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의식'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6.12.17 대통령의 콤플렉스
  2. 2010.10.25 고려대학의 정교수는 끝까지 살아서 싸웠어야 했다!
글 - 칼럼/단상2016. 12. 17. 13:51

대통령의 콤플렉스

 

 

 

최근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사람들은 그를 비판하고 질타하느라 여념이 없다. 단군 이래 우리가 이렇게 하나로 단결된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면, 우스갯말로 못난 대통령이지만 국민들의 단결을 위해 큰 공을 세웠다고 말할만도 하다. 의정 단상에서 사자후를 토하는 선량(選良)들 가운데 몇이나 돌을 던질 만한자격을 갖추고 있을 것이며, 촛불을 들고 나선 나 같은 장삼이사(張三李四)들 가운데 몇이나 국민으로서의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을까. 어차피 물러날 대통령이긴 하지만, 이쯤 우리는 그를 거울로 삼는 게 옳다그를 거울로 삼기 위해서라도 우리 스스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질 필요는 있다.

 

비선(秘線)의 인물이나 조직이 국정을 농단케 한 일에 대해서는 입이 천 개라도 변명할 수 없다. 그와 함께 불통, 여염집 여인에 의한 연설문 수정(혹은 대필), 머리 손질과 피부미용에 대한 집착 등은 대통령의 큰 문제로 지적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들을 관통하는 핵심은 콤플렉스. 인간의 현실적 행동 및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이나 감정의 복합체가 콤플렉스다. 콤플렉스는 열등의식을 비롯한 내면의 응어리 혹은 억압된 감정으로 구체화 되며, 이런 무의식은 대부분 개인차가 있지만, 간혹 집단적인 모습을 띠기도 한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콤플렉스는 무엇일까. 미안한 이야기지만, ‘공주로 자란 대통령이 타고난 책벌레는 아닌 듯 하고, 순발력 있는 두뇌의 소유자는 더더욱 아닌 듯하다. 성장기 내내 생존경쟁의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까닭일까. 앎에 대한 욕망과 투지에서 평균치 이하이고, 그러다 보니 모든 분야의 지적 수준이 평균 이하임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인사에 실패했다고 비판을 받긴 하지만, 대통령 주변의 인물들이 대체로 우수한 인재들인 것은 사실이다. 그들로부터 대면보고를 받으면서 자자구구(字字句句) 사전이나 인터넷을 들춰볼 수도 없고, 초등학생처럼 사사건건 질문을 던짐으로써 자존감을 손상받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모든 보고사항을 문서로 받아보고자 했을 것이다. 혼자 꼼꼼히 읽어가면서 자유롭게 사전이나 인터넷의 도움을 받고자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충분치 못한 지적 용량을 부하직원들 앞에서 노출시키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으리라. 대면보고를 수용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고, 그 점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불통이란 비판이 따라붙게 된 것이다. 대통령 자신의 자존심만 지킬 수 있다면, 불통에 대한 비판 쯤 감수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와 관련되는, 대통령의 특징이 바로 눌변(訥辯)이다. 공자는 欲訥於言 而敏於行(말에 있어서는 어눌하게 하고 실행에 있어서는 민첩하게 하고자 한다)’이라 했다. 공자의 언급대로 심사숙고 끝에 내놓는 말을 어눌하다고 한다면, 그 어눌함이 생각 없이 내뱉는 達辯(달변)’보다 훨씬 낫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대통령  뺨칠 만한 눌변이다. 사실 세상엔 말 잘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 그 말 잘 하는 사람들에게 도무지 믿음이 가질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말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대부분 첫판에 , 사기꾼이다!’라는 느낌이 전기처럼 전해져온다. 내가 목격한 사기꾼들 치고 말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나의 눌변이 결코 부끄럽지 않고, 대통령의 눌변을 그리 큰 흠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2012년 대통령 선거 토론 때 야당 후보로 출마한 어떤 젊은 여자와 마주 앉은 모습을 TV로 지켜본 적이 있다. 그 젊은 여자는 참으로 말을 잘했다. 그러나 그 역시 내겐 입만 살아있는선동가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차라리 어눌한 대통령이 나았다. 그런데, 대통령은 자신의 어눌함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TV에 나와서 사자후를 토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모두 달변가들이다. 그러나 입으로 하는 말과 속셈이 대부분 다른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잘 놀리는 혀가 그리 중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자신의 어눌함을 매우 부끄럽게 여기는 것 같다. 차라리 자신이 말로 뱉어낼 콘텐츠의 부족을 부끄러워해야 하는데, ‘말솜씨 없음만 부끄러워한다. 그게 바로 해결할 수 없는 그의 어리석음이다.

