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2. 13. 03:58

 

 


터키 괴레메 지역의 오픈 에어 뮤지엄(Open Air Museum)

 

 

 

 


터키 괴레메 로즈밸리(Rose Valley)의 한 암벽 동굴집을 찾아
현장에서 만난 베컴, 허이준, 허이훈 형제 등과 차를 마시며[2005년 12월]

 

 

 

 


터키 괴레메의 로즈밸리 지역

 

 

 

 


터키 괴레메 인근 언더그라운드 시티(Underground City)의 거실에서 만난 맷돌 아래 짝

 

 

 

 


터키의 셀르메 지역에서 만난 암벽 동굴들

 

 

 

 


터키 우흘라라 계곡의 암벽동굴 집에서 만난 프레스코화

 

 

 

 

 

 

 

암굴 속에 서린 생존 의지,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Bandelier National Monument]’의 말 없는 외침

 

 

 

 

9년 전 유럽 여행 중 터키 카파도키아의 괴레메 지역에서 만난 암굴 주거지는 지금까지도 큰 충격으로 남아 있다. 화산활동으로 생긴 다양한 모양의 암석과 암봉들에 침식작용으로 구멍이 뚫려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 안에 거주한 흔적들이 그 때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특히 카이마클르의 지하도시와 으흘라라 계곡, 셀르메 계곡 등 네브셰히르 코스에는 바로 어제까지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듯 온기까지 느껴졌다. 페르시아와 아랍인들의 침입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6세기부터 10세기까지 8층 깊이[높이가 아닌]로 뚫린 카이마클르의 언더그라운드 시티(Underground City)에는 각 층을 연결하는 가파르고 좁은 통로가 설치되어 있었고, 각 세대마다 거실과 침실은 물론 와인을 제조하고 저장하던 시설, 공동 주방 및 식당, 교회 등은 물론 까페도 있었다. 으흘라라와 로즈 계곡 등 지상에 서 있는 암굴 주택들의 벽과 천정에는 기독교 관련 프레스코화들이 그득했다.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 놀라움을 미국에서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산타페의 박물관들을 주마간산 격으로 스킴하고 멋지게 꾸민 이탈리아 식당에서 시장기를 달랜 후 우리는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Bandelier National Monument]’를 향해 쾌속으로 달렸다. 욕심도 과하지! 그곳을 본 다음 우리는 부랴부랴 멀고 먼 귀로에 올라 뉴멕시코를 벗어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산타페에서 반델리어 가는 길은 지금까지의 어떤 길보다도 만만치 않았다. 84[285] 하이웨이를 타고 산타페로부터 한 시간 가까이 사막지대를 달리다가 퍼와이키(Pojoaque) 턴파이크에서 502번으로 갈아탄 다음 더욱 높아진 산록 도로를 통해 몇 십 분을 더 달렸다. 제법 큰 도시의 모습을 갖춘 로스 알라모스(Los Alamos)부터는 가파른 산길이었다. 길은 그런대로 넓었고 노면 상태 또한 괜찮았으나, 왼쪽은 천 길 낭떠러지! 잔뜩 구름 낀 하늘엔 커다란 독수리가 선회하고 있었다.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의 음산한 분위기가 계곡 아래쪽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그 옛날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등짐을 진 어른들과 올망졸망 어린 것들이 길도 없는 이 등성이들을 넘었겠구나! 넘다가 실족하여 저 아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린 삶들도 좀 많았으랴!’ 생각하니, 삶에 대한 집착과 허무 사이의 드넓은 간극에 갑자기 콧마루가 시큰해졌다.

 

구불구불 산길을 넘어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비지터 센터에 도착했다. 추운 겨울, 비수기라서인지 우리를 포함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긴 코스와 짧은 코스가 있었지만, 시간 때문에 우리는 짧은 코스를 택했다. 사실 짧다 해도 충분히 둘러보려면 1시간 반 정도나 걸리는 코스였다. 비지터 센터를 떠나 본격 트레일에 접어드니 거대한 넓이로 땅 밑을 파낸 두 종류의 유허(遺墟)가 나타났다. 이른바 빅 키바(Big Kiva)’ 즉 푸에블로 인들의 지하 예배장이 아래쪽에 있었고, 그 위쪽에는 음식 저장고로 쓰이던 400개의 방을 가진 2층 구조물 즉 츄웨니[Tyuonyi]가 있었다. 그 주변에는 가옥으로 추정되는 지상 건축물들의 터가 많이 남아 있고, 거기서 올려다보니 주택 혹은 주택의 일부로 사용되던 벌집 모양의 암봉이 거대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었다그곳이 바로 푸에블로 인들의 암벽 주거지[Cliff Dwellings]’였다.

