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1. 6. 03:45

 

 


세미놀의 초기 생활상(주방의 모습)

 

 


세미놀 족 주술사 부녀(정면의 사진은 옥수수밭에서 의식을 행하는 장면)

 

 


주술사의 의식(儀式)

 

 


주술의식을 행하고 있는 주술사

 

 


세미놀 여인과 옥수수

 

 


옥수수의 정령

 

 


집 안에 저장한 옥수수

 

 


옥수수의 정령

 

 


플로리다 세미놀 족에 남아있는 Green Corn Dance

 

 


세미놀 족 처녀와 거북이

 

 


추장을 중심으로 앉아있는 세미놀 족 남자들

 

 


세미놀 족 여인들의 삶과 전통복장

 

 


세미놀 족 부엌도구들과 주식인 옥수수

 

 


세미놀 족 메디신 맨(Medicine Man)이 사용하던 주구(呪具)

 

 

 

놀라운 세미놀(Seminole) 인디언들()

 

 

세미놀 족이 전통시대에 풍요를 기원하던 의식들은 사진이나 그림으로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었다. 주술의식을 통해 인간과 신을 매개하던 현존 주술사의 주술의례는 전시되어 있었으나, 기대했던 그린 콘 댄스리본 댄스버팔로 댄스페더 댄스 등 다양한 의미가 함축된 군무(群舞)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어렴풋이나마 자연물들에 정령(spirit)이 있다고 믿어온 그들의 전통신앙이 그림으로, 실제 행위로 구현된 모습을 전시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주술사가 그들의 주식(主食)이었던 옥수수 밭에서 정령의 존재를 불러오는 듯한 그들의 의식이 아주 흥미로웠다. ‘먹는 것속에 자신들의 안위나 세계질서를 좌우할 힘이 내재되어 있다고 믿고, 그것을 소중히 대하여 온 그들의 태도는 매우 합리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다. 삶을 유지하는 데 곡식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면, 곡식을 관장하는 초월적 존재나 힘이야말로 가장 높은 곳에서 인간사의 모든 면을 관장하는 권능을 지녔다고 생각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그린 콘 댄스(Green Corn Dance)는 그런 생각이 극적으로 표출된 집단예술이다.

 

전통시대의 북미 인디언 종족들은 자신들이 옥수수와 동질적 존재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 모두에게 파종 축제, 수확 축제와 그린 콘 세리머니 등 옥수수에 관한 축제들이 있는 점이 그 방증이었다. 옥수수가 익어갈 무렵, 혹은 수확 전 몇 주일에 걸쳐 계속되는 것이 그린 콘 세리머니이며 그 축제의 중심이 바로 그린 콘 댄스였다. 그들은 그린 콘 댄스가 열릴 때까지 새로 익은 옥수수를 먹거나 손을 대는 일은 신을 모독하는 죄라고 생각했다. 흡사 우리나라에서 천신(薦新)’의례를 마친 다음 본격 수확을 시작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리라. 인디언 사회에서 플로리다의 세미놀 인디언들만이 아직도 5월의 그린 콘 댄스를 연다고 하는데희미하게나마 그 전통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오클라호마 세미놀 네이션 아닐까. 그런 점에서 그 시대의 주술사도, 평범한 인간들도, 정령을 불러내어 풍요와 자신들의 안위를 호소한 행위들에서 그 시대 나름의 보편적 합목적성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미놀의 역사나 의례 등 전통적인 삶을 묘사한 현대 예술가들의 그림들이 독립된 공간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속에 흥미로운 그림 하나가 있고, ‘뱀으로 변한 아우라는 제목이 합당할 법한 설화 한 편이 적혀 있었다. 독자들의 흥미를 위해 그 설화의 서사적 골자를 들기로 한다.

 

 

세미놀 형제가 마을을 위해 사냥하러 나갔다/다음날 하루 종일 비가 내려 사냥을 못하다가 오후 늦게 개자 형은 사냥을 포기하고, 가지고 있던 사슴고기로 요리를 시작했다./밖으로 나갔던 동생은 두 마리의 큰 물고기 배스를 잡아왔다./그는 설명하기를, ‘이 물고기들이 근처 호수에서 길바닥으로 튀어 올라와서 잡았다고 했다./형이 그 물고기들을 놓아주고 오라 하자, 동생은 펄쩍 뛰며 요리를 해 먹었다./한밤중 동생은 소리를 지르며 형을 불렀다./동생의 모기장으로 가자 동생은 형에게 내가 뱀이 되고 있어. 형이 먹지 말라고 하는데도 먹었더니, 이것 좀 봐!’라고 놀라며 소리쳤다./형이 불을 켜고 자세히 보자 동생의 다리들은 이미 뱀의 꼬리가 되어 있었다./동생이 형에게 내일 가족들을 데리고 호수 가의 큰 통나무로 와서 태양이 중천에 오르거든 통나무를 네 번 쳐. 그렇게 하면 나를 볼 수 있으니, 그렇게 해줘. 나는 그들을 만나 할 이야기가 있어.’라고 했다/다음 날 형은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호수로 와서 둥근 달 아래 캠프를 하며 다음 날 해 뜨기만을 고대했다./다음 날 해가 중천에 오르자 가족들을 데리고 통나무로 가서 동생의 말대로 통나무를 네 번 두드렸다./그가 네 번 두드리자 호수 밑에서 거품이 올라오고 큰 뱀의 머리가 올라왔다./아이들이 무서워하자 어른들은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한 다음, 뱀이 하는 말을 듣고자 했다./뱀이 호수 표면으로 떠올라 그의 가족들이 서 있는 호숫가로 주르르 미끄러져 왔다./뱀은 천천히 그들에게 움직여 가며 가까이 오세요. 이게 나예요. 말씀드릴 게 있어요. 잘 들으세요. 이후로 나는 다시는 말을 할 수 없어요. 내가 물고기들을 닦고 요리하여 먹은 것이 잘못된 일이었어요. 나는 뭐가 더 좋은지 알고 있었지만, 우리 문중 어른들의 금지법을 위반했어요. 나는 지금 그 벌을 받은 거예요. 여러분이 떠난 후에도 나는 우리 가족이 나에 관하여 나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요. 장래를 생각하고 여러분의 삶을 살아가세요. 나는 결코 돌아갈 수 없어요. 이 호수는 나의 집이 될 거예요. 나는 이 물 속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갈 거예요. 여러분 모두 돌아가거든, 결코 이 호수에는 돌아오지 마세요. 일단 여러분 모두 떠나면, 내 모든 기억들은 사라져서 여러분을 전혀 알아보지 못할 거예요. 나는 사악해져서 여러분을 해칠 거예요. 그것이 내가 살아갈 뱀의 삶이예요. 다만 좋았던 일들만을 기억하고 나를 용서하세요.’라고 말하고 나서 그의 형에게 머리를 돌리고 나는 형이 우리 가족을 도와주시고 그들에게 고기를 나눠주시기를 바라요. 내 아들들이 형처럼 좋은 사냥꾼이 되도록 가르쳐 주세요. 그 아이들이 제 어미를 돌보도록 해주세요.’라고 말했다./그 사냥꾼의 친구[*brother가 이곳에서는 friend로 바뀌어 있음. 착오로 보임-인용자 주]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그 뱀이 이제 나는 저 위로 올라가니 여러분은 내 몸 전체를 잘 보세요.’라고 말했다./그가 그렇게 하자, 모든 사람들은 그가 아주 크고, 큰 카누보다 더 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갑자기, 뱀은 그가 떠올라 온 물속으로 들어가 호수 가운데로 들어가기 시작했다./뱀은 그의 꼬리를 물 밖으로 내밀고 그들에게 흔들었다./그런 다음 그 뱀은 깊이깊이 큰 호수의 검은 물속으로 내려갔다./슬픔을 느끼며 그의 가족들은 큰 호수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고, 다시는 그곳에 오지 않았다.”

