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8. 19. 23:36

 

 


판카 시티 입구의 'Pioneer Woman 상[1930년 Bryant Baker 작/청동 상]'앞에서

 

 

 


판카 시티 입구의 멋진 집들

 

 

 


판카 시티 'Pioneer Woman Museum' 입간판

 

 

 


'Pioneer Woman Museum' 의 소장품[인디언 의상 및 소품들]

 

 

 


'Pioneer Woman Museum' 소장품[피리 부는 인디언 추장]

 

 

 


'Standing Bear Museum and Education Center'의 소장품

 

 


'Standing Bear Museum and Education Center' 의 소장품

 

 

 


'Standing Bear Museum and Education Center'의 소장품

 

 

 


'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판카 부족과 가까이 지내던 인디언 부족들

 

 

 


'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Standing Bear Park' 표지

 

 

 


'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Standing Bear 상-'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Standing Bear 상-'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스틸워터의 이웃동네에서 만난 판카(Ponca)인디언들

 

 

 

작년 가을 무렵. 스틸워터에 정착한 지 한 달 반이 지나자 거주지 주변의 것들이 하나하나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판카 시티(Ponca City)’가 있다는 말을 들어오다가 캐나다에서 날아 온 큰 아이와 함께 답사에 나섰다. 원래 우리는 폰카로 발음했지만, ‘판카혹은 팡카로 발음하는 이곳 사람들을 따라 판카로 바꾸었다. 집을 나서서 177번 하이웨이에 접어든 후 정북 방향 직선으로 대략 한 시간 반 정도의 거리에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울창한 나무숲에 숨듯이 들어선 집들은 모두 고급스러워 대체 어디에 판카 인디언들이 있다는 건지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아칸사 강(Arkansas River)이 감돌아 흐르고 호수[Lake Ponca]가 고여 있어 풍광도 이고, 인구 또한 많지 않은지 거리는 대체로 한산했다.

 

판카 족은 수어족[Siouan-language group] 가운데 데기한 어[Dhegihan language]를 사용하는 사람들인데, 캔자스 주 오세이지 카운티의 오세이지 족네브라스카의 오마하 사람들오클라호마와 네브라스카의 판카 사람들이 사용하던 수어가 바로 데기한 어다. 미 연방정부가 인정한 두 종의 판카 족이 있는데, 네브라스카의 판카 족과 오클라호마의 판카 인디언들이 그들이다. 후자가 바로 우리가 만나러 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미시시피 강 동쪽의 한 부족으로서 원래 오하이오 강 계곡에 살다가 사냥터를 찾아 서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이었다. ‘Ponca’는 칸사(Kansa), 오세이지(Osage), 쿼포(Quapaws) 사이의 한 클랜 명칭으로서 어원상 살인자[Cut Throat]’란 무시무시한 뜻을 갖고 있다 했다. 

 

이 부족 역시 여타 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백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한 희생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 판카 족의 역사는 꽤 길어서 구비전승에 따르면, 컬럼버스가 미 대륙으로 오기 전에 미시시피의 동쪽 지역으로부터 이주했다고 한다. 뉴욕 주에 살던 이로쿼이(Iroquois) 족의 침략을 받아 북쪽에 있던 전통 거주지역을 버리고 오하이오 강 지역으로 밀려났던 것이다. 그 후 거기서 서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인데,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1701년 지도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서양 상인들과의 교섭을 지속해 오다가 중간에 천연두가 창궐하여 800여 명 되던 인구가 200으로 줄었으며,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다시 700으로 회복되었다 한다. 평원에 사는 대부분의 다른 인디언들과 달리 이들은 옥수수와 채소들을 재배했고, 바이슨 사냥을 하며 살았다.

1817년의 평화조약을 필두로 1865년까지 판카 족은 미국정부와 여러 차례 조약들을 맺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자신들의 주권과 영역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특히 조약을 맺는 과정에서 미국의 실수로 자신들의 땅을 다 잃어버리게 되는 위기를 맞게 되자 이들은 미국 정부의 방침에 대항하여 집단 거주지로 이주하지 않는 방법을 쓰게 된다. 미 의회가 1876년 강제로 북쪽의 여러 인디언 부족들을 현재 오클라호마의 집단 거주지로 옮기기로 결정했음에도 새 보호구역이 농사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거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결국 강제로 옮겨야 했고, 새 땅에서 판카 족은 말라리아와 더운 날씨, 식량 부족 등으로 고생하다가 첫해에만 25%의 부족원들이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당하기도 했다.