 

이 구역의 암벽 주거지는 두 군데였다. 하나는 짧은 코스에 있는 것들이고 또 하나는 그 위쪽의 긴 주택[Long House]’들이었다. 우리는 짧은 코스의 것들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미 터키에서 정교하게 꾸며진 암굴(巖屈)들을 자세히 본 바 있는 내 입장에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으나, 미국에도 이런 유형의 집들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화산암[volcanic tuff]에 뚫린 동굴들은 그 자체가 좋은 집이나 안락한 방의 역할을 한 공간들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안에 들어가니 대부분의 벽들은 불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까맣게 그을려 있어 누군가 이 안에서 불을 피우고 살았음이 분명했다. 암벽을 둘러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작은 구멍들이 나 있었는데, 이것은 통나무들을 그 구멍에 끼운 다음 암벽에 의지하여 지어낸 푸에블로 전통가옥들의 흔적이었다. 구멍의 숫자로 보아 전성기 때는 매우 많은 세대의 집들이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 가는 교통망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의 위치

 

 

 


반델리어 지역 표지판

 

 

 


반델리어 지역 푸에블로 인들의 합동 예배장 유허

 

 

 


동굴집들이 있던 거대한 암벽

 

 

 


동굴집들이 있던 거대한 암벽

 

 

 


동굴집들이 있던 거대한 암벽

 

 

 


동굴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설치한 사다리

 

 

 


암벽 동굴집들과 벽에 잇대어 집을 지었던 흔적으로 남아 있는 작은 구멍들,
그리고 암벽화[pictograph]

 

 

 


암벽동굴집들과 그 주변에 덧붙여 지은 집의 유허

 

 

 


암벽 동굴집 아래쪽에 있던 주택가의 유허

 

 

 


암벽 동굴집 아래쪽에 있던 주택가와 각종 시설들의 유허

 

 

 


암벽 동굴집 아래쪽에 있던 주택가와 각종 시설들의 유허

 

 

 


암벽 동굴집 내부[벽이 온통 그을려 있음]

 

 

 


암벽 동굴집에서 내다 본 바깥 풍경

 

 

 

 

그렇다면 그들은 이 깊고 척박한 산중에서 무얼 먹고 살았을까. 대략 12세기 중반에서 16세기 중반에 걸쳐 이곳에서 살았던 () 푸에블로[Ancestral Pueblo]’ 인들은 메사(mesa)의 위쪽에 있던 들판에 농작물들을 재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옥수수, , 호박 등은 그들의 주식이었으며, 자생식물들과 우리가 현장에서 발견한 사슴, 토끼, 다람쥐 등의 고기도 영양분을 보충하기에 요긴했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의 집 주변에서 기르던 칠면조로부터는 깃털과 고기를 얻었을 것이며, 개를 이용한 사냥도 가능했던 것으로 보였다.

 

반델리어에 인간이 깃들기 시작한 세월은 10,000년이 넘는다. 메사와 계곡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야생 조수(鳥獸)들을 따라 다니던 수렵채취 부족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서기 1,150년에야 선 푸에블로인들은 반영구적인 주거지를 짓기 시작했고, 1550년에는 이곳을 떠나 리오 그란데(Rio Grande) 강가로 주거를 옮겼다. 코치티(Cochiti), 산 펠리페(San Felipe), 산 일데폰소(San Ildefonso), 산타 클라라(Santa Clara),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등이 그들의 새로운 주거지역이었다.

 

그 후로 4백여 년 간 이 땅에는 사람들이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심한 가뭄까지 닥쳐오게 되었다.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들의 구비전승[口碑傳承, oral tradition]에 의하면, 리오 그란데 강을 따라 남쪽과 동쪽에 위치한 코치티 푸에블로와 산 일데폰소 푸에블로가 프리올레 캐년에 집을 짓고 살던 이들의 가장 가깝거나 직접적인 후손들로 보인다고 한다.

