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5. 3. 5. 17:19

 

 

정신 차립시다!-웬디 셔먼의 말을 듣고

 

 

#1 유럽 여행 중, 독일의 본(Bonn)에 들른 적이 있다. 여행 정보가 필요하여 시내의 관광안내소를 찾았다. 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맞더니 대뜸 일본에서 오셨지요?”라고 물었다. 내가 아니오. 한국인이오!” 하고 대답했더니, 순간 표정과 응대가 사뭇 사무적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2 정확한 장소는 잊었지만, 유럽 또 다른 도시에서의 일이다. 민박을 하게 되었는데, 주인이 우리에게 야뽕이냐고 물었다. 우리를 일본 사람으로 확신하고 물었을 것이다. 내가 대뜸 아니오!” 라고 대답하자, ‘그럼 시이나인가?’ 라며 또 물었다. ‘일본 사람 아니면 중국 사람이겠지!’라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니오. 한국인이오!”라고 약간 목소리를 높여 대답하자 머쓱해하며 물러났다. 다음 날 아침 식당에서 주인이 서빙을 하다가 지도 한 장을 펴 보였다. 우리나라를 가리키며 여기서 당신네 나라를 찾았소. 그럼 남이냐 북이냐?’를 물었다. 그래서 나는 남쪽에 사는 한국인이오!” 라고 대답하자, 그 때서야 미소를 보였다. 그는 한국 사람을 처음 만난 듯 했다.

 

#3 재작년 미국 오클라호마 주. 지역 박물관들 몇 군데를 도는 동안 625 참전용사를 만났고, 다른 곳에서는 이미 작고한 참전용사의 아들을 만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1950~53년 어름의 한국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사람들이었다. 말을 나누다 보니, 그들 마음속의 한국은 아직 ‘1950년대 초반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는 연민과 경이의 상반된 정서가 착종되어 있었다. 폐허 속에서 코를 찔찔 흘리며 초콜릿을 구걸하던 그 모습과, 그나마 외국여행이랍시고 나선 우리에게서 일종의 심각한 언밸런스를 발견했을 것이다.

 

#4 최근 다녀 본 미국과 유럽, 중앙아시아나 러시아 등의 도로들엔 일본차들이 부지기수로 달리고 있었으며, 새 차는 물론 중고차도 일본차들은 인기 만점이었다. 미국에서 차를 사려고 하니 대부분 이왕 사려면 일본차를 사야 한다는 충고를 해주었다. 품질도 믿을만하고 중고로 팔 때 제값을 다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한국인은 삼성 폰을 만지작거리던 미국사람에게 그게 어디서 만든 것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대뜸 일본 제품이라고 답하더라며 탄식을 했다. 그 정도로 서양에서 일본 브랜드의 위력은 대단했다.

 

#5 우리나라에 체류하고 있는 원어민 영어 교수와 가끔 만난다. 서로 간에 흉허물이 없어졌다싶을 즈음 싱거운 질문 하나를 던졌다. “왜 당신을 포함한 서양인들은 일본이나 일본인을 좋아하는가? 2차 세계대전에서 맞붙어 싸운 적국 아닌가?” ‘이 친구도 일본을 좋아하겠지?’라는 내 추정을 확신으로 깔고 던진 물음이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일본인을 좋아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분명히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일본을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만들어 온 물건들과 그들이 지속해온 문화와 깔끔한 성품 땜에 일본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과거에 전쟁을 일으켰고, 함부로 역사를 수정하려 하며, 약삭빠른 그들을 꼭 좋아해야 하는가?”고 다시 물었더니, “지난 일은 내가 알 바 아니고, 지금 좋으면 된다.”고 답했다.

 

과거사는 한··3국 모두가 책임이 있으니까 빨리 정리하고, 북핵 같은 당면 현안에 치중해야’/‘민족 감정은 악용될 수 있고, 정치인들이 과거의 적을 비난해 값싼 박수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등은 최근 웬디 셔먼(Wendy Sherman) 미 국무차관이 공식석상에서 했다는 말의 요지다. 일본 편을 들어 우리를 비난하고 있음은 불문가지다. 누구는 뭐 한갓 아녀자의 말이니 그냥 모른 척 하자고 하는 모양이지만, ‘세계의 조정자를 자처하는 미국의 외교 수뇌부가 공식석상에서 뱉은 말에 우리가 대범할 수는 없게 되었다.

