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5. 11. 5. 07:08

세인트루이스(St. Louis)에서의 56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세인트루이스 공항 인근

 

 

 


발표문 ppt 일부

 

 

 


발표문 ppt 일부

 

 

 


워싱턴대학교 댄포스 캠퍼스 남쪽 입구

 

 

 


브루킹스홀 쪽의 게이트

 

 

 


캠퍼스 일부

 

 

 

 

작년에 신청했어야 하는데, 게으름을 부린 탓에 그만 올해 아시아학회(AAS: Association for Asian Studies) 참여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올해 초반 부랴부랴 찾아낸 학술발표회가 바로 AAS의 중서부 지역 분회에서 열리는 MCAA(Midwest Conference on Asian Affairs). ‘미국 중부의 하버드라 불리는 워싱턴대학교에서 열린다 하여 더 매력적이었다. 발표 및 참가 신청, 발표문 송부 및 심사, 숙소 및 항공편 예약 등 자잘한 절차들이 자못 번거로웠으나, 서양의 학자들을 만나 의견을 나누면서 새로운 기운을 받고 싶다는 욕구가 나를 움직인 것이 사실이었다. 그 과정에서 큰 학술발표회를 조직하고 움직이는 그들의 메커니즘을 배울 수도 있었고, 연락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그들의 내면 또한 살짝 훔쳐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아직 가보지 못한 세인트루이스와 워싱턴대학교였다.

 

멀었다. 비행기가 태평양 상공에 도달할 즈음에야 모니터에 뜨는 항로를 보며 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약간의 후회가 생겨난 것도 사실이었다. 시카고의 오헤어(O’hare) 공항까지 꼬박 12시간, 오헤어에서 기다린 3시간, 오헤어에서 세인트루이스 공항까지 1시간 20, 공항에서 호텔까지 30분 등 무려 17시간이나 걸렸으니!

 

시차 부적응으로 피곤한 몸을 끌고 다음 날의 발표(*발표문은 백규서옥http://kicho.pe.kr 연구업적>논문>No.221’ 참조)를 포함, 꼬박 사흘간의 학술발표회 일정을 소화하게 되었다. 61개의 패널, 패널 당 4명의 발표였으니, 발표자만 해도 240명이 넘었다. 토론자, 진행자, 참관자까지 합치면 1,000명이 넘는 규모였다. 발표도, 발표에 대한 반응도 비교적 만족스러웠기 때문일까. 몸과 마음 상태는 크게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워싱턴 대학의 이지은 교수와 전임강사로 있는 고인성 박사, 울산과기원의 이재연 교수 등을 만난 것은 피로를 가시게 한 청량제였다. 이지은 교수, 이재연 교수 등과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한 대화는 무엇보다 유익했다. 발표장을 메운 외국의 학자들에게 조선의 건국서사시(foundational epic of Joseon Dynasty)를 소개하고, 그 밑바탕으로 작용한 유토피아 찾기로서의 풍수론을 전통 생태 담론적 차원에서 설명한 것은 아주 짜릿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학회 종료 후 하루 반 동안의 여유가 있었다. 워싱턴대학교 댄포스(Danforth) 캠퍼스의 구석구석, 밀드레드레인켐퍼 미술박물관(Midred Lane Kemper Art Museum), 미주리 역사박물관(Jefferson Memorial Missouri History Museum), 게이트웨이 아치(Gateway Arch) 등을 포함, 다운타운 몇 곳들을 도는 데 그쳤지만, 그간 서구 여러 나라의 도시들을 돌아보며 익힌 노하우(?) 덕분일까. 세인트루이스와 워싱턴대학교의 장점들을 순식간에 체감할 수 있었다.

 

1853년 윌리엄 그린리프 엘리엇(Willam Greenleaf Eliot)이 주도하여 엘리엇 세미너리(Eliot Seminary)를 세웠는데, 이 학교가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학교로, 다시 워싱턴대학교로 확대발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 전역에 워싱턴의 이름을 딴 대학들이 늘어나자 다시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대학교(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로 교명을 환원했다 한다. 댄포스 캠퍼스는 빅벤 대로(Big Bend Boulevard), 퐈리스트 팍 파크웨이(Forest Park Parkway), 스킹커 대로(Skinker Boulevard), 와이다운 대로(Wydown Boulevard) 등으로 둘러싸인 변형된 직사각형 모양으로 되어 있었는데, 중앙에서 동서로 가로지르는 포시쓰 대로(Forsyth Boulevard)가 캠퍼스를 남북으로 가르는 형국이었다.

