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9.09.02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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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계 니콜라이’의 21세기 민족운동


알마티에서 만난 50대의 계(桂) 니콜라이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에게 뚜렷한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로서 한일강제합방 뒤 북간도로 망명하여 이동휘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한 계봉우(桂奉瑀·1880∼1959)의 손자다. 현재 독립유공자 후손회 회장인 그가 보기에 중앙아시아의 한민족 공동체는 이미 와해됐다고 할 만큼 이 지역 고려인에게 민족정신의 상실은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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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농장에 서 있는 니꼴라이 선생>

한민족의 표지(標識)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이 말과 글이다. 말과 글을 잃은 세대 사이에 역사나 문화가 이어질 리 없다. 말과 역사를 잃은 경우, 본질적인 의미에서 민족공동체의 일원일 수 없다. 그런 이유로 말과 글이 민족 정체성 회복의 관건이라는 계 니콜라이의 관점은 해외동포의 교육이나 계몽에 관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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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장을 배경으로 서 있는 백규와 니꼴라이 선생>

많은 고려인처럼 ‘편하게 잘 먹고 잘살아 오다가’ 나이 50이 넘어서야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우쳤다는 그는 지배자 일본에 붙어 편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바쳐 투쟁한 독립투사의 삶을 보면서 자신의 관점을 바꿨다고 했다. 요즈음도 한국어교육원에 나가 우리말을 익히고 있을 만큼 말과 글에 거는 그의 기대는 크다. 무엇보다 자금 마련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박봉의 대학교수 직을 접고 농장을 경영하며 고려인에게 우리말과 역사를 보급하는 일에 나선 그의 삶은 계몽 중심의 독립운동을 주도해 온 조부의 행적과 흡사하다.

고려인은 사실 오랫동안 가족과 소비에트 국가만을 위해 일했다. 모국어 학교의 폐쇄를 강요당하면서도 변변히 저항 한번 못했다. 모국어 극장이나 신문이 지리멸렬해지는데도 손 한번 써보지 못하는 것이 고려인이다. 모국어가 탄압받고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한 상황에서 그 언어로 쓰인 모국의 역사를 전승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 활동 모두가 ‘민족을 위한 일’이라면 언어의 상실과 함께 사실상 민족운동은 막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점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고려인 단체의 현실인식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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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인들의 미래에 대하여 담론하고 있는 세 사람. 좌로부터 김병학 시인, 백규, 니꼴라이 선생>

그는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를 개척하지 못하고 외부의 도전에 너무 쉽게 자신을 접어온 원인으로 ‘노예근성’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잘 먹고 잘살아 온’ 그간의 삶은 철저한 순응의 역사였다. 구소련의 동화정책에 맞서지는 못했다 해도 최소한 민족의 정신을 지키려는 가정 단위의 개별적 노력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았느냐는 그의 주장을 순진한 생각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역경 속에서도 민족공동체의 미래를 내다보며 현실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선각자의 고난을 그는 매 순간 떠올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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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책에 서명하고 있는 니꼴라이 선생>

이런 일에 착수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새로운 한글 신문을 제작하겠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다. 우리 민족의 언어 문화 관습 정보 등 모든 것을 묶어 무가지(無價紙)로 배포하겠다고 한다. 그는 5, 6년간만 고려인 가정에서 우리의 말이나 역사에 관한 담론이 오갈 수 있다면 궁극적으로 민족에 대한 인식이나 관점도 살아날 수 있다고 본다. 잘 먹고 잘사는 차원을 벗어나 가치 있는 삶을 모색할 때임을 강조하는 그가 있으므로 고려인 사회엔 아직도 희망이 있다.

