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10. 1. 12:13

아버지의 지게

 

 

 

 

 

 

연구실과 강의실을 왕복하는 일상. 그 단조로움을 깨는 유일한 즐거움은 수영이었다. 거의 매일 한 시간 정도 물에 들어가 숨차게 땀을 빼고 나면 온몸이 가뿐했다. 쉼 없이 30차 왕복하면 36~40분이 소요되는 25m 레인에서 가당치 않게 대양의 돌고래들을 꿈꾸곤 했다. 가끔씩 어깨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럴수록 더 열심히 하면 대개 며칠 지나지 않아 가라 앉곤 했다.

 

두어 달 전. 갑자기 욕심이 생겼다. 36분에서 30분으로! ‘기록단축의 헛된 욕망에 사로잡혔던 것. 팔을 최대로 뻗어 큰 원을 그리며 스트록(stroke)의 소요시간을 줄이고자 했다. 서너 바퀴째 왼쪽 어깨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룻밤을 자고 나니 어깨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래서 며칠간 미친 듯이팔을 휘둘렀다. ‘수영으로 생긴 통증은 수영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개똥철학을 실천이라도 하려는 듯.

 

초년 교수 시절, 따르던 영문과 원로교수가 계셨다. 심장병으로 투병하시던 분이었다. 하루는 내게 이제부턴 어그레시브하게(aggressively) 살아야겠어요!” 자신감에 넘치는 그 분의 어투가 참으로 비장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그로부터 한 달쯤 후 영안실에서 그 분의 영정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를 악문 수영이 지속되면서, 극복되기는커녕 통증은 점점 더 묘하게 바뀌어갔다. 한 주일이 지나 이건 아닌데?’ 하며 병원을 찾았다. 사진을 찍어보니 어깨 근육 파열이었다. 의사로부터 수영금지의 선고를 받고는 '어깨 근육 재생'이라는 지난(至難)하고 지루한 공정(工程)에 돌입했다. 어깨가 아프고 보니 참으로 행동에 제약이 많다. 나도 모르게 아악!’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순간들도 적지 않다.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작은 볼트 하나만 빠져도 차가 덜컥 서지 않던가. ‘어깨 하나쯤이야!’라면서, 어깨 치료를 받고 있는 친구들을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던 나였다. 만각(晩覺)이었다.

 

아픈 어깨를 어루만지는 동안, 또 하나의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버지였다. 평생 지게를 지고 사시던 내 아버지와 고향동네의 많은 아버지들이었다. 산 같은 나뭇짐을, 바위덩어리 같은 벼 가마니들을, 끙끙 짊어지고 다니시던 아버지들. 그 분들의 어깨는 어떠셨을까? 툭하면 수술을 했다며 고통을 호소하는 요즘 친구들의 그 회전근개골이란 말을 당시의 그 분들은 알고나 계셨을까? 농사일의 80%는 지게질인데, 그 분들의 어깨는 철골로 만들어졌단 말인가. 지게에 얹힌 삶의 무게는 과연 어떠셨을까. 저 육중한 쇳덩어리 크레인인들 몇 년이나 지탱할 수 있을까. 아마 단 몇 년 지나면 고장으로 폐기되기 일쑤이리라. 그러니 '아버지 어깨'의 위대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고작 수영이나 즐기다가어깨 근육 파열로 끙끙대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지게를 떠올렸으니. ‘사람의 자식으로서 낯을 들기가 민망한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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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0. 9. 11. 08:43

"대리기사 노릇까지… 온종일 교수님 몸종"
상아탑의 그늘- 연구조교 A씨의 하루
교수 자녀 돌보기 등 잡무·심부름으로 하루
"내 공부할 시간은 없어" 참거나…그만두거나…

남상욱기자 thoth@hk.co.kr


'몸종''개인비서'라고 자학하는 학생들이 대학 교정을 배회하고 있다. 교수의 연구보조를 이유로 각 대학 교수 연구실에 상주하는 수 만 명의 대학원생 연구조교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교수의 자녀 보육부터 세금명세서와 같은 개인서류 챙기기, 대리기사 노릇 등 '상전'의 갖은 일을 챙기느라 녹초가 되고 있다. 그렇다고 불만을 드러낼 수도 없다. 교수 눈밖에 나는 순간, 그들의 미래가 단박에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학문의 전당인 상아탑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대학조교의 실상을 들여다봤다.

