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나라'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6.09.15 “쓴물이나 한 잔 허세!” 1
  2. 2013.10.02 미국통신 15[근황 2: 미국음식 사귀기] 3
  3. 2012.09.29 일본을 어찌 할 것인가?
글 - 칼럼/단상2016. 9. 15. 23:34

쓴물이나 한 잔 허세!”

 

 

 

 

 

몇 년이나 지났을까. 일이 있어 고향에 갔다가 친구의 사무실에 들렀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그가 마무리 멘트로 던진 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시일 내로 쓴물이나 한 잔 허세!”

 

쓴물이라? 잠시 갸우뚱했다. 그러나 그게 바로 커피를 뜻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무릎을 쳤다. 그 날부터 아침마다 쓰디쓴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면서 그가 깨우쳐 준 쓴 물의 다의성(多義性)과 함축성을 곱씹기 시작했다. 최근 설탕과 프림을 듬뿍 넣은 우리네 막대커피의 우수성(?)을 서양인들도 인정하기 시작했다지만, 사실 커피의 매력은 쓴 맛에 있다. 요즘 젊은이들, 특히 젊은 여성들은 양동이만한 커피 잔을 안고 다니는 게 일종의 패션처럼 되어 있다. 대부분 나로선 이름도 외우기 힘든 달달한 커피 일색이다. 그러니 요즘 젊은 친구들, 쓴물의 철학적 원리나 약리(藥理)를 알 리가 없다.

 

공자는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 좋고,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동에 이롭다(良藥苦於口而利於病이요. 忠言逆於耳而利於行)"고 말씀하셨다. 내 경험상 익모초 달인 물을 비롯, 전통사회의 약들은 으레 몸서리쳐질 정도로 쓴 것들뿐이었다. 현대인들의 병 가운데 상당수가 당분의 과다섭취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상식이다. 요즘 대부분의 약은 달콤한 설탕을 겉에 바른 당의정(糖衣錠)’ 형태로 되어 있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쓴 약은 먹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인간의 본능적 기호(嗜好)를 역으로 잘 보여주는 경우 아닌가.

 

쓴물과 비슷한 표현에 쓴잔이 있고, 그것을 한자어 고배(苦杯)’로 쓴다. 어떤 시도가 실패할 경우 고배를 마셨다고들 한다. 그러나 쓴물혹은 쓴잔고배가 항상 같은 의미범주인 것은 아니다. 인류사 최고의 극적인 쓴물은 성서에서 발견된다. <<신약성서>>마태복음2639(“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은 그야말로 지극한 의미의 쓴잔이다. 인간의 형상으로 태어나신 예수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마지막 관문에서 당하신 온갖 모욕과 고통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이 말 속의 쓴잔아니겠는가. 따라서 그 경우의 은 패배의 그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적 고통으로 보는 것이 옳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바로 쓴맛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성어도 있다. 춘추시대 마지막 패권을 다투던 오나라 부차와 월나라 구천에 관한 고사다. 치고받고 싸워오던 과정에서 위기를 모면한 월왕 구천이 다시 월나라로 돌아와 곁에 쓸개를 놔두고 항상 그 쓴맛을 보며 회계산의 치욕을 상기하다가 결국 패권을 차지했다는 것이니, 쓴맛이야말로 승리를 위해 필수적인 약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승리의 환희보다 패배의 고통을 훨씬 자주 경험하는 게 인간의 삶이다. 패배의 고통을 겪지 않은 승리는 큰 의미가 없다. ‘승승장구(乘勝長驅)’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자주 목격한다. 그러나, 그것은 남의 입장에서 보는 현상일 뿐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그들의 삶도 알고 보면 성공과 실패’(혹은 승리와 패배’)가 반반, 아니 성공보다 실패가 훨씬 많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남의 성공만 볼 뿐, 실패는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실패 속에 고심참담하던 그들의 모습은 아예 보려하지 않는다. 남의 화려한 성공만을 보고 부러워하는 게 장삼이사들의 보편적인 심성이기 때문이다.

 

쓴물이나 한 잔 허세!”

