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1. 6. 02:45

 

 


촉토 내셔널 히스토리 뮤지엄에서 63번과 270번 하이웨이를 번갈아 타며 두 시간 이상을 달려 세미놀 족의 본거지인 위워카에 도착했다.

 

 


세미놀 네이션 뮤지엄(Seminole Nation Museum)

 

 


오클라호마 주에 강제이주된 39개 인디언 종족의 고향들[세미놀 족의 고향은 플로리다였음]

 

 


세미놀 네이션 뮤지엄 문 앞에서 만난 세미놀 족 전사의 두상

 

 

 

 

놀라운 세미놀(Seminole) 인디언들(1)

 

 

 

 

세미놀 족을 만난 것은 참으로 우연이고 행운이었다. 브라이언 군의 졸업 축하 파티에 참석했을 때, 그의 미국인 친구 한 사람에게 고향을 물었더니 세미뇰이라 했다. ‘이란 발음에 혹시 스패니쉬 계통인가 하고 물었더니, ‘인디언 부족 이름에서 온 것이라고 했다. 그날 밤으로 그것이 인디언 부족 이름이자 그 부족의 네이션이 있는 도시의 카운티 이름임을 확인하게 되었고, 스펠 ‘Seminole’세미뇰로 들은 것은 내 귀의 착각이었던 듯, 다른 미국인들에게 다시 물으니 모두 세미놀이라고 했다. 세미놀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치카샤와 촉토를 거쳐 드디어 그 실체를 육안으로 보게 되었다. 세미놀이 그동안 돌아 본 체로키치카샤촉토 등과, 앞으로 돌아 볼 크리크(Creek)와 함께 개화된 다섯 종족[Five Civilized Tribes]’을 이룬다고 하니, 적잖은 호기심이 발동된 것도 사실이었다.

 

'촉토 내셔널 히스토리컬 뮤지엄(Choctaw National Historical Museum)'을 나선 우리는 키아미치 산간을 꿰뚫는 63, 270번 하이웨이를 번갈아 타고 점심을 훌쩍 넘긴 무렵에서야 세미놀 카운티의 위워카(Wewoka) 시티에 도착했다. 뭔가 잔뜩 쏟아질 것만 같은 우중충한 날씨에 퇴락한 시가지의 모습이 겹치니 분위기가 음산했다. 다운타운엔 빈 상가들이 즐비했고, 페인트가 벗겨져 초라해 보이는 집들도 부지기수였다. 다른 지역의 상당수 중소도시들에서 이미 목격한 것처럼 이 도시도 기름기가 빠져 있었다. 아마도 원유의 고갈로 지역경기가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기가 좋은 대도시로 사람들이 빠져나가 텅 빈 집들은 사람의 온기를 쏘이지 못한 채 삭아들고 있었다. 살아있는 레스토랑 한 군데를 간신히 찾아내 시장기를 지우고, ‘세미놀 네이션 뮤지엄(Seminole Nation Museum)’에 갔다. 아담하고 아름다운 건물. 세미놀 사람들의 미학이 느껴지는 건축이었다.

 

