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8. 4. 20:08

 


무스코기 초입의 이정표

 

 


무스코기 초입에서 만난 인포메이션 센터

 

 


아미쉬 레스토랑의 표지판

 

 


아미쉬 레스토랑의 정갈하고 소박한 음식

 

 


아미쉬 레스토랑의 내부

 

 


아미쉬 버터 및 치즈 광고판

 

 


무스코기 네이션의 문장(紋章)

 

 


연합 인디언 네이션의 문장

 


무스코기 네이션의 국기 

 

 


삼강박물관(The Three Rivers Museum)에서 큐레이터들 및 보안관과 함께

 

 


보안관의 현란한 '권총 돌리기'

 

 


삼강박물관의 생활사 자료

 

 

 

 

크릭(Creek) 족의 꿈과 현실을 찾아

 

 

 

2014224일 아침 8시 오클라호마시티 윌 라저스 공항[Will Rogers World Airport]’ 발 유나이티드 아메리카 항공편으로 시카고 오헤어 공항으로 이동, 한국행 아시아나에 몸을 실으면 미국 생활은 끝이었다. 그래서 이 땅에 남은 미련을 남김없이 태우고자 21-22일 크릭 인디언들의 집거지를 거쳐 출발 전날 오클라호마 시티에 입성하기로 했다. 무스코기(Muscogee)와 오크멀기(Okmulgee)에 모여 산다는 크릭 인디언들을 만나기 위해 털사(Tulsa) 방향의 동쪽 우회로를 택하기로 한 것이다.

 

체류하는 동안 오클라호마에 거주하는 39개 인디언들 가운데 겨우 10여개 부족들을 접한 우리였다. 10여개 부족들 가운데는 이른바 문명화된 다섯 부족들[The Five Civilized Tribes: 체로키(Cherokee), 치카샤(Chickasaw), 촉토(Choctaw), 크릭(Creek/Muscogee), 세미놀(Seminole)]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오클라호마 동쪽의 크릭은 마지막 코스로 남겨 두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인들은 이 다섯 부족들을 ‘Civilized Tribes’로 부르고 있었으나, 그동안 우리는 그 말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civilized’문명화된으로 번역할 경우, 그동안 우리가 만난 여타의 인디언들은 뭐란 말인가. 우리가 보기에 그들 역시 이미 문명화된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훌륭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고 있는 OSU 역사과의 모제스(Dr. L. G. Moses) 교수에게 물었더니, 이 다섯 부족들이 식민시대나 초기 미 연방시대에 앵글로 색슨 계열 정착자들의 생활방식이나 관습을 수용, 그들과 선린관계를 맺어오면서 문명화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라고 했다. 내가 그 말을 미국화로 바꾸어 이해해도 무방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221. 겨울날씨치곤 쨍쨍하게 맑고 온화했다. 이 땅을 떠나기로 되어 있는 24일까지 만 3. 하룻밤은 인디언 구역에서, 나머지 이틀 밤은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보내기로 했다. 짐가방들을 트렁크에 때려 실은 우리는 렌터카를 몰고 학교를 한 바퀴 돈 뒤 177, 412, 44번 하이웨이 등을 번갈아 타면서 무스코기로 달렸다. 털사로부터 한 시간쯤이나 달렸을까. 무스코기 초입의 길가에 자그마한 관광안내소[Muskogee Tourist Information Center]가 나타났고, 그 건너편에 참한 식당 하나가 숨듯 서 있었다. 이곳에서 아미쉬 레스토랑[Amish Restaurant]’을 만나다니! 행운이었다. 전통 기독교 교회공동체 아미쉬. 메노파(Mennonite) 교회들과 비슷하지만 다른 집단이다. 그들은 스위스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재세례파(再洗禮派)’[16세기 종교개혁의 급진적 좌파 운동 집단으로서 유아세례를 부정, 죄와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성인세례를 받는 것만이 타당한 세례라고 보았음]와 근원을 공유한다. 단순한 생활, 검소한 복장, 문명과 기술의 이기(利器) 등을 기피하는 그들이었다. ‘목마른데 옹달샘 만난 격으로 여기서 그들이 운영하는 식당을 만나게 된 것. 앤틱 풍의 인테리어가 약간은 생소했으나, 벽면 가득 옛날 장식품들이 편안해 보였고 이들만의 풍미(風味) 또한 일품이었다.

 

다시 관광안내소로 돌아와 체구 좋은 중년 여성 자원봉사자의 친절한 설명을 들었다. 무스코기라 지칭하기도 하는 크릭 족은 오클라호마 주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현재 이곳 외에 앨라배마조지아플로리다 등에도 분포되어 있었다. 우리가 이미 만나 본 세미놀 족 역시 이들처럼 무스코기 어[크릭 어]를 사용하는, 가까운 부족이었다. 원래 무스코기 족은 오늘날 테네시조지아앨라배마 주에 걸쳐 흐르는 테네시 강을 따라 건축물을 쌓았던 미시시피 문명의 후예로 추측된다. 미시시피 문명을 이룬 사람들 가운데 최대의 공동체는 카호키아 토성터[Cahokia Mounds]’로부터 나왔으리라 추정되는데, 이미 그 시대에 계급화된 사회나 상속이 이루어지던 종교적정치적 집단이 생겨나 미국의 중서부와 동부를 800년부터 8세기 가까이 지배하고 있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무스코기 족이 바로 그 후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초기에 개척자로 등장한 스페인 사람들과 많은 갈등을 빚었고, 그 가운데 탐험대를 이끌고 나타난 스페인 사람 데소토와 마빌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데소토의 탐험대가 퍼뜨린 전염병으로 많은 인디언들이 죽어 인구가 급격히 감소되었고, 결국 미시시피 문명도 붕괴되기에 이르렀으나, 살아남은 인디언들 가운데 무스코기 어를 쓰는 사람들이 무스코기 부족 혹은 무스코기 부족 연합으로 다시 뭉치게 된 것이다.

