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2.09.23 김기덕은 반역자인가?
  2. 2012.01.25 '부러진 화살'의 불편한 진실
  3. 2009.03.29 워낭소리, 본향의 소리
글 - 칼럼/단상2012. 9. 23. 18:12

 

 

 

 

    <베드로 성당에서 감동적으로 만난 피에타상>     <베드로 성당 안에 있는 천계[天階, 발타키노]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은 베드로 성인>

     <베드로 성당 큐폴라에서 내려다 본 바티칸 시티>   

 

 

 

김기덕은 반역자인가?

-영화 ‘피에타’를 맛보고-

 

 

                                                                                                                                                         백규

 김기덕의 영화 ‘피에타’를 보았다. 제69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지 24시간도 안 된 시점이었다. 되새기기 싫은 장면들과 메시지가 내 안의 알량한 양식(良識)과 벌이는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 한 이 영화에 대한 단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으리라는 비관적 전망이 나를 우울하게 했지만, 그럼에도 쓴 약을 한 봉지 털어 넣고 도리질하며 차가운 물을 마시듯 몇 자 남길 수밖에 없다. 앞으로 이 감독이 새롭게 내놓을 또 다른 영화를 소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내 비위를 강하게 단련시킬 필요는 있다고 본 것이다. 그 정도로 이 영화에 대한 내 나름의 해석을 내려야 한다는 과제는 일종의 고문이었다. 영화를 접한 지 한 달이나 넘은 지금 몇 자 그적거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 별로 없지만, 그의 영화들은 늘 화제를 몰고 다녔다. 나도 그 가운데 몇 편 접하긴 했으나, 늘 개운치 못했다. 그다지 절절하지 못한 이유로 때려 부수거나 치고받다가 마지막에 행복의 카타르시스를 만들어 내는, 속 편한 영화들의 문법. 그런 문법에 익숙해진 내 범속성(凡俗性)의 한계 때문이리라. 그러지 않아도 매사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노라 피곤한데, 돈 내고 영화를 보면서까지 천근 무게의 메시지를 새겨야 한다면 억울한 일 아닌가. 깔깔 웃음이나 후련한 해결을 통해 내 안의 찌꺼기를 맘껏 풀어내는 배설의 장소가 바로 영화관이 아니던가. 그런데, 영화를 보며 배설의 쾌감을 맛보기는커녕, 오히려 무거운 과제를 받아 와야 한다면? 참으로 고약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떨떠름한 기분으로 영화관에 들어섰던 것이다. 과연 첫 장면부터 구역질이 나왔다. 한때 세상에서 불지옥으로 죄인들을 끌어 올리는 데 쓰였음직한 갈고리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말려 올라가고, 한 생명이 종말을 고하는 단말마에 내 가슴은 오그라들었다. 보이지 않는 죄악의 근원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듯한 주거환경이나 청계천 철거예정지역의 공작소가 보여주는 살풍경. 잔인무도한 표정과 어투의 ‘강도’ 이정진. 모두가 인간성 말살의 빗나간 이 시대의 ‘천민자본주의’ 혹은 그 터전을 대변하는 존재들이다. 불법 채권추심업의 비인간성을 온몸으로 보여준 이정진. 그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악마의 표본으로 제시된 존재였다. 자식을 죽인 원수 이강도에게 엄마를 가장하고 접근하여 복수를 시도하는 조민수의 무겁고 처절한 연기는 또 얼마나 섬뜩한가. 

 

 돈 때문에 남을 죽여야 하고, 자신이 죽어야 하는 세상은 말 그대로 지옥이다. 음습한 철공작소의 소품들이 빚어내는 살풍경과 무거운 공기. 그 속에서 단말마의 비명을 질러대며 사라지는 생명을 통해 감독은 무엇을 그려내고자 했을까. 자식을 죽인 원수를 만나 세속적인 복수의 방정식을 실천하는 대신 자신과 그를 함께 묶어 죽음으로 결산하는 서사를 통해 감독은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 했을까. 세상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고 죽음을 당한 예수. 그를 무릎에 앉히고 무한 슬픔에 잠긴 성모 마리아. 왜 조민수는 지금 세상의 가장 극악한 범죄자,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원수를 죽음으로 회개시키면서까지 나 같은 범인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구원의 방식을 세상에 내 보이고자 한 것일까. 강도의 처소에 들어간 뒤 음료나 음식물 속에 독약이라도 넣어 그를 죽여 버림으로써 세상의 어머니가 실천함직한 ‘범속한 복수’를 행하지 않고 그렇게 난해한 고차방정식을 풀어나간 것일까.   

