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2. 1. 25. 09:01

‘부러진 화살’의 불편한 진실


                                                                                                       백규

영화 '부러진 화살'을 만나기 위해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다. 그간 언론매체나 인터넷을 통해 익히 들어온 사건이라서 내용은 소상하게 알고 있었고, 스토리의 전개나 분위기 또한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기득권 수호를 중심으로 하는 법조계의 비리가 영화 속 사건의 핵심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사건의 발단 부분에 관심이 컸다. 감독이 좀 더 심사숙고했다면, 대학이나 교수들의 집단 심리를 스토리 전개의 또 다른 한 축으로 삼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자신이 봉직하던 S대학 입학시험으로 출제된 수학문항이 원천적인 오류를 안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고, 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김명호 교수. 그 지점에서 그가 강조한 것은 ‘학자와 교육자의 양심’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문제 하나’였지만, 그것이 수많은 학생들의 당락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사건이었다. 동시에 해당 전공의 교수로서는 학문적 자존심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다. 그 순간 관련 당사자들은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옳았을까. 김 교수의 주장을 받아들여 끝까지 진실을 규명하고 바로잡는 것이 옳았을까, 아니면 실제 일어난 사건처럼 ‘공동체의 대외 이미지 실추’를 막는다는 미명 하에 얼렁뚱땅 넘어 가면서 김 교수를 핍박하는 게 옳았을까.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가 바로 ‘진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진실의 공개나 규명이 공동체의 이익과 과연 상치되는 것인가?’ 등의 두 문제로 압축된다. 결정적 키는 바로 ‘정의’에 관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인식이다. 양심 혹은 양식에 달린 문제, 즉 정의와 집단이익 혹은 양심과 비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우리의 자화상을 역력히 보여주는 문제라는 것이다. 입시문제의 출제 오류를 인정하고 공개할 경우 S대학은 물론 학과의 명예에 손상을 입게 될 것이니 일단 덮고 가는 게 좋겠다는 것이 학교 당국과 교수들의 공감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학교 당국의 그런 판단과 회유에 넘어 간 교수들이 김 교수를 압박하고 나섰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학교당국의 회유에 넘어갔든 스스로의 판단이었든, 결과는 우리 사회의 도덕적 기준을 심대하게 손상시킨 일종의 ‘만행(蠻行)’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동료를 비난하며 학교당국의 종용에 따르는 순간 교수들의 내면에서 작동되던 양식이나 정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순간 마이클 샌덜(Michael J. Sandel)이 정의(正義)와 도덕적 행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제기한 물음들 가운데 하나[‘조난을 당해 오랫동안 굶주린 선원들이 제일 약한 소년을 잡아먹었다면, 그 행위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을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과연 ‘굶주린 선원들’이었으며, 김 교수는 과연 ‘약한 소년’이었는가? 물론 교수들은 학교당국에 의해 채용된 ‘피고용인들’이다. 영화에서 여러 번 반복된 바 있지만, ‘교수의 재임용은 학원의 고유권한’이라는 사립학교법에 의한다면, 교수들이야말로 무력하고 나약한 존재들이다. 다시 말하면 ‘밥이 필요하고, 권력의 우산이 필요한’ ‘굶주린 선원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켕기기야 했겠지만, 그들 가운데 ‘가장 약한 소년’을 잡아먹고도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허울이 양심과 정의의 화살을 막아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아무리 도덕의 문제가 이분법적으로 가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 또한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해도, 이 사건에 관련된 교수들이 도덕이나 정의에 관한 우리 사회의 공준(公準)을 저버린 점에 대하여 변명의 여지가 없음은 영화를 보며 무의식중에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의 공감에서 입증된다. 교수들을 그런 방향으로 몰고 간 대학 당국의 행위 또한 말할 것도 없이 독재시대에나 통했을 시대착오적 만행일 뿐이다. 일이 불거진 시점에 과감하게 문제를 공개하고 사과했다면, 역으로 그들의 판단이나 행위는 정의와 도덕의 빛나는 기치(旗幟)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젠 늦었고, 아마도 한동안 S대학당국과 그 학과 교수들은 성난 대중으로부터 난타당하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드높은 꽹과리 소리와 함께 권력에 당하기만 해온 민중의 ‘한풀이’가 이제 시작되려는 지금부터 앞으로 상당기간 그들은 ‘죽었다가 살아날’ 정도로 흠씬 두들겨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 것인가? 나 역시 ‘굶주린 선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지 말란 법이 있을까?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의 교수들 가운데 누가 이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게 바로 이 영화가 살짝 보여준 ‘불편한 진실’이다.<2012.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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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1. 11. 5. 01:30