조규익 숭실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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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08.23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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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대 강제이주 이후 고려극장에서 공연한 한글대본 200여편 발굴 《춘향전》 《심청전》 《홍길동》…. 일제 강점기 중앙아시아에 끌려간 한인들이 고향 땅을 그리며 무대에 올린 우리 고전들이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국립 고려극장이 지난 80년간 우리 말로 무대에 올린 연극 대본 200여편과 공연 일정이 공개됐다. 한글로 쓰인 이 연극 대본 가운데는 우리 학계에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 많아 우리 문학·연극사 연구에 획기적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고려극장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한인들의 문화적 구심점 역할을 해온 곳이다. 조규익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장은 최근 알마티 고려극장을 방문, 극장 설립 이래 최근까지 공연된 연극 대본들을 정리·발간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193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된 고려극장은 알마티로 옮겨온 뒤, 한인과 러시아 극작가들의 창작 희곡·번역 희곡 등 200여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려 왔다. 조 소장이 공개한 대본 목록에는 우리 고전과 역사 인물을 각색한 작품들이 가장 많았다. 《토끼전》(1959) 《장한몽》(1935) 《흥부와 놀부》(1946)와 김두칠의 《논개》(1962), 정동혁의 《온달전》(1972) 등이 대표적이다.


▲ 1956년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서 올린 연극〈흥부와 놀부〉. 가운데 담뱃대를 들고선 이가 놀부 역을 맡은 인민배우 리 니꼴라이./최 아리따·김병학 제공

특히 1942년 태장춘(1911~1960)이 쓰고 공연한 《홍범도》는 1920년 봉오동전투의 주역이자 중앙아시아 한인들의 우상인 홍범도 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홍범도 장군은 만년에 카자흐스탄에서 극장 수위를 지내는 등 곤궁한 생활을 하다 1943년 세상을 떴다. 스탈린 치하인 1953년 셰익스피어의 고전 《오셀로》를 무대에 올린 것도 눈길을 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고리키의 《사람들》(1940)과 고골리의 《검찰관》(1952)과 함께 이념극으로 보이는 《동쪽의 빨치산》(1934) 《38선 이남》(1950) 《모란봉》(1962) 등도 무대에 올렸다.

고려극장은 한인 극작가·연출가들의 산실(産室)이었다. 그 가운데 태장춘은 《밭두렁》(1934), 《신 철산》(1935), 《노예들》(1937), 《행복한 사람들》(1938), 《생의 흐름》(1945), 《흥부와 놀부》, 《해방된 땅에서》(1948), 《노예들》(1948) 등 거의 해마다 신작을 발표한 고려극장의 주요 작가였다. 문세준·연선용·김기철·채영·이정림·김해운·이길수·최길춘·한진·최영근 등도 우리 말로 대본을 쓰고 공연한 예술가들이다. 조규익 소장은 "고려극장은 일제시대부터 현재까지 매년 우리 말로 연극 공연을 올려 온 유일한 해외단체"라면서 "이들이 올린 연극 대본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지사들이나 고려인들의 삶을 다룬 역사적 기록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창고에 보관 중인 대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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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07.15 10:32

최근 들어 러시아어 권의 국가들을 자주 찾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동족들을 수시로 만난다. 미국이나 일본, 혹은 중국에서 만나는 50대 60대 동포들은 대부분 한국어에 능숙하니 불편함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구소련 권은 사정이 다르다. 최근에 이주한 사람이 아니라면, 모두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다.

 구소련의 엄혹했던 ‘동화정책’은 대부분의 동포들을 철저한 러시아인들로 만들고 말았다. 진짜 속이야 어떤지 알 수는 없으나, 타고난 제 말 혹은 조상의 말을 버리고 러시아어를 모어 혹은 모국어로 삼게 함으로써 내면까지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말이 다르면 생각도 달라진다고, 그들이 2대, 3대를 지나면서 바꾸어 가진 말 때문에 의식구조 역시 완벽하게 달라지고 말았다. 구소련 권의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말과 민족성의 문제를 새삼 다시 인식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서는 한 가지 사례를 소재로 두 가지의 말을 하고자 한다. 말에 따르는 소외감, 말과 민족의식 등이 그것들이다.