미국인들을 몇 번 만나 보면 개인이든 공인이든 마음과 달리 외교적 언사가 매우 매끄럽고, 이른바 포커 페이스’(poker face)에 능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구한말의 일본 놈 일어난다. 소련 놈에게 속지 말고, 미국 놈 믿지 말자는 항어(巷語)도 나왔으리라. 미국 고위관료의 말과 표정만 믿고 돌아와 걱정 말라고 큰소리치다가 된통 당하기만 하던 과거 우리나라 관료들의 순진함도 이런 외교적 언사와 포커 페이스에 당한 결과들이리라.

 

유럽이나 미국인들이 일본과 일본인들을 좋아하는 이유를 사실 우리는 잘 이해할 수 없다. ‘625 때 자국의 군대를 파견하여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주었으니, 당연히 우리 편을 들어주겠지’, ‘세계대전에서 악랄한 일본군으로부터 몹쓸 시련을 받았으니 당연히 우리 편을 들어주겠지등등. 우리는 너무 순진해서 탈이다. 미국에 가보면 주류사회에 많은 일본인들이 진출해 있고, 일본 여자와 결혼한 미국의 고급관료들이나 오피니언 리더들을 꽤 보게 된다. 그 뿐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린 시절엔 소니의 게임기에 빠져 살았고, 자라면서 워크맨이나 모바일, PC 등에 조종당하며, 토요타 등이 생산하는 일본차를 타고 일생을 보내던 사람들이 잘 나가는 미국인들이었다. 1998년 미국에서 만난 어떤 아이에게 나중에 자라면 어디를 젤로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일본이라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이렇게 재밌는 게임기를 만들어낸 나라에 꼭 가보고 싶다는 대답이었다.

 

***

 

유럽과 마찬가지로 미국 역시 일본 편일 수밖에 없다. 간혹 오바마 대통령이 짐짓 일본을 꾸중하는 듯한 표정을 짓기는 하지만, 경험칙으로 보아 포커 페이스임이 분명하다. 이쯤 우리는 집단적 착각에 빠져 있는 우리의 모습을 깨달아야 한다. 세계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언론들은 우리 전화기, 자동차, K-POP이 세계를 제패한 듯 떠들고, 흡사 세계인들이 모두 우리를 주목하는 듯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망한다 해도 더이상 군대를 보내주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이나 생존의 문제를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일로 생각해 주지 않는다는 점을 이 순간 아프게 깨달아야 한다. 국제사회의 냉혹함에 언제까지 둔감할 것인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4. 28. 10:37

 

 

 


제이슨 가족이 살고 있는 대학 아파트[Morrison]

 

 


제이슨 부부와 함께 저녁 식사 중에[Freddy Paul's에서]

 

 


식사 후 제이슨 가족과 함께

 

 


제이슨 집을 방문하여 그의 아들 그레이선[Grayson]과 함깨


 

 

 

탁월한 젊은 영어 교육자, 제이슨 컬프(Jason Culp)

 

 

 

2013827일 저녁. 이미 어둑발이 내리기 시작한 저녁 일곱 시쯤 숙소인 대학 아파트 윌리엄스[Williams]’에 도착했다. 평화로운 초원 위에 조용히 앉아 있는, 그림 같은 아파트였다. 아파트 관리소 FRC[Family Resources Center]의 사무실을 찾아가니 훤칠한 훈남한 사람이 친절하게 우리를 안내했다. 나중에 그가 우리 아파트의 위층에 사는 OSU 대학원생 제이슨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와 함께 그 아파트에 살며 FRC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고 있었다.

 

제이슨과의 인터뷰



 

우리는 종종 그를 만났다. 아파트에 문제가 생겨도, 우편물이나 택배 수령에 문제가 있어도, 우리는 그를 불렀다. 학교에서도 내 연구실에서도 나는 그와 자주 만나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실제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게 미국인들인데,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교제할 수 있는 상대가 미국인들이기도 했다. 그와 친구로 만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한국문화와 한국인들의 삶을 말해주었고, 그는 그간 우리가 모르고 있던 남부 미국인들의 삶과 의식(意識)을 설명해주었다.