2011년 숭실⋅인하⋅중앙 대학원 연합심포지움 토론요지



연구부정에 무감각한 지식사회, 방황하는 학문후속세대



                                                                                                              조규익(숭실대)


몇 달 전 외국 유학 중인 20대 중반의 제자[이른바 ‘학문후속세대’라 할 수 있는]가 메일을 보내왔다. 공학 분야 어느 전공의 세계적인 학회 홈페이지에 ‘대한민국 교수 및 학자들의 이름과 그들이 자행한 논문표절 사실들’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세계 지식인들의 웃음꺼리가 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메일에는 그들 가운데 한 교수가 얼마 전 그 표절논문들 가운데 하나로 한국의 국토해양부 장관으로부터 우수논문상까지 받았다는 사실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그 논문들이 외국 학자들의 논문에 들어 있는 아이디어를 ‘살짝 도용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송두리째 베낀 경우들이라 했다. 깜짝 놀라서 그 사이트를 방문한 결과 과연 그곳엔 복수의 대학 교수들을 포함한 한국학자들이 ‘여러 건의 논문들을 표절한 파렴치범들’로 낙인 찍혀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고, 우리나라의 신문기사를 검색하니 과연 그 교수는 장관상까지 받은 것으로 되어 있었으며, 해당 교수의 대학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그 교수는 ‘우수교수’로 대학 홈페이지의 첫 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전공의 많은 학자들이 포진해 있는 해당 학계나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잠잠했다. 그 사실을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 알고도 그러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언제까지 국제적인 수모를 견뎌내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 시점으로부터 무려 석 달이 지나서야 그 사실은 우리나라 언론에 보도되었고[조선일보, 2011. 10. 5.],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언론에서 몇 마디 떠들다가 모두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어제 그 대학의 사이트를 다시 방문해보니 그 교수는 아직도 해당학과의 ‘시니어 교수’로 당당하게 남아 있었다. ‘특정분야 극소수의 일’이라고 편한 마음을 먹을 수도 있겠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남의 지식을 훔쳐 재미 보는 일’을 아무런 죄의식이나 죄책감을 느낄 만한 사건으로 보지 않는 지식인이 존재한다면, 우리 지식사회엔 미래가 없다. 과연 우리나라 대학들은 이들을 교수로 인정해도 되는 것인가. 가능성과 실력을 갖춘 학문후속세대들이 존경과 감시의 눈초리를 번뜩이고 있는 이 시대에 과연 우리의 교수집단이나 지식사회는 연구윤리의 정립자 혹은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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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을 비롯한 고위 공직에 발탁되는 교수들이 많아지면서, 청문회 등 검증의 기회가 정립되면서, 비로소 ‘연구부정’은 우리 지식사회의 치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상당수 고위 공직 후보자들이 연구부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은 지식사회에 대하여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었다. 언론이나 네티즌들은 고위 공직의 물망에 오르는 학계인사들의 논저들을 검증하기에 바쁘고, 야당은 그런 정보를 빌미로 후보자 본인은 물론 집권세력을 흠집 내기에만 전념한다. 문제의 후보자들은 으레 ‘당시에는 관행이었다/제자가 모르고 한 일이다/기억에 나지 않는다/확인해 보겠다’ 등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지만, 매우 떳떳하지 못하다. 초창기에는 그런 문제로 공직의 입구에서 낙마한 사고들도 더러 있었으나, 지금은 연구부정 문제로 낙마하는 사례가 거의 없다. 그만큼 짧은 기간 연구윤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문제의식이 무디어진 것이다. 처음 그런 문제들이 불거졌을 때 국회에서라도 연구부정의 문제를 논의해볼 법도 했건만, 그들이 연구나 연구윤리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고 관심조차 없었으니 애당초 기대할 필요도 없었던 일이긴 하다. 사안의 심각성이 부각되면서 정부와 학계가 부랴부랴 ‘연구윤리 규정’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연구부정에 적극 대처한다고 해왔지만, 지금도 빈번하게 발생하는 연구부정의 사례들은 그런 노력들이 대체로 문제의 본질에 훨씬 못 미치는 ‘격화소양(隔靴搔癢)’격의 시늉에 불과했음을 입증할 뿐이다. 입만 열면 대학생들의 리포트부터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고 떠들어온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리포트를 작성한다고 하면서 인터넷 사이트에서 긁어다가 짜기워 내거나 돈 몇 푼으로 구매하여 제출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현실이다. 