 

비지터 센터에는 박물관과 함께 이들의 생활사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관이 있었다. 거기서 확인하게 된 흥미로운 사실들 중의 하나는 이들이 구비전승을 통해 조상들과 연결했고, 그에 의존하여 삶의 지혜를 얻거나 적응해 나왔다는 점이다. 푸에블로의 구비전승은 자신들의 믿음, 이야기, 노래, , 생활 속의 기술 등 모든 것을 포괄한, ‘옛날과 현재의 대화E.H. 카아의 말대로 역사였다. 따라서 구비전승은 선대 푸에블로의 생존에 기본적인 텍스트였고, 오늘날에도 푸에블로로 하여금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게 하는 필수적인 지식의 창고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푸에블로의 이야기들에는 그들의 활동이 묘사되어 있기도 하고 교훈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여, 대대로 그것을 가르쳐 왔음은 물론 그 안에 들어 있는 생생한 정보들을 공유하기도 했다. 대부분 구비로 전승되어 왔지만, 개중에는 그림, 암각화, 혹은 춤으로 묘사되기도 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들의 주거지 주변에서 목격한 암각화도 그 사례들 가운데 하나였다.

 

1,700년대 중반 스페인 정부가 불하해준 땅을 소유한 스페인 정착자들은 프리욜레 캐년(Frijoles Canyon)에 자신들의 주거지를 만들었고, 1880년 코치티 푸에블로의 호세 몬토야(Jose Montoya)는 고고학자 반델리어[Adolph F. A. Bandelier, 1840. 8. 6.~1914. 3. 18.]를 프리욜레 캐년으로 데리고 가 조상들이 살던 고향땅을 보여주었다. 그 때부터 반델리어는 이 지역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반델리어는 스위스 베른 출신의 미국 고고학자인데그의 이름을 따서 이 유적지의 명칭으로 삼았을 정도로 그는 이 지역에 관한 전문가였다. 그는 젊은 시절 미국으로 이주하여 노동을 하며 힘들게 살았다. 당시 대단한 인류학자 모건(Lewis Henry Morgan)의 지도 아래 그는 미국 남서부, 멕시코, 남아메리카 등지의 미국 원주민들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멕시코의 소노라(Sonora),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지에서 연구를 시작하여, 이 지역 연구를 선도하는 권위자가 되었고, 쿠싱(F. H. Cushing) 및 그의 후계자들과 함께 선사 문화 분야의 선도적인 학자가 되기도 했다. 그의 이름을 딴 곳이 바로 이 구역이었다.

 

1916반델리어 국립 유적지법령이 만들어지고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이 서명했으며, 1925년에는 에벌린 프라이(Evelyn Frey)와 그의 남편 죠지(George)가 이곳에 도착하여 1907년 애벗 판사(Judge Abbot)가 건립해온 ‘10 엘더스 랜취(the Ranch of the 10 Elders)’를 이어받게 되었고, 1934년과 1941년 사이에 민간 자원 보존단[Civilian Conservation Corps]’의 노동자들이 프리욜레 캐년에 만들어진 캠프에서 작업을 하는 등 최근까지의 노력으로 지금의 유적지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암벽 주거지를 거쳐 내려오는 길은 지난여름 이 일대를 휩쓸었던 것으로 보이는 홍수의 현장이었고, 근년에 일어나 아름드리 소나무들을 태워버린 무서운 자연 화재의 현장이기도 했다. 무수한 나이테들을 몸에 새기고 벌렁 누워있거나 아직 청청하게 버티는 소나무들은 그 옛날 이곳에서 살아간 푸에블로 인들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이 계곡에서 먹고 자고 사랑하며 생존의 나날을 버텨내던 푸에블로 인들은 벌써 오래 전에 이 계곡을 떠났다. 그러나 리오 그란데 강줄기를 따라 새로운 터전들을 일군 그들은 변함없이 옛날이야기들 속에 숨어 있는 조상들의 지혜를 이어가며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는 프리욜레 계곡의 거센 냇물 소리를 기억하며...