 

1866년 새 정부를 세운 크릭 족은 오크멀기를 수도로 정했고, 1867년에 세운 의사당을 1878년엔 더 크게 확장했다. 우리가 돌아본 크릭 네이션 의사당은 국가의 역사적 랜드마크로서 크릭 족 의사당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크릭 족은 번영기였던 19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학교교회공공건물 등을 지었는데, 이 시기 이 종족은 자치조직을 갖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연방정부로부터는 최소한의 간섭만 받고 있는 상태였다.

1898커티스 법[Curtis Act]’에 의해 부족 정부가 해체되었고, ‘도스 할당법[Dawes Allotment Act]’에 의해 부족의 임대 토지는 사라지게 되었다. 도스 위원회는 부족원들을 혈통에 의한 크릭 족자유민으로서의 크릭 족으로 나누어 등록을 했다. 그런데 그들은 부족원들이 갖고 있는 크릭 혈통의 비율에 상관없이 아프리카 혈통만 인정되면 누구나 그 범주에 분류해 넣었던 것이다. 1906426, 미합중국 의회는 1907년에 오클라호마가 주의 자격을 인정받을 것으로 예상, ‘1906년 문명화된 다섯 부족 법안을 통과시키게 되었다. 이런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크릭 족은 8,100의 땅을 비원주민 정착자들과 정부에 빼앗기고, 그 후에야 ‘1936년 오클라호마 인디언 복지법아래 일부 무스코기 족 도시들은 연방의 승인을 받게 된 것이다. 크릭 네이션은 1970년까지 재조직되거나 연방의 인정을 다시 얻지 못하다가 1979년에야 1866년의 헌법을 대체하는 새 헌법을 만들어 비준하게 되었다. 1976년 하르호(Harjo)와 클레피(Kleppe) 간의 법정 소송사건으로 미합중국의 가부장주의는 종식되고, 민족자결권이 고양되었다. 크릭 네이션은 후손들의 구성원 자격을 결정하기 위한 기초로 도스 법의 명단을 이용, 58,000명이 넘는 할당자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등록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현재 크릭 족의 인구는 69,162, 주요 거주지는 미국의 오클라호마 주이며, 종교생활은 기독교[특히 침례교와 감리교], 종교적정치적전통주의적 조직인 네 엄마들의 결사(結社)[Four Mothers Society]’를 중심으로 영위되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특히 크릭, 체로키, 촉토, 치카샤 등 네 종족이 주로 그들의 땅을 비원주민 이주자들에게 할양하도록 한 도스 법이나 미 의회의 법안 활동 등에 반발하여 결성한 복합적 조직이 바로 이것이었다.

인포메이션 센터의 직원으로부터 무스코기와 오크멀기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얻은 다음 본격적인 탐사에 나섰다. 먼저 언덕 위의 ‘Five Civilized Tribes Museum’에 들렀는데, 1850526일에 세워진 무스코기 네이션의 옛 건물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들어가 보니 소장품은 별스럽지 않았다. 1층에는 다섯 부족의 휘장[seal]들과 사진 몇 장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조차 찍지 못하게 했다. 1층에서 올려다보니 2층에도 식탁이나 의자 등 생활사 자료들이 몇 가지 진열되어 있을 뿐이어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다른 네 부족들을 찾아 그들 문화와 역사유물들의 진수를 맛보고 온 우리였다. 그러한 유물들의 일부를 복제하여 모아 놓고 ‘Five Civilized Tribes Museum’의 간판을 붙인 뜻은 좋았으나, ‘통합문화를 보여주기엔 턱 없이 모자라는 컬렉션이었다.

 

약간의 실망감을 안고 무스코기 시내로 달려 들어갔으나, 이곳 역시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경기가 안 좋아서인지 기름기가 빠져 있었다. 간판마저 흐릿하게 퇴색되고 있는 옛 건물들만 경기가 좋았던 그 시절의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을 뿐 널찍한 시내 도로들에는 먼지만 날리고 있었다. 우리는 옛날의 역사(驛舍)를 재활용하여 만든 삼강박물관[Three Rivers Museum]’을 방문했다. 잘 나가던 시절 카우보이들이 텍사스나 오클라호마의 중남부로부터 몰고 온 소떼들을 열차에 싣고 동부로 나아가던 오클라호마 주의 출구가 바로 이곳이었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여성 자원봉사자 한 분이 오랜만에 만나는 외국 손님에 당황했는지 허둥거리며 친절을 베풀었다. 큰 역사를 박물관으로 개조한 만큼 세련되지는 않았으나, 오클라호마 주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현장감이 이곳에서도 물씬 풍겨났다. 잠시 후 그 여성이 전화로 호출한 정식 큐레이터가 달려왔고, 그녀로부터 박물관을 꽉 채운 각종 생활사 자료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설명이 다 끝나갈 무렵 크릭 인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보안관이 들어왔다. 홀을 꽉 채울 듯 거대한 몸집의 그는 꽤나 붙임성이 좋았다. 대대로 이 도시에서 살아온다는 그는 보안관이라는 자신의 직책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 했다. 무엇보다 한국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의 가계와 이 도시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바빴다. 급기야는 우리를 환영하려는 의도였는지 자신의 권총을 빼내 현란한 손놀림을 보여주기도 했다. 밖에 놓인 열차 유물까지 둘러 본 다음, 친절한 사람들로부터 간신히 빠져 나온 우리는 즉시 차를 몰아 1시간 거리의 오크멀기에 도착, 1박을 하게 되었다.