전담 교수들까지 채용하여 대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지만, 어린 새싹들까지 연구부정의 고전적 수법에 능숙해져 가는 현실을 보면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글쓰기란 다만 ‘글의 겉을 꾸미는 기술’에 불과하지나 않은가 불안해지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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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윤리의 문제, 즉 서구에서 이미 개념 정립이 끝난 날조[fabrication]⋅변조[falsification]⋅표절[plagiarism] 등 연구부정의 행위들에 대한 국내외 학자들의 연구 또한 화려하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의 경우도 지식사회의 폭이 넓어지고 지식이 재화 창출의 수단으로 인식되면서, 지적 소유권 문제나 연구윤리의 문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에 따라 이 분야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결과들도 많이 보고되었고, 비록 형식에 그치는 감이 없지 않지만, 학회들의 논문집 말미에는 ‘연구윤리규정’이라는 것도 실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부정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빈번해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학문적 아이디어를 얻고, 그것을 골격으로 저작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야말로 철저히 ‘양심’에 관련된 문제임에도, 우리가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는 일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부정의 사건이 일어날 경우 그냥 외면하거나, 기껏 ‘기술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실수’ 쯤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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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 글 쓰는 일의 윤리성’은 유치원 단계부터 교육하여 ‘심성(心性)으로 고착’시켜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문제는 너무 크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서 논할 수는 없고, 당면한 우리의 관심사는 3개 대학원[중앙⋅인하⋅숭실]의 학생[학문후속세대]들을 어떻게 제대로 교육시킬 것인가에 있다. 토론자로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우선 세 대학원만이라도 「정의롭게 사고하기와 연구윤리」(가칭)를 공통과목으로 개설했으면 한다. 인문계[예술계 포함], 경상계[사회계 포함], 이공계 등 대학원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전공에 해당하는 이 분야의 한 과목을 반드시 이수케 할 필요가 있다. 세 대학원이 ‘연구윤리 공동위원회’를 만들고, 그 위원회에서 매년 혹은 매 학기 세 대학의 교수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강의를 맡기고, 그 교수에게는 일정액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것이 좋다. 연구 윤리가 교수 개인의 전공분야는 아닐 것이며, 강의내용을 새롭게 개발하고 조직하는 일이 수월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 학기 동안 전문적으로 동⋅서양의 연구풍토나 윤리 등을 공부하면서 학생들 스스로 연구부정의 폐해를 깨닫게 하는 것은 물론, 지식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된 이후에는 그들 스스로 연구윤리의 전도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재로서는 그 길만이 그나마 우리의 학문후속세대가 연구부정의 탁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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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가 ‘연구부정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우리의 미래는 암담하다. 학문후속세대로 하여금 지적 생산 작업에서 갖추어야 할 정직한 자세야말로 국가 간의 경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최종 병기’ 그 자체다. 후속세대에게 아무리 현란한 이론과 학설을 가르친들 이런 병기를 갖추지 못한다면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하다. 어설픈 미봉책이나 시늉만으로 문제의 본질을 덮을 수 있을 만큼 지금의 우리 처지가 한가롭지 못하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30. 15:47
 

아버지의 정


                                                                       조규익


‘동물’의 생태에 관한 TV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편이다. 미국에 잠시 체류할 때 ‘애니멀 플래닛(Animal Planet)'이란 채널을 즐겨 보았다. 가끔 채널 다툼(?)이 생겨나곤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의 삶의 원리나 방법이 인간의 그것과 별 차이 없다는 것이 내가 동물의 세계를 즐겨 보는 이유다. 구체적으로 그들의 삶의 원리는 무엇일까. 첫째는 약육강식 등 힘의 논리에 대한 승복이고, 둘째는 자식에 대한 애틋한 정이다.