 

1877년 인디언 구역의 쿼포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된 뒤, 판카 족은 아칸사와 솔트 폭 강에 접한 자신들의 땅으로 이주했으며, 동친혈연(同親血緣) 주민들은 티피(tipi) 마을을 구성했고, 혼혈 주민들은 치카스키아 강 언저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판카 지도부가 미 정부에 맞서는 동안 미국 정부는 커티스 법(Curtis Act)으로 부족의 정부를 해체하고 타 부족들과의 동화를 강요하면서 1891년과 1892년의 도스 법(Dawes Act) 아래 개개 구성원들에게 보호구역의 땅을 나누어 주었고, 분양 후 남은 땅은 인디언 아닌 사람들에게 팔 수 있도록 했다. 오클라호마 주가 성립된 후 나머지 판카 땅들은 풀려서 101개의 목장의 주인들에게 팔렸고, 판카 주민들은 이곳에 고용되기도 했다. 1911년 판카 족의 땅에서 원유가 발견되면서 수익을 얻었으나, 정유공장들이 아칸사 강에 폐유를 방류함으로써 환경에 재앙을 입기도 했다. 1950년에는 오클라호마 인디언 복지법에 의거, 판카 족은 새 정부를 만들었고, 같은 해 920일에는 부족 헌법을 만들기도 했다. 판카 족 행정의 중심은 오클라호마 주의 화이트 이글(White Eagle)에 있으며, 현재 판카 족 인구는 4,200명에 달한다.

 

현재의 판카 족이 안정을 찾기까지 미국 정부와의 투쟁에서 중심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스탠딩 베어(Standing Bear)라는 인물이었다. 사실 판카 족을 찾아 온 우리도 그의 행적과 모습이 궁금했다. 여느 인디언 추장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 역시 강제이주에 격렬히 저항했다. 심지어 그의 큰 아들이 죽을 때 그는 부족의 조상 땅에 묻어주겠다는 약속을 할 정도였고, 실제로 그는 보호구역에서 판카 족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다가 체포되어 포트 오마하에 구금되기도 했다. 미국 정부의 허락 없이 보호구역을 이탈했다는 이유였다. 그의 체포와 구금에 많은 사람들이 법정 투쟁으로 그를 도왔고, 뛰어난 두 명의 변호사가 무료로 소송을 대리해 주기도 했다. 1879년 네브라스카의 오마하에서 열린 재판에서 미 연방 지방법원은 사상 최초로 미국 인디언들도 미합중국 법 안의 사람들임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쟁취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스탠딩 베어가 보여준 불굴의 저항 덕분에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법적인 권한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

과연 우뚝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스탠딩 베어의 모습에서 비장함이 느껴졌다. 미합중국 정부의 부당한 명령에 목숨을 걸고 항거함으로써 자신의 부족은 물론 여타 인디언들이 보편적인 생존권을 부여받을 수 있도록 한 점에서 그는 인디언 사회의 진정한 영웅이었다.

석양을 등지고 서서 주변을 압도하는 그의 거대한 동상을 바라보며 특정 부족이나 민족의 미래를 개척하는 지도자의 온당한 리더십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백인들과 여타 부족들이 섞여 살아가고 있는 그 공간에서 스탠딩 베어의 정신 덕에 판카 족은 인디언 사회로부터 존경받고 있음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Standing Bear 상-'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오세이지 족에 대한 설명-'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판카 어 물건 명칭-'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판카 어 물건 명칭-'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판카 어 문장과 뜻-'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판카 부족 서사시-'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톤카와 부족의 문장-'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오세이지 네이션의 문장-'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판카 족에 대한 설명-'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스탠딩 베어에 대한 전자 설명-'Standing Bear Native American Memorial Park'

 

 

 

 


Waynoka에서 일박을 한 체로키 인

 

 

 

 


웨이노카 숙소 앞의 소박한 식당-Cherokee Station

 

 

 

Cherokee Station의 저녁식탁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9. 27. 13:57

    

 길크리스(Gilcrease) 박물관에서 길을 잃다!

 

 

 

 


Beaver effigy pipe, Woodland period


<Breaking Through the Line> Charles Schreyvoge 작


<Ceremony, Spirit Ascending>, Woody Crumbo작


<Creek Chiefs>, Acee Blue Eagle 작


<George Washington>, Rembrandt Peale 작


<Indian Council(Sioux)>, 1847 George Catlin 작


Mask, Chumash 족


Moccasins Cheyenne 족, 19th century


<Mourning Her Brave>, 1883년 George De Forest 작


<Overleaf-Ranchos Church with Indians>, Ernest L. Blumenschein 작


<Siouxs족의 Playing Ball>, Charles Deas 작


<Syacust Ukah>, 1762년 Sir Joshua Reynolds 작


<Taos Deer Hunter>, Bert G Phillips 작


<The Wild Turkey>, John James Audubon 작


<Thomas Gilcrease>, Charles Banks Wilson 작


<Warriors on Horses>, Acee Blue Eagle 작


길크리스 뮤지엄 앞에서

 

 

       예술로서의 역사, 역사로서의 예술

 

 

-털사(Tulsa)의 길크리스(Gilcrease) 박물관에서 길을 잃다!-

 

 

 