토요일인 다음날 오크멀기의 탐사에 나섰다. 공공기관이나 박물관 등은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 하는 수 없이 도심 주요부분들을 걸어 다니며 느껴보기로 했다. 윤기가 빠진 점은 다른 도시들과 같았으나, 규모가 제법 컸다. 오클라호마 주 오크멀기 카운티의 도시이자 남북전쟁 이래 크릭 네이션의 수도였던 곳이다. 그 명칭 ‘Okmulgee’는 영어로 끓는 물(boiling water)’를 뜻하는 크릭 단어 ‘oki mulgee’에서 나왔다는데, ‘졸졸 흐르는 시내[babbling brook]’ 혹은 증발악취[effluvium]’ 등으로도 번역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곳은 분명 노천온천 지역이었을 것이다. ‘악취 나는 끓는 물이라면 아마도 유황온천이었으리라. 인근의 체로키 네이션에서 발견한 그들의 환영사 ‘Osiyo[오시오]’를 내가 우리말 ‘(어서) 오시오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했듯이, ‘oki mulgee’ 아쿠 (뜨거운) !’로부터 나온 것이나 아닐까 상상해 보았으나, 근거를 대지 못하는 한 부질없는 생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 내내 크릭 네이션의 수도였던 만큼 시내 곳곳에 고풍스런 자취가 많이 남아 있었다. 33.2의 넓은 땅에 2010년 기준 12,321명의 인구가 분산되어 살고 있으므로 한산할 수밖에 없지만, 전체적으로 기름기는 빠져 있었다. 우리가 찾으려 한 오크멀기 다문화 역사 박물관[Okmulgee Multicultural Historical Museum]’을 길가에서 발견하고 차를 멈추었으나, 이미 문을 닫은 채 이전했다는 메모만 문 앞에 걸려 있었다. 주변에 물었으나,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고, 찾아간들 토요일에 문을 열었을 리 없어, 하릴없이 무스코기 네이션 본부가 위치한 곳을 찾았다이미 130여년이나 지난 시기의 건물들이 넓은 땅에 여유롭게 늘어서 있었다. ‘무스코기 네이션 크릭 의사당[Muscogee Nation Creek Council House]’, ‘크릭 의회[Creek Capitol]’, ‘크릭 네이션 수도 청사[Creek Nation Capital]’ 등 단순 소박한 건물들이 주변의 상가들과 행복한 어울림을 이루고 있었다. 1867년 조직된 크릭 네이션의 수반 코우치먼[Ward Coachman] 시대에 오크멀기는 수도로 지정되었고, 1870년에는 오크멀기 헌법도 제정되었다. 수도 청사 의사당 건물 뒤편의 잔디밭에는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인디언 관련 유물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가운데 눈물의 행진[Trail of Tears]’ 표지가 버티고 서 있었다. 미국이 인디언 특히 크릭 족에 대하여 자행한 횡포를 고발하는 내용임은 물론이다. 어느 인디언 네이션에 가도 ‘Trail of Tears’ 표지가 서 있는 곳은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이다. 인디언들에게 가한 미국의 원죄는 인디언이 살아 있는 한 업보가 되어 그들을 괴롭힐 것임을 이 표지판은 말해주고 있었다.

 

 


삼강박물관의 생활사 자료[MKT 라인, 즉 '미주리-캔자스-텍사스' 간 철도 노선에서 사용되던 각종 물건들] 

 

 


삼강박물관에 소장된 인디언 관련 그림[승천하는 전사의 영혼?]

 

 


삼강박물관에 소장된 인디언 관련 그림[크릭 족 전사?]

 

 


삼강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기관차

 

 


박물관에 전시된 기차의 기관실


 


지금은 박물관과 음악 홀로 쓰이는 당시의 화물열차 역

 

 

 
무스코기 초입의 환영 표지판

 

 


오크멀기에서 저녁을 먹은 집[값싼 등심이 맛있는 집]

 

 


한산한 오크멀기 시가지

 

 


크릭 네이션 의사당

 

 


크릭 네이션 의사당

 

 


'눈물의 여정' 설명판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

 

 

의사당을 떠난 우리는 널찍널찍한 주택가를 배회하다가 크고 멋진 교회들을 만났다. 그 가운데는 미국에서 보기 드문 천주교 성당도 있었다. 이름은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St. Anthony of Padua Catholic Church]’. 천주교 신자인 아내의 말대로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성당 뒤편 주차장에 차를 대는데, 작은 차 한 대가 또르르 달려왔고, 문이 열리면서 로만칼라 복장의 연세 지긋하신 신부 한 분이 의상을 손에 들고 급히 나와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곳에 들어오면서 미사가 있다고 공지되어 있는 것을 본 터라 우리도 부랴부랴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미사 예정 시각이 지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당 안은 텅 비어 있는데, 아까 들어온 신부가 촛불을 붙이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물으니 오늘 특별 미사가 있는데, 아직 수녀가 당도하지 않아서 당신이 직접 미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라 하자 반색을 하며 우리를 위해 포즈를 취해 주었다. 휑하니 넓은 성전에는 우리 둘 만 앉아 있었고, 신부 혼자 미사 준비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참 겸연쩍었다. 최소한 한 시간 가까이 걸릴 미사에 우리 둘만, 그것도 천주교 신자로는 아내 한 사람만 참여하는 셈이니, ‘참으로 기이하고 멋쩍은 경험아닌가.