 

 

 


당시 이곳 주민들이 잡아먹고 살았을 다람쥐

 

 

 


당시 이곳 주민들이 잡아먹고 살았을 사슴들[Mule Deer]

 

 

 


당시 이곳 주민들이 따 먹고 살았던 잣나무 열매[piňon nuts].
지방과 단백질의 공급원이었음.

 

 

 


당시 이곳 주민들에게 비타민과 무기질을 공급했을 선인장 열매들

 

 

 


당시 이곳 주민들이 동굴집 주변에 남긴 암각화[pictograph]

 

 

 


스페인 이주자들로부터 받은 영향을 암시하는 암벽 위의 십자가

 

 

 


열매를 갈아 식량을 확보하던 당시 여인들의 삶[비지터 센터 박물관 그림]

 

 

 


당시 이곳 주민들이 사용하던 바구니와 갈돌, 그리고 화살촉[비지터 센터 박물관]

 

 

 


당시 이곳 주민들이 사용하던 도자기와 각종 생활 도구들[비지터 센터 박물관]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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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3. 11. 20. 14:53

 

 

우린 언제쯤이나 존경할만한 대통령을 가질 수 있을까?

 

 

 

 

미국에서 알래스카 주 다음으로 크고 캘리포니아 주 다음으로 인구가 많으며, 내 느낌으론 미국 내에서 최고로 부유한 텍사스 주[State of Texas]의 달라스(Dallas)시에 와 있다. 1836년 멕시코로부터 텍사스 공화국으로 독립했다가 18451229, 미국의 28번째 주로 흡수된 텍사스 주. 이른바 '바이블벨트'로 불리는 이곳과 오클라호마 등 중남부의 여러 주는 전통적으로 높은 공화당 지지율을 보여주는 등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 미국 입성 이래 서서히 쌓여온 피로에도 불구하고 달라스 행을 무리하게 시도한 것은 아무리 바쁘고 귀찮아도 오클라호마 주와 인접한 텍사스를 생략하고 떠날 순 없다는, 일종의 의무감이나 초조감 때문이라 할까?

 

16일 오후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고 난 17일 오전. 도착 당일부터 오클라호마와는 현저하게 다른 교통체계와 북적대는 인파에 지친 우리는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오클라호마의 스틸워터로 당장 돌아가고픈 마음이 절실했지만, 그 욕망을 잠시 억누른 채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만나기로 했다.

 

한 사람은 매사추세츠 주 출신의 35대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1917529~ 19631122] 대통령, 다른 한 사람은 텍사스 출신의 43대 조지 W. 부시[George Walker Bush, 194676~ ] 대통령이다. 케네디는 가톨릭 집안 출신의 민주당적 대통령, 부시는 개신교 집안 출신의 공화당적 대통령이었다.

 


시민이 그려 박물관 계단에 붙여놓은 케네디 대통령의 초상화 

 

하버드대 정치학과 출신인 케네디는 44세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46세에 암살되었고, 예일대 역사학과 출신인 부시는 200155세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첫 임기를 마치고 2005년에 재선된 뒤 200963세까지 임기를 마친 행복한 인물이다. 정치경력으로는 케네디가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을 지냈고, 부시가 텍사스 주지사를 두 번째 역임하고 있었으니, 이만 하면 똑같이 대권을 거머쥔 두 대통령이지만 상당히 다른 인생역정을 걸어왔음을 알 수 있다.

 


취임연설을 하는 부시 대통령 

 

두 대통령의 가문이나 경력, 정치적 성향, 정책의 성패, 개인적 성격 등 자세한 사항들은 이미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져 있으므로, 이 글에서 번거롭게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묘하게도 우리는 케네디 대통령 암살 50주년에 이곳을 찾게 되었다. 그 점을 깨달은 우리는 달라스라는 같은 공간에 자취를 남긴 두 대통령을 찾아보고자 했다. 존경하는 대통령을 한 사람도 갖지 못했다고 자탄하는 우리 입장에서 이 좋은 기회에 대통령을 자랑스러워하고 존경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먼저 방문한 곳이 이른바 ‘6층 박물관[The Sixth Floor Museum at Dealey Plaza]’. 케네디 대통령 암살범 리 하비 오스왈드가 창틀에 앉아 총을 쐈다는 교과서 보관창고 6층에 마련된 박물관인데, 사실은 일종의 사건 전말 영상 기록관인 셈이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범이 이용한 교과서 보관건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음


현재 박물관으로 쓰이는 교과서 보관건물[오렌지색 건물] 6층 창문틀에서 오스왈드는
카퍼레이드를 벌이며 이 사진 속의 아스팔트 위를 지나던 케네디 대통령을 저격했다. 