약자를 지배하는 유일한 근거는 힘이다. 그 면에서 적어도 동물계의 불확실성은 없다. 윤리나 양심 등 약간의 예외를 빼면 인간 세계의 원리 역시 약육강식이다. 사실 윤리나 양심 등도 약육강식의 잔인성을 포장하거나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일 뿐, 늘 그것들이 인간행동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럴 경우 그것은 가식으로 비칠 가능성이 훨씬 크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동물보다 불순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나는 동물들을 좋아하고, 그들의 삶을 훔쳐보기를 좋아한다. 한국판 애니멀 플래닛의 출범만을 기다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동물의 애틋한 자식사랑도 인간과 마찬가지이고,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헌신적인 점도 인간과 마찬가지다. 부모 모두 자식 기르는 데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동물도 있긴 하다. 그러나 대충 수컷들은 육아에 무책임하다. 어떻게든 암놈을 차지하여 ‘씨를 뿌리는 데’만 혈안이다. 일단 씨를 뿌리고 나면 낳고 키우는 건 암놈의 몫이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대충이라도 알기 어려운 것이 초원에 펼쳐진 동물들의 세계다.


인간도 그렇다. ‘깊은 정은 부정(父情)’이라지만, 그건 모정에 비해 하나도 애틋하지 않은 부정의 실상에 대한 수사(修辭)일 뿐이다. 그래서 그런가. 아들들은 대충 아버지가 되어서야 아버지의 입장을 깨닫고 가까이 하려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 아버지의 무정함’을 다 늦어서야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


 국내 굴지의 재벌 H그룹의 모 회장이 술집에서 얻어맞고 온 아들의 복수를 위해 끔찍한 활극을 벌였다. 아들의 나이가 스물셋이니, 일찍 장가들었다면 아들이라도 보았을 나이다. 이제 육체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다 큰 녀석 아닌가. 그럼에도 밖에서 얻어맞고 들어온 아들이 그리도 애처로웠을까. 회장의 나이를 잘은 모르지만, 아마 ‘지천명(知天命)’이나 ‘이순(耳順)’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을 텐데. 이제 세상 물정 알 만큼 알고, 철이 들었을 만큼 들었을 그가 다 큰 아들이 얻어맞고 들어왔다고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직접 응징에 나섰다니, 어안이 벙벙해진다.


옛날 내 인척 가운데 한 분도 자식 사랑이 끔찍했었다. 그러나 같은 경우의 대처방법은 회장과 달랐다. 애가 밖에서 맞고 들어왔을 때, 자초지종을 물어 억울하게 맞았으면 아들을 다시 보내 스스로 복수하고 사과까지 받아오게 했다. 만약 아들이 잘못이었다면 그를 엄하게 꾸짖었다. 그런 교육을 받은 그는 책임감 강한 인간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애들이 밖에서 놀다 보면 사소한 다툼이 있을 수 있고, 툭탁거리며 싸우기 일쑤다. 회장의 아들은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곱고 귀하게 자랐을 것이다. 애들과 티격태격하다가 한 대 얻어맞으면 또르르 달려와 부모에게 일러바치고, 부모 또한 참을성 없이 달려가 주먹다짐을 하곤 했으리라. 그러니 스물셋이란 나이를 먹고도 몇 대 밖에서 얻어맞았다고 싸움판에 부모를 끌어들이지 않았겠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그 회장이 경찰 등 나라의 공권력을 우습게 만든 점은 따로 따져야겠으나, 필자 같은 일개 필부의 눈으로도 그 부자의 행실이야말로 ‘정상적인 경우’는 아니다. 초원에서 늘상 보는 ‘무책임한 수컷’의 범주는 벗어났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4. 30.


백규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