 

멋진 캠퍼스였다. 어떤 건축양식을 본떴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평탄한 대지에 늘어선 단정한 베이지색 톤의 건물들은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따스해보였으며, 안으로 들어가니 철저히 인체공학에 맞추어 지은 듯 이동하기에 편했다. 거의 반반인 대학원과 학부 합쳐 14천의 학생들과 3000여명이 넘는 교수진이 댄포스 캠퍼스(206,885), 메디컬 캠퍼스웨스트캠퍼스노스캠퍼스(165.263) 등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이들 캠퍼스에 산재해 있는 14개의 도서관들엔 총 420만권의 도서가 소장되어 있었으며, 이 대학의 자랑인 밀드레드레인켐퍼 미술박물관도 미시시피강 서부 연안 최고(最古)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교수진에 22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10명에 가까운 퓰리처 수상자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 미국 대학평가에서 늘 10위권(12~14)을 유지하고 있는 최고 명문이라는 점도 놀라웠다.

 

학회 덕에 이 대학에서 종신 교수직을 받고 한국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이지은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연세대학교에서 노문학을 전공하고 하바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 교수는 이 대학교 인문대학(Arts & Sciences) 동아시아 언어문화학부(East Asian Languages and Cultures) 한국학과의 학과장이었다. 이 교수는 저서 <<Women Pre-Scripted: Forging Modern Roles through Korean Print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5)>>를 비롯하여 많은 논문들을 발표했으며, ‘한국문명론(Korean Civilization)근현대 한국문학(Literature of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한국문학과 문화의 주제들: 젠더 구축하기(Topics in Korean Literature & Culture: Constructing Gender)현대 한국인의 자아: 한국문학과 문화의 주제들(Contemporary Korean I: Topics in Korean Literature and Culture)한국문학과 문화의 주제들(Topics in Korean Literature and Culture)’ 등의 강의를 통해 미국 학생들과 만나고 있었다. 이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미국 인문학계의 자세한 모습들을 들을 수 있었다. 함께 발표에 참여한 울산 과기원의 이재연 교수 또한 하바드와 시카고대학에서 공부한 한국문학 세계화의 주역이었다.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나를 비롯한 한국문학 전공자들이 앞으로 무엇에 주력해야 할지를 깨닫게 되었다. 아젠다(agenda)의 쉼 없는 발굴과 논리 구축을 통해 세계 학자들과 소통하는 일만이 우리의 낙후성을 탈피하는 유일한 출구임을 알게 된 것이다.

 

***

 

귀국 날까지 짬을 내서 찾은 워싱턴대학교의 밀드레드레인켐퍼 미술박물관은 건물도 훌륭했지만, 마침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내 가슴을 뛰게 했다. 하루를 쉰 다음 찾은 미주리주 역사박물관과 게이트웨이아치는 미주리 주와 세인트루이스의 어제와 오늘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명소들이었다. 미주리 역사박물관은 제퍼슨(Thomas Jefferson) 대통령을 기념하는 의미도 갖고 있었다. 사실 제퍼슨 대통령이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강에서 로키산맥에 이르는 80만 평방 마일의 광대한 땅을 사들임으로써 미주리 주는 비로소 미국 땅이 되었고, 본격적인 번영이 시작된 것이다. 세인트루이스의 역사가 독립선언을 기점으로 시작된 미국의 역사보다 100년 이상이나 긴 것도 그 때문이다. 1673년 이 지역에 도착한 프랑스 탐험가들은 원주민이 살고 있던 이 땅을 접수하여 프랑스령으로 만들었고, 자신들의 왕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서 루이지애나(Louisiana)로 명명한 것. 3대 대통령 제퍼슨이 1803년 나폴레옹으로부터 이 땅을 매입하여 1804310일 미합중국의 한 부분으로 공식화한 다음 1808년에 시의원단을 선출했고, 1809년에 정식 시로 등록한 것이다. 1904년의 국제무역박람회, 커피산업, 도시 확장 및 정비 등이 박물관 소장품의 대표적 컨셉들이었다. 사실 1904년의 국제무역박람회와 하계올림픽은 1896년에 세인트루이스를 덮친 허리케인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 시도였는데, 역대 최악이었던 올림픽과 달리 박람회는 성공적이었다. 그 내용들이 박물관 중심의 전시물들을 통해 설명되고 있었다.