8일 오후 늦은 시각. 서울 모 사립대 문과계열 대학원 3학기째인 연구조교 A(29)씨가 교수 연구실에서 나와 도서관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1년 내내 연구실과 도서관을 오가는 반복된 생활이다. 가방에 가득 채운 것도 모자라 겨드랑이에까지 두툼한 책을 끼워 든 그는 밤새 공부할 작정이라고 했다. 그는 이번 학기 내 학위논문을 끝낼 계획을 세워두고 강행군 중이다. 하지만 A씨는 "오늘도 교수님 딸의 과제를 도와주느라 하루를 다 보냈다. 교수님 뒤치다꺼리에 공부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공부하러 대학원에 왔는데 이게 뭔가 싶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는 석사과정을 마치는 내년 하반기에 대학원을 그만 둘 생각을 하고 있다. "밖에서 보는 것과 너무 다른 현실에 자괴감이 들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 그 중심에는 물론 '부려먹기만 할뿐 공부에 도움을 안 주는 교수에 대한 원망'이 깔려있다. 그는 "교수가 쓸 논문자료를 찾고, 수업보조에다 시험이나 과제물을 확인하다 보면 이렇게 밤 늦게야 내 공부를 할 수 있다"며 "이런 고생도 미래가 보이면 감내하겠지만 지도교수는 논문지도 등에는 무관심하다"고 하소연했다.

A씨의 하루는 어찌 보면 단순하다. 오전 8시 교수 연구실로 출근, 그날 예정된 교수의 수업자료 챙기기로 일과를 시작한다. 수업에 들어가 출석 체크를 하고, 과제물을 걷거나 교수 전달사항을 전하는 게 그의 일상적인 수업보조 일이다. 간혹 과제물 채점을 직접 할 때도 있다. 그 사이 자신의 대학원 수업도 들어야 한다.

최근에는 지도교수가 학술지 발표 논문을 준비하고 있어 자료수집에 여념이 없다. "논문에 이름 하나 걸어준다"는 '대단한' 조건이 암묵적으로 걸렸지만, 그는 "내가 논문을 쓰는 건지, 교수가 쓰는 건지 모르겠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거부할 수 없다. 학술지에 이름 하나 오르는 것이 다음 학기 장학금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조교를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은데, 조교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향토장학금(집)에 기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날 오후 그는 교수와 함께 인천공항에 갔다 왔다. 친한 외국 교수가 한국에 도착한다며 지도교수가 마중을 같이 나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지난 주에는 교수 아들이 학교에 놀러 온다고 해서 오후 내내 놀아줬다"고 했다.

이러다 보면 어느 새 퇴근 시간이다. 퇴근은 물론 교수가 집에 가는 시간이 기준이다. 저녁 술자리가 있으면 함께 가는 경우가 많고, 가끔은 술 취한 교수를 집까지 모시는 '대리운전기사' 역할도 해야 한다. 그는 "한 마디로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회사원"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그의 하루 근무시간은 평균 12시간. '개인 비서'노릇을 하며 월급은 평균 80만원 가량으로 정확히 등록금만큼이다.

물론 그는 마음에 담아둔 말을 교수에게 한 적이 없다. 그는 "장학금은 물론 논문 심사까지 교수가 전권을 가지고 있는데 힘들다고 어떻게 얘기하겠나. 참거나 학교를 그만두거나 둘 중 하나다"라고 말한 뒤 도서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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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심해어

    백규님, 기자의 작문이라고 하셨습니까?