 

대통령이 눌변과 함께 부끄러워하는 것이 바로 렬한 글 솜씨인 것 같다. 연설문 담당관에게 연설문을 받고서도 다시 최순실의 수정을 받은 이유는 뭘까. 최순실의 어투나 문장이 편했을 것이다. 잘 나고 뛰어난 사람들이 현학적으로 작성한 글보다는 통일은 대박식의 단문이 수준에 맞아 훨씬 맘이 편했을 것이다. 누구나 한 번 두 번 글 도움을 받다 보면, 스스로 글 쓰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글은 습관이다. 한 번 최순실에게 맡겨 본 대통령으로서는 어느 순간부터 대필자 혹은 검토자를 다른 누구로도 바꿀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내 맘을 콕 짚어낼 수 있을까?’라는 찬탄을 보내며, 대부분의 연설문을 그녀에게 맡기는 동안, 대통령 자신의 글 솜씨는 점점 퇴보하고 말았으리라. 아니, 단 한 줄의 글도 제 손으로 써내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말이 어눌하고 글이 졸렬하니, 내로라하는 참모들을 대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말이 어눌하고 글이 졸렬하면, 책이라도 열심히 읽고 짧은 글이라도 열심히 써야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고자 하는 대통령으로서는 단 한 번도 국민들 앞에서 어눌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으며, 참모들 앞에서 단 한 점의 무식한 모습도 보여줄 수 없었다.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것이 대통령 권위의 전부라 생각하여 아예 취임 첫날부터 대면보고를 받지 못했던 것일까. 처음부터 그런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어쩌면 오늘과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다음이 머리 손질과 피부미용이다. 대통령만큼 나이에 맞지 않는 외모와 고운 피부를 갖고 있는 여성도 드물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그는 늘 자신의 얼굴과 피부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역시 여성인지라 아름다움에 관한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일 것이다.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여인들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 덕에 우리나라의 화장품 산업이 이토록 발전했겠지만, 대통령까지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각종 주사까지 맞아가며 피부나 머리 관리를 해야 했는지, 생각할수록 한심하다. 화장품 광고마다 화이트닝(whitening)’을 강조하고, 각종 주사제를 선전하며 어린애 같은 피부를 내거는 광고에 한국 여성들이 거금을 아까워하지 않는 건 일견 당연하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나랏돈으로 각종 주사제까지 사들이고, 마구잡이로 비선의 의사들을 불러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런 와중에 불거진 사건이 세월호 7시간이다. 남자고 여자고 간에 60 넘어 귀한 것은 내면의 덕이 내뿜는 광채다. 쓸데없이 이것저것 덕지덕지 바르고, 주사바늘로 밀어 넣어 팽팽해진들 그게 얼마나 지속되겠는가. 대부분 돈과 시간의 낭비요,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우스워지는 일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런 부질없는 일로 국민의 기대와 공적 임무를 저버리는 것은 왜일까.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콤플렉스 탓이다. 그리고 그 콤플렉스는 그간의 삶이 정상적이지 못했거나 불건전했음을 드러내는 증거일 뿐이다.