 

다양한 전시물들을 통해 커피 산업이 미주리의 중심에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 부분이나 도시의 형성, 발전, 팽창을 보여주는 대형 사진들과 각종 생활사 자료들은 박물관을 매우 인상적인 공간으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 그것들은 여타 국가나 지역의 박물관들과 비교하여 특별한 의미와 함께 차별성 또한 보여주고 있었다. 그곳을 찾은 모든 이들에게 우리도 이런 역사박물관 하나쯤은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박물관을 나와 들른 곳은 이 도시의 어느 곳에서도 보이는 게이트웨이 아치(Gateway Arch). 국립 제퍼슨 국토 확장 기념관(Jefferson National Expansion Memorial)을 장식하는 조형물이자 '게이트웨이 시티(Gateway City)'라는 세인트루이스의 별칭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랜드마크였다. 서부개척 시대, 서부로 넘어가는 관문이 바로 세인트루이스였고, 그 개척의 상징물이 바로 이것이었다. 1947년 핀란드 계 미국 건축가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과 건축기사 한스카를 반델(Hannskarl Bandel)의 설계를 채택, 1963212일 착공, 19651028일 완공, 1967724일 일반에 개방되었으니, 설계로부터 무려 20년이나 걸린 큰 공사였다. 전체 높이 192m의 무지개 형상 스테인리스강 구조물로서 남쪽과 북쪽 두 방향에서 엘리베이터 격인 트램(tram)을 타고 아치 꼭대기까지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꼭대기의 좁고 긴 방에서 창문을 통해 미시시피강과 일리노이 평원, 세인트루이스 시내를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아치 밑으로는 웨스트워드 익스팬션 박물관(Museum of Westward Expansion)이 연결되었다.

 

 

세인트루이스는 도착부터 떠나는 날까지 평화와 안온함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조용한 가운데 안으로는 바글바글 끓어 넘치는 용광로처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미국의 여느 도시들처럼, 짧지만 화려한 역사와 전통을 기반으로 아이디어와 활력이 맥박치고 있었다. 그 한 복판에서 세계의 인재들을 불러 모으는 곳이 바로 워싱턴대학교였다. 그러나, 어쩌랴! 56일 간의 짧은 일정 속에 바늘구멍으로 들여다 본 풍경. 그게 세인트루이스의 허상일까, 아니면 실상일까.

 

 


Thinker on rock-Barry Flangan 작, 1997. 워싱턴대학교 교정

 

 

 


John M. Olin Library

 

 

 


 Carl Neureuther에 대한 감사 동판

 

 

 


도서관 서가

 

 

 


도서관 서가

 

 

 


동아시아 도서관

 

 

 


인문대학 동아시아 언어문화학과 이지은 교수 연구실

 

 

 


이 교수 연구실의 서가

 

 

 


MCAA 첫날 연회

 

 

 


학술발표회에서. 린덴우드 대학교 중국어학과 Brian Arendt 교수와 함께

 

 

 


동아시아학과의 Rebecca Copeland 교수(일본문학교수/동아시아학부 학부장), 

Holden Thorp 박사(교무처장/학사부총장/리타 레비-몬탈시니 석좌교수)와 함께

 

 

 


이지은 교수와

 

 

 


연회장에서 이지은 교수, 이재연 교수, 고인성 교수 등과 함께

 

 

 


저녁식사 자리에서 함께 한 한국학자들

 

 

 


밀드레드레인켐퍼 미술박물관

 