 

19631122일 링컨 컨티넨탈을 타고 달라스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이던 케네디 대통령은 딜리 플라자(Dealey Plaza) 인근의  교과서 보관창고 6층에서 오스왈드가 쏜 3발의 총탄 가운데 두 번째 총탄을 머리에 맞고 숨졌다. 이 사건의 전말이나 상세한 재판 과정, 저격범 오스왈드를 둘러싼 의혹 등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에 크나큰 의문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그래서 그런지 사건의 발발에서 종말까지의 전 과정을 40여 장면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박물관의 핵심 컨셉이었다. 박물관을 한 바퀴 돌고나자 암살사건의 전모와 함께 왜 미국인들이 케네디 대통령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지를 석연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외견상 허름하지만, 이 박물관은 매우 치밀하고 효율적으로 기획되어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 박물관 위치 및 사이트                                                            

                   
                                                              케네디 대통령 박물관 입구
                                                                                     


달라스를 방문한 케네디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하는 시민들

 
                    어떤 시민이 그린 케네디 대통령

 
어느 초등학생이 표현한 케네디 대통령에 대한 애정

  

그 다음 방문한 곳이 조지 W. 부시 대통령 도서관과 박물관[George W. Bush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 남부 감리교 대학교[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캠퍼스 안의 부시 대통령 센터 안에 세워져 있었다. 아버지 부시와 어머니 바버라 여사 및 부인 로라 여사 등을 비롯한 화목한 가족들, 학창시절과 군복무 시절의 각종 자료, 대통령 시절에 이룩한 대내외 업적들, 백악관 생활자료 등등. 엄청난 규모의 자료들이 생생한 사진들과 함께 기념관을 그득 메우고 있었다. 대충 둘러보아도 대통령 스스로의 자부심이 묻어날 뿐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 더 나아가 세계인을 위해 미국 대통령이 걸어 온 영예의 흔적들이 역력했다. 정말로 이국인인 내가 보기에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고자 한 것은 대통령의 암살에 대한 전말이나 의혹, 기념관에 전시된 업적들의 화려함이 아니었다미국인들은 과연 대통령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가가 궁금했던 것이다. 걱정했던 대로 관람객이 많이 몰려 우리가 케네디 박물관에 입장하는 데만 2시간이 넘게 걸렸고, 넓게 만들어진 부시대통령 박물관에서도 사람들의 어깨가 걸려 편안한 관람에 지장을 느낄 정도였다. 그 뿐 아니라 대부분 미국인들인 관람객들은 하나같이 진지하고 긍지에 찬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이 점들 만으로도 대통령에 대한 관심과 존경의 증거로는 충분했다.

 

케네디 박물관에서 만난 그들은 대부분 슬프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어폰에서 울려나오는 설명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나는 40대의 젊은 대통령이 단 2년 동안 이룩한 업적에 놀랐고, 그가 바로 이곳에서 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점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물론 숱한 여인들과의 염문설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고, 쿠바 미사일 위기나 흑인 민권법 등에 관한 대처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진실이 밝혀지고 있긴 하지만, 그런 것들이 아직은 비운의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심을 크게 손상시키지는 않고 있는 듯 했다. 대통령이 피격된 지점의 길바닥에는 지금도 x 표시가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내 눈에는 그것이 십자가[cross]로 보였는데, 어쩌면 미국은 폭력으로 점철된 그들의 죄를 용서받고,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케네디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나 아닐까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그런 복잡한 생각 없이 이곳에  x 표시를  해 놓았으리라. 차라리 그어놓지나 말든지 이왕 표시하려거든 말뚝을 박아 새끼줄이라도 쳐놓든지. 공사장 인부들이 아스팔트에 굴착지점 표시하듯이 백묵으로 찍찍 엇갈려 그어놓은 모습이란! 그러나 그것이 미국인들의 장점이기도 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피격당한 지점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 재키 여사