       

   하나   


이번 여행 중 알마티에서의 어느 점심시간. 70대, 60대, 50대 등 고려인 3명과 함께 하는 자리였다. 모두 고려인 3세들이나, 70대는 우리말과 러시아말에 유창한 이중 언어 구사자, 나머지 둘은 러시아말만 할 줄 아는 지식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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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의 한국식당들 가운데 하나인 '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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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인들과 함께 점심을>

 두 언어에 능통한 70대가 본의 아니게 나와 나머지 두 사람 사이의 통역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말만 능하다고 통역이 수월한 게 아님을 그는 여실히 보여주었다. 통역이란 언어능력과 순발력을 요하는 업무임을 분명히 깨닫게 된 자리이기도 했다.

 통역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대화 판은 대부분 둘로 나뉘게 된다. 특히 통역해야 할 상대 언어 구사자가 단 한 사람이라면 그는 필경 본의 아닌 ‘왕따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사람이란 어쩔 수 없이 의사소통이 되는 사람끼리 대화를 나누게 되고, 그에 따라 통역이란 징검다리를 거쳐야 하는 상대는 소외되기 마련이다. 행인 앞에 두 갈래 길이 있다 하자. 한쪽은 탄탄대로, 또 한 쪽은 차가운 시냇물에 덩어리 덩어리 던져놓은 징검다리라면 그가 어느 쪽으로 길을 잡아들지는 묻지 않아도 분명해진다.

 우리의 모임이 그랬다. 4명이 합석한 자리였는데, 3명이 같은 러시아어, 1명인 나는 한국어 구사자였다. 더구나 3명 중 2명은 러시아어 외에 영어 등 구사할 수 있는 다른 언어가 전혀 없었다. 반면 나는 한국어와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지만, 그 자리에서 영어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 3명 중 1명은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구사했지만, 수시로 통역의 임무를 망각했다. 말하자면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그룹의 일원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그들과의 대화에 몰입하는 것이었다. 연로한 때문인지 전혀 순발력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힘겹게 대화에 끼어든 내가 “이 말 좀 통역해 주시오!”라고 소리쳐야 겨우 통역을 하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러시아 말이란 얼마나 소란스럽고 수다스러우며 안하무인적(眼下無人的) 언어인가. 그들이 자신들의 일에 관해 요란한 러시아어로 떠들어댈 때 나는 우두커니 앉아 음식만 씹어댈 수밖에 없었다. 대화 판에서 사람이 외로움을 느낀다거나 일상생활에서 소외를 당하는 일이 사실은 다른 게 아니다. ‘자기들만의 언어로 자기들 끼리 만 소통함으로써 남을 문 밖에 세워두는 일’이야말로 현대사회의 비참한 소외현상이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같은 언어’를 쓰느냐의 여부는 큰 문제가 아니다. 같은 언어를 쓰는 동족끼리도 서로 간에 얼마나 비참하게 소외시키는지를 보면 그 점을 잘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자기들만의 언어’를 쓰는 것이 소외의 가장 큰 조건임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계유지의 어려움에 몰려 어쩔 수 없이 떠난 초기 이민들이나, 비슷한 이유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동남아의 새댁들을 생각해 보라. 언어 때문에 그들이 겪어야 했던 소외감이 어떠했을까를. 그럼에도 심지어 우리 중의 몰지각한 어떤 인사들은 우리말을 못 알아들을 거라는 지레짐작으로 그들을 같은 자리에서 돌려세워놓고 험담을 하기도 한다. 차별의식으로부터 나온 우리 민족의 못된 습성이다. 같은 동족끼리도 말을 통해 소외시키기를 밥 먹듯이 하는 민족인데, 하물며 우리와 피부색과 사고가 다른 외국인들에 대해서야 오죽할까.