 

 


미술박물관에서 만난 시팅불(Sitting Bull)[Andy Warhol 작]

 

 

 


피카소의 <알제리의 여인들(Women of Algiers)>

 

 

 


Max Beckmann의 <Artists with vegetable>

 

 

 


미주리 역사박물관

 

 

 


미주리 역사박물관 소장 '세계무역박람회장 가는 길'

 

 

 


역사박물관 전시품

 

 

 


역사박물관 소장 포스터

 

 

 


역사박물관 소장 '수레'

 

 

 


커피산업에 대한 세인트 루이스의 자부심 "시애틀은 비켜 서세요!"

 

 

 


그 당시 커피 브랜드의 하나

 

 

 


세계 각국에서 수입되는 커피 원두들

 

 

 


어렵던 시절의 미주리주 주민들

 

 

 


당시 야구경기 모습.

 

 

 


게이트웨이 아치

 

 

 


게이트웨이 아치

 

 

 


Forest Park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멋진 개인주택

 

 

 


Forest Park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멋진 개인주택

 

 

 


세인트루이스 다운타운의 한가로운 모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8. 4. 20:08

 


무스코기 초입의 이정표

 

 


무스코기 초입에서 만난 인포메이션 센터

 

 


아미쉬 레스토랑의 표지판

 

 


아미쉬 레스토랑의 정갈하고 소박한 음식

 

 


아미쉬 레스토랑의 내부

 

 


아미쉬 버터 및 치즈 광고판

 

 


무스코기 네이션의 문장(紋章)

 

 


연합 인디언 네이션의 문장

 


무스코기 네이션의 국기 

 

 


삼강박물관(The Three Rivers Museum)에서 큐레이터들 및 보안관과 함께

 

 


보안관의 현란한 '권총 돌리기'

 

 


삼강박물관의 생활사 자료

 

 

 

 

크릭(Creek) 족의 꿈과 현실을 찾아

 

 

 

2014224일 아침 8시 오클라호마시티 윌 라저스 공항[Will Rogers World Airport]’ 발 유나이티드 아메리카 항공편으로 시카고 오헤어 공항으로 이동, 한국행 아시아나에 몸을 실으면 미국 생활은 끝이었다. 그래서 이 땅에 남은 미련을 남김없이 태우고자 21-22일 크릭 인디언들의 집거지를 거쳐 출발 전날 오클라호마 시티에 입성하기로 했다. 무스코기(Muscogee)와 오크멀기(Okmulgee)에 모여 산다는 크릭 인디언들을 만나기 위해 털사(Tulsa) 방향의 동쪽 우회로를 택하기로 한 것이다.

 

체류하는 동안 오클라호마에 거주하는 39개 인디언들 가운데 겨우 10여개 부족들을 접한 우리였다. 10여개 부족들 가운데는 이른바 문명화된 다섯 부족들[The Five Civilized Tribes: 체로키(Cherokee), 치카샤(Chickasaw), 촉토(Choctaw), 크릭(Creek/Muscogee), 세미놀(Seminole)]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오클라호마 동쪽의 크릭은 마지막 코스로 남겨 두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인들은 이 다섯 부족들을 ‘Civilized Tribes’로 부르고 있었으나, 그동안 우리는 그 말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civilized’문명화된으로 번역할 경우, 그동안 우리가 만난 여타의 인디언들은 뭐란 말인가. 우리가 보기에 그들 역시 이미 문명화된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훌륭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고 있는 OSU 역사과의 모제스(Dr. L. G. Moses) 교수에게 물었더니, 이 다섯 부족들이 식민시대나 초기 미 연방시대에 앵글로 색슨 계열 정착자들의 생활방식이나 관습을 수용, 그들과 선린관계를 맺어오면서 문명화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라고 했다. 내가 그 말을 미국화로 바꾸어 이해해도 무방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221. 겨울날씨치곤 쨍쨍하게 맑고 온화했다. 이 땅을 떠나기로 되어 있는 24일까지 만 3. 하룻밤은 인디언 구역에서, 나머지 이틀 밤은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보내기로 했다. 짐가방들을 트렁크에 때려 실은 우리는 렌터카를 몰고 학교를 한 바퀴 돈 뒤 177, 412, 44번 하이웨이 등을 번갈아 타면서 무스코기로 달렸다. 털사로부터 한 시간쯤이나 달렸을까. 무스코기 초입의 길가에 자그마한 관광안내소[Muskogee Tourist Information Center]가 나타났고, 그 건너편에 참한 식당 하나가 숨듯 서 있었다. 이곳에서 아미쉬 레스토랑[Amish Restaurant]’을 만나다니! 행운이었다. 전통 기독교 교회공동체 아미쉬. 메노파(Mennonite) 교회들과 비슷하지만 다른 집단이다. 그들은 스위스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재세례파(再洗禮派)’[16세기 종교개혁의 급진적 좌파 운동 집단으로서 유아세례를 부정, 죄와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성인세례를 받는 것만이 타당한 세례라고 보았음]와 근원을 공유한다. 단순한 생활, 검소한 복장, 문명과 기술의 이기(利器) 등을 기피하는 그들이었다. ‘목마른데 옹달샘 만난 격으로 여기서 그들이 운영하는 식당을 만나게 된 것. 앤틱 풍의 인테리어가 약간은 생소했으나, 벽면 가득 옛날 장식품들이 편안해 보였고 이들만의 풍미(風味) 또한 일품이었다.