 

 

보는 사람에 따라 이 설화의 주지(主旨)는 달라지겠지만, 물고기 배스를 잡아먹은 행위가 어른들의 금단법(禁斷法)[Forbidden Law]’을 어긴 것이라는 말로 미루어, 아마도 배스는 그가 속한 문중, 즉 클랜(Clan)의 상징 동물이었을 것이다. 당시 인디언 사회에서 클랜의 상징동물을 신성하게 여기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불문율이었다. 따라서 상징동물을 해치면 하늘의 벌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을 2세들에게 교육할 필요가 있었고, 그런 의도에서 이런 설화는 나왔을 것이다.

이 외에도 진기한 컬렉션들이 많았다. 예컨대, ‘Military Corner’에서 만난 한국전 관련 컬렉션들은, 한국전을 바라보는 현재의 관점과 한국인들을 바라보는 당시 그들의 관점이 매우 따스하고 긍정적이라는 점에서 감동적이었다.[미국통신 41 참조] 자기 민족의 젊은이들을 낯선 나라의 전쟁터에 보내면서 얼마나 걱정이 많았을까. 그들이 만들어 자국 병사들의 교육에 썼을 그 자료들에는 그런 걱정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자식에 대한 정이 지극한 우리네 부모들과 그들의 정서가 동질적임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

 

애당초 플로리다에 살던 세미놀 족의 일부가 오클라호마까지 오기까지 많은 고통이 따랐을 것이다. ‘눈물의 여정[Trail of Tears]’은 다른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끔찍하게 겪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오클라호마 인디언 구역 내에서도 소수자로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지만, 그들 나름의 화려한 문화와 내면세계, 혹은 역사에 대한 자부심만은 확실하게 지닌 채 살아 온 것으로 보인다. 결국 미국의 체제에 순응하여 그들의 일원으로 정착했고, 그들의 생활양식에 동화되어 오긴 했지만, 아직도 언어와 문화를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지켜 가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소수 부족이면서도 개명(開明)된 다섯 종족 가운데 하나로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는 그들의 위치와 현실적인 활동이 바로 이런 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물고기 배스를 삶아먹은 죄로 뱀이 되고 있는 동생을 안고 있는 형

 


세미놀 족 여인들의 전통문양 치마

 


세미놀 족의 전통문양

 


세미놀 족의 집안 살림들

 


세미놀 족 전통 가옥의 생활사 자료들

 


세미놀 족 전통 생활예술 자료들

 


함께 방아를 찧고 있는 세미놀 족 여인들

 


매 나무[Wheeping Tree)에 죄인을 매달고 회초리형을 가하고 있는 세미놀 족 관리들

 


세미놀의 대표적 고등교육기관인 에마하카 아카데미(Emahaka Academy)와 두 명의 교육 공로자
[왼쪽이 교육자 앨리스 브라운(Alice Brown), 오른쪽이 윌리엄 패커 블레이크(William Packer Blake) 목사] 

 


왼쪽의 사진은 세미놀 네이션의 대표이자 오클라호마 주 의회의 첫 여성 의원이었던
앨리스 로버츤(Alice Robertson)과 그녀의 다섯 딸 및 세 손녀들

 

 


Military Corner에 전시되어 있던 한국전쟁 관련 자료들
[한국 및 한국인들에 관한 소개의 그림이나 필수 회화 내용]

 


한국전에 나가는 세미놀 족 병사들의 교육에 쓰인 것으로 짐작되는 한국인들의 캐리커츄어
['한국인들은 우아하고 자부심 강한 사람들'이란 설명이 인상적임]

 


세미놀 족 관련 교회 자료들

 


위 사진 속에 들어 있는 위워카 지역 감리교회의 모습

 


위워카의 시가지를 재구해 놓은 모습

 


당시 의원의 진찰실을 송두리째 기증받아 전시하고 있는 모습

 


1966년의 세미놀 네이션 창립[1866] 백주년 기념식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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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4. 1. 6. 02:45

 

 


촉토 내셔널 히스토리 뮤지엄에서 63번과 270번 하이웨이를 번갈아 타며 두 시간 이상을 달려 세미놀 족의 본거지인 위워카에 도착했다.