 

우린 갈 길이 바쁘니 어여 나갑시다!’ 신부가 옷을 입으러 들어간 틈에 나는 아내의 옆구리를 찔렀다. 나의 표정이 완강해 보였던지 아내도 마지못해 따라나선다. 밖으로 나오며 생각하니 참으로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특별미사에 신도는 하나도 없고, 그나마 찾아온 한국인 관광객 두 명마저 종적이 묘연하게 사라지고 말았으니, 미사복을 입고 나온 신부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7~8년 전 유럽 자동차 여행에 나섰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상당수의 성당이나 교회들은 주일날에도 문이 닫혀 있었다. 주일 예배에 참여하고자 하이델베르그의 한 교회에 갔더니 교회 문은 열려 있었으나 목사 한 분이 앉아서 무료하게 책을 읽고 있을 뿐이었다. 서구사회에서 교회가 망하고 있음을 절감한 순간이었다. 그래서인가. 이 성당 정면엔 미국정신과 함께 가톨릭 정신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며[Keeping Catholicism Alive With American Spirit]’라고 쓰인 걸개가 늘어져 있었다. 그에 비해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교회에 모여 활동을 벌이는 젊은이들은 미국 사회에 뿌리내린 신교의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도시 외곽에 자리 잡은 OSU 무스코기 캠퍼스를 거쳐 무스코기 참전용사 비’, ‘무스코기 크릭 네이션 지방법원등을 일별한 다음 마지막 행선지 오클라호마시티를 향해 40번 하이웨이에 접어들면서 우리의 크릭 탐사는 끝이 났다.

 

***

 

크릭 족을 대면하기 위해 무스코기와 오크멀기를 찾았으나, 박물관의 유물이나 건축물로 남아 있는 삶의 흔적만 보았을 뿐, 그들의 종적은 없었다. 그렇다. 아직도 검붉은 얼굴에 검은 머릿결을 날리는 그들의 모습이 유지될 리는 없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도 아닐 것이다. 나와 다른 모습의 이웃들과 섞이고 사랑함으로써 나를 변모시키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었을 터. 그러나 신화 속에 살아 숨 쉬는 인디언들의 문화나 의식도 언젠간 새로운 시대 삶의 원리로 부활될 수 있으리라. 돌고 도는 것이 세상 이치라면, 지금 위세를 떨치는 서구문화의 끝판 어디쯤에서 그 옛날 인디언들이 영위하던 생활양식이나 정신이 그들의 이름을 잊어버린 채 새로운 삶의 원리로 사람들을 고양(高揚)시키게 되리라. 그 때를 기다리며 은인자중하며 살아가는 크릭 인들을 우리는 여기서 만난 것이다.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의 사제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 100주년[2008] 기념 표지

 

 


빠두아의 성 안토니 교회 내부

 

 


오크멀기 제일 장로교회

 

 


오크멀기 제일 장로교회 내부

 

 


오크멀기 연합 감리교회

 

 

 


무스코기 전몰용사 추모비[한국전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병사들 포함]

 

 


오클라호마시티의 '윌 라저스 공항' 인근에서 만난 석유채굴기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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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4. 2. 23. 14:15

 

 

 

                         6개월간 몸을 담고 있던 South Murray 홀

 

 

 



                              OSU Student Union

 

 

 



                                        머레이 홀 1층에 있던 연구실 팻말

 

 

 



                                       연구실 내부

 

 

 

 

스틸워터를 떠나며

 

 

 

 

예정 체류기간 6개월을 모두 써버리고, 오늘 드디어 스틸워터를 떠난다. 그동안의 추억에 쩐 짐들이 자동차 트렁크와 뒷좌석에 그득하건만 마음은 대체로 허하다. 그 옛날 유목민들이 이랬을까. 천막을 대충 걷어 말 등에 올려 메우고 정처 없이 또 다른 풀밭을 따라 길을 떠나던 그들의 기분이 아마도 이러했을 것이다. 농경 정착민의 후예인 내가 노마드라니? 스스로의 몸에서 노마드의 애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나를 감싸고 있는 시대의 변화 때문이리라. 풀이 자라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맹세를, 떠나는 아침이면 그 옛날의 유목민들은 무수히 되뇌었을 것이다. 삶터 앞을 졸졸거리며 흐르는 시냇물을, 천막 주변에서 재잘거리던 작은 새들을, 가끔씩 찾아와 기웃거리던 사슴이나 토끼들을, 환하게 미소 짓던 꽃들을, 귓가에 스쳐가던 바람결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천 년의 세월을 격()한 노마드의 서정이 이 순간 내 마음을 치고 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24일 아침, 오클라호마시티의 윌 라저스 공항[Will Rogers World Airport]’ 출발 예정. 그러나 아직도 이 땅에 미련이 남았는가. 기다리는 사람은 없지만, 둘러 볼 곳들이 남아있어 스틸워터 출발 날짜를 며칠 당기기로 한 것이다. 무스코기(Muscogee)와 오크멀기(Okmulgee)에 모여 산다는 크릭(Creek) 인디언들을 만나기 위해 동쪽의 우회로를 택하기로 한 것.

 

스틸워터를 떠나는 이 순간의 기분은 9년 전 중남부 유럽의 20개 나라들을 자동차로 돈 뒤,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귀국 비행기에 오르던 그 기분과 동일하다. 사실 아무런 경험이나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구석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면서도 타고 난 낙천성과 조심성 하나로 무사히 그 길을 주파(走破)해낸 것처럼, 달력에 하루하루 금을 그어가며 체류해온 오클라호마 주와 스틸워터 역시 까맣게 모르던 공간들이면서도 그다지 숨차 하지 않고 골인 지점에 도착한 것이다. 처음으로 마주친 중남부 미국인들의 보수성이 우리가 기대하고 있던 미국인들의 일반적 성향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에 머리를 갸웃거렸지만, 그들의 보수성이란 자기표현의 미숙함이외의 아무것도 아님을, 나는 그들을 만나는 순간 간파할 수 있었다. 사실 나로선 그게 가장 큰 행운이었다.