 

그와 만나는 과정에서 그가 TESOL[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외국어 사용자들을 위한 영어 교육]을 전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의 영어가 매우 명료하면서도 정확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이라고 모두 표준 한국말을 명료하고 정확하게구사하지는 못하듯, 미국 사람들이라고 모두 표준 영어를 구사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영어만으로 분류할 경우 미국에서 만난 미국인들은 대충 네 부류로 나뉘었다. 짤막하면서도 느릿느릿한 영어로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주는 어른들, 진한 사투리 억양으로 상대방을 갸웃거리게 만드는 사람들, 입에 오토바이 엔진을 단 듯 숨넘어가게 지껄여대는 학생들과 젊은이들, 제이슨처럼 교과서적인 영어로 호감을 주는 소수의 지식인들. 가끔 방송에서 목격하는 오바마 대통령, 전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 현 백악관 대변인과 미 국무성 대변인 등의 대중 스피치를 통해 미국 지도자들이나 상류층의 덕목 가운데 언어의 명료성과 모범성이 큰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제이슨에게서 그런 스피치의 전형을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지금 한국에는 많은 원어민 영어교사들이 활약하고 있다. 모두 훌륭한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지만, 각기 다른 그들의 특징과 개성을 뛰어 넘는 표준성과 모범성을 제이슨에게서 발견했다. 흡사 입술과 내면에 부드러운 모터(motor)를 달아놓은 듯, 그에게선 늘 명료하고 기분 좋은 영어가 솔솔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이런 사람이 우리나라의 대학이나 공공기관에서 한국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늘 갖게 하는 그였다. 그 역시 한국 같은 나라에 나가 영어를 가르칠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

 

제이슨 부부와 식사를 함께 한다거나 차를 마시면서, 풋볼 경기를 관람하면서, 새로 태어난 아기를 축하하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하면서, 우리는 서로의 사이에 개재하는 문화의 차이를 초월하여 상통하는 동질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름을 넘어 같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힘은 바로 언어였다. 대화를 통해 서로의 다름을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소통의 힘이었다. 우리는 그와 그의 가족을 만나면서 미국 체류 기간 내내 행복했다. 타향에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가 이웃에 살고 있는 것처럼 든든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비록 우리에 비해 나이는 어렸지만, 지구촌에 대하여 그가 갖고 있던 식견만은 어느 기성세대보다 월등했다. 그리고 글로벌화 된 세계에서 좀 더 멋진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은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게 해준 그였다. 조만간 한국에서 그를 만날 수 있게 되길 기대하면서, 그들과의 행복했던 몇 개월을 회상해보는 요즈음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2. 8. 03:45

 

 

 

 

 

 


앨버커키를 떠나 산타페로 가는 도중

 

 

 

 


산타페 입구 세리요스 힐스에서 만난 작은 오름들

 

 

 

 


세리요스 힐스에서 바라본 산타페 전경

 

 

 

 


세리요스 힐스를 지나 산타페로 들어가는 길

 

 

 

 


1882년의 산타페 시가지 그림

 

 

 

 

 

 

 

 

 

환상과 낭만, 그리고 역사의 공간 산타페에 빠지다! [산타페-1]

 



 

 

큰 도시 앨버커키에서 산타페에 이르는 하이웨이 ‘I-25’ 역시 황량한 야산들을 끝없이 관통하는 길이었다. 뉴멕시코에 진입한 이래 키 작은 사막식물들과 작고 큰 화산 석들이 검게 그을린 채 다닥다닥 깔려 있는 야산들을 곧게 뚫고 나아가는 한 줄기 길이 대견하여 나 스스로 명명해본 것이 바로 용감한 길이었다. 그 길을 종횡무진 뚫고 돌아다니는 자그마한 자동차와 거기에 실린 내 실존적 자아가 사실은 용감한 존재들이었는데, 엉뚱하게도 나는 왜 그 길에만 자꾸 내 감정을 투사하려고 노력하는 것일까.