  

그 식사 자리에서 ‘고려 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사실은 60대나 된 사람들이 우리말을 한 마디도 모르는 게 눈에 거슬리던 차였다. ‘고려인들은 고려 말을 좀 배워야 하고, 젊은 세대는 더욱 그래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의 요지였다. 그러자 대뜸 ‘우리는 러시아 말을 하고 있고, 외국어를 배우려면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현실로 따진다면야 옳은 말일 것이다. 그러나 늘 애틋하게만 생각해오던 동포들의 입에서 망설임도 없이 이런 말이 튀어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나였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한국말을 배워서 어디에 써 먹느냐?’는 대답이었다. 한국말 배울 시간에 영어를 배우는 것이 훨씬 더 유용하다는 것이었다. 더더욱 기가 막힌 것은 ‘고려인의 후예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카자흐스탄 사람들이 고려 말 배우기에 열성적’이라는 말을 덧붙인 점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한국말을 배워야 한국의 정신을 배울 수 있고, 한국의 정신을 익혀야 뿌리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설득의 말을 건넬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미 구소련 혹은 카자흐스탄을 조국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한국은 독일이나 중국과 같은 먼 외국일 따름이었다. ‘비록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의 피붙이들에게 잘 해 준 건 없어도 늘 애틋하게 생각해왔는데, 이럴 수가 있는가!’라는 한탄은 이미 그들에게 통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었다. 그동안 혼자서 이들을 짝사랑해왔음을 그 순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생김새는 분명 나와 별로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뚜르르~’ 굴러가는 러시아어를 술술 구사하는 그들, 한국에 가서 며칠간 한국음식을 먹느라고 죽을 뻔 했다는 그들을 보며,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하다는 앤더슨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옮겨 심은 나무처럼 그저 그 땅에 적응하면 그 땅의 나무가 되는 것 아닌가. 누구의 말대로 ‘줄기와 뿌리는 이파리를 잡고 있으려 하나, 이파리들은 한사코 나무를 떠나려’ 하는 이치가 바로 이것 아닌가. 모체를 떠난 이파리인 그들은 결코 모체를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본향 회귀를 염원하는 1세대의 정신적 자장(磁場)으로부터 멀리 벗어난 그들이었다. 그들에겐 돌아갈 본향도, 그리워할 음식도, 붙들고 울어야 할 피붙이도 없었다. 그저 기름 줄줄 흐르는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의 음식들을 먹으며, ‘뚜르르~’ 굴러가는 러시아어로 수다를 떨며, ‘바로 지금 이곳’을 사는 이곳 사람들일 뿐이었다.


  ***


민족이란 무엇인가. 아니 가족이란 무엇인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우리는 그간 ‘피붙이’라면 끔찍이 생각해왔다. 준 것도, 줄 것도 없지만, 정 하나만큼은 나누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해온 것이 해외의 우리 동포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분명히 깨닫자. 그들에게 자신들의 나라는 카자흐스탄이요, 러시아일 뿐 대한민국이 아니다. 잘 나가는 대한민국을 특별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의무도 그들에게 없고, 고국을 잊지 말하고 강요할 권리도 우리에겐 없다. 너와 나는 그저 ‘바로 지금, 여기’에 충실해야 할 생활인들일 뿐임을 잊지 말자. 이런 바탕 위에서 해외 교민들에 대한 정책도 재조정되어야 한다. 민족의 실체 또한 새롭게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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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07.14 09:36

7월 13일, 알마티에서 처음으로 맞는 월요일이자 고려극장 가는 날. 새색시마냥 가슴이 두근거린다. 최영근 문예부장의 차를 타고 공항 가는 길로 나가다가 시가지 외곽에서 빠졌다. 상처투성이의 길을 숨차게 돌고 돌자 아담한 단층의 고려극장이 나타났다. 그동안 걸어온 80년 영욕의 역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장부 이 류보위 극장장은 예의 그 호탕한 웃음으로 나를 맞아준다. 극장장의 방에서 간결하게 의전 절차(?)가 끝난 뒤 나와 최영근 부장이 찾은 자료실. 그곳엔 먼지와 시간에 절고 절은 대본들이 쌓여 있었다. 1930년대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필체로 쓰인 대본들이 눈물겨운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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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 국립 고려극장 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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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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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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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의 객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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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심청전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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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극 상속자들의 포스터>

   ***

10여 만 명의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카자흐스탄은 구소련 중앙아시아에서 핵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지역. 1937년 스탈린에 의한 강제이주 이후 이곳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우리 민족의 문화적 전통과 언어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고려극장은 그 중심이었다.