 

풀브라이터(Fulbrighter)로서의 가볍지 않은 사명을 짊어지고 오긴 했지만, 연구 외에 이곳에서 발견한 또 다른 것들이 나를 달뜨게 했다. 이곳 사람들과의 만남, 인디언의 역사나 문화와의 만남, 길과의 만남, 이상적인 환경과의 만남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했던 스틸워터는 문만 닫으면 절간처럼 조용해지는 공간이었다. 맑은 공기 속에 한 발만 나서면 온갖 새와 나무들이 그들먹한 낙원이었다. 기대 이상의 힐링을 체험하며 마음속의 온갖 찌꺼기들을 날려 버릴 수 있었다. 물론 이곳이라고 어찌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그로부터 일어나는 불행들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러나 유목민들이 아름다운 꽃향기와 산토끼의 해맑은 눈빛, 그 지순(至純)한 추억으로 광풍 몰아치던 수많은 밤들의 괴로움을 지우듯,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걸러내는 능력이야말로 지혜로운 인간의 전유물 아닌가. 사실 짧지 않은 6개월 동안 걸러내야 할 단 하나의 씁쓸함도 만나지 못한 나였다. 스틸워터에서 화려한 행복 보다는 작고 따스하며 담백한 즐거움 속에 거의 완벽한 힐링의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이제 맛있고 영양가 풍부한 풀들이 많이 자라 있기를 기대하며 다시 옛 고향으로 소떼를 몰고 재입사(再入社)하기로 한다.

 

 

 

 


산책로의 한 부분

 

 

 

 


가끔 산책하던 부머 호수의 오리들

 

 

 

 


부머 호수의 서정

 

 

 

 


아파트 뒤켠 풀밭에서 식사하고 있는 기러기들[Canadian Goose]

 

 

 

 

 
아파트 주차장까지 진출한 기러기들

 

 

 

 


산책로의 전선을 점령한 새들

 

 

 

 


산책로에서

 

 

 

 


산책로에서

 

 

 

 


눈 내린 산책로의 한 부분

 

 

 

 


산책로에서 만난 이름 모를 열매

 

 

 

 


산책로에서 만난 다람쥐

 

 

 

 


추운 날 산책길에 만난 이름 모를 새

 

 

 

 


OSU 스포츠의 대명사 풋볼 팀 광고사진

 

 

 

 


'2013년도 풀브라이트 강화 세미나[2013 Fulbright Enrichment Seminar]'에 참석한
 각국의 학자들 중 몇몇과 함께

 

 

 

 


스틸워터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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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성원

    여러 가지 고생되는 부분은 좀 있었겠지만
    육십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인간적으로, 학문적으로 또 한단계의 성숙을 이루어낸 것으로 느껴지는구먼.
    한 편으론 부럽기도 하지만 성공적으로 건강하게 연구활동을 종료한 점 진심으로 축하하네.
    서울에서 보세나.

    2014.02.24 08:29 [ ADDR : EDIT/ DEL : REPLY ]
  2. 백규

    성원, 고맙네. 6개월이 '한 여름밤의 꿈'처럼 흘러갔네. 이번에야 미국의 속살을 본 것 같아 기분은 좋네. 보려고 하는 것만큼만 보인다는 사실도 확인했네. 그들을 넘기가 쉽지 않지만, 넘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깨달았네. 격려해줘서 거듭 고맙네. 서울에서 보세.

    2014.02.24 09:39 [ ADDR : EDIT/ DEL : REPLY ]

글 - 칼럼/단상2013. 12. 14. 13:27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4: 엘 르노 시티(El Reno)커네이디언 카운티 뮤지엄[Canadian County Museum ]’-

 

 

 

 

손 형,

 

엘 르노 시티와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었지요. 유콘 시티의 베테란스 뮤지엄에 들렀다가 돌아가려는데, 큐레이터 리차드 씨가 근처의 엘 르노 시티를 보고 가는 게 좋을 거라고 충고합디다. 그래서 그곳에 들렀는데, 그렇게 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상당히 퇴락된 느낌이 들었지만, 꽤 유서 깊은 면모를 간직한 도시였어요. 이 도시 또한 66번 도로와 큰 관련을 맺고 있지요. 그 뿐 아니라 열차의 터미널과 수리공장이 있던 곳으로, 말하자면 이 지역의 교통 요지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가 방문한 박물관은 그 역사(驛舍)와 부지(敷地)를 통째로 개조한 것이었어요.

 

 


엘 르노, 유콘, 오클라호마시티, 에드몬드, 거쓰리, 스틸워터 등이 표시된 지도

 


1891년 엘 르노 시가지의 모습

 

엘 르노 시티는 캐나디언 카운티 청사의 소재지로서 현재 대략 1,8000에 가까운 인구를 보유한 도시이죠. 1889년 랜드러시(land rush)² 직후 인근의 Fort Reno를 본떠 명명된 이 도시는 오클라호마 시 중심가로부터 겨우 40km 정도 떨어져 있을 만큼, 주의 중심부라 할 수 있지요. 특히 오클라호마 시티 표준 도시 통계구역[Standard Metropolitan Statistical Area]’¹의 한 부분이라는 점은 이 도시가 이 지역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군요. 원래 현재 위치로부터 북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북 캐나다 강[North Canadian river]’의 제방에 있던 이 도시는 Reno City라는 이름을 갖게 되면서 네바다(Nevada)주의 Reno와 혼동을 일으켜 우편물의 배달 오류 사태가 자주 일어나곤 했다네요. 그래서 시가지가 물에 잠긴 두 번 째의 홍수 이후에 현 위치로 옮겼고, 이름도 El Reno로 바꾸었다는군요.