 

프로이트가 말한 일종의 '심리적 전이(psychological transference)'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례일까. 미국에 온 이후 특히 에 집착하는 나의 내면이 나 스스로도 흥미롭게 생각될 때가 많아졌다. 길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있는 한갓된 공간일 뿐인데, 그 길이 마치 살아서 내 비위를 맞춰주기도 하고 심술을 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건 왜일까. 아마도 나의 내면에 일어나는 감정적 에너지를 쏟아 붓기에 가장 좋은 대상이나 공간이 바로 미국 남부 지역의 길들이었으리라.

 

산타페까지 60.3 마일의 그리 길지 않은 길이었으나, 기억하기 힘들 만큼 많은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집거지가 차창으로 스쳐 지나갔다.* 지아 푸에블로(Zia Pueblo), 산타애나 푸에블로(Santa Ana Pueblo), 산 펠리페 푸에블로(San Felipe Pueblo), 산토 도밍고 푸에블로(Santo Domingo Pueblo) 등 푸에블로 인들은 거주하는 지역마다 구분되는 인종적 독자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푸에블로 인들을 변별할 때는 거주 지역의 이름을 관치(冠置)하는 것이 통례인 듯 했다.

 

고개를 넘으니 멀리 산타페 산맥이 보이고, 그 앞쪽 넓은 분지에 한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을 만큼 넓게 퍼진 도회(都會)가 아름답게 형성되어 있었다. 잠시 언덕을 내려가자 길옆에 비지터 센터가 있고, 안으로 들어가니 젊은 여성 안내원이 호쾌한 웃음으로 맞아 주었다.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세리요스 힐스(Serrillos Hills)의 초입이자, 길 건너 산 속 산토도밍고 푸에블로의 인접지였다. 자료를 받은 다음 밖으로 나오니 앞 쪽에 제주도의 큰 오름을 연상케 하는 화산봉들이 여인네 젖가슴처럼 봉긋 솟아 있고, 산타페 진입을 위해 I-25에서 285로 갈아타는 턴파이크(Turnpike)가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산타페 카운티에 들어선 우리는 곧바로 산타페 시내 외곽의 신시가지를 거쳐 목표지점인 구시가지로 방향을 잡게 되었다. 거대한 가마솥의 한 가운데로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가듯 산타페 산맥 앞에 자리 잡은 산타페 시티는 거대한 분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지터 센터에서 20분이나 달렸을까. 드디어 어도비 건물들 일색인, 조용하고 아름다운 산타페 알트 슈타트(Alt Stadt)쌩얼이 우리의 가슴에 살포시 안겨들었다.

 

 

 


넓게 퍼져 있는 산타페 신시가지의 주택들

 

 

 


산타페의 '프란시스코 대성당'과 구시가지 중심부

 

 

 


주지사 궁(Palace of the Governors) 앞에서 좌판을 벌이고 있는 주민들과 물건을 사는 관광객들

 

 

 


산타페 구시가 중심부의 야경

 

 

 

***

 

거룩한 믿음[Holy Faith]’을 뜻하는 스페인어 ‘Santa Fe’. 식민시대의 생생한 산물이 바로 이 도시다. 뉴멕시코 주도인 산타페는 주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자 산타페 카운티의 청사 소재지이며, 무엇보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 된 캐피털 시티다. 2012년 기준으로 69,204명의 인구를 보유한 이곳은 카운티 전역을 포함하는 표준 통계지역[Metropolitan Statistical Area]’의 으뜸 도시이기도 하다.

 

산타페의 완전한 명칭이 ‘La Villa Real de la Santa Fé de San Francisco de Asís’ 아씨시 프란시스코 성인의 로열 타운[The Royal Town of the Holy Faith of St. Francis of Assisi]’임을 알고 나서야 구시가의 높은 곳에 우뚝 서서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는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바실리카 대성당[Cathedral Basilica of St. Francis of Assisi]’의 존재의미가 이해되었다. 대성당 뿐 아니라 시 청사 앞을 비롯한 시내의 곳곳에서 프란체스코 성인의 동상과 사진들을 보았는데, 그가 바로 산타페의 수호성인이었다. 그 점을 이해하고 나서야 왜 대성당이 내려다보이는 앞쪽에 중앙 광장과 주지사 집무실 및 공관을 포함한 공공기관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왜 그로부터 상가들과 각종 편의시설들이 방사상(放射狀)으로 펼쳐져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즉 '프란체스코 성인-대성당-아름다운 산타페'의 상관구조를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산타페 광장의 모습