 

 


세미놀 네이션 뮤지엄(Seminole Nation Museum)

 

 


오클라호마 주에 강제이주된 39개 인디언 종족의 고향들[세미놀 족의 고향은 플로리다였음]

 

 


세미놀 네이션 뮤지엄 문 앞에서 만난 세미놀 족 전사의 두상

 

 

 

 

놀라운 세미놀(Seminole) 인디언들(1)

 

 

 

 

세미놀 족을 만난 것은 참으로 우연이고 행운이었다. 브라이언 군의 졸업 축하 파티에 참석했을 때, 그의 미국인 친구 한 사람에게 고향을 물었더니 세미뇰이라 했다. ‘이란 발음에 혹시 스패니쉬 계통인가 하고 물었더니, ‘인디언 부족 이름에서 온 것이라고 했다. 그날 밤으로 그것이 인디언 부족 이름이자 그 부족의 네이션이 있는 도시의 카운티 이름임을 확인하게 되었고, 스펠 ‘Seminole’세미뇰로 들은 것은 내 귀의 착각이었던 듯, 다른 미국인들에게 다시 물으니 모두 세미놀이라고 했다. 세미놀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치카샤와 촉토를 거쳐 드디어 그 실체를 육안으로 보게 되었다. 세미놀이 그동안 돌아 본 체로키치카샤촉토 등과, 앞으로 돌아 볼 크리크(Creek)와 함께 개화된 다섯 종족[Five Civilized Tribes]’을 이룬다고 하니, 적잖은 호기심이 발동된 것도 사실이었다.

 

'촉토 내셔널 히스토리컬 뮤지엄(Choctaw National Historical Museum)'을 나선 우리는 키아미치 산간을 꿰뚫는 63, 270번 하이웨이를 번갈아 타고 점심을 훌쩍 넘긴 무렵에서야 세미놀 카운티의 위워카(Wewoka) 시티에 도착했다. 뭔가 잔뜩 쏟아질 것만 같은 우중충한 날씨에 퇴락한 시가지의 모습이 겹치니 분위기가 음산했다. 다운타운엔 빈 상가들이 즐비했고, 페인트가 벗겨져 초라해 보이는 집들도 부지기수였다. 다른 지역의 상당수 중소도시들에서 이미 목격한 것처럼 이 도시도 기름기가 빠져 있었다. 아마도 원유의 고갈로 지역경기가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기가 좋은 대도시로 사람들이 빠져나가 텅 빈 집들은 사람의 온기를 쏘이지 못한 채 삭아들고 있었다. 살아있는 레스토랑 한 군데를 간신히 찾아내 시장기를 지우고, ‘세미놀 네이션 뮤지엄(Seminole Nation Museum)’에 갔다. 아담하고 아름다운 건물. 세미놀 사람들의 미학이 느껴지는 건축이었다.

 

연방정부에 의해 인정된, 미국 전역의 세미놀 족 집거지는 세 군데로 알려져 있다. 오클라호마 주의 세미놀 네이션, 플로리다의 세미놀 트라이브, 플로리다의 미코수키(Miccosukee) 트라이브가 그것들이다. 물론 세미놀 족의 원 고향은 플로리다이며, 2차 세미놀 전쟁 이후 8백명의 흑인 세미놀 인들을 따라 플로리다에서 인디언 거주구역으로 강제 이주되어 온 3천명 세미놀 인들의 후예들이 호클라호마 주에 살고 있다. 따라서 오클라호마의 세미놀 네이션은 세 군데 집거지들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우리가 찾아온 이곳 위워카 시티가 바로 오클라호마 세미놀 네이션의 본부가 있는 곳인데, 현재 등록 인원 18,800명 가운데 대략 13,500여명이 오클라호마 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세미놀 카운티에는 대략 5,3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1936년 인디언 재건법이 공표되면서 세미놀 족은 그들의 정부를 되살려 내기 시작했으며, 부족의 사법 관할지역 또한 그들의 다양한 자산들이 포함되어 있는 세미놀 카운티를 카버하게 되었다고 한다. 플로리다에 남아있던 수백 명의 세미놀 인들도 3차 세미놀 전쟁을 겪으면서도 미국 정부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드디어 평화를 찾게 되었으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후예들이 연방정부로부터 인정을 받는 두 개의 세미놀 트라이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들 조직된 세미놀 인들과 조직되지 않은 부족원들이 함께 1823년 미국 정부가 강제로 뺏어간 24백만 에이커의 땅에 대하여 1976년 기준으로 16백만 달러 가치의 정착지를 받아냄으로써 분쟁은 완결된 셈이다. 따라서 현재 세미놀 족이 오클라호마 한 군데와 플로리다 두 군데 등 세 지역으로 나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세미놀 큐레이터의 설명에 따르면, 세미놀 인들의 말은 무스코기 어[Muskogean Language]에 속하는데, 전통적으로 서로 통하지 않는 두 말, 즉 미카수키(Mikasuki)와 크리크(Creek)어를 동시에 사용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크리크가 정치사회적 측면의 지배언어였으므로, 미카수기 어를 쓰는 사람들도 크리크 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다. 조사 결과 2000년대 초까지 부족원의 25% 정도가 크리크와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나머지는 영어만 쓰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현재 오클라호마에 있는 네이션의 대부분 세미놀 인들은 영어를 제1언어로 쓰고 있으나, 부족 차원에서 전통적인 크리크 어를 살려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한다.

 

다른 인디언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도 사회구조로서 가장 기본적인 가족 바로 위에 클랜(Clan)이란 단위가 있었다. 아주 오랜 옛날에 어떤 동물이나 초자연적 정령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고난을 견뎌 낸 것은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혈통으로 연결되는 사람들이 특정 동물의 정령들과 연관을 맺게 된 것이다. 치카샤 네이션에서도 촉토 네이션에서도 누구나 특정 클랜에 속해 있고, 너구리악어 등 어떤 동물이 자기 클랜의 상징동물인지 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점은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불문(不文)의 제도 아래, 세미놀의 성인들은 자기네 부모가 속한 클랜들 밖에서 결혼상대를 찾아야 할 의무를 갖고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동성동본 혼인금지와 같은 차원의 제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근친혼을 금함으로써 종족을 건강하고 우수하게 유지하려는 지혜의 발로라고 할 수 있었다.