    이 기사 보다 더 한 일들이 대학원생들과 강사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 대학원의 현실입니다. 다만 그동안 공부한 것이 아깝고, 또한 논문을 포기할 수 없기에 더러워도 참는 것일 뿐입니다.
    교수, 교수가 대체 무엇이라 말입니까? 진정한 스승이 사라진 이 대학 사회에서 교수는 단지 국어 사전에 나와 있는데로 '대학에서, 전문 학술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나 전문 학술을 제대로 가르치는 사람이 몇이며, 제대로 연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글을 읽으며 "혹 기자의 작문 아닌가"라는 반문에 화가 날 뿐입니다.
    제 선배들 중에 정말 술자리에 대학원생들을 데려나와 술자리 끝날때까지 기다리게 하는 선배 교수 여럿 봤습니다. 그건 아주 애교로 봐 줄 수 있습니다. 정말 가관인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전 그런 선배들, 그 이후로 인간같지 않아서 만나지 않습니다. 내 비록 학문은 모자라나 인간인 것이 분명한데, 어찌 개떼들과 어울리겠습니까?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그런 교수들 아주 가까이에 떼거리로 있을 겁니다. 개떼들처럼 말입니다.

    조선의 문신 조지겸의 시가 떠올라 한 수 올려 봅니다.

    鬪狗行 개떼들 / 조지겸 趙持謙

    衆狗若相親 개떼들 친하게 지낼 때에는
    搖尾共行止 꼬리 흔들며 어울려 다니지만
    誰將朽骨投 누군가가 썩은 뼈다귀 하나 던져주면
    狗起衆狗起 한마리 두마리 일어나 우루루 달려가
    其聲은은의우牙 이빨 드러내고 으르릉 먹이 다투어
    大傷小死何紛紛 큰 놈은 다치고 작은 놈은 물려 죽지
    所以貴騶虞 그래서 추우를 참 고귀하다 하는 거야
    高臥天上雲 구름 위에 높이 누워 유유자적하니깐

    * 은은(犬+言, 犬+言) 의(犬+示) 우(口+牛) 추우(騶虞)鬪 : 인자한 성질을 지녔다는 전설상의 짐승

    정치판만 이와 같은 개떼가 득시글한 것은 아닙니다. 대학의 교수사회도 개떼와 같습니다. 아무 문제없이 친하게 지낼 때에는 서로 듣기 좋은 말만 하고 다정한 척 합니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걸린 일이 눈앞에 있으면 물불 가리지 아니하고 달려가 서로 물어 뜯습니다. 마치 개떼처럼 말입니다. 이익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아수라장이 됩니다. 결국 대학의 교수들 간의, 또는 교수와 강사들, 교수와 대학원생들 간의 온갖 갈등도 뼈다귀를 차지하기 위한 개들의 아귀다툼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중에 가장 회생자는 힘없는 강사들과 대학원생들임을 어찌 모른다 하십니까?
    진정으로 모르시는 것입니까? 아님 반어입니까?

    2010.09.13 23:18 [ ADDR : EDIT/ DEL : REPLY ]
  2. 이승희

    동감합니다. 저도 소위 SKY 대학 대학원 연구조교를 하면서 위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꾹 참고 석사를 졸업했는데 이제는 학교를 쳐다보기도 싫습니다. 교수들 중에는 술 취하면 여학생에게 성희롱을 하는 교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일을 떠맡기고 돈은 한푼도 주지 않는 교수 등 악질 교수가 다양한데, 여러 대학원생들의 밥줄이 걸려 있는 터라 교수를 마음놓고 신고하지도 못합니다.

