콜럼버스 기념탑에서부터 까딸루냐 광장에 이르는 널찍한 보도(步道).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길 양쪽으로 늘어서 있고, 길바닥엔 돌이 깔려 있었다. 길옆으로 ‘움직이는 동상’이라 불리는, 꽤 많은 수의 거리공연자들이 갖가지 행색으로 나그네의 눈길을 끌었다. 꽃 가게, 신문이나 잡지의 가판대들이 줄지어 있고, 거리 양쪽에는 각종 레스토랑, 숙박시설, 선물가게, 옷 가게 등이 즐비했다. 람블라스를 걷다가 옆의 상가로 들어가니 어물전, 식품점, 적나라한 고깃집, 반찬가게 등이 한 골목 그득했다. 껍질 벗긴 염소머리, 토막 난 생선, 소세지, 각종 야채 등 우리나라 재래시장에서 봄직한 음식의 1차 재료들이 진열대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람블라스 거리를 부랴부랴 빠져나온 우리는 어둑발이 진 치고 있는 거리를 뚫고 가우디의 또 다른 작품 카사 밀라(Casa Mila)를 찾았다. ‘라 페드레라(La Pedrera, 채석장이란 뜻)’라고도 불리는 이 고품격 맨션은 바르셀로나 중심가인 그라시아의 거리를 마주보고 있었다. 각 층 4 가구, 가구 당 400㎡의 공간을 갖고 있는 이 저택은 가우디의 예의 컨셉대로 꾸불텅거리는 외관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 보아도 ‘기괴한 미학’이라 할 수 있는데 한 세기 전엔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니, 이 작업 후에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는 말도 결코 과장이 아니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

 바르셀로나는 넓고 깊었다. 단순히 물리적인 면적이 아니라 문화와 역사, 아름다움이 어울려 빚어내는 도시의 정신적 깊이와 넓이가 그렇다는 것이다. 가우디가 차지하는 면적이 그리 넓지는 않았으나, 가우디와 바르셀로나가 동일시되는 것은 그의 미학이 범상치 않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바르셀로나의 모든 것들을 대충 지나쳤으면서도 가우디의 모든 것을 보기 위해 한사코 애를 쓴 이유도 그 점에 있었다.


 스페인을 정리하기 위해 이제 우리는 마드리드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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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로 부터 몬주익 경기장, 몬주익 경기장, 몬주익 경기장 밖 대한민국 기념물, 달리는 황영조, 몬주익 경기장 성화대, 몬주익 경기장 뒤 몬주익 성, 몬주익 성 위에서 바라본 바르셀로나 시내, 몬주익 경기장 옆 고고학박물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