내 친구의 허허로운 이 말 속에는, 성공을 소망하며 오늘을 성실하게 살고자하는 장삼이사의 철학이 들어있다. 툭하면 성공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그들, 아니 우리들. 늘 실패를 맛보면서도 내일은 성공하고 싶다는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기에 우리네 필부필부들은 쓴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새로운 도전의 결기를 다지는 게 아닌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0. 2. 06:14

  

 

근황 2

 

미국음식 사귀기

 

 

김형,

 

우리는 몇 년 전 자동차를 몰고 유럽의 20여 개 국을 답사한 적이 있소. 당시에 매일 올리던 홈페이지의 글이나, 나중에 출판한 책[<<, 유럽>>]에서 호기롭게 음식에 관한 한 코스모폴리탄임을 내 스스로 자부하곤 했지만, 사실 가장 큰 문제의 하나가 음식이었소. 유럽은 그래도 미국보다 훨씬 다양하고 섬세하여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인의 미각을 달랠 만한 여건이 풍부하게 마련되어 있습디다. 물론 우리 동포들이 밀집해 사는 뉴욕이나 서부 도시들을 감안하면, ‘음식의 평균적인 친 한국 성향은 이론상으로 미국이 유럽을 앞설 것이오. 물론 그 보다 훨씬 전인 15년 전 1년 남짓 지낸 LA에서는 전혀 음식 문제가 없었소. 차를 몰고 몇 분만 나가면 한국마켓들이 많았고, ‘한국보다 더 한국적인한국음식점들 또한 수두룩했기 때문이오. 서울에서도 찾아가 먹어 본 적이 없던 소공동 순두부를 거기서 처음으로 맛보았으니, 더 할 말이 있을까요?

 


카우보이 박물관 식당에서

 


무어 시에서 점심 차 들른 베트남 국수집

 

사실 이곳으로 오면서 이번에는 완벽하게 미국식으로 살아보자고 큰 소리를 쳤던 나요. 출국할 때 기본적인 양념이나 밑반찬 등을 다 빼놓고 온 것도 미국식으로 살아보자는 호기와 함께 미국엔 어딜 가나 한국인들이 터를 잡고 마켓이나 식당을 열고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소. 무엇보다 이젠 먹는 것으로부터 초탈할 나이도 되지 않았는가라는, 우리 자신에 대한 착각이 대책 없는호기의 근원이었소. 나이 들면서 먹는 양은 줄었지만, 식성은 더 근본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었소.

 

미각은 지문보다 더 정확하다는 말은 나이 든 뒤 찾는 음식을 보면 대부분 그의 어릴 적 삶이나 지역까지 정확하게 맞출 수 있기 때문일 것이오. 서해안 촌놈인 나는 어릴 적부터 젓갈이나 뻘게, 소금에 절인 물고기 등을 자주 먹으며 자랐소. 그래서일까요? 나이가 들수록 밥숟가락을 들 때마다 눈길은 짭짤한 젓갈이나 비린내 나는 생선을 향하곤 하는 것이오. 그런 반찬에서 고향의 내음이 풍기기 때문이지요. 젊어서 먼 길 떠났던 나그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 고향으로부터 풍겨오는 음식 내음때문 아니겠소?

 

혹시 오나라 출신 장한(張翰)이 낙양에서 벼슬하다가 고향의 진미인 순채국과 농어회를 잊지 못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는 순갱노회(蓴羹鱸膾)’의 고사를 알고 계시오? 물론 당시 제나라 왕의 무도함을 보며 위기를 느낀 그였으므로 그가 벼슬을 버린 것이 순전히 음식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만약 그에게 고향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없었어도 그리 빨리 벼슬을 버릴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참으로 미국의 음식에는 매력이 없소. 며칠 전 만난 미국 여학생도 미국 음식은 모두 ‘unhealthy food’라고 한 마디로 매도합디다. 학교 안에 식당들이 많고, 대부분의 식당들이 학생들로 붐비지만, 나로선 딱히 먹고 싶은 것이 없소. 대부분 달고 기름기 많고, 어떤 것은 짜기도 하고, 비벼 놓거나 섞어 먹는 어떤 것들은 흡사 사료같은 모습을 띠기도 하오. 혹자는 그대가 싸구려 음식만 먹으니 그렇지. 멋진 레스토랑에 가서 제대로 된 미국 음식 좀 먹어봐!’라고 타박하기도 하오. 그러나 값이 싸고 비싼 차이, 음식의 가짓수나 코스가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구조야 비싸다고 달라질 수가 있겠소? 설탕과 소금, 밀가루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미국 음식=unhealthy food’라는 공식은 아마 바뀔 수 없을 거라고 보오.

