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1. 7. 26. 06:51



*사진 위로부터 코펜하겐 공항 구내에서 만난 덴마크의 '열린 마음', 차창 밖으로 보이는 코펜하겐 거리, 인어공주상, 게피온 분수대에서, 뉘하운 항구의 재즈공연장(현재 재즈페스티벌 중), 아마리엔보 궁전, 코펜하겐 항구 DFDS 선상에서 바라본 크루즈선, 코펜하겐 크라운 플라자 호텔에서의 아침식사, 크라운플라자호텔 인근에서 만난 친환경 아파트(옥상까지 자전거로 올라갈 수 있다 함), 프레데릭 보르 성1, 프레데릭 보르 성2



자연 속에 영글어 온 인간의 꿈, 덴마크



헬싱키 공항에서 비행기를 바꾸어 타고 7월 7일 오후 다섯 시쯤 도착한 코펜하겐 공항.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코펜하겐의 상공엔 흰 구름이 덮여 있었고, 항구엔 하얀색의 크루즈선들이 정박해 있었다. 풍력발전기의 바람개비들은 바다 위에 한 줄로 늘어서 돌고 있고, 그 사이를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이 한가로웠다.

‘밖에서 잃은 땅, 안에서 찾자!’고 외치며 실의에 빠진 조국을 구한 달가스(Enriko Mylius Dalgas), 국민교육으로 조국을 구한 그룬트비(N.Fs Grundtvig), 동화를 통해 어린이들의 꿈을 키워준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실존주의 철학자 키엘케골(Kierkegaard, Soren Aabye) 등. 그들이 만든 나라에 온 것이다. 북위 55도. 우리로 치면 ‘끔찍한 북쪽’이다. 그런데 날씨는 산산하고 밤 11시까지 지지 않는, 대낮 같은 백야의 석양 속에 길거리는 차분했다. 시내 일식집에서 한식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크라운 플라자 호텔에 짐을 풀었다. 꽤 높은 호텔 창밖으로 바다와 시가지가 어우러져 보였다. 호텔의 수돗물은 그대로 마셔도 무방하다는 그곳. 무엇보다 공기가 달았다. 그런데, 물가는 살인적이었다. 동행한 노선생은 자판기의 생수가격을 예로 들었다. 17크로네! 작은 생수 한 병이 우리 돈으로 3,400원이 넘었다. 껌 한 통이 2유로에 가깝다니, 북유럽은 ‘껌값’이란 말도 통할 수 없는 곳인가.

북유럽의 날씨를 보여주려는 듯 다음 날은 종일 비가 내렸다. 빗속에서 김동규가 ‘간지 나는’ 저음으로 들려주는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들으며 덴마크를 친견하게 된 흥분을 겨우 잠재웠다. 호텔을 나서자 야산 하나 보이지 않는 평원과 푸른 숲이 끝없이 이어졌다. 해발 170m라니! 아예 산은 없는 셈이다. 남한의 3분지 1밖에 안 되는 땅, 530만 인구에 380여개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나라. 대체 굴뚝 하나 안 보이는 숲속 어디에서 87,000달러의 1인당 국민소득이 만들어져 나온단 말인가. 멀리 아름답게 디자인된 건물 사이로 솟은 굴뚝 하나가 보였다. 놀랍게도 쓰레기 소각장이란다. 버스가 뚫고 지나는 녹색의 숲이 덴마크의 오늘과 내일을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평평한 대지에 그득한 삼림, 그 속에 숨듯이 앉아 있는 아름다운 건물들이야말로 그들이 추구해온 그린 프로젝트(Green Project)의 현주소 아닐까.

삼림을 뚫고 나간 곳, 힐레뢰드에 프레데릭스 보르성[프레데릭 2세의 여름별장]이 있었다. 오늘날의 국립역사박물관으로, 1800년대 유명한 칼스버그 맥주회사의 CEO가 재건하여 덴마크 문화재단에 기부한 곳이란다. 눈만 뜨면 변칙 상속, 비자금 조성 등으로 영일이 없는 우리나라 재벌들을 생각나게 하는 곳이었다. 수천억의 재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못 사는 사람들의 것까지 빼앗아야 만족하고,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려 온갖 탈법을 자행하는 우리나라의 재벌들은 이들에 비하면 ‘나무를 갉아먹는 벌레들’일 뿐인가. 프레데릭 보르 성을 보며 ‘많이 벌면 나누어야 한다’거나 ‘문화가 없으면 관대하지 못하다’는 덴마크 재벌들의 철학이 오늘날의 이 나라를 이루었음을 절감한다. 덴마크를 포함한 북유럽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세계 최고인 것도 돈과 문화에 대한 열린 사고 덕분이리라.