 

다시 관광안내소로 돌아와 체구 좋은 중년 여성 자원봉사자의 친절한 설명을 들었다. 무스코기라 지칭하기도 하는 크릭 족은 오클라호마 주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현재 이곳 외에 앨라배마조지아플로리다 등에도 분포되어 있었다. 우리가 이미 만나 본 세미놀 족 역시 이들처럼 무스코기 어[크릭 어]를 사용하는, 가까운 부족이었다. 원래 무스코기 족은 오늘날 테네시조지아앨라배마 주에 걸쳐 흐르는 테네시 강을 따라 건축물을 쌓았던 미시시피 문명의 후예로 추측된다. 미시시피 문명을 이룬 사람들 가운데 최대의 공동체는 카호키아 토성터[Cahokia Mounds]’로부터 나왔으리라 추정되는데, 이미 그 시대에 계급화된 사회나 상속이 이루어지던 종교적정치적 집단이 생겨나 미국의 중서부와 동부를 800년부터 8세기 가까이 지배하고 있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무스코기 족이 바로 그 후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초기에 개척자로 등장한 스페인 사람들과 많은 갈등을 빚었고, 그 가운데 탐험대를 이끌고 나타난 스페인 사람 데소토와 마빌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데소토의 탐험대가 퍼뜨린 전염병으로 많은 인디언들이 죽어 인구가 급격히 감소되었고, 결국 미시시피 문명도 붕괴되기에 이르렀으나, 살아남은 인디언들 가운데 무스코기 어를 쓰는 사람들이 무스코기 부족 혹은 무스코기 부족 연합으로 다시 뭉치게 된 것이다.

 

1866년 새 정부를 세운 크릭 족은 오크멀기를 수도로 정했고, 1867년에 세운 의사당을 1878년엔 더 크게 확장했다. 우리가 돌아본 크릭 네이션 의사당은 국가의 역사적 랜드마크로서 크릭 족 의사당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크릭 족은 번영기였던 19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학교교회공공건물 등을 지었는데, 이 시기 이 종족은 자치조직을 갖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연방정부로부터는 최소한의 간섭만 받고 있는 상태였다.