연방정부에 의해 인정된, 미국 전역의 세미놀 족 집거지는 세 군데로 알려져 있다. 오클라호마 주의 세미놀 네이션, 플로리다의 세미놀 트라이브, 플로리다의 미코수키(Miccosukee) 트라이브가 그것들이다. 물론 세미놀 족의 원 고향은 플로리다이며, 2차 세미놀 전쟁 이후 8백명의 흑인 세미놀 인들을 따라 플로리다에서 인디언 거주구역으로 강제 이주되어 온 3천명 세미놀 인들의 후예들이 호클라호마 주에 살고 있다. 따라서 오클라호마의 세미놀 네이션은 세 군데 집거지들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우리가 찾아온 이곳 위워카 시티가 바로 오클라호마 세미놀 네이션의 본부가 있는 곳인데, 현재 등록 인원 18,800명 가운데 대략 13,500여명이 오클라호마 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세미놀 카운티에는 대략 5,3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1936년 인디언 재건법이 공표되면서 세미놀 족은 그들의 정부를 되살려 내기 시작했으며, 부족의 사법 관할지역 또한 그들의 다양한 자산들이 포함되어 있는 세미놀 카운티를 카버하게 되었다고 한다. 플로리다에 남아있던 수백 명의 세미놀 인들도 3차 세미놀 전쟁을 겪으면서도 미국 정부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드디어 평화를 찾게 되었으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후예들이 연방정부로부터 인정을 받는 두 개의 세미놀 트라이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들 조직된 세미놀 인들과 조직되지 않은 부족원들이 함께 1823년 미국 정부가 강제로 뺏어간 24백만 에이커의 땅에 대하여 1976년 기준으로 16백만 달러 가치의 정착지를 받아냄으로써 분쟁은 완결된 셈이다. 따라서 현재 세미놀 족이 오클라호마 한 군데와 플로리다 두 군데 등 세 지역으로 나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세미놀 큐레이터의 설명에 따르면, 세미놀 인들의 말은 무스코기 어[Muskogean Language]에 속하는데, 전통적으로 서로 통하지 않는 두 말, 즉 미카수키(Mikasuki)와 크리크(Creek)어를 동시에 사용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크리크가 정치사회적 측면의 지배언어였으므로, 미카수기 어를 쓰는 사람들도 크리크 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다. 조사 결과 2000년대 초까지 부족원의 25% 정도가 크리크와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나머지는 영어만 쓰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현재 오클라호마에 있는 네이션의 대부분 세미놀 인들은 영어를 제1언어로 쓰고 있으나, 부족 차원에서 전통적인 크리크 어를 살려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한다.

 

다른 인디언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도 사회구조로서 가장 기본적인 가족 바로 위에 클랜(Clan)이란 단위가 있었다. 아주 오랜 옛날에 어떤 동물이나 초자연적 정령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고난을 견뎌 낸 것은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혈통으로 연결되는 사람들이 특정 동물의 정령들과 연관을 맺게 된 것이다. 치카샤 네이션에서도 촉토 네이션에서도 누구나 특정 클랜에 속해 있고, 너구리악어 등 어떤 동물이 자기 클랜의 상징동물인지 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점은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불문(不文)의 제도 아래, 세미놀의 성인들은 자기네 부모가 속한 클랜들 밖에서 결혼상대를 찾아야 할 의무를 갖고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동성동본 혼인금지와 같은 차원의 제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근친혼을 금함으로써 종족을 건강하고 우수하게 유지하려는 지혜의 발로라고 할 수 있었다.

 

***

 

문을 열고 뮤지엄에 들어가니 실제 모습대로 전시된 세미놀 족의 전통 생활양식이 눈을 끌었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주방과 거실이 함께 붙어 있었는데, 설명을 위해 그 옆에 붙여놓은 클레이(Clay MacCauley)의 말이 흥미로웠다.

 

세미놀의 가정에 들어가면 누구나 사람들이 모이는 중심에 모닥불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곳은 요리가 준비되는 장소이고, 가족과 그들의 친구들이 사교를 나누는 장소이며, 스토리가 만들어지고 이야기되는 장소다.”

 

지금까지 만나본 모든 인디언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세미놀 족도 가족 간의 유대나 사랑을 중시한다는 점과 모계사회라 할 정도로 여성의 발언권이나 힘이 절대적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모닥불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수프와 그 주위에 앉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들, 다 된 음식을 각자에게 덜어주는 주부 등 익히 보는 가족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이 뮤지엄의 첫 공간에 제시되어 있었다. 아마도 세미놀 인들은 끈끈한 가족공동체의 전통을 외부 손님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그 뿐 아니었다. 전통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활사 자료들과 예술품 들이 적절하게 분류, 전시되고 있었다.