 

 

 

 


산타페 시청 정원과 프란체스코 성인 동상

 

 

 

 


"Hometown Hero" 2011. 7. 12.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레인저 상

 

 

 

 


산타페 시내에서 만난 멋진 화랑 입구

 

 

 

 


또 다른 화랑 입구

 

 

 

 


길 건너편에서 발견한 인디언 기념품 가게

 

 

 


길거리 상가에서 만난 독특한 디자인의 의자

 

 

 

 


길가 주택의 뜰에서 만난 인상적인 디자인의 두상

 

 

 

 

 

뉴멕시코 진입 후 며칠이 지나면서 고도(高度)의 변화에 무덤덤해지긴 했지만, 놀랍게도 뉴멕시코 주 전반의 평균 해발 고도는 1,000m에 가까웠고, 이 가운데 해발 2,134 m인 산타페는 미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주도였다. 가끔씩 귀가 멍멍해지는 느낌을 받은 것도 특히 고도에 민감한 내 신체 구조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다. 산타페의 면적은 96.9인데, 그 가운데 96.7가 땅이고 나머지 0.2는 저수지나 강, 호수 등 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추운 겨울, 따뜻한 여름이 이곳 날씨의 공식이라서인지 햇볕이 내리쪼임에도 구 시가지를 돌아보는 동안 우리는 달달 떨어야 했다. 한겨울인 12월의 평균온도 0.9, 한여름인 7월의 평균온도는 21.2이며,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6~8개월 동안 눈이 내린다고 하며, 6~8월까지는 심한 비가 내린다고 한다.

 

1848년 멕시코와 미국이 전쟁을 끝내고 체결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atado de Guadalupe Hidalgo/Treaty of Guadalupe Hidalgo)’은 뉴멕시코의 역사적정치적 향배를 결정한 분수령이었다. 멕시코에서 독립한 텍사스 공화국이 미국에 합병된 이듬해인 1846년에 일어난 것이 멕시코-미국의 전쟁이다. 전쟁에서 패한 멕시코의 평화협정 요청에 미국이 서명한 조약이 바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인데, 이 조약으로 멕시코는 현재 텍사스 주, 콜로라도 주, 애리조나 주, 뉴멕시코 주, 와이오밍 주의 일부, 캘리포니아 주, 네바다 주, 유타 주 등을 미국에 넘겨야 했다.

 

그 때 미국 땅으로 바뀐 뉴멕시코 땅을 밟으면서 나는 미국과 판이한 멕시코의 향기, 멕시코를 지배한 스페인의 향기가 섞인 묘한 분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 미국 남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침례교 위주의 개신교 교회들 대신 웅장한 규모의 가톨릭 성당이 구시가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은 대부분 유럽의 도시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또한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전통음식이라는 것도 대부분 멕시코 음식 그 자체이거나 멕시코 풍미를 벗어나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옛날 인디언들의 식습관이라야 자연 재료의 상태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것들일 것이니, 유럽풍, 멕시코 풍을 만나면서 그 정체성을 맥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 지역의 어딜 가도 인디언 음식이라고 내오는 것들이 대부분 멕시코 음식 일색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족들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애코머(Acoma Pueblo), 코치티(Cochiti Pueblo), 이즐레타(Isleta Pueblo), 히메즈(Jemez Pueblo), 케와(Kewa Pueblo)[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Pueblo)의 이전 이름], 라구나(Laguna Pueblo), 남베(Nambe Pueblo), 오케 오윙에(Ohkay Owingeh Pueblo), 피쿠리우스(Picuris Pueblo), 퍼와이키(Pojoaque Pueblo), 샌디아(Sandia Pueblo), 산 펠리페(San Felipe Pueblo), 산 일데폰소(San Ildefonso Pueblo), 산타애나(Santa Ana Pueblo), 산타 클라라(Santa Clara Pueblo), 타오(Taos Pueblo), 터수키(Tesuque Pueblo Santa Fe), 지아(Zia Pueblo), 주니(Zuni Pueblo) 20 개에 가깝다.