1898커티스 법[Curtis Act]’에 의해 부족 정부가 해체되었고, ‘도스 할당법[Dawes Allotment Act]’에 의해 부족의 임대 토지는 사라지게 되었다. 도스 위원회는 부족원들을 혈통에 의한 크릭 족자유민으로서의 크릭 족으로 나누어 등록을 했다. 그런데 그들은 부족원들이 갖고 있는 크릭 혈통의 비율에 상관없이 아프리카 혈통만 인정되면 누구나 그 범주에 분류해 넣었던 것이다. 1906426, 미합중국 의회는 1907년에 오클라호마가 주의 자격을 인정받을 것으로 예상, ‘1906년 문명화된 다섯 부족 법안을 통과시키게 되었다. 이런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크릭 족은 8,100의 땅을 비원주민 정착자들과 정부에 빼앗기고, 그 후에야 ‘1936년 오클라호마 인디언 복지법아래 일부 무스코기 족 도시들은 연방의 승인을 받게 된 것이다. 크릭 네이션은 1970년까지 재조직되거나 연방의 인정을 다시 얻지 못하다가 1979년에야 1866년의 헌법을 대체하는 새 헌법을 만들어 비준하게 되었다. 1976년 하르호(Harjo)와 클레피(Kleppe) 간의 법정 소송사건으로 미합중국의 가부장주의는 종식되고, 민족자결권이 고양되었다. 크릭 네이션은 후손들의 구성원 자격을 결정하기 위한 기초로 도스 법의 명단을 이용, 58,000명이 넘는 할당자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등록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현재 크릭 족의 인구는 69,162, 주요 거주지는 미국의 오클라호마 주이며, 종교생활은 기독교[특히 침례교와 감리교], 종교적정치적전통주의적 조직인 네 엄마들의 결사(結社)[Four Mothers Society]’를 중심으로 영위되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특히 크릭, 체로키, 촉토, 치카샤 등 네 종족이 주로 그들의 땅을 비원주민 이주자들에게 할양하도록 한 도스 법이나 미 의회의 법안 활동 등에 반발하여 결성한 복합적 조직이 바로 이것이었다.

인포메이션 센터의 직원으로부터 무스코기와 오크멀기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얻은 다음 본격적인 탐사에 나섰다. 먼저 언덕 위의 ‘Five Civilized Tribes Museum’에 들렀는데, 1850526일에 세워진 무스코기 네이션의 옛 건물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들어가 보니 소장품은 별스럽지 않았다. 1층에는 다섯 부족의 휘장[seal]들과 사진 몇 장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조차 찍지 못하게 했다. 1층에서 올려다보니 2층에도 식탁이나 의자 등 생활사 자료들이 몇 가지 진열되어 있을 뿐이어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다른 네 부족들을 찾아 그들 문화와 역사유물들의 진수를 맛보고 온 우리였다. 그러한 유물들의 일부를 복제하여 모아 놓고 ‘Five Civilized Tribes Museum’의 간판을 붙인 뜻은 좋았으나, ‘통합문화를 보여주기엔 턱 없이 모자라는 컬렉션이었다.

 

약간의 실망감을 안고 무스코기 시내로 달려 들어갔으나, 이곳 역시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경기가 안 좋아서인지 기름기가 빠져 있었다. 간판마저 흐릿하게 퇴색되고 있는 옛 건물들만 경기가 좋았던 그 시절의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을 뿐 널찍한 시내 도로들에는 먼지만 날리고 있었다. 우리는 옛날의 역사(驛舍)를 재활용하여 만든 삼강박물관[Three Rivers Museum]’을 방문했다. 잘 나가던 시절 카우보이들이 텍사스나 오클라호마의 중남부로부터 몰고 온 소떼들을 열차에 싣고 동부로 나아가던 오클라호마 주의 출구가 바로 이곳이었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여성 자원봉사자 한 분이 오랜만에 만나는 외국 손님에 당황했는지 허둥거리며 친절을 베풀었다. 큰 역사를 박물관으로 개조한 만큼 세련되지는 않았으나, 오클라호마 주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현장감이 이곳에서도 물씬 풍겨났다. 잠시 후 그 여성이 전화로 호출한 정식 큐레이터가 달려왔고, 그녀로부터 박물관을 꽉 채운 각종 생활사 자료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설명이 다 끝나갈 무렵 크릭 인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보안관이 들어왔다. 홀을 꽉 채울 듯 거대한 몸집의 그는 꽤나 붙임성이 좋았다. 대대로 이 도시에서 살아온다는 그는 보안관이라는 자신의 직책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 했다. 무엇보다 한국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의 가계와 이 도시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바빴다. 급기야는 우리를 환영하려는 의도였는지 자신의 권총을 빼내 현란한 손놀림을 보여주기도 했다. 밖에 놓인 열차 유물까지 둘러 본 다음, 친절한 사람들로부터 간신히 빠져 나온 우리는 즉시 차를 몰아 1시간 거리의 오크멀기에 도착, 1박을 하게 되었다.