 

 단언컨대, 단순히 감독 자신의 미학을 화면에 구현시킨 것이 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진정한 주제나 사건들의 의미를 감독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새롭게 발견되는 의미가 ‘텍스트의 살아있음’을 입증하는 유일한 단서라면, 감독은 자신이 던진 화두가 세상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목소리들을 통해 그를 확인하고자 했을 뿐, 그가 결코 단정적인 메시지를 던진 건 아니었으리라. 그런 점에서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를 통해 세상 사람들이 흔히 읽어내는 메시지, 그 스테레오 타입을 멋지게 전도시킨 김 감독이야말로 얼마나 ‘멋진 반역자’인가!

 

  <2012. 9. 23.>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1. 25. 09:01

‘부러진 화살’의 불편한 진실


                                                                                                       백규

영화 '부러진 화살'을 만나기 위해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다. 그간 언론매체나 인터넷을 통해 익히 들어온 사건이라서 내용은 소상하게 알고 있었고, 스토리의 전개나 분위기 또한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기득권 수호를 중심으로 하는 법조계의 비리가 영화 속 사건의 핵심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사건의 발단 부분에 관심이 컸다. 감독이 좀 더 심사숙고했다면, 대학이나 교수들의 집단 심리를 스토리 전개의 또 다른 한 축으로 삼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자신이 봉직하던 S대학 입학시험으로 출제된 수학문항이 원천적인 오류를 안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고, 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김명호 교수. 그 지점에서 그가 강조한 것은 ‘학자와 교육자의 양심’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문제 하나’였지만, 그것이 수많은 학생들의 당락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사건이었다. 동시에 해당 전공의 교수로서는 학문적 자존심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다. 그 순간 관련 당사자들은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옳았을까. 김 교수의 주장을 받아들여 끝까지 진실을 규명하고 바로잡는 것이 옳았을까, 아니면 실제 일어난 사건처럼 ‘공동체의 대외 이미지 실추’를 막는다는 미명 하에 얼렁뚱땅 넘어 가면서 김 교수를 핍박하는 게 옳았을까.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가 바로 ‘진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진실의 공개나 규명이 공동체의 이익과 과연 상치되는 것인가?’ 등의 두 문제로 압축된다. 결정적 키는 바로 ‘정의’에 관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인식이다. 양심 혹은 양식에 달린 문제, 즉 정의와 집단이익 혹은 양심과 비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우리의 자화상을 역력히 보여주는 문제라는 것이다. 입시문제의 출제 오류를 인정하고 공개할 경우 S대학은 물론 학과의 명예에 손상을 입게 될 것이니 일단 덮고 가는 게 좋겠다는 것이 학교 당국과 교수들의 공감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학교 당국의 그런 판단과 회유에 넘어 간 교수들이 김 교수를 압박하고 나섰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학교당국의 회유에 넘어갔든 스스로의 판단이었든, 결과는 우리 사회의 도덕적 기준을 심대하게 손상시킨 일종의 ‘만행(蠻行)’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동료를 비난하며 학교당국의 종용에 따르는 순간 교수들의 내면에서 작동되던 양식이나 정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순간 마이클 샌덜(Michael J. Sandel)이 정의(正義)와 도덕적 행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제기한 물음들 가운데 하나[‘조난을 당해 오랫동안 굶주린 선원들이 제일 약한 소년을 잡아먹었다면, 그 행위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을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과연 ‘굶주린 선원들’이었으며, 김 교수는 과연 ‘약한 소년’이었는가? 물론 교수들은 학교당국에 의해 채용된 ‘피고용인들’이다. 영화에서 여러 번 반복된 바 있지만, ‘교수의 재임용은 학원의 고유권한’이라는 사립학교법에 의한다면, 교수들이야말로 무력하고 나약한 존재들이다. 다시 말하면 ‘밥이 필요하고, 권력의 우산이 필요한’ ‘굶주린 선원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켕기기야 했겠지만, 그들 가운데 ‘가장 약한 소년’을 잡아먹고도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허울이 양심과 정의의 화살을 막아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아무리 도덕의 문제가 이분법적으로 가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 또한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해도, 이 사건에 관련된 교수들이 도덕이나 정의에 관한 우리 사회의 공준(公準)을 저버린 점에 대하여 변명의 여지가 없음은 영화를 보며 무의식중에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의 공감에서 입증된다. 교수들을 그런 방향으로 몰고 간 대학 당국의 행위 또한 말할 것도 없이 독재시대에나 통했을 시대착오적 만행일 뿐이다. 일이 불거진 시점에 과감하게 문제를 공개하고 사과했다면, 역으로 그들의 판단이나 행위는 정의와 도덕의 빛나는 기치(旗幟)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젠 늦었고, 아마도 한동안 S대학당국과 그 학과 교수들은 성난 대중으로부터 난타당하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드높은 꽹과리 소리와 함께 권력에 당하기만 해온 민중의 ‘한풀이’가 이제 시작되려는 지금부터 앞으로 상당기간 그들은 ‘죽었다가 살아날’ 정도로 흠씬 두들겨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 것인가? 나 역시 ‘굶주린 선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지 말란 법이 있을까?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의 교수들 가운데 누가 이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게 바로 이 영화가 살짝 보여준 ‘불편한 진실’이다.<2012. 1. 24>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3. 29. 07:42
워낭소리, 본향의 소리