                                                                                                                                                 
                                          어느날 학교 식당에서의 점심상


                                               

                                          최근의 아침 메뉴

 

그래서 우리도 나름대로 궁여지책을 고안했소. 마트에 들러 수십 종류의 빵 가운데 밀가루와 약간의 식염 외에 전혀 가미(加味)가 되지 않은 한 종을, 과일 코너에서 아보카도(avocado)란 열대과일과 이 지역의 사과를, 유제품 코너에서 치즈 한 두 종을, 야채 코너에서 양상추를, 음료 코너에서 건더기[이곳 사람들은 이것을 pulp라 합디다]가 들어 있는 (원액) 오렌지 주스를 각각 고르니, 대충 미국식 아침식사로서는 분에 넘치는 조합이었소. 빵을 살짝 구어 버터 대신 아보카도의 과육(果肉)을 바른 다음, 치즈와 양상치를 얹고 오렌지 주스를 곁들이면 아침은 해결이지요. 그렇게 먹고 점심은 초원의 굶주린 사자처럼 미국 음식의 정글 속에서 어슬렁거리기 일쑤라오. 그러다가 저녁은 완벽한 캠핑족 스타일의 한식으로 (이들의 표현대로 한다면) ‘빅디너(big dinner)’를 먹게 되는 것이오 

 


어느 날의 빅디너(?)

 


장영배 교수 부녀와 함께 한 어떤 레스토랑의 점심

 

지난 달 하순인가요? 일요일에 길크리스 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해 인근 도시 털사(Tulsa)에 갔었소. 박물관 관람이 주목적이었지만, 아내나 나는 내심 그곳에 있다는 한국음식점에 더 무거운 방점을 찍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소. 나름대로 정성을 들인 그 식당의 김치찌개를 먹으며, 한 달 여 시달린 솟증을 풀어낸 셈이오. 돌아올 때 식당과 이웃한 한국마트에서 삼겹살 몇 근을 끊어 차에 실으니, 어렵던 시절 설 쇠기 위해 동네 돼지 잡던 현장에서 다리 한 짝 사들고 의기양양하게 대문을 박차고 들어가던 가난한 가장의 호기가 이런 게 아니었을까 짐작됩디다.

 


털사에서 만난 한국음식점-한국가든 

 


한국가든에서 먹은 김치찌개백반 

 


한국가든 주인장의 두 따님 및 손자와 함께 

 


한국가든 옆의 한국 마켓

 

그러나, 언제까지 한국음식만 찾아다닐 수 있겠소?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지겹게 그 음식 속에서 일생을 지내야 할 것을! 귀국 후 여기서 보낸 시간을 회상할 때 이곳의 음식경험만큼 오래 갈 추억 거리가 어디 있겠소? 김 형이나 나나 이제 젊은 시절의 아름답던 추억이나 반추하며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가야 할 군번들이 아니겠소? 세계 제일의 국가라 자부하는 미국, 그 미국을 움직이는 국민들, 그들이 먹는 음식. 어쩜 내 주관의 속박만 벗어날 수 있다면, 그들의 음식이 갖는 의미나 장점이 우리 음식의 그것보다 나을 수도 있지 않겠소? 그래서 이젠 적극 그들의 음식과 친해지기로 했소. 좋은 것, 입맛에 맞는 것, 익숙한 것만 찾으려면, 고생스럽게 이역만리 미국 땅엔 무엇 하러 왔겠소? 그냥 내 나라에서 두 다리 쭉 펴고 편하게 소고기나 사 묵으며살 일이지. 그래서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내 미각을 길들이기로 했소.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이만 하리다. 잘 계시오.

 

2013. 10. 1.

 

스틸워터에서 백규

 


캠퍼스 외곽쪽의 약간 특이한 반 주문식 학생식당에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9. 29. 16:29

 

 

 

<조선학회 간친회(懇親會)장에서, 앞 줄 왼쪽이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 교수)  발표 후 이자카야(居酒屋)에서 만난 일본 학자들일본 천리시의 정갈한 호텔방

일본을 어찌 할 것인가?