 

 


엘 르노 시청

 


오클라호마 주와 인디언 구역들

 

이 도시는 오클라호마 주에서 유일하게 다운타운 지역에서 운행되는 전차를 갖고 있다는 점, ‘시카고, 락 아일랜드 및 태평양 철도[Chicago, Rock Island and Pacific Railroad]’ 락 아일랜드(Rock Island)’의 터미널과 수리 시설이 있다는 점 등으로 아직도 오클라호마 주 안에서 중시되고 있었어요. 그런데 불행히도 1975년 이 회사가 파산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실직을 했고, 철도부지 역시 공터로 남게 되었다지요? 철도회사의 창고와 건물들은 캐나디언 카운티 역사학회가 사들여 박물관 단지의 중요한 부분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고, 우리는 바로 그 박물관을 방문하게 된 겁니다. 기차 역사(驛舍)를 사들여 빌딩을 건축함으로써 엄청난 시세차익을 남기려는 우리와 달리 그들은 박물관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그들의 여유가 무척 부러워지더군요.

 

 


커네이디언 카운티 뮤지엄

 


락 아일랜드 역사[현재의 카운티 뮤지엄]

 


Bob Kreiger가 기증한, 당시의 달리는 열차 그림.

 

박물관의 중심 컬렉션은 다른 도시의 박물관들처럼 이 지역의 생활사 자료들이 주축이었어요. 그러나 다른 지역과 다른 점은 락 아일랜드역 자체에 관한 풍부한 컬렉션이었어요. 기차와 철로에 관련되는 각종 물건들이 세밀하게 수집되어 있었고, 당시 운행되던 열차의 미니어쳐를 전시실 안에서 실제로 움직이게 함으로써 박물관에 생동감을 주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어요. 박물관의 중심 건물 밖에는 당시 있던 학교, 교회 등 공동체의 건물들이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되어 있었으며, 창고에는 열차 관련 부품들과 각종 운송수단 및 농기계 등도 전시되어 있었어요. 그 뿐 아니라 역의 사무실은 까페로 꾸며져, 사람들이 당시의 분위기를 느끼며 즐길 수 있도록 개조되어 있더군요. 전반적으로 이들이 쓸모없게 된 물건들이나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머리를 많이 썼다는 느낌을 줍디다. 발전의 주기가 짧고 변화 자체가 드라마틱한 우리의 경우도 생활사 자료들을 폐기처분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이 도시에서 특히 강하게 깨달았지요. 당장 우리의 안목이 좀 더 문화적인 폭과 깊이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 미국의 중소 도시들을 몇 군데만 돌아다니면 얻을 수 있는 교훈이었어요.

 

 


커네이디언 카운티 박물관의 사무실 겸 전시장

 


박물관 컬렉션(인디언과 북)

 


박물관 컬렉션(엘 르노의 학교 관련 물품들)

 


박물관 컬렉션(거실의 물품들)

 


박물관 컬렉션(여성용 화장품)

 


박물관 컬렉션(금전등록기)

 


박물관 컬렉션(사무용 비품들)

 


박물관 컬렉션(사무용 비품들과 사진들)

 


1951년 당시 엘 르노 지역 선수들이 사용하던 풋볼의 헬멧

 


당시 역 구내의 매표소

 


전시품 소개문(개척시대의 의사들/가구 공예/철로와 모형열차 전시)

 


Dr. Ernest Ewing 진료실의 진찰 및 치료용 도구들

 

이 도시 역시 엘크나 클린턴, 유콘 등처럼 66번 도로변의 도시, 메인 스트릿(Main Street)’ 공동체이지요. 아시겠지만, 오클라호마 주는 오래전부터 메인 스트릿 프로그램(Main Street Program)’을 실시해 왔고, 엘 르노 시티는 자신들의 프로그램으로 미국 메인스트릿 대상[the Great American Main Street Award]’2006년에 받기도 했다지요. 말하자면 하이웨이의 신설 등 사회 간접자본의 확충으로 퇴락하는 다운타운을 되살리는 작업인 셈인데, 이 도시 역시 철도역을 중심으로 번성하던 숙박업소나 레스토랑, 백화점 등 각종 건물들이 현재는 각종 사적(史蹟)’으로 지정되어 있었고 일부는 그 안에서 영업을 하고 있기도 했어요.

 

 


당시의 농기구 전시실에서

 


당시의 전화기

 


어메리칸 익스프레스 캄퍼니의 취급 항목들(우편환/외국환 어음/여행자 수표/신용장/전신환)

 


락 아일랜드 역의 물품들과 당시 열차의 미니어쳐

 


당시 우체통

 


 소포의 무게를 재던 당시의 저울

 


당시 락 아일랜드 역의 수하물 저울들

 


당시의 저울들과 다른 물건들

 


락 아일랜드 역 관련 물품들

 


까페로 개조한 역사

 


당시에 타고 다니던 수레

 


당시 이 지역의 통나무집

 

다운타운은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널찍하게 정비가 잘 되어 있었고, 특히 100년 이상 된 건물들도 이 곳 저 곳에 중후한 모습으로 서 있었어요. 다운타운을 돌아보면서 무엇보다 우리의 눈길을 끈 것은 도심 한 복판에 전몰용사 기념공원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었어요. 그 가운데는 이 지역 출신으로서 625 때 전사한 젊은이들의 사진과 이름을 새긴 석비도 있었는데, 순간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어요. 정작 우리는 우리의 혈육들이 그 전쟁에서 몇 명이나 죽었으며, 전사자 가운데 우리 고장 사람들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게 사실 아니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전사자들을 도시 한 복판에 모시고 항상 추모하며 고마움을 느낀다는 사실이 우리를 감동시킵디다. 우리가 이런 점은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봐요. 세계 곳곳의 전쟁터에서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어 왔지만, 국가는 그들의 희생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매 순간 각인시키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부강한 나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았겠어요? 개인주의로 철저히 무장한 미국인들이 일단 애국정신의 기치 아래 뭉치면 천하무적의 집단이 된다는 점. 무섭고도 부러운 면이지요. 이 평범하면서도 쉽지 않은 점을 미국 중서부의 작은 도시 엘 르노에서 발견하게 되었어요. 우리는 과연 언제쯤이나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나머지는 다음번에 말씀드리기로 하지요. 안녕히 계시오.