고정관념을 뛰어 넘은 영화 <워낭소리>가 우리사회 중장년층의 누선(淚腺)을 자극하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전통정서에 쉽사리 호응할 것 같지 않은 2, 30대 청년들의 마음까지 움직이고 있다. 중장년층이야 어린 시절 향촌에서 워낭소리를 듣고 자란 세대라서 그럴 수 있다지만, 의외로 청년들이 이 영화에서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다소간 의외라 할 수 있다.

날마다 새벽같이 워낭소리에 잠을 깨던 꼬마들이 50대 장년으로 성장한 지금, 어린 시절의 추억이 화면으로 재생되어 나타난 것이다. 시절은 마구 변하여 산업화와 정보화를 지나 고도 지식정보화의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우리의 정신적 촉수는 아직 산업화 이전의 농경사회에 머물러 있음을 영화는 역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누렁소와의 추억을 공통으로 갖고 있는 우리는 왜 영화 속의 장면들을 보며 눈물을 떨구는가. 화면을 점령하고 있는 ‘느림, 늙음, 낙후’가 빚어 만드는 그 시절 삶의 진실이 ‘아직도 그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통해 산업의 패턴이 변화하는 와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우리가 먼빛으로나마 다시 제 길로 접어들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무익한 ‘원점 회귀’로 평가절하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의 원점 회귀는 잃어버린 본향의 회복일 뿐 낙후한 상태로의 후퇴는 아니다. 물질적 개념 아닌 정신적 공간이 바로 본향이다.

현실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나그네 혹은 이방인으로 보는 것이 특정 종교의 전유물은 아니다. 누렁소와 말없이 교감하며, 소 때문에 농약을 뿌리지 않고 기계영농마저 거부하는 노인이야말로 생명을 중시하던 우리의 전통적 인간상이거나 그동안 잊고 지내던 우리의 원래 모습이다. 사실 본향 속에서만 그런 인간상은 존재할 수 있고, 체현될 수 있다.

매일 바꾸어야 할 만큼 우리들의 삶이 가벼운 건 결코 아니다.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한 주변의 하찮은 물건 하나도 그냥 버릴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생명은 바로 존재의 이유다. 비록 한 마리의 소일지라도 생명이 있는 한 인간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은 그것이 존재해야 할 소중한 이유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첨단의 디지털 기술로 번쩍이는 오디오, 비디오 기기가 넘쳐나지만 두 노인은 아직도 아날로그 시대의 고물 라디오에 기대고 산다. 비록 낡았으나, 아직도 흘러간 그 시절의 노래들을 잘도 들려주는 그 자체가 그 라디오의 존재 이유다. 라디오처럼 늙은 노부부의 얼굴에 깊게 파인 주름은 시절이 아무리 변해도 우리의 삶이 바뀌지 않음을 보여주는 기호다. 시절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을 추구해 가는 삶의 진실은 주름이라는 기호의 심층구조다.

따라서 이 영화를 관통하는 정신은 ‘변하지 않음’ 혹은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는 지속 그 자체다. 우리는 살면서 수시로 단절을 경험한다. 어제와 오늘, 작년과 올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등 늘 단절을 통해 변하는 것이 세상인 것처럼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네 삶의 이면은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다.

영화는 변화에 대한 거부나 비판을 바탕에 깐 채 ‘불변, 느림, 지속’의 철학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가 수시로 경험하는 변화나 발전은 허상일 뿐이고, 그 이면에 지속되고 있는 농경사회의 정서가 우리의 본향임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영화를 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우리의 마음에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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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