 


 

각 부족의 구역이 할당된 시기와 점유지의 성격

 


조정이 끝난 1907년까지 각 부족의 점유지 현황

 

 


세미놀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초기 네이션 깃발

 

 


오클라호마 주 내 39개 인디언 부족의 분포 지역 리스트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2. 00:48

 

 

 

 

교육으로 일어선 촉토 족의 어제와 내일(2)

 

 

 

 
                                                   포트 토우손 표지판

 



                                  포트 토우손 관리 및 소 전시실

 



                            포트 토우손 내 뮤지엄.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닫혀 있었음.

 



                         포트 토우손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원

 



     포트 토우손이 레드 리버에 배를 띄우던 출발점이었음을 나타내는 유물들

 



                     남군이 북군에게 최종적으로 항복한 독스빌의 유물들

 


남부연합군을 이끌던 체로키 인디언 출신의 스탠드 웨이티 준장이 항복한 사실을 기념한 동판 

 



                           Peter Pitchlynn, 당시 촉토 족 대표[Principal Chief]

 



                               당시 남부연합군을 이끌던, 체로키 족 출신의 Stand Watie 장군

 

 

듀랭을 떠난 우리는 70번 하이웨이를 타고 촉토 카운티를 지나 아이다벨(Idabel)로 향했고, 중간에 포트 토우손(Fort Towson)을 들렀다. 아이다벨에서 1박을 한 다음 날 다운타운 바깥의 레드 리버 뮤지엄(Museum of the Red River)과 브로컨 바우(Broken Bow), 휴고(Hugo)의 휠락아카데미(Wheelock Academy)를 거쳐 투스카호마(Tuskahoma)의 촉토 내셔널 뮤지엄(Choctaw National Museum)까지 가야 하는 대장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까지 촉토 장정을 마쳐야 느긋한 마음으로 위워카(Wewoka)에 있는 세미놀 내셔널 뮤지엄(Seminole National Museum)을 들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포트 토우손은 휴고로부터 11마일쯤 동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 인구 600여명의 소도시로서 그 외곽에 옛날 진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원래 이 진지는 남쪽에 있던 멕시코와 그 멕시코의 관할 하에 있던 텍사스로부터 인디언 구역의 경계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그 지역에 인디언이 떠나고 촉토 족이 재정착한 후에는 1마일 서쪽의 독스빌(Doaksville)을 지키기 위해 이 진지는 다시 활성화 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독스빌이 남부연합군에 가담한 촉토 족들이 남북전쟁에서 패하고 북군에게 항복한 현장이라는 점이었다. 1865623일 남북전쟁 당시 마지막 남부연합군의 지상 전력이 항복한 현장이 바로 포트 토우손이었고, 당시 체로키 출신 지휘관이었던 스탠드 웨이티(Stand Watie) 준장이 휴전 및 항복 조건들에 합의한 다음 촉토 군 대대를 전장으로부터 빼냈다고 한다. 바로 그 현장에 우리가 간 것이었다. 촉토 족의 땅이었으면서도 남북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촉토 전사들이 크게 수모를 당한 역사의 현장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웠다. 그래서인지 진지에서 만난 안내원도 이곳에서 전투가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말하자면 큰 전투는 없었고, 다만 전투가 마무리된 곳일 뿐이었다.

 

토우손을 거쳐 들어간 아이다벨은 비교적 넓고 큰 도시였으나, 쇠락한 다운타운이 도시 전체의 활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점에서는 앞서 1박을 한 듀랭과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도시 외곽에서 비교적 깨끗한 숙소를 찾았고, 저녁식사로 멕시칸 레스토랑에서 예상치 못한 미각을 맛보는 행운까지 누리게 되었다.