 

***

 

문을 열고 뮤지엄에 들어가니 실제 모습대로 전시된 세미놀 족의 전통 생활양식이 눈을 끌었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주방과 거실이 함께 붙어 있었는데, 설명을 위해 그 옆에 붙여놓은 클레이(Clay MacCauley)의 말이 흥미로웠다.

 

세미놀의 가정에 들어가면 누구나 사람들이 모이는 중심에 모닥불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곳은 요리가 준비되는 장소이고, 가족과 그들의 친구들이 사교를 나누는 장소이며, 스토리가 만들어지고 이야기되는 장소다.”

 

지금까지 만나본 모든 인디언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세미놀 족도 가족 간의 유대나 사랑을 중시한다는 점과 모계사회라 할 정도로 여성의 발언권이나 힘이 절대적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모닥불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수프와 그 주위에 앉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들, 다 된 음식을 각자에게 덜어주는 주부 등 익히 보는 가족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이 뮤지엄의 첫 공간에 제시되어 있었다. 아마도 세미놀 인들은 끈끈한 가족공동체의 전통을 외부 손님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그 뿐 아니었다. 전통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활사 자료들과 예술품 들이 적절하게 분류, 전시되고 있었다.

 


 

각 부족의 구역이 할당된 시기와 점유지의 성격

 


조정이 끝난 1907년까지 각 부족의 점유지 현황

 

 


세미놀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초기 네이션 깃발

 

 


오클라호마 주 내 39개 인디언 부족의 분포 지역 리스트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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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4. 1. 2. 09:07

 

 


휠락 아카데미 입구

 


휠락 아카데미의 관리동 건물[Administration Building]

 


휠락 아카데미 박물관(Wheelock Museum]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붕괴의 위험이 높은] 11개의 건물에 포함된 휠락 아카데미

 


휠락 아카데미의 한 부분

 


휠락 아카데미의 기숙사(?)

 


손님들이 묵던 '객사' 터[Eagle Creek Guest Cottages]

 


휠락 아카데미 박물관 앞에 벽돌에 새겨 만든 기증자들 명단

 

 

 

교육으로 일어선 촉토 족의 어제와 내일(완)

 

 

 

레드 리버 뮤지엄 관람을 끝으로 아이다벨을 떠나 다시 70번 하이웨이를 타고 20분 정도 가니 맥커튼(McCurtain) 카운티의 밀러튼(Millerton)이란 작은 도시가 나왔고, 다운타운 직전에 오른쪽으로 빠져 나가 10분 정도 달리니 산 속 조용한 곳에 제법 큰 규모의 학교 휠락 아카데미(Wheelock Academy)가 나타났다. 촉토 족의 선진성과 교육열을 상징하는 교육기관이다. 들어가니 드넓은 언덕 위에 여러 채의 건물들이 서 있었는데, 대체로 낡아서 어떤 건물은 금방 무너질 것 같았다. 1832년에 건립되었고, 가장 이른 교육기관들 가운데 하나다. 우리가 거쳐 온 밀러튼의 북동쪽 1~1.5마일, 아이다벨의 북쪽으로 10~12 마일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사실 이 학교는 어린 소녀들을 위한 미션 학교로 시작되었다. 무어(Moor)의 인디언 학교 설립자인 엘리저 휠락(Eleazar Wheelock) 목사의 이름을 교명으로 딴 것인데, 무어의 인디언 학교는 나중에 다트머스 칼리지(Dartmouth College)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1839년에 기숙사에 입사하려는 학생들이 몰리자 캠퍼스 건물에 두 층의 기숙사가 증축되기도 했다. 1842년 촉토 네이션의 첫 아카데미가 된 이 학교는 다섯 문명화된 인디언 종족들에 의해 학교 시스템의 모범적 사례로 활용되곤 했다. 휠락의 교사들은 교육자이자 선교사 역할을 담당했다.

 

그들은 교과목[가정경제, 영어, 지리, 역사, 과학]은 물론 바이블을 가르치고 매사에 행동으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오전 5시간 동안 이런 교과목들은 가르치고, 오후에는 4시간 동안 물레 돌리기, 베짜기, 뜨개질, 바느질, 재봉질 등 가사(家事)에 도움 되는 과목들을 가르쳤다 한다. 남북전쟁 때 폐쇄되었었고, 1869년 화재로 상당 부분이 소실되었으며, 그 뒤 많은 우여곡절들을 겪은 뒤, 현재 이 학교는 오클라호마 주에서 가장 위험에 처한 역사 자산의 리스트에 오르게 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이들이 이른 시기에 풍광 좋은 곳에 기숙학교를 건립하고 2세 교육에 열을 올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미개하다는 우리의 편견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주해온 백인들에게 무참하게 당하고 난 그들이 절실하게 깨달은 것은 2세 교육이었다. 지배자들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월등하게 머리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휠락 아카데미는 바로 그 생생한 증거였다.