토요일인 다음날 오크멀기의 탐사에 나섰다. 공공기관이나 박물관 등은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 하는 수 없이 도심 주요부분들을 걸어 다니며 느껴보기로 했다. 윤기가 빠진 점은 다른 도시들과 같았으나, 규모가 제법 컸다. 오클라호마 주 오크멀기 카운티의 도시이자 남북전쟁 이래 크릭 네이션의 수도였던 곳이다. 그 명칭 ‘Okmulgee’는 영어로 끓는 물(boiling water)’를 뜻하는 크릭 단어 ‘oki mulgee’에서 나왔다는데, ‘졸졸 흐르는 시내[babbling brook]’ 혹은 증발악취[effluvium]’ 등으로도 번역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곳은 분명 노천온천 지역이었을 것이다. ‘악취 나는 끓는 물이라면 아마도 유황온천이었으리라. 인근의 체로키 네이션에서 발견한 그들의 환영사 ‘Osiyo[오시오]’를 내가 우리말 ‘(어서) 오시오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했듯이, ‘oki mulgee’ 아쿠 (뜨거운) !’로부터 나온 것이나 아닐까 상상해 보았으나, 근거를 대지 못하는 한 부질없는 생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 내내 크릭 네이션의 수도였던 만큼 시내 곳곳에 고풍스런 자취가 많이 남아 있었다. 33.2의 넓은 땅에 2010년 기준 12,321명의 인구가 분산되어 살고 있으므로 한산할 수밖에 없지만, 전체적으로 기름기는 빠져 있었다. 우리가 찾으려 한 오크멀기 다문화 역사 박물관[Okmulgee Multicultural Historical Museum]’을 길가에서 발견하고 차를 멈추었으나, 이미 문을 닫은 채 이전했다는 메모만 문 앞에 걸려 있었다. 주변에 물었으나,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고, 찾아간들 토요일에 문을 열었을 리 없어, 하릴없이 무스코기 네이션 본부가 위치한 곳을 찾았다이미 130여년이나 지난 시기의 건물들이 넓은 땅에 여유롭게 늘어서 있었다. ‘무스코기 네이션 크릭 의사당[Muscogee Nation Creek Council House]’, ‘크릭 의회[Creek Capitol]’, ‘크릭 네이션 수도 청사[Creek Nation Capital]’ 등 단순 소박한 건물들이 주변의 상가들과 행복한 어울림을 이루고 있었다. 1867년 조직된 크릭 네이션의 수반 코우치먼[Ward Coachman] 시대에 오크멀기는 수도로 지정되었고, 1870년에는 오크멀기 헌법도 제정되었다. 수도 청사 의사당 건물 뒤편의 잔디밭에는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인디언 관련 유물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가운데 눈물의 행진[Trail of Tears]’ 표지가 버티고 서 있었다. 미국이 인디언 특히 크릭 족에 대하여 자행한 횡포를 고발하는 내용임은 물론이다. 어느 인디언 네이션에 가도 ‘Trail of Tears’ 표지가 서 있는 곳은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이다. 인디언들에게 가한 미국의 원죄는 인디언이 살아 있는 한 업보가 되어 그들을 괴롭힐 것임을 이 표지판은 말해주고 있었다.

 

 


삼강박물관의 생활사 자료[MKT 라인, 즉 '미주리-캔자스-텍사스' 간 철도 노선에서 사용되던 각종 물건들] 

 

 


삼강박물관에 소장된 인디언 관련 그림[승천하는 전사의 영혼?]

 

 


삼강박물관에 소장된 인디언 관련 그림[크릭 족 전사?]