 

다음 날 이른 시각에 찾은 곳이 바로 레드 리버 뮤지엄(Museum of the Red River)’. 멋진 외관의 단층 건물이었다. 일찍 도착한 까닭에 한참을 기다린 뒤 10시가 되어서야 입장할 수 있었다. 1975년 개관했다는 이 박물관은 특이하게도 선사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여러 분야에 걸친 컬렉션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눈에 띄는 컬렉션들은 이 지역 원주민인 캐도(Caddoan)공동체의 예술품들, 콜럼버스 시대 이전의 물건들, 원주민들의 민족지적(民族誌的) 작품들, 현대 원주민의 예술작품들, 미국 전역의 공예품들, 아프리카동아시아태평양 제도(諸島)의 대표적 예술품들 등등, 다양했다.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대상은 도자기 등 생활예술의 빼어난 수준을 보여주는 캐도 공동체의 존재였다. 캐도는 전통적으로 지금의 동 텍사스, 북 루이지애나, 남 아칸사와 오클라호마 등지의 원주민 종족 연합체를 말한다. 말하자면 다종족 원주민 연합체가 바로 캐도인 셈이다. 현재 오클라호마 캐도 네이션은 빙거(Binger)에 수도를 갖고 있는, 단일 연합체다. 우리가 얼마 후에 캐도 네이션을 답사할 예정으로 있지만, 아이다벨의 이 박물관에서 그들의 생활예술품들을 접한 것은 일종의 행운이었다. 색상이 밝고 디자인이 아름다웠으며, 실용성을 겸한 점이 우리의 전통예술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최근에 만든 작품들이 대부분이어서 그 역사성을 찾아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캐도 예술품들 외에 다른 지역의 것들도 많았으나, 우리의 답사 목적이 주로 이 지역 원주민들의 삶과 역사인 만큼 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다른 나라나 지역의 것들은 우리의 관심 밖이었다. (계속)

 

 

 


레드 리버 뮤지엄 표지석

 


레드 리버 뮤지엄 건물

 


티라노소러스 골격 모형(이 지역에서 발굴된 것을 복원, 모조한 것)

 


여성의 스커트[1957년 플로리다 거주 세미놀(Seminole) 족인 메리 카피지(Mary Coppedge)가
만든 작품]

 


숄더 백[1994년 크리크-세미뇰 족 출신 제이 맥거트(Jay McGirt)가 만든 작품]

 


플레인스 인디언 족의 부드러운 요람[1890년 경 수(Sioux) 족이 만들어 쓰던 것]

 


1900~1930년경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족이 만든 동이

 


무늬가 새겨진 세 발 달린 병[800~1200년 사이, 남동부 캐도 족의 생활용품]

 


캐도 족 등 이 지역 인디언들의 도기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2. 23. 02:57

 

 

 

고마운 미국인들, 그리고 인디언 전사들

 

 

 

 

얼마 전 이곳 OSU 역사학과의 강사 Gary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미국에서도 이제 세계를 상대로 한 경찰국가의 노릇을 그만 두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으며, 그도 그 여론에 찬성한다고 했다. 나는 그의 생각이 얼마나 위험하거나 짧은지 말해 주었다. 미국이 경찰국가를 자청하는 의도의 이면에 엄청난 국가이익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 미국이 만약 경찰국가를 포기할 경우 다른 어느 나라[예컨대 중국, 일본, 러시아 등]가 경찰국가를 자임하고 나서거나 다양한 세력들의 춘추전국 시대가 전개되어 결국 미국은 자국마저 방어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것등을 들어 미국은 결코 그 역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포기할 수도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결국 그는 내 말을 수긍했다.

 

***

 

길 가다가 한쪽 편을 들어 싸움판에 끼어들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한쪽 편을 대신하여 맞거나 때려야 하는 입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물며 다른 나라의 전쟁에 내 나라의 젊은이들을 파견하여 피를 흘리게 하는 일의 어려움이야 오죽하랴. 사실 미국이 관여해온 전쟁은 많았고, 지금도 어디에선가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미국이 취해왔거나 취하고 있는 대외정책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문외한인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Yukon City에서 베테란들을 만나 한국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진심어린 인사를 건넨 것처럼, 나는 미국이 625 때 우리를 구해줘서 말할 수 없이 고마운 나라라는 점은 뼈에 새길 정도로 갖고 있다. 625의 원인이나 동기를 따질 필요도 없이 만약 미국 등 UN 기치 하의 16개국이 자국의 젊은이들을 파견하지 않았다면, 죽었다 깨나도 백두혈통이 아닌 이 나이의 내가 갓 30의 애송이 김정은에게 마구 짓밟히고 있거나 분명 어느 수용소에라도 들어가 있을 것 아닌가. 그 끔찍함을 상상할 때마다 미국이 고맙기만 하다.