 

***

 

휠락 아카데미를 출발한 우리는 래티머(Latimer) 카운티, 투스카호마(Tuskahoma)의 촉토 내셔널 히스토리 뮤지엄(Choctaw National History Museum)으로 달렸다. 계속 이어지는 키아미치 산맥(Kiamichi Mountains)은 평원 일색인 오클라호마 주의 일반적인 모습과 전혀 달랐다. 산들은 높지 않았으나, 주변의 숲이 울창하고 왕래하는 차들도 없는 산길이 호젓했다. 하늘은 흐려오고, 바람도 슬슬 불기 시작했다. 일기예보를 보고 온 우리의 초조한 마음과 달리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주변 목장의 소들이 부러웠다. 휠락으로부터 두 시간을 족히 달려 간신히 투스카호마의 뮤지엄에 도착하니, ‘날씨 때문에 일찍 퇴근한다는 안내문이 출입문에 붙은 채 닫혀 있었다. 이 뮤지엄을 본 다음 세미뇰 네이션까지 가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투스카호마에는 잘 곳도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20분 거리의 클레이튼(Clayton)으로 이동,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모텔에서 하루를 묵을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일찍 뮤지엄에 도착하니 직원들이 막 출근해 있었다. 겉모양처럼 뮤지엄의 내부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촉토 인들의 생활사, 네이션의 지도자들, 군인들 특히 암호 해독병들의 활약상, 휠록 아카데미를 비롯한 교육의 현장, 민속자료, 예술작품 등등. 많은 컬렉션들이 촉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설명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이곳에도 눈물의 여정(Trail of Tears)’은 강조되어 있었다. 국가 권력에 의해 고향으로부터 쫓겨나 다른 지역에 강제로 정착했던 참담한 기억은 이들에게도 일종의 집단적 트라우마로 남은 듯 했다. 뮤지엄 건물 밖에도 볼 것들이 많았다. 그들이 숭상해오던 붉은 전사(Red Warrior)’, 부족의 지도자들, 전몰용사 추모비[그 가운데 6데25 당시 희생자들의 추모비도 있었다. 미국통신 41 참조] 등이 있었다. 길 건너에는 촉토 족의 전통마을이 조성되어, 주거환경, 공동체 활동 등 그들의 옛날을 보여주고 있었다.

***

 

현장에서 접한 촉토 족의 역사와 문화는 말 그대로 언제든지 뛰쳐나올 것 같은 살아있는 화석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부심이나 자존심은 지금도 용광로처럼 펄펄 끓고 있었다. 맨 처음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한 그들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2세를 가르치고 깨우쳐 주지 않으면 자신들의 미래가 없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 관해 갖고 있던 오만과 편견은 그들 앞에 서는 순간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들의 상당수는 이미 미국의 주류사회에 편입되어 미국인으로 살고 있지만, 그들의 내부에서 약동하는 혈맥은 오롯이 촉토인의 그것임을, 드넓은 이곳 그들의 네이션에서 우리는 발견하게 되었다.

 

 


촉토 네이션 입구의 아치

 


촉토 네이션 뮤지엄의 표지 비석

 


촉토 내셔널 히스토리 뮤지엄(Choctaw National History Museum)의 모습

 


뮤지엄 앞에 세워져 있는 붉은 전사의 상

 


뮤지엄 앞 뜰에 세워져 있는 독수리 푯대

 


촉토 네이션 문장[실(Seal), 紋章]

 


뮤지엄 건너편에 만들어진 촉토 족 전통마을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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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3. 12. 26. 09:16

 

 

 

길 가다가 아이오와(Iowa) 족을 만나다!

 

 

 

 

 

 

미국에 온 이후 갖가지 일들에 정신이 팔린 채 살아왔으나, 그래도 잊지 않고 찾아다니는 분야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다. 지난 10월 털사(Tulsa)에서 34일간 진행되었던 ‘2013년 풀브라이트 강화 세미나[2013 Fulbright Enrichment Seminar]’에 참여하여 오세이지(Osage) 인디언 보호구역을 방문한 이래 11월 하순 체로키(Cherokee) 인디언 네이션까지 답사함으로써 문명화된 다섯 인디언 부족들[Civilized 5 Indian Tribes]’ 중 두 개를 체험한 셈이었다. 그러나 오클라호마 주만 해도 36개의 인디언 부족들이 주로 남부지역에 터를 잡고 있는데, 최소한 다섯 부족만이라도 접해보는 것이 내 목표였다. 그래서 이번 겨울방학 초반에 그 목표를 달성하고자 나선 길이었고, 그 행선지가 바로 치카샤(Chickasha) 인디언 네이션이었다.

 

***

 

20131216일 아침 10시쯤 집을 나섰다. 첫 목표지는 치카샤 인디언 네이션이 있는 아다(Ada)였고, 거기로 가기 위해 타는 길이 177번 하이웨이였다. 177번길의 스틸워터 시내 구간은 퍼킨스 로드(Perkins Road)였고, 묘하게도 그 길은 퍼킨스 시티(Perkins City)로 연결되었다. 즉 퍼킨스 로드를 따라 스틸워터에서 벗어나 30분쯤 가니 퍼킨스 시티가 나오고 그로부터 남쪽으로 계속 4마일쯤 달리다가 눈에 번쩍 뜨이는 표지판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Iowa Tribe of Oklahoma”란 글자들 밑에 이상한 모양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앙증스러운 표지판이었다.

 

 


스틸워터 시내의 퍼킨스 길(Perkins Rd.)

 


177번 도로에서 2~3분 가량 들어간 B의 위치에 아이오와 네이션이 있다.


 


177번을 달리다가 길가에 있는 이 표지판을 발견했다.

 

 

부족을 뜻하는 ‘tribe’란 말과 독수리 깃털로 만든 문장의 디자인이 분명 인디언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이전에 아이오와 주[Iowa State]’는 들어보았으되, 그런 이름을 달고 있는 인디언을 들어본 적이 없던 터라 의아해 하면서도 처음엔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1~2분 정도 달리다가 아무래도 그냥 지나칠 순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해도 그것이 인디언 부족인 이상 그냥 가면 나중에 후회가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차를 돌려 이곳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하이웨이로부터 빠져나가 5분 정도 들어가니 과연 오하이오 네이션이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관리 사무소에 들어가니 20대 후반의 아가씨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것저것 물었으나 기초적인 사항을 제외하고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책임 있는 인사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묻자 한참 만에 족장[Tribal Chairman]이 나와서 나를 자기 방으로 불러 들였다. 수인사를 나눈 뒤 그에게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졌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는 자기네 부족의 과거와 현재가 술술 흘러나왔다.