외레순 해협을 따라 펼쳐진 해안을 따라 조촐하고 조용하게 사는 이 나라 부자들의 실상을 차창으로나마 목격할 수 있었다. 날 좋으면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 갈매기와 바닷물을 관조하며 혼자 즐기고, 날 궂으면 집 안에서 파티를 즐기는 그들의 단순하면서도 자연친화적인 삶이 차분한 색깔의 집들과 어울렸다. 덴마크의 세계적인 음악가 에드워드 그리그가 30년을 산 마을도 보았고, 우리의 서낭당과 비슷한 문화를 지녔다는 스코스보 마을도 지났다.

그런 다음 우리는 코펜하겐 시내에 로코코 양식으로 지어진 1800년대의 주거지를 보았고, 100년 전 칼스버그 사장이 돈을 내고 조각가 에릭슨과 합작으로 만들어 세운 인어 아가씨도 만났다. 1m 60cm의 아담한 체구인 그녀는 당시 에릭슨의 여친이었던 궁정 발레리나를 모델로 만들어졌다나? 그러나 어릴 적 동화책 속의 그 ‘인어공주’가 내게 심어준 ‘슬픈 아름다움’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뉘하운(Ny havn) 항구는 빗속에서도 붐볐다.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는지 가설무대에서는 재즈 가수들의 힘찬 노래에 정열적인 몸짓과 타악기ㆍ관악기의 분방한 소리들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재즈가 미국에서 나왔으나 무대에 올린 건 덴마크가 처음이라니, 그럴 법 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항구의 운하로 관광객을 실은 배들은 쉼 없이 드나들고, 갈매기들의 호위 속에 노천 주점의 서정이 무르익는 곳. 북유럽의 문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서정적 공간, 뉘하운이었다.

우린 이제 D.F.D.S. SEAWAYS 크라운호[길이 170m, 넓이 28m, 무게 35,498톤, 2,026명의 승객과 450대의 차량을 싣고 덴마크의 코펜하겐과 노르웨이의 오슬로를 왕복하는 페리]에 몸을 싣고, 잔잔한 발트해를 꿈결처럼 미끌어져 갈 것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7. 8. 13:43


내게 북유럽은 늘 낯설고 먼 곳이었다. 깔끔하게 디자인된 도시들과 조화를 이룬 전통, 비싸게 유지되는 맑은 공기와 자연, 복지를 떠받치는 경제, 늘 모자라는 햇볕 등등. 참으로 존경스러우면서도 섣불리 다가가기 어려운 면모들을 고루 갖춘 곳. 스칸디나비아 반도 [Scandinavian Peninsula]를 간다.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발트해를 건너는 9시간여의 비행 끝에 헬싱키 공항에 잠시 머물렀고, 다시 1시간여의 비행 끝에 도착한 코펜하겐. 유럽 북서쪽 끝의 발트 해를 낀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북쪽의 러시아와 핀란드를 기점으로 남쪽의 덴마크까지 인상적인 모양으로 누워 있는 지역이다. 스칸디나비아 산맥을 기준으로 서쪽에 노르웨이, 동쪽에 스웨덴이 있는 곳. 우리가 도착한 미항(美港) 코펜하겐은 반도 최남단의 거점이다. 현대와 전통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시가지 곳곳, 질펀하게 흐르는 도시의 운하들에선 안데르센의 숨결이 느껴진다. 생수 한 병에 17크로네[1크로네는 대략 우리 돈으로 200원]나 하는 살인적인(?) 물가가 조용한 시가지의 이면에 꿈틀대는 현실로 다가왔지만, 안데르센의 동화적 세계를 품고 있는 그들이기에 그런 엄혹한 현실 또한 극복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지.