 

***

 

미국은 사실 베테란의 나라다. 역대 대통령들을 비롯한 정치인들 대부분이 베테란들이다. 그래서인지 어느 도시를 가든 베테란을 위한 뮤지엄이 있고, 추모기념관이나 공원들이 중심부에 마련되어 있다. 나는 유콘 시티의 베테란 뮤지엄에서 625 당시의 귀한 자료들을 얻었고, 그로부터 멀지 않은 엘 르노시티의 다운타운에서 625 전몰용사들의 추모비를 발견했다. 그리고 최근 치카샤 인디언 네이션을 답사하던 중 듀랭(Durant)이란 자그마한 도시에서 625 전몰용사 추모비를 또 발견했고, 잘 알려지지 않았던 촉토(Choctaw) 인디언 네이션 뮤지엄과 세미뇰(Seminole) 인디언 네이션 뮤지엄에서 625 관련 자료들을 여러 점 목격하고 감동을 받은 바 있다.


투스카호마(Tuskahoma)에 있는 촉토 네이션 뮤지엄(Choctaw Nation Museum)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자국의 용사들을 명예롭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나라가 미국임을 이런 사례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625가 끝난 지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병사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자국으로 모셔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라. 살아있는 참전용사들마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우리와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베테란들을, 전몰용사들을 그딴 식으로대접해 놓고 어떻게 젊은이들보고 전쟁터에 나가라고 할 수 있을까.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해외의 전쟁터에 기꺼이 나가는 젊은이들을 보며, 미국의 시대가 쉽게 저물지 않을 것임을 감지하게 된다.

 

 


유콘 시티 베테란 뮤지엄의 한국전 코너

 


6 25 당시 한국전에 참여했던 카치니[당시 상사]가 표창을 받는 모습

 


엘 르노 시티 다운타운에 있는 전몰용사 추모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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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르노 시티 다운타운의 전몰용사 추모공원 한 복판. ‘Korea’라는 글자들이 선명한 비석 중심에 ‘Dobbs, Johnny F./Johnson, Melvin J./Reed, Amzie O./Rogers, Glenn R./Rother, Robert L./Stanphill, Verlyn L./Wiewel, James M./Williams, Johnny/Wosika, Paul J./Ruser, Charles H./Morse, Robert L./Hollman, Paul H.’ 등 한국에서 전사한 미국의 젊은이들의 빛나는 이름들이 올라 있었다.

 

 


엘 르노시티 전몰용사 추모공원의 한국전 전사자 추모비

 

 

치카샤 인디언 네이션에서 촉토 네이션으로 넘어가는 어름에서 듀랭(Durant) 시티를 만났고, 그 시청 앞의 ‘Korean War’라는 추모비에서 ‘Donnie J. Airington/Troy W. Bailey/J. C. Burr/James H. Cross/George H. Dillard/Carl Dill/Ernest H. Haddock/George O. Hiser/Arnett Lamb/Dewey E. McGehee/Charles L. Minyard/Loy A. Philpot/Ben D. Trout’ 등 젊은 전사자들을 발견했으며,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듀랭(Durant) 시티의 한국전 전몰용사 추모비

 

 