케네디 대통령 추모비


추모비 안쪽의 상석

 부시 대통령 박물관에서는 역사 진행의 합리성에 맞추어 가고자 한 그의 노력들을 읽어냈고, 대통령의 소탈하고 인간적인 면모들로부터는 잔잔한 감동을 받을 수 있었다. 부시 대통령 박물관에서 만난 미국인들은 대부분 자긍심과 존경심으로부터 번져 나오는 흐뭇한 미소들을 띠고 있었고, 나 역시 그랬다. 물론 이라크 전쟁을 두고 부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정책의 실수 혹은 판단착오는 그것대로 계산하면서도 대통령으로서의 전체적인 공적이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하여 존경을 표하는 일은 민주국민의 성숙한 자세일 수 있을 것이다. 

 


1994년 9월 12일 달라스의 Texas State Fair에서 아버지 부시와 함께.
부자 간의 다정한 모습과 미소가 국보급이지요?


세계적인 테러와 투쟁해온 부시 대통령


초등학교 교실에서 1일교사로 참여한 부시 대통령


어린이들의 건강 캠페인에 참여한 로라여사 모녀


2005년 11월 한국을 방문한 로라 여사가 어린이들과 함께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서 자연보호 활동을 펼치는 부시 대통령


연례 100km 산악자전거 대회에서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에서 오른쪽 발을 잃은
다니엘[Daniel Gade]소령을 부축하고 있다.


 자궁경부암과 유방암 치료를 위한 부시 연구소 사업의 일환으로
2012년 잠비아 Kabwe의 Ngungu Health Center 리노베이션 작업에 나선 부시 전 대통령.
왜 우리 대통령들에겐 이런 모습이 없는 걸까요?


2000년 12월 대통령 당선자 부시의 인사말 "나는 한 당파에 봉사하기 위해 대통령으로
뽑힌 게 아니고, 한 국가에 봉사하기 위해 뽑힌 것이다. 미합중국의 대통령은 모든 미국인들의, 
모든 인종들의, 그리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대통령이다. 당신이 내게 표를 주었든
그렇지 않았든, 나는 당신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할 것이며, 당신의 인정을 받기 위해
일할 것이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요?


조지 W. 부시 대통령 도서관과 박물관 앞면

 

그렇다면 그들을 보며 나는 왜 슬픔을 느껴야 했는가. 같은 자신들의 대통령이면서 서로 다른 길을 간 두 사람에게 똑같은 존경을 보내는 미국인들을 보며 나는 왜 슬픔을 느껴야 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내겐 그들처럼 존경할만한 우리 대통령이 없기 때문이다. 일국의 대통령직을 맡아 수천만 생령(生靈)들의 기대와 소망(素望)을 한 몸에 받은 입장이라면, 더구나 자연수명으로도 이제 살만큼 산 입장이라면, 무슨 세속적 욕망을 다시 추구하고 싶단 말인가. 아주 낮은 자세로 봉사활동에라도 나서서 국가와 국민으로부터 받은 벅찬 사랑을 아주 겸허한 자세로 한 톨 한 톨 갚아나가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었으련만, 하나같이 가당찮은 물욕과 권력욕에 찌들어 재직 중엔 신성한 대통령직을 더럽히고 물러나서도 오욕(汚辱)의 구렁텅이에서 지금껏 헤매고 있단 말인가. 국민들에겐 실망을 안겨주고 역사에는 더러운 자취를 남기는 그들을 어떻게 존경스런 대통령으로 대접할 수 있단 말인가.

 

케네디 박물관의 매점에서 나는 한 권의 책을 샀다. 앤 보섬(Ann Bausum)<<Our Country’s Presidents>>란 책이었고, 이 책에는 조지 워싱턴부터 지금의 오바마 대통령까지 자랑스러운 얼굴들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과연 우리는 언제쯤이나 되어야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이란 자긍심 넘치는 책을 쓸 수 있게 될 것인가.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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