 

 

 

 


산타페 시가지의 야경

 

 

 


호텔 로레토(Loretto)의 환상적인 모습

 

 

 


호텔 라폰다(La Fonda) 외관의 전통미

 

 

 


미국-멕시코 간의 전쟁,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협정문,
그로 인해 변한 양국의 국경 등을 보여주는 자료들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멕시코의 패배를 풍자한 그림[털 뽑힌 독수리]

 

 

 

 


산타페 '순교자들의 십자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8. 17:26

 

 

 

 


영화 <아파치 요새>의 포스터

 

 


영화 <론 레인저>의 포스터

 

 

 
<아파치 요새>에서 좌측이 헨리 폰다(Henry Fonda), 우측이 죤 웨인(John Wayne)

 

 


<아파치 요새>의 한 장면

 

 

 
영화<론 레인저>의 한 장면. 왼쪽이 쟈니 뎁(Johnny Depp), 오른쪽이 아미 해머(Armie Hammer)

 

 


<론 레인저>의 한 장면

 

 

 

 

 

서부지역 인디언들과 대평원[The Great Plains]

 

 

 

 

하이틴 시절부터 이 나이까지 영화를 그리 많이 접하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그 가운데 기억나는 것들은 헐리웃에서 만들어진 서부영화들이다. 이름을 다 기억할 수 없는, 비슷비슷한 내용들이었으나, 관통하는 서사구조는 단 하나 선악의 대결이었고 주제는 미국 판 권선징악이었다. 선을 대표하는 백인들은 늘 당당하고 정의로우며 멋있었던 반면, 악을 대표하던 인디언들은 늘 무지(無知)무명(無明)무뢰(無賴)의 저급한 무리들이었다. 미국 인디언들에 대한 세계인의 편견과 무지는 이처럼 대부분 서부영화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넓고 아름다운 땅에서 평화롭게 살던 그들을, 어느 날 웬놈들이 밖에서 뛰어 들어와 채찍을 휘두르며 한 구석으로 몰아넣고, 그들의 땅을 차지해 버린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천추만대 원한에 사무칠 일인데, 전 세계의 코흘리개들도 다 보는 영화에 가해자인 백인들은 정의의 사도로, 피해자인 자신들은 몹쓸 불한당(不汗黨)으로 그려냈으니, 그 통탄스러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내 기억으로는 20055월에서야 미국의 상원은 인디언 6천만 학살에 대한 사과를 추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의 죄가 어찌 사람 죽인 일뿐일까. 당시로서는 몹쓸 땅에 그들을 짐승처럼 몰아넣은 점까지 계산하면, 그 죄가 하늘에 닿고도 남을 백인들이었다. 나찌 독일이 죽인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왜인들이 전쟁터로 광산으로 징발하거나 허물을 뒤집어 씌워 죽인 우리 민족의 숫자도 엄청나지만, 당시 총인구 5천만~1억을 헤아리던 인디언들 가운데 살해된 비율이 80~90%라니, 아무리 컴퓨터가 발달했다 한들 미국 백인들의 끔찍한 죄악을 어떻게 계산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그런 사건으로부터 무려 2백년이나 지나서야 이제 사과나 해볼까?’하고 궁시렁 거리며 나섰고, 그로부터 5년의 세월이 더 흐른 2010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사과하기에 이르렀으니, 만시지탄(晩時之歎)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워싱턴 D.C. 의회 묘지에서, 체로키촉토무스코기포니시스턴와페톤오야테 등 5개 부족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캔자스 출신의 공화당 상원 샘 브라운백 의원이 사과결의문을 낭독함으로써 의회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그 전 해 11월에도 오바마 대통령은 564개 부족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디언들에 대한 그동안의 횡포와 잘못된 정책에 대하여 사과하고 그들로 하여금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과거에도 정부로부터 무수한 약속을 받았으나 그 약속이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인디언들로서는 이번에도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미국 정부가 인디언들에게 진작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고, 사과를 늦게 한 데 대하여 문제 삼으려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억울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인디언들을 눈곱만큼이라도 배려했다면,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그들의 이미지라도 진실에 가깝게 만들거나 긍정적으로 묘사했어야 하건만, 서부영화 같은 매체들에서 보듯이 그들의 모습은 스테레오 타입이라 할 정도로 왜곡되어 온 게 사실이다. 그 점이 제삼자인 내가 보기에도 지나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미국에는 현재 나바호(Navajo), 체로키, (Sioux) 등 규모가 큰 종족들을 포함, 564개 종족에 3백만 이상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다. 그 가운데 비교적 소수부족으로서 서부영화들에 단골로 등장한 종족이 아파치(Apache)와 코만치(Comanche).