 

 


네이션 입구의 간판


아이오와 네이션


 


아이오와 네이션의 친절한 아가씨 Miss Kent Tehavno

 

 

토착 원주민들 가운데 하나인 아이오와 부족은 (연방정부와의) 각종 조약과 법령으로 인정된 자치정부를 갖고 있는, 말하자면 독립적 주권국가의 중심에 있다고 했다. 자체 헌법과 각종 법률, 통치체제를 갖고 있다는 설명이었는데, 정말로 당신네 공동체가 독립국가냐고 물으니, 미국민이지만 어느 정도 자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식으로 정정하기도 했다.

 

 


아이오와 트라이브의 족장[Tribal Chairman] Mr. Gary Pratt

 

 

아이오와 사람들은 자신들을 회색 눈[grey snow]’을 뜻하는 바코제(Bah-Kho-Je)’로 부르는데, 그 말은 겨울 몇 달 동안 난방 연기로 그을린 눈에 뒤덮인 그들의 집이 회색으로 보인 데서 나왔으며, 아이오와 주[Iowa State]의 이름도 아이오와 부족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했다.

 

오네오타(Oneota) 지역민들의 후손인 아이오와 부족은 1600년대에 남서 미네소타의 파이프스톤 쿼리(Pipestone Quarry)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1730년에는 북서 아이오와 오코보쥐(Okoboji) 호수와 스피릿(Spirit) 호수 지역의 마을들에 살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들은 아이오와 주 카운슬 블렆스(Council Bluffs) 인근에서 남쪽으로 이동했고, 18세기 중반에는 그들의 일부가 드 모인(Des Moines) 강으로 이동해 올라갔다. 당시 남아 있던 사람들은 스스로 미주리의 그랜드 플랫강(Grand and Platte River)가에 정착했고, 연방정부와의 조약에 따라 미주리, 아이오와, 미네소타 등의 땅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게 되었다. 연방정부와 맺은 1936년의 워싱턴 조약에 따라 그들 중 일부에게 네브라스카와 캔자스에 있는 그레이트 네마하 강(Great Nemaha River)을 따라 보호구역을 할당해 주었으나, 나중에 아이오와 족 일부가 오클라호마의 인디언 구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1883815일 날짜로 발령된 대통령령[Executive Order]에 의해 설립된 것이 원래 오클라호마 주 아이오와 보호구역이다. 나중에 아이오와 네이션은 두 부분으로 분할되었는데, 오클라호마의 아이오와족은 남부 아이오와이고, 캔자스와 네브라스카의 아이오와족은 북부 아이오와다.

 

 


오클라호마 주 인디언 분포 지도 가운데 Iowa 족의 구역

 

 

 

족장은 특히 자신의 부족이 강인한 정신력으로 고난과 불공평 등 그들을 억압한 역사의 시련들을 견디어 온 데 대한 자부심을 강하게 피력했으며, 아이오와 족은 현재 490명 이상의 등록 인구를 갖고 있으며, 페인(Payne), 오클라호마(Oklahoma), 링컨(Lincoln), 로건(Logan) 카운티 전역 혹은 부분들을 아우르는 사법 관할구역을 갖고 있다고 했다. 아이오와 족은 지역 행정 기관과 부족 기업들의 회계부서, 부족이 운영하는 경찰과 소방서 등을 포함 다양한 분야에서 160여명이 고용되어 활약할 만큼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명이 끝나고, 족장 뒤편에 있는 문장에 대하여 물었다. 인디언 부족들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들의 실(Seal) 즉 문장(紋章)이 가장 중요한 상징이라는 사실이었다. 각 문장에는 해당 부족들의 현실과 꿈, 그리고 철학이 응축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문장은 1978년 밥 머레이(Bob Murray)가 디자인한 것인데, ‘생명의 순환 고리를 의미하는 원은 신성한 독수리의 깃으로 장식된 아이오와 전사의 전투모를 상징한다. 원 안에는 신성한 파이프[담뱃대]가 있는데, 아이오와 족의 각 클랜(clan)은 그 자신들의 신성한 파이프를 클랜 우두머리 집에서 가까운 방어구역 안에 갖고 있으면서 각종 제사나 의식(儀式), 특히 평화와 동맹을 맺는 절차들에 사용했다고 한다. 원 안의 쟁기는 아이오와 족의 농경 전통을 나타내며, 원의 양쪽에 매달려 있는 총채 비슷한 털 자루는 전통적으로 버팔로의 은신을 본뜬 떨림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오와 족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활과 화살을 운반하는데 사용되었다. 원 아래 쪽의 독수리 깃털 네 개는 사방의 바람과 사계절을 나타내는데, 전통적으로 아이오와 족은 독수리를 존경해왔으며, 부족과 신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독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단순치 않은 의미가 바로 이 문장에 숨어 있었다.

 

 

 


아이오와 족의 문장

 


아이오와 족이 존경하는 독수리

 

 

족장의 설명을 듣고 난 다음 방문한 갤러리에는 부족의 삶을 보여주는 물건들과 예술품들이 가득했다. 비록 흩어져 있는 부족원들을 모두 합해 봐야 1000명이 채 되지 않는 소수그룹이지만,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이방 나그네의 눈에는 매우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비쳤다. 그러나 과연 이 작은 공동체가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이오와 족 부족 축제

 


갤러리에 전시된 Eric BigSoldier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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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3. 12. 15. 11:15

 

 

 

왜 우리는 이렇게 하지 못하는가?

 

 

 

어렵던 시절, 궁색한 현실에 비해 가당찮게 큰 욕구를 가졌었기 때문일까. 졸업식에 관한 내 추억은 온통 잿빛 일색이다. 1978년도 내 대학 졸업식은 참으로 우중충했고, 1981년도 석사학위 수여식과 1986년도 박사학위 수여식은 번잡하고 무성의하여 도무지 아무 감흥도 느낄 수 없었던, 그야말로 서운한행사들이었다그 후 대학인들의 타성이 고착되면서 졸업식에 관한한 행사를 위한 행사를 반복해왔고, 오늘날에 이르러 대학 졸업식은 지리멸렬그 자체로 전락해 버렸다.