 일제 통치 하의 극동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항일 지사들과 고려인들이 우리 문화와 민족 전통을 유지⋅보존하겠다는 의지로 설립한 기관이 바로 1932년에 설립된 고려극장이다. “1932년 이후 극장이 걸어온 운명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려극장-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1999)는 전 극장장 김 겐나지의 말에서도 암시되는 것처럼 고려극장의 문화적ㆍ역사적 의미는 쉽게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최근 발행된 『고려극장의 역사』에도 고려극장의 의미나 사명은 다음과 같이 천명되어 있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이주하게 된 고려극장은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민족 유산을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선진적이며 자랑할 만한 전문적인 문화 발원지로 변모했다. 고려극장의 무대에서 카자흐, 서양, 러시아 극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75년 기간 극장은 수많은 유명한 배우들을 배출했고, 오늘날도 그 어느 때와 마찬가지 고려인 문화 발전을 위한 사명을 다하고 있다. <149쪽>

 

창립 이후 고려인ㆍ카자크스탄인들을 비롯한 수백 만 명의 관객들이 이곳을 찾았으며 수백 편의 연극과 음악회가 열릴 정도로 고려극장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곳에서는 대부분 한인 극작가들에 의해 창작된 200여 편의 연극을 통해 고려인들의 삶과 문화, 역사가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 희곡들이 단순히 예술적인 의미만을 지닌 것들은 아니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지사(志士)들이나 고려인들의 삶, 「춘향전」⋅「심청전」⋅「홍길동」⋅「흥부전」 등 우리의 고전 등 넓은 내용적 편폭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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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년 상연된 연극대본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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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연극대본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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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쌓여있는 대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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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를 정리 중인 최영근 문예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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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의 포스터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희곡작품들이 정리되지도 못한 채 고려극장의 창고에서 썩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연구 인력과 자금이 모자라는 현지에서 이런 일을 수행할 수 없다면, 우리라도 그 자료들의 정리⋅연구⋅출판(보급)에 적극 나서야 한다. 구소련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이 지역에서 거세게 타오르고 있는 ‘민족주의’ 성향과 그에 따른 고려인 문화의 위축현상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시급히 나설 필요가 있다.

내가 불원천리 이곳을 찾은 것도 그 때문이다. 내게 고려극장은 카자흐스탄 여행의 중심이자 종착역이다. 먼지투성이의 자료들, 기나긴 연륜 속에서 누렇게 바래고 바스러지는 종이를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 내게 최영근 부장은 겸연쩍은 표정을 짓는다. “이 분들은 그동안 왜 한 번도 정리를 하지 않았까.”라는 힐난을 내 표정에서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태장춘, 연성용, 김기철, 채영, 맹동욱, 최영근 등 쟁쟁한 고려인 문사들의 손때가 묻은 대본들. 그것들은 역사의 굽이굽이 고난을 극복해온 ‘고려인의 함성’으로 다가왔다. 나는 과연 이것들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어떤 모습으로 단장시켜 사람들 앞에 내놓을 것인가.