921일 토요일. 아낌없이 쏟아 붓는 햇살이 평원을 달구기 시작할 무렵, 언제부턴가 가보고 싶었던 털사로 길을 떠났다. 대략 한 시간 반 거리라곤 하지만 자동차 몇 대 다니지 않는 드넓은 길임을 감안하면 실제 거리는 우리 생각과 많이 다르리라. 과연 맑은 공기와 화사한 햇살, 끝없이 펼쳐진 평원 위의 짙은 활엽수들이 우리를 매료시켰다. 시내에서는 조심조심하던 미국인들도 가속페달을 눌러 밟는 듯 412번 하이웨이에서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이 지역에서도 유명한 박물관이 유독 많은 문화도시 털사.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첫 방문처는 인디언 관련 미술품이 가장 많이 소장되어 있다는 길크리스 박물관(Gilcrease Museum)이었다. 인디언 미술품에 대한 호기심 뿐 아니라 일생 모은 콜렉션으로 만든 박물관에 깃들었을 한 인물의 정신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호수 같은 아칸사(Arkansas) 강가의 샌드스프링스(Sandsprings)를 지나고 털사 카운티 경계를 들어서서 잠시 달리다가 한적한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서 길크리스 뮤지엄 로드로 접어들었다. 그로부터 눈 깜짝하는 사이 좌측 언덕배기에 숨듯이 앉아 있는 뮤지엄을 만났다. 주소는 ‘1400 North Gilcrease Museum Road’. 털사대학에 속한 박물관이 바로 그곳이다.

 

널찍한 규모도 규모려니와 컬렉션의 양과 질에 놀라 자빠질 뻔 했다. 12,000점의 미술품, 300,000점의 민족지적(民族誌的)고고학적 유물들, 100,000점의 희귀 서적과 육필 원고 등을 포함,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소장품들이 빽빽했다. 누가 미국을 문화의 불모국이라 했던가. 유럽의 건축이나 박물관들에서 느끼는 고색창연함은 아니로되, 이곳만의 잘 보존된 예술과 문화재야말로 쉽게 측량하기 어려운 미국의 힘과 깊이를 잘 보여주는 증거가 아닌가.

 

이 박물관은 미국의 예술과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미국 정신의 산실이었다. ‘미술작품으로 승화된 민족의 서사(敍事, epic)’ 바로 그것이었다. 그 정신의 구현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이 박물관을 세운 토마스 길크리스(Thomas Gilcrease)라는 인물.

 

그는 1890년 루이지애나에서 농부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프랑스 계, 스코틀랜드-아일랜드 계 등으로부터 이어진 그의 부계(父系)와 달리 어머니 엘리자벳은 무스코기(Muscogee)와 크리크(Creek) 등 원주민의 피를 25%쯤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길크리스로서는 자연히 인디언에 대한 관심이나 애착심을 타고 난 셈이었다. 게다가 그가 태어난 몇 개월 후 그의 가족은 인디언 구역의 크리크족 거주지로 이사했으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물려받은 13%의 크리크족 피 덕분에 엄청난 땅을 받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털사 남쪽 20마일의 160에이커에 달하는 땅도 있었다. 1908년 인디언인 오세이지(Osage) 족 출신의 벨레(Belle Harlow)와 결혼해서 두 아이를 둔 그는 1912년부터 미술품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잠시 후 지금의 길크리스 박물관의 중심이 되는 주택을 사들였고, 1922년에는 길크리스 석유회사를 세웠으며, 1941년 곳간과 차고를 예술품 수장고로 리모델링함으로써 길크리스 뮤지엄의 뿌리가 되었다고 한다.

 

1947년 뉴욕의 수집가 질레트(Gillette Cole) 박사로부터 엄청난 컬렉션을 통째로 사들이고 미술가이자 건축가인 알렉산더 호그(Alexander Hogue)를 고용하여 뮤지엄을 설계하여 그의 소장품들을 전시하게 했으며, 1949년에 미국의 역사와 예술에 관한 토마스 길크리스 연구소를 세우게 되었다. 그 후 여러 단계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 1958년 길크리스 재단은 뮤지엄의 건물과 땅을 털사시티에 기증함으로써 길크리스 뮤지엄은 본격적인 출발을 보게 된 것이다.

 

***

 

뻐근한 다리를 끌다시피 뮤지엄을 돌아보고 나오면서 그가 1949년에 붙였다는 미국의 역사와 예술에 관한 토마스 길크리스 연구소란 이름이야말로 이 뮤지엄의 본질을 정확히 드러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일별한 많은 작품들은 대부분 실제 삶을 그려낸 극사실주의 미학의 소산들이었기다. 지난주에 들른 오클라호마시티의 카우보이 박물관에서는 인디언들과 카우보이들의 발밑에서 튀어나온 삶의 파편들을 감상했으나, 지금 이곳 털사의 길크리스 뮤지엄에서는 예술가들의 해석을 거친 삶의 모습들을 확인하게 되었다.

 

, 해는 짧고 힘은 달리는데 촘촘하게도 짜여 있는 이 역사와 예술의 숲을 어찌 헤쳐 나갈까? 무정한 길크리스 뮤지엄은 이국의 나그네들에게 한없이 너그럽기도 하고, 한없이 무정하기도 하구나!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