촉토 네이션 뮤지엄의 한복판에도 각종 전쟁에서 활약한 촉토족 전사들의 활약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12차 세계대전에서 암호 해독병으로 활약한 그들의 공적이 크게 부각되어 있었다. 촉토족 언어가 전선에서 연합군 측 암호로 쓰인 점을 이 뮤지엄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어쩌면 그것은 한국전에서도 활용되었을 것이다. 미국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뮤지엄의 뜰에도 전몰용사를 추모하는 비석이 서 있었고, 한국전에서 사망한 용사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Amos, Morris/Bryant Jr., William/Burris, Tony *winner of Medal of Honor/Cole, William/Dill, Carl/Green, Joe/Franklin, Preston/Frazier, Elam/Kaniatobe, Charles/Killingsworth, Leo/Mcclure, Jim/Mccurtain, Buster/Mccurtain, Isaac/Ontayabbi, Timothy/Rasha, Willie/Watson, Leonard’ 16명의 혈기방장했을 젊은이들이 전사자 추모비에 자랑스럽게 올라 있었다. 이 가운데 명예훈장을 받았을 정도로 전공이 혁혁했던 인물 Burris, 형제가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BusterIsaac 등은 한동안 내 눈길을 끌었다. 추모비 뒤쪽에 촉토족의 용맹을 대표하는 붉은 전사[Red Warrior]’가 적의 가슴을 향해 활을 힘껏 당기는 모습의 동상이 서 있는데이들 전몰용사들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후예들이 아니겠는가.

 

 


촉토 네이션 뮤지엄 뜰에 서 있는 한국전 전몰용사 추모비


2차세계대전에서 암호병으로 활약하여 큰 공을 세우고 훈장을 받은 촉토족 전사들

 


촉토 네이션 뮤지엄 앞에 서 있는 '붉은 전사[Red Warrior]' 상

 

최근 만난 한 미국인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열아홉 나던 해 한국전쟁에 참여했다고 했다. 다행히 그는 살아 돌아왔지만, 그 점으로 미루어 이곳에서 만나는 전몰용사들 역시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걸치는 젊은이들이었을 것이다.

 

더 감격스런 일은 위워카(Wewoka) 시티의 세미뇰 네이션(Seminole Nation)에서 있었다. 세미뇰 네이션 뮤지엄에는 군사박물관[military museum]’이란 별도의 방을 마련하고, 제12차 세계대전, 한국전, 베트남전 등 미국인들이 참여한 세계 각처의 전쟁 코너들을 별도로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전 코너에서 참으로 인상적인 자료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해병중위 팩터(Kenneth J. Factor)가 정찰임무 수행 중 전선에서 실종되었다는 사실과 그의 사진이 전시되었을 뿐 전몰용사들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이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에 관한 귀한 자료들이 여러 점 전시되어 있었다. 그 때의 한국인들에 관한 캐리커츄어(caricature) 석 점인데, 그림도 그림이려니와 그 밑에 달아둔 멘트가 감동적이었다. 약간 서양식으로 변이된 복장의 노인 둘, 여인네 둘, 꼬마 셋, 장승 하나를 그린 다음, ‘한국인들은 우아하고 자부심 강한 민족[The Koreans are a graceful and proud race]’이라는 멘트를 달아놓은 것이 그 하나이고, 소달구지를 몰고 가던 중 넘어진 소에게 화를 내는 주인과 깔깔대며 재미있어 하는 구경꾼들을 그린 다음 한국인들은 가끔 화를 내면서도 예리한 유머감각을 지녔다[They have a keen sense of humor despite their occastional bursts of temper]’는 멘트를 달아 놓은 것이 두 번째 것이며, 장대비가 쏟아지는 속에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들을 그린 다음 한국에서는 7월과 8월에 장마철이 시작된다[The rainy season occurs in July and August]’는 사실 관계 멘트를 달아놓은 것이 세 번째 것이었다. 이들이 얼마나 따스하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한국인들을 관찰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사례들이었다.