    2010.09.16 21:36 [ ADDR : EDIT/ DEL : REPLY ]

글 - 칼럼/단상2008. 2. 27. 14:16
 

참회의 글


                                                    조규익


불교경전에 ‘개구즉착(開口卽錯)’ 또는 ‘미개구착(未開口錯)’이란 말이 있습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오묘함을 깨닫기 위해 반드시 되씹어 보아야 하는 경구이지요. 스스로의 노력으로 견성(見性)하지 못하고 남에게 의지하려 하면 ‘입을 열자마자 그르친’격이거나 ‘입을 열기도 전에 그르친’ 격이라는 말입니다. 예로부터 불교의 선사(禪師)들이 흔히들 써온 이 말은 진리를 깨닫는데 말이 필요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해를 끼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작은 일(?)에 큰 화를 낸 제가 정작 큰 일을 만나자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입을 열자마자 그르친 일'과 같은 격이 아니겠는지요? 그 당시 제 가시 돋친 말의 대상이 되었던 분에게 비로소 미안한 마음을 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아침 저는 ‘개구즉착’이란 성어에 빗대어 제 그러한 실수를 참회하고자 합니다.

***

 2년쯤 전인가요? 저는 교육부총리로 임명된 김 아무개 교수에게 직격탄을 날린 적이 있습니다.(*그 글을 아래쪽에 첨부합니다)  당시 논문발표와 관련하여 그 분이 저질렀다고 보도된 일들이나 그에 관한 그 분의 해명이 너무나 궁하고 불쾌했던 저로서는 ‘욱’하는 성미를 참을 수 없었고, 급기야 글 한 쪽을 써서 일간지에 실었던 것이지요.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통쾌해 했다면, 어쩌면 그것은 그 분이 당시 인기 없던 대통령의 측근이었다는 점 때문이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분에게 미안하게 생각하면서도, 함께 학문의 세계에 몸담고 있다는 외람된 사명감(?)에 저지른 일이었지요. 그러나 새 정부가 들어서고 장관에 임명된 이른바 ‘폴리페서(polifessor)’들의 ‘추한 모습’을 목격하며 부끄러움과 회한으로 참담함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의 행위에 비하면, 그 시절 그 분의 잘못이야말로 참으로 ‘애교스러운 실수’였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저를 몹시도 괴롭히는 요즈음입니다. 그 분의 잘못에 대하여 그런 글을 썼다면, 지금 문제된 분들에 대해서는 과연 어떤 글을 써야 형평이 맞는 것일까요?

***

제자의 글을 표절하고, 한 논문을 십여 곳에 중복 게재했으며, 십여 년 가까이 제대로 된 논문 한 편 발표하지 못했다면, 학자로서 더 이상 무슨 말을 보탤 수 있겠는지요? 그것뿐인가요?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부동산 등에 투기해온 그들의 행위를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교수들은 긴 방학을 즐길 수 있어서, 학문 하는 여가에 전국을 누비며 땅 투기에 전념할 수 있었노라고 ‘당당하게’ 해명이라도 해야 하나요? 연구가 잘 되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부동산 투기라도 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나요? 연구실에서 밤늦도록 불을 밝히고 고뇌하는 제 주변의 교수들은 그럼 어떤 사람들일까요? 왜 새 정부에는 그런 사람들 뿐인가요? 이토록 그들에겐 ‘이런 사람도 있다’고 자신 있게 내세울 만한, ‘단 한 사람’의 표본적 인물도 없는 걸까요?

***

새 정부에 참여하신 문제 교수님들! 당장 거기서 내려오세요. 거긴 여러분께 분에 넘치는 자리입니다. 제가 강요할 사안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동안 투기로 벌어들인 부동산을 처분하여 제자들을 위한 장학금으로라도 내놓으시는 게 어떨지요? 그런 다음 그간 소홀히 했던 학문 연구에 매진하세요. 그렇게 하는 길만이 그나마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아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참담한 마음으로 제 실수를 참회하노니, 강호 제현께서는 부디 제 허물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소서. 

 2008. 2. 27.