내일부터 그 숨결을 느껴볼 것이다. 수난과 영광의 역사를 직조(織造)해나온 그들 역사의 저력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문학과 예술, 그리고 산업의 조화를 통해 삶의 질을 관리해 나온 그들의 지혜는 과연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지. 풍족한 삶을 바탕으로 한 자기절제의 정신적 근원은 무엇인지 등을 스칸디나비아의 곳곳에 남아있는 물질적 증거들로부터 찾아볼 것이다. <2011. 7. 7.>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5. 20. 00:33
 

“여자로 나느니 쉐로 나주”

 -아, 제주 여성의 운명이여!-


아주 어릴 적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를 읽었다. 오래 전의 일이라 자세한 것은 기억나지 않으나, 마지막 장면은 지금까지 가슴에 오롯이 남아있다. 사랑하는 왕자님의 배를 따라가던 인어공주. 그 왕자님은 이웃나라 공주와 결혼하러 가는 길이었다. 마법의 힘으로 꼬리는 뗐지만 말을 못하게 된 인어공주였다. 왕자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인간세상으로 환생했으나, 말을 잃어 사랑의 성취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 굴레에서 벗어나 다시 인어공주로 돌아가려면 왕자의 가슴을 찌르고 그 피를 자신의 다리에 발라야 했다. 가까스로 왕자의 침실에 들어갔으나 결국 그 일을 포기하고 물에 몸을 내던져 포말로 사라졌다는 인어공주의 슬픈 이야기였다. 처절한 자기희생을 통해 결국 ‘영원한 사랑’을 성취한 것일까. 그게 바로 인어공주의 운명이었다. 고귀한 것을 위해 운명에 순응하는 모습은 이처럼 비장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


미끈하게 심해를 유영(遊泳)해 들어가는 해녀들의 모습에서 인어공주와의 유사성을 떠올린 것은 아니다. 듣기에 따라 ‘이미지의 폭력적 결합’이라 할 만큼 둘 사이의 유사성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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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녀의 모습(해녀박물관)

그러나 상상의 공간이든 현실의 공간이든 양자 모두 바다를 무대로 한다는 점. 억척스레 자신의 꿈을 가꾸지만, 운명을 거역하기보다 순응한다는 점 등이 해녀와 인어공주에 대한 내 생각을 결정한 요인이리라. 어려서부터 물질로 세월을 보내 바닷물과 해풍에 주름이 깊어진, 나이 든 해녀들을 보라. 그들의 모습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은 환상과 낭만의 서정이 아니라 현실과 투쟁의 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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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 딸 때 사용하는 빗창

 추우나 더우나 365일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는 제주 해녀들. 그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삶의 엄혹(嚴酷)함을 확인하기 위해 죽음의 공간을 밥 먹듯 드나들고 있는 것이다. 깊은 바다를 자맥질하는 수십 초의 짧은 순간. 가쁜 숨비소리와 함께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한 알의 전복이 전부이지만, 죽음의 허무보다는 삶의 뿌듯함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존재가 해녀들이다.


   ***


정방폭포 앞 해변에서 좌판을 벌이고 갓 따온 해물들을 팔고 있는 늙은 해녀와 제주 민속촌박물관, 해녀박물관 등에서 ‘박제된 해녀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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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폭포 아래 쪽 해변에서 해산물 좌판을 벌이고 있는 해녀들

모두 시간을 초월하여 ‘삶에 봉사하는’ 제주해녀들의 본질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삶을 통해 ‘억척스러운 제주의 여성성’을 형성해왔지만, 결코 자신들의 삶이 즐거운 것은 아니었으리라. 그래서 가끔은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기도 했으리라. 특히나 제주도에 태어난 것을.

 사방을 둘러봐야 시퍼런 바다. 그 장벽이 가로막고 있으니, 그들은 그 바다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주 해녀의 바다 개척은 그런 현실적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욕망과 투지 의 소산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여자로 나느니 쉐로 나주’라는 속담을 만들어냈다. ‘여자로 태어나느니 소로 낳지’라는 뜻이다. 운명에 순응하면서 살길을 개척하는 제주 해녀들의 실상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속담이다. 가족을 살리고, 제주를 살려온 해녀들의 삶. 그 정신을 다시 살려내고, 우리는 그것을 배워야 한다.


제주 해녀 만세!!!

                                      <2007. 5. 19. 아침, 제주도 한경면 청수리에서>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