 

 


위오카(Wewoka) 시티에 있는 세미뇰 네이션 뮤지엄

 


세미뇰 네이션 뮤지엄의 한국전 코너

 


한국전 코너의 '6 25 전쟁 종군 기장'

 


한국전에서 실종된 팩터(Kenneth J. Factor) 중위

 


한국전 코너에 전시된 자료들

 


한국전 코너에 전시된 자료

 


한국전 코너에 전시된 자료

 


한국전 코너에 전시된 자료

 


한국전 코너에 전시된 자료(한국 가이드북)

 


한국전 코너에 전시된 자료(한국 가이드 북)

 


한국전에 관한 저널의 보도

 

 

그러나 무엇보다 내 가슴을 찡하게 만든 것은 이들이 전선에 나가는 자민족 군인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만들었음직한 한국어 교재였다. ‘추가적인 표현[Additional Expression]’이란 표제가 붙은 것으로 보아 주 교재는 별도로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실린 총 18개의 표현들은 한국에 가면 꼭 알아야 하는 것들이라고 그들 나름대로 판단했던 것 같은데, 그 내용이 참으로 흥미롭다.

 

I’m hungry                                   SEE-jahng HAHM-nee-dah

I’m thirsty                                    MAWG mah-ROOM-nee dah

I’m lost                                         NAH-noon KEE-rool eer-huss-SOOM-nee-dah

I’m tired                                      NAH-noon CHAWM KAW-dahn HAHM-nee-dah

I’m wounded                              NAH-noon CHAWM tahch-huss-SOOM-nee-dah

Stop!(to someone running away)           KUG-ee sut-suh

Hold still!                                                     KAH-mah-nee ISS-suh

Wait a minute!                                           CHAHNG-gahn kee-dah-REE-see-yaw

Come here!                                                 EE-ree AW-see-yaw

Quickly!                                                       BAHL-lee

Right away!                                                 KAWT

Come quickly!                                            BAHL-lee AW-see-yaw

Go quickly                                                   BAHL-lee KAH-see-yaw

Help! SAH-rahm                                       SAHL-liyaw

Help me                                                      CHAWM TAW-wah choo-SIP-see-yaw

Bring help                                                  SAH-rahmool CHAWM TAHR-yudah CHIOO-see-yaw

I will pay you                                            TAWN too-ree-gess-SOOM-nee-dah

 

 


당시 한국전에 참가할 세미뇰 병사들에게 교육하던 한국어 추가 교재

 

 

 

자기 민족의 젊은이들을 아무런 정보도 없는 한국의 전쟁터에 내보낸다고 생각해보라. ‘이 녀석들이 배고프면 어쩌나, 목이 마르면 어쩌나, 낯설고 물 선 타국 땅에서 길을 잃으면 어쩌나!’ 얼마나 걱정이 많았을까. 미국 연방정부의 명령이니 네이션에서도 파병을 거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모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교육을 시킨 것 아닐까. 도망가는 적군에게 ‘stop!’ 대신 거기 섰어![KUG-ee sut-suh!]’라고 외쳐야 알아듣는다는 걸 대체 누가 알려 주었단 말인가. 이 추가적 표현들이야말로 생존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사항들인데, 영문자로 간신히적어놓은 이 발음대로 말했다 한들 알아먹었을 한국인들이나 인민군들이 몇이나 되었을까. 그러나 아무것도 모른 채 보내는 것보다는 이 정도라도 알려서 보내는 것이 그나마 부모 형제, 동족으로서는 마음 놓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길 떠나는 자식에게 불안한 마음에서 쓸데없이이것저것 잔소리하는 우리네 부모의 심정이 이랬을까.

 

그렇게 이역만리 전쟁터로 사랑하는 아들들을 보낸 미국인들, 혹은 인디언들이었다. 그들의 희생 덕에 우리는 기사회생(起死回生)했고,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지금 등 따습고 배부른우리는 당시 거지 몰골로 우리네 사립문을 흔들며 나는 시장합니다!’라고 외쳤을 인디언 전사들, 아니 이름 모를 험한 계곡에서 피 흘리며 죽어갔을 그들의 모습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기억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오히려 당시 우리를 죽이려 했던 적들에게 공공연히 부역(附逆)하려는 무리가 백주대낮에 활개를 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