 백규 드림



*첨부(조선일보 2006년 7월 28일 오피니언 칼럼)


교육부총리, 안 되겠소

                                                         

신임 교육부 장관 관련 사건들과 이에 대한 당사자의 해명이 갈수록 가관이다. 해명은 의혹만 증폭시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규모로 번지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둔사(遁辭)’의 덫이란 것. ‘둔사 즉 도피하는 말은 논리가 궁하고 결국 정사(政事)에 해를 끼친다’는 맹자의 말씀은 이 경우에 딱 들어맞는다. 장관 하마평이 나돌면서 자녀의 외고 편입에 관한 여러 말들이 나돌았다. 그러나 교육문제에 관해 전문가 뺨칠 정도의 소양을 갖고 있는 국민들의 감정을 누그러뜨릴 만큼 그의 답변은 시원치 못했다. 그러다가 제자논문 표절 사건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우리의 지식사회를 감염시킨 표절사건들의 중심에 그가 서 있었음을 만천하에 드러냈고, 그 사건의 노출로 학계는 ‘카운터펀치’를 맞은 셈이다. 그 문제에 대해서도 당사자는 ‘전혀 문제 없다’는 반응을 보임으로써 학계와 국민들은 할 말을 잊었다. 곧바로 ‘BK21 논문 중복 게재 사건’이 뒤를 이었다. 이번에는 그도 어쩔 수 없었던지 사과를 했다. 그러나 ‘실무자의 착오’라는 전제를 달아둠으로써 그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말았다. 표절사건만 해도 그렇다. 제자인 신모씨의 논문이 통과된 것보다 자신의 논문 발표가 앞섰으니, 자신은 표절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 장관의 논리다. 제자에게 설문조사나 데이터 작성을 시킨 일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해괴한 것은 같은 데이터로 제자는 학위논문을, 자신은 일반논문을 작성했는데, 제목도 논조도 결론도 유사하다는 점이다. 시기를 따지면 장관의 논문 발표보다 학위논문 통과가 두어 달 뒤진다. 그러니 자신은 표절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모씨는 장관의 논문이 발간되고 나서야 학위논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인가. 백보를 양보하여 그런 논리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의문은 남는다. 박사학위논문에는 최소한 서너 번의 심사과정이 있다. 심사위원인 자신의 논문이 도용당했음에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인터넷 만능시대, 표절의 전성시대, ‘표절 여부를 가려내는 것이 학위논문 심사의 핵심’이라는 교수들의 한탄을 접하기가 어렵지 않은 요즈음이다. 하물며 직전에 발표한 자신의 논문이 제자의 학위논문에 도용되었는데,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장관이 한 마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이게 어찌 정상이란 말인가. BK21 논문사건은 표절보다 더 큰 문제다. ‘21세기 지식기반사회를 위한 고등인력 양성’이란 기치 아래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여 진행하고 있는 사업이다. 쓴 잔을 마신 필자를 포함하여 전국의 많은 교수들이 몇 개월간 날밤을 새워가며 BK21에 참여하기 위해 애썼으나 선정된 인원은 소수다. ‘피 같은 국민의 세금’으로 세계 수준의 대학을 만들어 보겠노라는 국가의 야심찬 프로젝트에 한때 고무되었던 우리다. 장관은 논문을 중복 투고했으면서도 연구비는 그대로 챙겼으리라. 그렇게 귀한 국가예산을 ‘눈먼 돈’ 쯤으로 여겼단 말인가. 그런 입장으로  어떻게 ‘표절하지 말라, 연구비 집행을 투명하게 하라, 학위논문의 부실을 막기 위해 철저히 심사하라, 자녀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편법을 쓰지 말라’는 영(令)을 내릴 수 있는가. 장관직 수행에 행정능력이나 기술이 중시된다지만, ‘교육인적자원부’만은 달라야 한다. 국가의 만년 대계를 책임 진 곳이 바로 교육부다. 행정능력을 바탕으로 인격이나 학자로서의 품위에 시비가 따르지 않을만한 인물을 발탁해야 하고, 스스로 ‘적재(適材)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면 고사해야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강호에 묻건대, 과연 지금이 불거진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장관직을 고수할 상황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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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8. 1. 3. 17:44
학기 말 성적 평가를 마치고