 

 


1901년에 지어진 상가-엘 르노의 다운타운에서

 


엘 르노 다운타운에서 만난 전몰용사 추모 공원[한국전 관련 비석이 보임]

 


커네이디언 카운티 출신의 전몰용사들

 


전몰용사 추모공원의 담벽

 


박물관 사무실에서 관리인들과 함께

 

 


당시의 초등학교

 


당시의 엘 르노 주류판매점

 


당시의 호텔

 


당시부터 있던 상가 건물들

 


엘 르노 연례행사의 하나인 버거데이 포스터

 

 

¹ ‘표준 도시 통계구역이란 미국에서 대도시 문제를 분석하는 데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만든 개념인데, ‘인구, 도시의 성격, 통합의 정도등을 기준으로 그런 지역은 설정된다.

² 1889년 오클라호마 인디언 구역 안에 백인 정착이 시작되면서 세계 역사에 보기 드문 도시 건설의 기괴하고 혼란스런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철로가 인디언 구역을 가로지르고, 아칸사와 텍사스를 잇는 통로들을 따라 여기저기에 증기 열차를 운행하기 위한 급수탑과 여타 설비들이 설치되었다. 인디언 구역이 개방되기 몇 달 전부터 도시구역의 회사들을 대표하는 개인들과 단체들은 이 위치들을 선점하고 이에 따르는 구체적인 계획들을 세우기 시작했으나, 당시 의회는 시민 정부의 어떤 형태도 제시하지 못했다. 당시 5만 여명의 정착민들이 200만 에이커의 땅을 둘러싸고 벌인 투쟁은 랜드 러쉬땅 차지하기싸움으로 기록되었며, 인디언들에게는 비극적인 역사의 단초가 되었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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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3. 11. 11. 12:52

 

66번 도로[Route 66]에 살아 있는 역사의 공간, 유콘 시티(Yukon City)

 

 

 

 


66번 도로 가의 Arcadia Round Bahn에 전시 중인 66번 도로 표지판

 

 

우리가 유콘을 찾은 것은 112()이었다. 사실은 66번 루트에서 비교적 유명한 오클라호마시티 남쪽 엘크(Elk) 시의 국립 66번 도로 박물관(National Route 66 & Museum)’, ‘옛 마을 박물관 단지(Old Town Museum Complex)’, ‘농업 및 목축업 박물관(Farm and Ranch Museum)’ 등 세 박물관들을 돌아보기 위해 집을 나선 길이었는데, 오클라호마시티에 들어오니 시곗바늘은 이미 11시 반을 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목적지는 스틸워터로부터 달려 온 만큼의 시간을 그로부터 더 달려야 하는, 100마일이나 먼 거리에 있었다. 도착하면 오후 2시쯤 될 것이고, 점심을 먹고 나면 3시쯤 될 것 아닌가. 난처했다. 박물관 하나를 겨우 보고나서 다시 되돌아 와야 하고, 되돌아오는 길 또한 300마일쯤이나 될 것이니, 오밤중이나 넘어서야 집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이었다. 끔찍하게 드넓은 미국 땅. 그 중에서도 끝없이 펼쳐진 벌판의 왕국 오클라호마를 얕본 우리의 실책이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출발했어도 쉽지 않을 거리였는데, 느직이 일어나 아침을 다 챙겨먹고 나선 길이니 여유롭게 돌아보고 오기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하이웨이의 출구를 빠져나와 주유소와 푸드마트, 구멍가게 등을 겸한 휴게소에 들렀는데, 마침 66번 도로가 그 휴게소 옆을 지나고 있었다. ‘작전 상 후퇴아닌 시간 상 노정 변경이었다. 마트에 들른 그 지역 사람들에게 물으니, 하나같이 유콘시티를 추천했다. 그래, 오늘은 유콘을 탐사하기로 하자. 그렇게 해서 우리는 66번 길가에 묻혀 있던 유콘을 찾아낸 것이다.

 

***

 

시내에 들어서자 저 멀리 도시 입구 쪽의 메인 스트릿 양 옆에 원통형의 거대한 건물들이 서 있었다. 이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듯 그 건물들의 위압적인 모습이 범상치 않았다. 다가가 보니 두 건물 모두 제분공장이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고 그 사이를 지나는 철길도 녹이 슬어 있어 이 제분공장에서 밀가루가 만들어지고 있는지 알만한 단서는 아무데도 없었다. 퇴락한 옛날의 영화들이 건물 벽의 각종 글씨들에만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이 정도 규모의 제분공장들이라면 아마 이 근동 사람들이나 먹여 살리는 데 만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차에 실려와 조달된 밀을 가루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그 기차로 다른 지역에 실어다 팔기도 했을 것이다. 나중에 보기로 하고 우리의 1차 관심처인 유콘 역사박물관[Yukon Historical Museum]’을 찾기로 했다.