 

처음부터 대통령에게 이런 콤플렉스가 없었다면, 비선을 가까이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고, 비선이 없었다면, 국정농단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콤플렉스는 물론 죄가 아니다. 자신의 의지나 의도와 무관하게 생겨난 내면의 암 덩이일 뿐이다. 형사법으로 다스릴 죄이기 이전에, 용한 의사들이 달려들어 정확히 진단을 내린 다음 뿌리를 뽑아야 할 병일뿐이다. 지금 우리는 불쌍한 환자 하나를 거리로 내쫓은 뒤 괜한 마음고생으로 뒤척이고 있는지 모른다대통령은 다중(多重) 콤플렉스 환자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겐 추상같은 법의 단죄와 함께 치료의 손길을 건네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0. 10. 25. 10:57
 

 교수들을 ‘구름 위의 신선’이나 ‘도덕군자’ 쯤으로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요즘 들어 교수가 관련된 파렴치 범죄들이 노출되면서 교수들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은 바뀌고 있지만, 그동안 그들에게 주어왔던 기본점수까지는 깎으려 하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 대다수의 가상한 정서다. 전통시대에 형성된 스승관(觀)이 우리 사회에 온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정신적 거래행위’를 시장에서 사고파는 ‘물질적 거래행위’와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범주에 올려놓고 전자를 신성시하는 행태는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어렵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요즘의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를 상행위(商行爲)와 일치시킴으로써 교육과 관련된 세태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다지 일반화된 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상당수의 대학교수들이 국회의원 혹은 정부의 고위직으로 발탁되는 모습들을 보면서 형성된 보통사람들의 교수관(觀)이야말로 교수직에 대한 일종의 ‘우스꽝스런 외경심(畏敬心)(?)’이라고나 할까.

 그 뿐 아니다. 교수로 임용되는 일의 지난(至難)함 아니 극난(極難)함이 교수직에 대한 환상이나 편견을 고조시키는 데 분명한 일조를 했다. 보라! 넘쳐나는 교수임용 대기자들, 예비 학자들,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한 채 구체제 속에서 양산되고 있는 대학원생들... 교수직을 아예 뽑지 않거나 뽑더라도 비정년직으로 대충 땜질하고 있는, 교수시장의 급격한 변모양상을 보면, 이런 문제는 갈수록 심화될 것이다. ‘교수직 진입의 어려움’은 ‘교수직에 대한 선망’을 더욱 촉진시킬 것이며, 교수직에 대한 선망은 다시 교수직에 대한 진입 욕구를 증진시킬 것이다. 이런 현실은 유능한 대기자들의 교수직 진입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는 일종의 ‘악순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교수직 혹은 교수들의 본질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은 더욱 왜곡되어 갈 것이다.

 교수도 사람이다. 아니 생활인이다. 뿔을 마주 대고 싸우는 벼랑 위의 산양(山羊)들처럼 공동체 안에서 작은 이해관계로 첨예하게 다투고, 한줌의 이익 때문에 상대방을 음해하기도 한다. 정론을 펴기보다는 하잘 것 없는 입방아로 공동체를 분열시키거나 국가와 사회에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말하자면 대학 바깥의 사람들보다 저급한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반인들은 상아탑의 교수들을 ‘맹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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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고려대 정 아무개 교수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언론보도들은 공통적으로 그가 ‘왕따’ 때문에 자살했다고 한다. 그리고 ‘왕따’의 원인을 지방대학 출신이라는 데서 찾고 있다. 대한민국의 중심인 서울에 있고, 현직 대통령을 배출한 대표적인 메이저 대학들 가운데 하나가 고려대학이다. 한국 대학들의 저급한 관행으로 미루어 고려대학 교수진이라면 대부분 고려대학 출신 이상들만 모여 있을 것이니, 지방대학인 공주대학 출신의 정교수가 흡사 ‘붕어 떼 틈새의 피라미’ 정도로 여겨졌을까? 피라미 정도가 붕어 급인 자신들 사이에서 노니는 ‘꼬락서니’가 눈에 거슬렸을까? 그들은 왜 ‘가련한’ 그를 왕따시킨 걸까?

 사실 한 집단에서 왕따를 당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대다수 구성원들과 다른 행동양태를 갖는 경우,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평균보다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그것들이다. 양자 모두 사회적 병리현상들로서 ‘치유 불가능한 부정적 집단행동’이라는 점에서 사회의 저급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현상들이다. 실제 대부분의 경우 능력이 모자라서 왕따를 당하는 것은 아니다. 외부로부터 이입(移入)된 구성원의 능력이나 자질이 자신들의 평균보다 낮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 당황스런 다수는 공격성을 보이게 된다. 까닭 없이 특정인을 배척하는 행태, 그것이 바로 ‘왕따’다.