                                                                                                                    조규익
지난 여름의 일. 국가 기관이 발주하는 대형 프로젝트의 2차 심사(평가)를 받기 위해 풍광 좋은 어느 지방엘 다녀왔다. 목에 힘이 들어간 평가위원들이 평가 받기 위해 ‘잔뜩 숙이고 들어온’ 우리를 맞았다. 그들의 물음들 마디마디 짜증이 배어 있었지만, 우리는 그들이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점에 짜증이 났었다. 그러나 결코 내색할 수는 없었다. 칼자루를 쥔 그들이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몰라서였다.

결과는 우려했던 대로 ‘꽝’이었지만, 그들이 나중에 보내온 1쪽짜리 심사평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몇 가지 지적들 가운데 단 한 가지만 그런대로 수긍할 수 있었을 뿐, 나머지는 연구 제안서의 기본 내용이나 프로젝트의 취지마저 오독(誤讀)한 결과로 나온 것들이었다.

우리 팀의 어떤 친구는 “프로젝트 신청을 아예 못한 대학이나 냈다가 떨어진 대학의 교수들이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을 것이니, 말하자면 이 분야의 열등생들이 우등생의 보고서를 평가한 셈 아니냐?” 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우리끼리만 분통을 터뜨릴 뿐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은 우리에겐 앞으로도 ‘먹고 살아야 할 날들’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 국가기관을 자극해서는 앞으로 ‘국물도 없을 것’ 아닌가.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남들이 가하는 ‘평가’의 세례 속에 살아왔고, 나 또한 그 평가의 주체가 되어 남들을 괴롭혀 온 게 사실이다. ‘삶 자체가 평가’라 할 만큼 모든 것이 평가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내 모습은 그런 평가들을 거쳐 온 결과라고 할 수 있고, 지금도 끊임없는 평가 속에서 살고 있으니, 앞으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남아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학교나 사회에만 평가가 있는 게 아니다. 가정도 무서운 평가의 현장이다. 어제까지 모범 남편으로 칭송되다가 어느 한 순간 마나님의 눈으로부터 벗어나면 ‘몹쓸 인간’으로 추락된다. 어제까지 존경받는 아버지로 칭송되다가 무슨 문제로 자식들과 언쟁이라도 벌이게 되면 그 순간 여지없이 낙제생으로 급전직하하기 마련이다. 직장에서 지금까지 잘 나가다가 뜻 하지 않게 명퇴라도 당할라치면,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처치 곤란의 애물단지로 전락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이처럼 크게는 대통령 선거에서 작게는 학급의 일일 쪽지시험까지 시험과 평가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일희일비하며 인생을 불태워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평가자는 언제나 잔인하고 피평가자는 대부분 억울하다. 그러나 한 번 평가자라고 영원한 평가자일 수 없고 한 번 피평가자라고 영원한 피평가자는 아닐 것이니, 서로 간에 잔혹한(?) 새디스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모두의 운명인 셈이다.