 

독자 여러분 가운데 최근의 대학 졸업식에 가본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졸업생들은 식이 시작되어도 식장에 들어가지 않는다. 흡사 사진 찍는 일이 졸업식의 전부인양 카메라를 껴안은 채 식장 바깥에서만 어슬렁거린다. 모처럼 자식의 학교를 찾은 학부모들도 식장 안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들어가 봐야 재미 없고 지루하기만 할 것이며, 무엇보다 당사자인 자식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 기를 쓰고 들어가 앉아 있을 부모는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바깥은 인파로 북적대는데, 그 넓은 식장 안의 좌석들에는 석박사학위 받는 몇 사람과 수상자 몇 명만 듬성듬성 앉아있을 뿐이다.

 

왜 그럴까. 간단히 말하면, 졸업식을 주관하는 대학 측의 철학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졸업식은 학교당국과 교수들이 그 행사의 핵심인 졸업생을 위해 가족을 초청하여 갖는 학교 최대의 행사인데, 졸업생들이 철저히 소외 되고 있는 것이 한국 대학 졸업식의 현주소다. 

 

근래 어느 대학의 졸업식에 참석해 보았다. 그 넓은 단상에는 내빈들과 동문회 인사 등 외부 초청 인사들이 그득하고, 그 한 가운데 지역구 국회의원이 총장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총장의 연설이라는 게 왜 그리 장황하고 요령부득인지 참으로 한심했다. 하기야 우리나라 주요 일간신문들은 스피치 라이터가 써주는 큰 대학 총장들의 축사 전문을 경쟁적으로 싣던 때도 있었으니,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있을 수 없었다. 각 대학 스피치 라이터들의 글 솜씨나 한 번 맛보라는 이야기였을까. 내빈축사는 왜 그리 많으며, 내용 또한 중언부언(重言復言) 지루하단 말인가. 그 많은 졸업장과 상장들은 왜 하필 졸업식장에서 일일이 수여해야 하는가. ‘이하 동문(以下 同文)’을 일일이 외쳐대면서도 서너 시간을 끌어가니, 그나마 상장이라도 받지 못하는 대부분의 졸업생들이 앉아 있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런 고문을 당하고 나면 자신의 졸업이 어찌 영광스러울 것이며, 어찌 모교에 대한 사랑인들 생길 것인가.

 

***

 

그간 가까이 지내던 브라이언 군이 이 대학에서 2년을 단축하여 조기 졸업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 그 졸업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전기에 속하는 본 졸업식은 이미 5월에 있었고, 이번은 후기에 속하는 이른바 '코스모스 졸업'이었다. 규모가 작아 대충대충 진행되리라는 우려가 있었을 뿐 아니라, 대학 졸업식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도 오래 된 터여서 별 감흥은 없었지만, 정리로 보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졸업생들의 가족과 친지들은 물 밀 듯이 밀려들었으나, 모두 정시에 입장을 끝내고 경사 진 3면의 관객석에 안전하게 좌정했다. 식장인 실내 농구장의 바닥에는 졸업생들이 앉을 의자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고, 정면의 단상에도 그리 많지 않은 좌석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예정된 시각에 총장이 단상으로 나오더니 놀랍게도 그 스스로 식을 주재하기 시작했다. 총장의 말에 따라 이 대학 파이프 밴드가 행진곡을 연주한 뒤, 브라스 밴드의 연주에 맞추어 졸업생들이 두 줄로 들어와 마련된 의자에 착석하기 시작했다. 졸업생들의 착석이 끝나자 스코틀랜드 전통복장을 한 파이프 밴드의 연주와 선도로 단상에 앉을 인물들이 질서정연하게 입장했다. 그 다음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미국 국가[The Star Spangled Banner]우렁찬 목소리로 제창했다. 이어 오클라호마 주의 노래인 'Oklahoma'를 부른 다음 본격적인 졸업식이 진행되었다.

 


OSU 농구 경기장에 꾸민 졸업식장

 


졸업식장 전경(좌, 우, 뒷면 등 3면에 가족과 친지들이 앉아 있다)

 


가족과 친지들이 일어선 가운데 졸업생들이 줄지어 입장하고 있다.

 

총장은 우선 특별한 몇몇 손님들을 소개했고, 그 가운데 세 사람[주 교육위원회 의장, 교수협의회 의장, 오클라호마 주 하원의장]이 각각 1~2분 정도의 아주 간단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졸업축하 인사를 했으며, 이어 학위증 수여가 있었다졸업생들은 호명되는 대로 단상에 올라 총장, 학장, 학과장 등과 악수하고 사진 찍기 위한 포즈를 취한 다음 자기 자리로 내려가는데, 좌석 부근엔 해당 학과 교수들이 함께 모여 기다리다가 자리로 돌아오는 졸업생들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졸업생들이 호명되어 단상으로 올라갈 때마다 관객석의 가족이나 친지들은 괴성에 가까울 정도의 함성을 질러대는 장면들이었다. 졸업식의 즐거움을 그들은 그렇게 표현했고, 당사자들 또한 단상으로 나가면서 이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졸업생 모두를 단상으로 불러 올려 격려함으로써 그들에게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려는 배려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입장한 졸업생들과 객석의 가족 및 친지들이 일어서서
단상에 앉을 인사들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단상에 앉을 인사들이 입장하고 있다.

 


졸업생들에게 학위증을 수여하고 있다. 졸업생 좌석의 교차로에서
교수들이 축하인사를 건네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졸업장 수여가 끝나자 졸업생들도 단상의 인사들도 관객석의 가족이나 친지들도 함께 모교의 노래[OSU Alma Mater]’를 부르는데, 내 주변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얼마나 큰지 깜짝 놀랄 정도였다. '모교의 노래'가 끝나고 단상의 인사들이 줄 지어 퇴장한 뒤 졸업생들도 들어올 때의 역순으로 퇴장함으로써 졸업식은 끝이 났다.