  ***

천산의 만년설 위로 해가 지니 종이 썩는 냄새에 찌든 내 마음도 덩달아 바빠진다. 그러나, 아무리 바쁘다 해도 최영근 부장과 이 스타니슬라브 시인을 마주하고 한 잔 할 시간마저 없을 소냐? 자, 누군가의 성공을 축하하고, 무언가를 위하여 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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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의 야외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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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의 산천어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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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 무렵의 천산, 그 만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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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07.12 20:53


까를라가쉬와 헤어진 우리는 한국식당 청기와에서 시장기를 지웠다. 더위에 지친 우리는 천산의 만년설이 잡힐 듯한 곳에 둥지를 틀고 있는 최석 시인을 만나기로 했다. 택시로 30분을 달려 도착한 곳에서 마중 나온 최 시인의 차를 만났고, 함께 하기로 연락된 리 스타니슬라브 시인, 문희권 선생 등을 만났다. 최 시인의 차로 20분 이상을 달려 올라간 산중턱에 빨간 지붕을 한 최 시인의 집이 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엔 과수원이, 저 멀리로 알마티 시가지가, 아득히 펼쳐져 있었다. 알마티 시가지 너머에는 보일락 말락 지평선이 그어져 있고, 발코니에서는 천산의 만년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과연 신선이 깃들만한 곳. 아니 내 자신이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매연에 절은 인세홍진(人世紅塵)의 추억이 먼 옛날의 일인 듯,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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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석 시인 집 발코니에서 올려다 본 천산의 만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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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석 시인 집 발코니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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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석 시인 집 뜰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꽃>

그곳에서 만난 세 시인 모두 고려인 사회의 독특한 존재들이었다. 우선 최석 시인. 논산에서 태어난 그는 1987년부터 무크지『현실시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1989년 시집『작업일지』를 도서출판 청하에서 펴냈으며, 현재 카자흐스탄에서『고려문화』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견시인이다.

 전남 신안 출생인 김병학 시인은 1992년 카자흐스탄으로 건너와 한글학교 교사, 대학 한국어과 강사, 고려일보 기자 등을 역임했고, 2005년 시집 『천산에 올라』를 도서출판 화남에서 펴냈으며, 2007년에는 『재소 고려인의 노래를 찾아서』Ⅰ과 Ⅱ를 도서출판 화남에서 펴내는 등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의 정신적 자취를 발굴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1959년 우슈또베에서 고려인 3세로 출생한 리 스타니슬라브 시인. 그는 1985년 시집 『이랑』을 알마티에서 출판했고, 1997년 제2시집『별들은 재 속에서 간혹 노란색을 띤다』를 출간했으며, 1999년 카자흐스탄 공화국 11학년용 교과서에 그의 시가 수록되었고, 최근 러시아 문학잡지 『유노스찌/청춘』에 그의 시가 실리는 등 문학적 성가를 높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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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석 시인 집 발코니에 선 세 시인-왼쪽부터 최 시인, 리 스타니슬라브 시인, 김병학 시인>

보드카의 주향 속에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화의 미래에 관한 이들의 담론들은 무르익어 갔다. 다민족 사회의 소수자인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 한글로 문학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려인들끼리의 갈등을 어떻게 해소해나갈 것인가, 등등. 천산의 만년설은 말없이 굽어보고 있는데, 민족의 미래를 놓고 토론하는 이들의 가슴은 장작불마냥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꽃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어둠을 밝히고, 중앙아시아의 평원을 고독하게 걸어가는 고려인들의 앞길을 이끄는 향도가 될 것이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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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녕하세요. 중앙아시아에 있는 고려인들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학생입니다. 이번에 우연한 기회로 알마티에 가게 됐는데요. 시인분들이 말하는 고려인 문화와 미래에 대한 담론을 좀 들어보고 싶습니다. 혹시 저분들을 만나려면 어떻게 연락을 취해야 하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시나요?^^;
    제 연락처는 ppopp3@naver.com , 01044327088 차주혜 입니다.