 

 

                                                                                                                                                               백규 

작년 늦가을, 일본 천리대학에서 열린 조선학회에 발표자로 참석했다. 첫날 저녁 이자카야의 선술집에서 몇몇 일본학자들과 어울렸다. 술잔이 오고 가던 중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한국학을 하는 일본인들은 모두 친한파(親韓派)’라고 하자 다른 학자들이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다. 좌중의 유일한 한국인인 나를 의식한 ‘외교적 언사’임을 모르진 않았지만, 그 후에도 ‘친한파’란 말의 여운은 오랫동안 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가끔 ‘친한파’와 ‘지한파(知韓派)’란 용어의 같고 다름을 혼자 헤아려 보며 고개를 갸웃하곤 한다.

 

 그간 우리 언론들은 일본 정치인들에 대하여 툭하면 ‘지한파’란 용어를 갖다 붙이곤 했다. 요즈음 등장하는 정치인들이야 대개 전후(戰後) 세대로서 일본 우익(右翼)의 입맛에 맞게 ‘맞춤식으로 사육(飼育)된 전사(戰士)들’이 대부분이지만, 내가 자랄 때만 해도 나름대로 ‘선이 굵은’ 정치인들이 일본을 이끌어 왔다. 그래서 그랬던가. 그들이 정권을 잡을 때마다 우리 언론들은 그들의 이름 앞에 ‘지한파’란 용어를 붙이기 일쑤였다. 그러나 한-일 양국이 충돌하는 경우 그들이 예외 없이 보여주는 ‘몰역사적(沒歷史的) 파렴치’를 목격하며, 나는 ‘지한파’란 용어의 불순한 함축성을 깨닫게 되었다. 말하자면 ‘친한(親韓)’과 ‘지한(知韓)’은 현격하게 다른 의미를 갖고 있으며, ‘친한’이든 ‘지한’이든 적어도 일본인들과 우리 사이에는 운명적으로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는 사실 또한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총독부의 철권통치를 통해 ‘악랄하다’ 할 정도로 철저하게 우리를 집어삼키고자 한 일본. 우리의 국토나 해양을 이 잡듯 뒤진 일이야 만인 공지의 사실이니 그 극악함은 재삼 반복할 필요 없을 것이다. 최고로 명민한 자국 학자들을 동원하여 우리의 정신문화를 철저히 연구⋅분석해온 저들의 자취를 찾아가다 보면 정말로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 일본 어용학자들은 이 땅의 젊은 학자들을 자신들의 도구로 끌어들여 이른바 ‘식민사관’을 공고히 했고, 지금까지 우리의 정신문화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남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길러낸 어용학자들이나 그들의 후예를 ‘지한파’로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적어도 다른 나라나 민족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정신까지 속속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우리의 내면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지한파’ 일본인들을 어떻게 우리의 친구로, 선린(善隣)으로 가까이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하여 제대로 항변할 줄 아는 강단의 사학자들을 목격하기 어려운 것도 그 원초적인 씨앗이 이제 큰 나무로 자라나 우리의 땅을 뒤덮고 있다는 무서운 증거일 것이다.

 

 우리는 일본이 독도를 갖고 ‘장난을 친다’고 여긴다. 말도 안 되는 일에 억지를 부리는 그들의 꼴이 우리의 눈에는 우습게 보이기 때문일까.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역사 기록들이 꽤 많으니 걱정할 일 없다는 것일까. 그들에게 내 땅을 통째로 빼앗긴 채 40년 가까운 세월을 허송한 바로 직전의 역사는 앞 세대의 일일 뿐, 지금의 나[우리]와는 상관없다고 보기 때문일까.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라. 그들은 수시로 독도에 잽을 날리는 일을 ‘목숨을 건 도박’으로 생각한다. ‘장난을 치는 일’에 목숨을 거는 바보는 없다. ‘목숨을 건 도박’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일본이 독도를 거론할 때마다 한심하고 딱하다는 듯 ‘저 새끼들 또 지랄한다’는 반응을 보이기 일쑤다. 그냥 대꾸하지 않고 넘기다 보면 장난꾼이 제풀에 지쳐 그만 두듯 포기하리라 믿는 것이다. 순진한 한국인들은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일부 극우주의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필요 때문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짓들을 벌인다’고 말하며, 사태를 아주 낙관적으로 보기 일쑤다. 이 이상 더 ‘대책 없이 순진한 낙관주의’가 있을 수 없다. 그들이 언젠가 있을지 모르는 ‘독도대첩(獨島大捷)’을 위해 해⋅공군력을 무한 증강하고 그 칼날을 벼려 온 역사가 얼마인데, 우리들 가운데 일부 불순한 무리들은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만드는 일조차 필사적으로 막으려 한다. ‘평화’를 위해 해군기지를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우리 스스로 무장해제를 해가면서 어떻게 이웃의 강도들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방어한단 말인가.