20년 넘게 교수생활을 해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 내겐 연구도, 강의도 아니다. 바로 학생들에 대한 ‘평가’다. 대학에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있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성적을 매겨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학사시스템’에 올리게 된다. 교수에 따라 성적을 매기는 기준은 다양하지만, 내 경우 대개 ‘중간고사 40%+기말고사 40%+과제 10%+출석 10%’의 기준을 적용한다.
평가 척도를 좀 더 다양하게 하고 싶지만, 생각만큼 관리가 쉽지 않다. 학기 초에는 ‘잘 가르치고 엄정하게 평가하겠다’는 초심으로 날이 시퍼렇다. 그러나 날이 가면서 학생들의 면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출석 잘 하고 성실하나 학과공부에는 그다지 두각을 보여주지 못하는 그룹(1), 가끔 결석·지각은 하지만 반짝이는 모습을 보이는 그룹(2), 성실하면서 공부도 잘 하는 그룹(3), 극소수의 이도저도 아닌 그룹(4)으로 나뉜다. 요즈음에는 졸업반 학생들도 아래 학년들의 강의에 많이 들어 와 후배들과 경쟁을 하는데, 대개 교수에게 졸업반으로서의 절박감을 각인시킴으로써 후배들보다 우월한 위치를 점하려는 의도도 없지 않은 듯하다.^^
학점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대부분 성실하려고 노력하기 마련이어서 4에 속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편이다. 따라서 1, 2가 대부분이고, 3은 소수다. 그런데 문제는 1, 2에 속하는 친구들도 자신들이 틀림없는 3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열심히들 하기도 하지만 이제 마지막 벼랑에 서 있음을 시위하는 4학년들까지 고려에 넣다보면 채점의 곤혹스러움이 여간 아니다. 생각 같아선 모두에게 A를 주고 싶다. 그러나 눈치가 빤한 학교당국이 그걸 모를까. 아예 상대평가로 바꾸어 몇 %이상은 A나 B를 줄 수도 없다. 제한된 %를 초과하면 아예 성적 입력을 할 수 없도록 막아 놓은 것이다.
우리 대학시절만 해도 ‘교수시여, 제발 펑크만 내지 말아 주소서!’ 기도하고 다녔는데, 요즘 학생들은 B를 주면 무척 서운해 하고 C를 주면 아예 원수처럼 대한다.^^ 교수들에게 엄정한 상대평가를 강요하는 학교 당국도 C학점 받은 학생들이 졸업 전에 ‘재수강’을 하여 A나 B를 받을 수 있도록 탈출구를 열어 주고 있으니, 참으로 ‘모순된 현실’이다. ‘학점 인플레’에 대한 대응에서 학교 당국과 교수들 간의 엇박자가 이렇게 심할 수 없다.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성적처리가 끝나면 몇몇 학생들로부터 ‘눈물의 하소연’이 답지한다. 단 1점 때문에 장학금이 날아갔다느니, 다음 학기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삭감 당하게 되었다느니, 기업체에 인턴으로 선발되었는데 정식 채용될 기회가 사라졌다느니, 대학원에 진학하려는데 교수님의 학점 때문에 어렵게 되었다느니, 한 번도 지각·결석 없이 그토록 열심히 했는데 설마 이런 학점을 받을지 몰랐다느니 등등  과거 몇년 간 내게 전달된 사연들을 요약하면, 단순하지만 절절하다. 이럴 땐 어딘가로 숨고 싶다. 누군가를 평가한다는 게 이리도 가슴 아픈 일인지 매 학기 경험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다. 차라리 내가 피평가자의 입장에 설지언정, 다시는 남을 평가하는 자리에 앉고 싶지 않은 심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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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주인을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번호가 핸드폰에 찍혀있다. 학점 때문에 억울한 어느 학생의 전화였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이여! 억울해하지 말라. 낮은 학점은 오히려 그대를 한 단계 성숙시킬 수 있는 ‘쓴 약’이 될 수도 있다. 먼 훗날 그 학점 덕분에 좀 더 성숙한 인간으로 남을 평가할 수 있게 될 것이니. 대학의 학점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의미가 있는 법이다. 모두가 1등일 수는 없다. 그리고 대학의 학점 1등이 인생의 1등인 것도 아니다. ‘내가 1등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과 분발이 우리의 미래를 좀 더 발전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진리 아닌 진리를 깨달아줄 지어다, 사랑하는 학생들이여!
   

                                                   2008. 1. 3.  


연구실에서
고민 많은 백규 씀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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