    2010.04.27 21:0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글 - 칼럼/단상2009.07.12 20:34
 

알마티 통신 1 : 알마티의 매연과 천산의 만년설


2009년 7월 11일. 알마티에서의 첫날. 어딜 가나 시내에는 푸른 숲이 가득 했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수백 년의 연륜을 족히 드러내고 있었다. 울창한 숲을 보고 깨끗한 공기를 상상했으나, 시가지에 깔린 공기는 매연에 쩔어 있었다. 들숨 가득 탁한 공기가 폐부를 찔러댔다. 그나마 고개를 들 때마다 압도해오는 천산의 만년설 덕분에 숨 막히는 매연으로부터 겨우 놓여날 수 있었다. 뜨람바이를 타도, 버스를 타도, 택시를 타도, 모든 공간엔 여지없이 매연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스팔트에서 튀어오르는 열기와 매연이 어우러져 채워진 욕조를 유영하듯 힘겹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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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의 도로와 멀리 보이는 천산의 만년설>

김병학 시인의 안내로 햇살에 달구어진 시내를 책 읽듯 훑어나갔다. 카자흐스탄 첫 방문, 알마티 첫 방문. 모든 것들이 생소하면서도 신기했다. 구소련의 문화적 동질성에 갇혀 있었건만, 러시아에서와는 다른 느낌을 주는 게 신기했다. 걷는 동안 러시아 정교회 건물을 찾아 이곳 사람들의 경건한 신심을 확인했고, 시장을 찾아 삶의 박동도 느꼈다. 시내 한복판에 ‘푸른시장(질료녜 바자르)’이란 이름의 재래시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81세의 고려인 서올랴 할머니를 만났다. 아직도 고운 자태를 잃지 않은 고려인 할망은 올망졸망 찬거리들과 각종 양념들을 늘어놓고 손님들의 눈치를 살피며 앉아 있었다. ‘장사가 안 된다’고 혀를 차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표정에 적이 안도가 되었다. 심심하던 차였는가 은근히 잡으려는 할망을 뒤로 하고 2․8공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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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시 러시아 정교회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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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정교회 제대 뒤의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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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 질료녜 바자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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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료녜 바자르의 서올랴 할머니>

그곳엔 거대한 조형물이 공간을 압도하고 있었다. 적진을 향해 무기를 들고 돌진하는 군인들이었다. 그 밑의 글자들이 걸작이었다. “위대한 러시아! 모스크바를 뒤로 물러설 곳이 없다”는 뜻의 문구였다. 모스크바를 죽음으로 지키겠다는 속뜻일 것이다. 그야말로 구소련의 살기 어린 구호였다. 그 옆쪽에는 1차 대전과 2차 대전의 조형물들이 붙여져 있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 용기 있게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영원한 영광 있으라!”는 구호가 보는 이의 내면을 압도해왔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흔히 사용하던 선동의 구호와 문구들을 알마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의 전쟁기념관을 그득 채우고 있던 선동의 모티프가 이곳에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토요일이기 때문일까. 결혼하는 커플들이 많았다. 결혼식을 마친 커플들은 이곳 광장의 ‘꺼지지 않는 불꽃’에 헌화하는 것이 관례란다. 하얀색 예복을 입은 신부들이 그림처럼 아름다웠고, 그들이 들고 있는 백합 다발은 순결한 영혼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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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 2-8 공원의 조형물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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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의 전통악기 돈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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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 악기 박물관의 악사 까를라가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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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정교회 앞뜰의 아름다운 신부>
 
러시아 정교회 안에도 결혼식을 마친 커플, 결혼식을 올릴 커플, 그들의 가족 친지 친구들로 만원이었다. 밀려드는 인파를 피해 찾은 곳은 공원 한 켠의 악기 박물관. 그곳에서 카자흐스탄 민족의 음악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의 비파 비스름한 카자흐스탄 전통악기 돔브라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악기들을 본 다음 문을 나서려는데 우리를 잡는 손길이 있었다. 참하게 생긴 카자흐스탄 아가씨가 우리를 위해 직접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겠단다. 카자흐스탄 돈 200원을 투자하여 한동안 애상적인 분위기에 젖어들게 되었다. 노래를 끝낸 그녀는 ‘까를라가쉬’라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제비’라는 뜻을 갖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피곤하지만, 카자흐스탄과의  의미있는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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