 


유콘 제분소[Yukon Mill]-"유콘의 최고 밀가루"란 문구가 눈에 띈다


맞은편에 있는 또 하나의 제분소


유콘 역사박물관[Yukon Historical Museum]

 

그러나 작은 도시의 메인 스트릿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박물관을 찾았으나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책자에 소개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규정상 미리 예약을 해야 볼 수 있으나, 오늘은 그냥 보여주겠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가니 80대로 보이는 깨끗한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은 캐롤(Carol Knuppel). 이른바 자원봉사 큐레이터였다. 건강은 좀 안 좋아 보였으나 맑고 지성적이며 자신들의 향토 역사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지식인이었다.

 


유콘 역사박물관의 큐레이터 캐롤


대화를 나누고 있는 캐롤과 백규 

 


생활사 관련 소장품을 설명하고 있는 캐롤


캐롤과 전직 소방관인 남편, 그리고 백규

 

폐교된 초등학교를 1 달라에 주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개관한 박물관이었다. 우리가 이미 목격하고 온 밀가루 공장 유콘 밀(Yukon Mill)을 중심 컨셉으로 박물관의 콜렉션은 이루어져 있었다. 캐나디언 카운티(Canadian County)에 속한 유콘은 1891년 스펜서(A. N. Spencer)에 의해 세워졌으며, 오클라호마시 인접 도시로 존속되어 왔다. 캐나다 카운티의 유콘 구역에서 있었던 골드러쉬(gold rush)를 바탕으로 명명된 유콘 시티가 지금은 오클라호마시티 직장인들의 베드타운 역할을 하고 있지만, 원래는 이 지역 농업의 중심지로서 대규모 제분작업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그런 역사적 바탕 위에서 비로소 우리는 Yukon Mill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유콘의 시민들은 Yukon Mill에 대단한 프라이드를 갖고 있다는 말로 큐레이터 캐롤의 설명은 시작되었다.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체코인들의 자본으로 세워진 것이 이 제분소들이었다. 1891년 이 도시가 세워지고 철도까지 부설되자 이 도시는 급속히 번성하게 되었다. 1898년에 이르자 이 도시는 체코 이민자들의 보금자리로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유콘은 '오클라호마의 체코 수도'로 알려질 정도였다.

 


박물관에 통째로 기증된 이발소


박물관 행사를 후원한 지역의 기업들


박물관 소장 사무용품


통째로 기증받아 전시하고 있는 치과의원


유콘시에 관한 신문기사들을 스크랩해 놓은 자료들


통째로 기증받아 전시하고 있는 잡화상 콜렉션

  

1893년에는 소규모 제분공장인 유콘 제분 곡물 회사[Yukon Milling and Grain Company]가 사업을 시작하여 급속히 성장했고, 1915년에는 해외로 곡물을 수출까지 하게 되었다. 그 첫 제분소는 없어진지 오래지만, 대형 곡물창고는 지금도 66번 도로와 철로가 만나는 지점에 서 있었다. 지금도 건물 북쪽의 외벽에는 유콘 제분소[Ykon Mills]”, “유콘 최고의 밀가루[Yukon’s Best Flour]” 등의 글자들이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동쪽에는 유콘 최고의 밀가루[Yukon’s Best Flour]/미국 최고급 근대 제분소[No finer or more modern mills in America]/유콘 제분 곡물 회사-유콘 오케이/유콘은 오클라호마의 체코 수도[Yukon Czech Capital of Oklahoma]” 등의 글귀들이 새겨져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 정부는 이 회사로부터 많은 밀가루를 사다가 굶주린 동맹국들을 도왔다는데, 그 덕에 이 회사는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유콘밀 관련 자료들과 설립자들


유콘밀 관련 자료들

 

유콘 제분소를 중심으로 하는 이 지역 산업과 경제 관련 생활사 콜렉션들을 설명한 다음, 캐롤은 우리를 1층으로 인도하여 이 학교를 거쳐 간 졸업생들과 교사들의 사진이 가득한 방을 보여주었다. 사진은 물론 각종 교과서, 학용품, 학교 비품, 생활기록부 등 학교와 학생들에 관한 생생한 자료들이 방 안에 그득하였다. 일종의 살아있는 아카이브(archive)였다.

 


학교 졸업생 관련 자료들


학교 졸업생 관련 자료들


1959년 교사들 사진

 

***

 

박물관은 작았지만, 그곳의 콜렉션들은 1세기 이상 지속되고 있는 이 도시의 삶을 보여주는 스토리의 원천이었다. 설명을 들으며 폐교를 비싼 값에 매각, 처분하는 우리나라가 문득 생각났고, 무사려한 처사가 나를 많이 안타깝게 했다. 이곳에서는 폐교를 단 1달라에 이 지역 사람들에게 넘기고, 그 공간을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쓰도록 도와주고 있다 한다. 이미 썩어버렸거나 엿장수들의 손에 엿 값으로 넘어가 지금은 모조리 사라진 우리 고향의 각종 생활사 자료들을 보관, 전시할 지역 박물관을 폐교에 만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리 비까번쩍한건물로 우리의 외면을 치장한들 무엇 하랴. 역사와 스토리가 빠진 도시는 영혼이 빠져나간 인간의 육체나 마찬가지! 그런데 이들은 폐교를 활용하여 자신들이 스스로 모은 생활사 자료들을 박물관으로 만들고, 이 도시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주민들은 자원봉사 큐레이터 역할을 함으로써 선대로부터 이어온 삶의 모습과 문화를 계승, 보존하며 후대로 이어주고 있었다. 자신들의 삶에 대한 자부심과 철저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66번 도로의 역사성과 유콘 시티에 대한 부러움을 함께 느끼며, 우리는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입구 쪽 코너에 세워놓은 박물관 간판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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