 

 최근 일본총리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란 자가 앞장서서 ‘독도 분란’와 댜오위다오(釣魚島) 분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그 덕분에 그는 꺼져가던 그의 정치생명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황당하기로 노다에 비해 한 술 더 뜨는 아베신조(安倍晋三)란 자는 최근 자민당의 총재로 선임되었다. 나이를 갖고 따지는 일이야말로 젊은이들이 흔히 비칭으로 사용하는 이른바 ‘꼰대’들의 잘못된 관행이겠지만, 노다는 나와 같은 1957년생(56세), 아베는 약간 위인 1954년생(59세)이다.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겪은 일제시대, 대동아 전쟁, 6⋅25 동란 등을 한 번도 겪지 않고 등장하여 나라의 경영을 맡게 된 첫 세대가 바로 내 또래의 정치인들이다. 말하자면 일본이나 우리나 ‘철따구니 더럽게 없는’ 세대가 바로 우리 또래들이다. 전후에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역사의 노폐물들을 접하며 현실적 이해관계의 잣대나 들이대며 ‘불뚝거리는’ 세대가 바로 지금 나라를 경영한다는 내 또래의 정치인들이다. 제대로 된 철학도 경륜도 갖추지 못하고 감정과 투쟁의 혈기만 넘치는, 바로 그 세대다.

 

그런데, 노다의 정치생명 연장이나 아베의 총재 취임은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는가. 바로 일본 국민들에 의해서다. 그간 순진한 우리나라 언론들은 독도 분란이나 댜오위다오 분란이 일부 일본의 극우세력에 의해 야기된 일이라고 떠들어 댔다.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 언론들의 무책임한 선정성이나 과도한 낙관주의는 참 기네스북에 올려도 될 정도다. 지금도 노다나 아베의 재등장을 일부 극우주의자들의 작품이라고 떠들 자신이 있는가? 아니다. ‘독도도 댜오위다오도 자신들의 것이었으면’ 하는 것이 일본 국민 전체의 마음이라는 것을 이제 깨달아야 한다.

 

그런 가운데 최근 일본의 일부 지성인들이 자국의 위험한 움직임에 대하여 경고의 멘트를 날린 것은 다소 위안이 되는 일이다. 핏발 선 눈으로 미쳐 날뛰는 극우주의자들, 인간의 탈을 쓰고 차마 겉으로 말은 못하면서 ‘우리 것이었으면’ 하는 욕심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대다수 일본 국민들과 달리, 그들이 잘못 된 길을 가고 있음을 지적한 소수 지식인들은 세계 지성사에 아로새겨야 할 ‘보석 같은 존재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소수가 무슨 힘이 있는가. 과연 그들의 양심이나 양식이 거대한 집단의 흐름을 막는 보(洑)가 될 수 있다고 보는지?

 

***

 

 우리의 무책임한 낙관주의는 재빨리 청산되어야 한다. 상대방이 창을 들고 나서면 우리는 두꺼운 방패로 막은 다음 더 강한 창을 마련해야 한다. 제주에도 두어 군데 해군기지를 만들어 두 방향에서 밀려오는 적[일본과 중국]을 막아야 한다. 우리가 도서관 서고에서 찾아낸 옛 문서를 들고 아무리 흔들어도 일본의 독도 침탈은 막을 수 없다. 댜오위다오를 두고 일본과 싸움을 벌이는 중국이 싸움을 걸어올 다음 차례는 우리의 이어도다. ‘역사가 반복된다’는 경험칙만 바라보며 넋을 잃고 앉아 있을 틈이 없다. 오나라의 부차와 월나라의 구천이 남긴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교훈을 우리 스스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중국와 일본에 의해 당한 구한말의 치욕은 바로 오늘의 일로 재현될 수도 있다. <2012. 9. 27.>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