 

***

 

그 흔한 꽃다발도 없었다. 식장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졸업생도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시간이 되자 악대의 선도를 받아 질서정연하게 들어왔고, 정확하게 준비된 의자를 모두 채워 앉았다어쩌면 이렇게 개인주의의 천국인 미국에서 마치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질서정연하게 행사를 진행할 수 있단 말인가. 식 초반에 그들은 자신들의 국가와 주가(州歌) 함께 소리 높여 부르며 단합정신[team spirit]을 확인하는 듯 했다어느 순서 하나 필요 이상으로 늘어지는 게 없었다. 모두가 졸업생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영예와 모교에 대한 자부심을 갖도록 치밀하게 조직된 극본을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모든 참석자들이 기립하여 국가와 주가 등을 제창하고 있다.

 


가족 및 친지들의 모습

 

사실 대학 졸업식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나였다. 그러나 식이 시작되면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일순 나를 긴장시켰다. 식순이 하나하나 진행되면서 서서히 감동이 일기 시작했다. 장황하거나 지루하지 않아 초점을 살리면서도 모두를 배려하는 세리머니는 예술 자체였다. 스피치에 참여한 모든 인사들도 하나같이 사전에 입을 맞춘 듯짤막한 멘트 속에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교훈을 담으려 노력한 것 같았다.  

 

이 대학과 아무런 관련 없는 나도 식이 끝나면서 내심으로 작지 않은 변화를 느꼈다. 그건 또 다른 버전의 감동이었다. 개인주의를 넘어선 단합정신. 여기서 미국의 무서운 힘이 나온다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미국에도 대학의 서열이 엄존한다. 그러나 그들은 무턱 댄 자기 비하자기 우월에 빠지지 않는다. 그 서열이란 모든 요소들을 반영한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자기 대학의 장점을 찾아 열심히 노력하는 데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이들의 최대 장점이다. 추운 날 담요를 싸들고 경기장에 나가 모교 응원에 참여하는 이 대학의 졸업생들. 그들이 바로 초강대국 미국을 유지해가는 사람들이다. 허구 한 날 좁쌀들끼리 비교하며 경쟁심만 부추기고, 모든 사람들을 자기 비하에 빠지게 하는 우리나라 대학들의 행태는 이쯤에서 청산해야 한다. 헛된 자존심을 버리고, 배울 건 배워야 한다.

 


브라이언(왼쪽에서 세번째)과 친구들

 


브라이언 등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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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성원

    벌써 수 십년 동안 한 해에 두 번 씩은 보았을테니 무질서 할 듯한 자유분방 속의 질서를 보게 된 놀라움 이해가 가고 부럽기만 할 따름이지. 요즘은 모르겠지만 우리는 예행연습 무지 많이 했었는데... 그러한 행위들의 지속적인 퇴적물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지금이라도 바꾸어야 하는데... 바꿀 수 있겠지? 아떻게 해야 할까?
    "개인의 존엄성을 중시한 개인주의와 행동을 필요로 하는 목표가 아닌(변질된) 욕심을 중시하는 이기주의?의 차이에서 초래된 결과물이 아닐까 " 라고 추측해 본다.
    20세기 말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나에게는 스스로 지키려고 노력하는 운전 습관이 한 가지 생기게 되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보행자 우선"
    5년전 호주의 멜번에서 유럽에서 보았던 "보핸자 우선"의 원칙이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젊은 훈전자들이었다.

    2013.12.16 23:12 [ ADDR : EDIT/ DEL : REPLY ]
  2. 백규

    성원, 참 좋은 말이네. 자네도 현지에서 그런 걸 느꼈구먼. 나는 미국사람들이 턱없이 자유롭고 무질서한 줄로만 알았거든. 천만에! 규정이나 법을 철저히 지키는 이들의 태도를 보면 참 존경스러워. 그 뿐인줄 아나? 어딜 가나 국기가 게양되어 있어. 심지어 교회나 성당에도 성조기가 펄럭이고 있어. 얼마 전 우리나라 장학사라는 작자가 어떤 행사장에서 "귀찮으니 국민의례를 생략하자!"고 했다던가? 교육의 최일선에 서 있다는 자가 그런 정도니 우리가 얼마나 속속들이 썩었는지 알 수 있지 않겠나? 사실 미국인들이 개인주의에 철저하지만, 애국심으로 뭉칠 때 보면 너무 무서울 정도야. 그들이 졸업식장에서 너나 할 것 없이 목청껏 그들의 애국가를 부르는 걸 듣다 보니 우리의 처지가 한심해지더군. 우리의 공공 행사에서 애국가 제창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 모두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부르는지, 마는지...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고 말하겠지만, 최소한의 형식도 갖추지 못하면서 무슨 내용을 논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 반성해야지.

    2013.12.17 23:27 [ ADDR : EDIT/ DEL : REPLY ]
  3. 나그네

    그런데 후기졸업이라 하지만, OSU의 졸업생이 이 정도밖에 안되는가요? 한국 대학의 졸업생도 이 정도 규모라면 이렇게 할 수 있으련만, 이토록 깔끔하게 하려면 수가 너무 많지 않을까요?

    2013.12.22 04:23 [ ADDR : EDIT/ DEL : REPLY ]
  4. 백규

    이 학교의 경우 후기졸업이라 해도 졸업생 수는 꽤 되지요. 그래서 졸업식을 세 번에 나누어 하네요. 이번의 경우를 보면, 12월 13일(금요일) 저녁에 대학원 졸업식을, 14일(토요일) 오전에는 'College of Human Sciences/College of Engineering, Architecture and Technology/Spears School of Business' 의 졸업식을, 오후에는 'College of Education/College of Agricultural Sciences and Natural Resources/College of Arts and Sciences' 등의 졸업식을 각각 갖더군요. 그러니 장소나 시간 등이 여유로울 수 있지요. 학부와 대학원 졸업을 한꺼번에 치루느라 졸업생, 학부모 등 수천 명이 북적대는 우리네 졸업식과는 상황이 다른 것 같습니다.

    2013.12.22 09:14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