 나는 정교수의 능력이나 인간관계를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한국 교수시장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는 ‘카르텔’을 고려해볼 때, 그가 지방대학 출신으로서 고려대학 같은 메이저 대학에 입성했다는 그 사실은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일이다. 그가 능력을 갖추지 않았다면, 무슨 수로 그런 암초들을 피해 ‘교수임용’이라는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었으랴. 아마도 간신히[혹은 너끈히] 접안(接岸)에 성공한 그를 보며, 선배교수들이나 동료들은 ‘어라, 저 놈 봐라!’라고 경악했을 것이다. 그의 능력이나 장점을 인정하기보다는 자신들과 다른 학부 졸업장을 쥐고 있는 그가 자신들과 같은 반열에 오른 것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노비문서’인 학부 졸업장의 원천적인 핸디캡을 시원스레 극복해낸 그에게 박수를 치는 대신, 도리어 새로운 양태의 공격을 가하게 되었으리라.
교수들이 뜻만 합친다면 동료교수 하나쯤 ‘왕따’시키는 일이야 무슨 대수이겠는가. 교수가 관여해야 할 온갖 일들이 ‘왕따 작전의 현장’일 것이니, 그 속에서 갓 40의 여린 그가 감내해야 할 부담은 오죽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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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지식사회를 대표하는 것이 대학이고 교수집단이다. 그러나 ‘실력을 제외한’ 온갖 기준들을 지뢰처럼 묻어놓고 차별을 자행하는 ‘무자비한 집단’이기도 하다. 서울과 지방, 서울과 수도권, 본교와 분교 등은 1차적 차별 기준이다. 서울에 있는 대학들이라고 모두 ‘서울대학’은 아니다. 그 속에도 1류, 2류, 3류가 있다. 서울의 1류라고 모두 같은 것도 아니다. 초일류와 범일류가 있고, 준일류도 있다. 2류와 3류도 같은 방식으로 세분되는 것은 물론이다. 최상의 대학 내에서도 음으로 양으로 차별을 자행하는 기준들이 엄존한다. 이런 차별구조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마음의 흐름은 단 두 갈래다. 가당찮은 우월감과 비참한 열등의식이 그것들이다. 일류대학 구성원들이라 하여 모두 같은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도 묘한 차별이 자행되고, 그에 따르는 ‘상대적 열등감’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우월감과 열등의식을 갖게 하는 상황은 언제든 있을 수 있지만, 지식사회의 그것처럼 국가와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것도 없다. 우월감도 열등감도 ‘실력에 의한 자부심’과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현재 한국의 지식사회는 나라의 발전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집단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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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미국에서의 일이다. 세칭 일류대학 출신의 유학생을 한 사람 만난 적이 있다. 학교에 갔다가 자신보다 먼저 유학 온 어떤 사람을 반갑게 만났더니, 대뜸 “어중이떠중이대학 출신들이 모두 유학이란 걸 오는구나!”라고 말하더란다. 자신이 나온 대학보다 세상에서 말하는 서열이 한 단계 높은 대학을 나왔다고 생각한 그가 자존심이 상했던 듯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이었을 거라고 씁쓸하게 웃는 것이었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서 뿔나고,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새는 법이다. ‘글로벌 시대’를 고창(高唱)하며 지구촌 곳곳에 나가서도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누가 감히 우리를 넘보랴?’와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못난이들이 바로 우리 지식사회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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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순간,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난 고려대학의 정교수가 아쉬운 것이다. 까짓것 못난이들이 왕따를 시키거나 말거나 굳세게 버티며 ‘노력과 실력’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보여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잘한 참새들의 입방아를 넌지시 웃어주며 학문의 대로(大路)를 뚜벅뚜벅 걸어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2010. 10. 22.

      타쉬켄트의 호텔방에서  
      백규, 통곡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