 

대부분의 독자 여러분은 <아파치 요새(Fort Apache)>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을 것이다. 1948년 죤 포드(John Ford) 감독이 만들었고, 죤 웨인(John Wayne) 및 헨리 폰다(Henry Fonda) 등 명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인데, 인디언에 대하여 비교적 따스한 관점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서부영화들과 구별된다고 한다. 감독은 주인공인 요크 중령[죤 웨인]을 통해 아메리카 인디언 특히 아파치 족에 대한 인간적 관점을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종래 사납고 공격적이며 대화가 통하지 않는아파치를 동정적포용적 관점에서 바라 본 사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 전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인디언을 바라보는 시선이 비교적 긍정적인데,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 영화를 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또 하나. 미국으로 떠나오기 직전인 작년 7월 하순 경, 한국에서는 론 레인저(The Lone Ranger)’란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쟈니 뎁(Johnny Depp)이 열연한 주인공 톤토(Tonto)는 바로 코만치 인디언이었고, 영화의 배경은 캘리포니아유타콜로라도 애리조나뉴멕시코 등이었는데, 이 가운데 콜로라도와 뉴멕시코는 그레이트 플레인즈에 포함되는 공간이었다. 악령을 몰아내는 능력을 지닌 톤토는 죽기 직전의 외로운 레인저존 레이드(John Reid)를 살려냄으로써 결국 그들은 환상의 콤비를 이루게 된다. 거칠 것 없는 드넓은 황야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현란한 액션들은 코만치 인디언인 톤토와 백인 레인저 존 사이에 교감되는 우정의 깊이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백인들과 인디언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코만치 추장 빅베어(Big Bear)의 말[‘우리 시대는 사라졌네. 백인들은 그걸 발전이라 부르는 모양이네만.’]이 추가되면서 그간 스테레오 타입으로 고착된 백인과 인디언의 이미지 혹은 양자관계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반성이나 의식 또한 새롭게 제기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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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을 찾아다니기 몇 달 만에 대평원의 주인공 아파치와 코만치, 그리고 카이오와를 만나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대평원의 주인들이었다. 오클라호마 동북쪽에 '대초원[Tall Grass Prairie]'이 있다면, 서남쪽에는 '대평원[The Great Plains]'이 있다. 그렇다면 대평원은 어떤 공간인가. 알버타(Alberta), 새스캐치원(Saskatchewan), 매니토바(Manitoba) 등 캐나다 남부를 포함, 몬태나(Montana)노쓰 다코타(North Dakota)사우쓰 다코타(South Dakota)와이오밍(Wyoming)네브라스카(Nebraska)콜로라도(Colorado)캔자스(Kansas)뉴멕시코(New Mexico)오클라호마(Oklahoma)텍사스(Texas) , 로키산맥(Rocky Mountains)과 미시시피강(Mississippi) 사이의 미국 땅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남북 간 길이는 3,200 km, 동서의 폭은 800 km, 면적은 1,300,000 이니, 남한 면적[99,538 ]13배에 달하는 거대한 공간이다. 오클라호마의 경우 대평원은 주 전체 면적의 60%나 차지할 만큼 거대하다. 그 안에 카이오와, 아파치, 코만치 등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다음에 계속>

 

 


워싱턴 D.C.의 미 의회 묘지 

 


캐나다에서 미국 남부까지 걸치는 대평원(The Great Plains)

 

 


대평원의 한 부분

 

 


대평원 한 가운데를 달리는 하이웨이

 

 


대평원의 바이슨 무리

 

 


대평원의 한 부분

 

 


카이오와, 아파치, 코만치의 집단 거주지를 찾아.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