 

 


삼강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기관차

 

 


박물관에 전시된 기차의 기관실


 


지금은 박물관과 음악 홀로 쓰이는 당시의 화물열차 역

 

 

 
무스코기 초입의 환영 표지판

 

 


오크멀기에서 저녁을 먹은 집[값싼 등심이 맛있는 집]

 

 


한산한 오크멀기 시가지

 

 


크릭 네이션 의사당

 

 


크릭 네이션 의사당

 

 


'눈물의 여정' 설명판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

 

 

의사당을 떠난 우리는 널찍널찍한 주택가를 배회하다가 크고 멋진 교회들을 만났다. 그 가운데는 미국에서 보기 드문 천주교 성당도 있었다. 이름은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St. Anthony of Padua Catholic Church]’. 천주교 신자인 아내의 말대로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성당 뒤편 주차장에 차를 대는데, 작은 차 한 대가 또르르 달려왔고, 문이 열리면서 로만칼라 복장의 연세 지긋하신 신부 한 분이 의상을 손에 들고 급히 나와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곳에 들어오면서 미사가 있다고 공지되어 있는 것을 본 터라 우리도 부랴부랴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미사 예정 시각이 지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당 안은 텅 비어 있는데, 아까 들어온 신부가 촛불을 붙이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물으니 오늘 특별 미사가 있는데, 아직 수녀가 당도하지 않아서 당신이 직접 미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라 하자 반색을 하며 우리를 위해 포즈를 취해 주었다. 휑하니 넓은 성전에는 우리 둘 만 앉아 있었고, 신부 혼자 미사 준비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참 겸연쩍었다. 최소한 한 시간 가까이 걸릴 미사에 우리 둘만, 그것도 천주교 신자로는 아내 한 사람만 참여하는 셈이니, ‘참으로 기이하고 멋쩍은 경험아닌가.

 

우린 갈 길이 바쁘니 어여 나갑시다!’ 신부가 옷을 입으러 들어간 틈에 나는 아내의 옆구리를 찔렀다. 나의 표정이 완강해 보였던지 아내도 마지못해 따라나선다. 밖으로 나오며 생각하니 참으로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특별미사에 신도는 하나도 없고, 그나마 찾아온 한국인 관광객 두 명마저 종적이 묘연하게 사라지고 말았으니, 미사복을 입고 나온 신부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7~8년 전 유럽 자동차 여행에 나섰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상당수의 성당이나 교회들은 주일날에도 문이 닫혀 있었다. 주일 예배에 참여하고자 하이델베르그의 한 교회에 갔더니 교회 문은 열려 있었으나 목사 한 분이 앉아서 무료하게 책을 읽고 있을 뿐이었다. 서구사회에서 교회가 망하고 있음을 절감한 순간이었다. 그래서인가. 이 성당 정면엔 미국정신과 함께 가톨릭 정신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며[Keeping Catholicism Alive With American Spirit]’라고 쓰인 걸개가 늘어져 있었다. 그에 비해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교회에 모여 활동을 벌이는 젊은이들은 미국 사회에 뿌리내린 신교의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도시 외곽에 자리 잡은 OSU 무스코기 캠퍼스를 거쳐 무스코기 참전용사 비’, ‘무스코기 크릭 네이션 지방법원등을 일별한 다음 마지막 행선지 오클라호마시티를 향해 40번 하이웨이에 접어들면서 우리의 크릭 탐사는 끝이 났다.

 

***

 

크릭 족을 대면하기 위해 무스코기와 오크멀기를 찾았으나, 박물관의 유물이나 건축물로 남아 있는 삶의 흔적만 보았을 뿐, 그들의 종적은 없었다. 그렇다. 아직도 검붉은 얼굴에 검은 머릿결을 날리는 그들의 모습이 유지될 리는 없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도 아닐 것이다. 나와 다른 모습의 이웃들과 섞이고 사랑함으로써 나를 변모시키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었을 터. 그러나 신화 속에 살아 숨 쉬는 인디언들의 문화나 의식도 언젠간 새로운 시대 삶의 원리로 부활될 수 있으리라. 돌고 도는 것이 세상 이치라면, 지금 위세를 떨치는 서구문화의 끝판 어디쯤에서 그 옛날 인디언들이 영위하던 생활양식이나 정신이 그들의 이름을 잊어버린 채 새로운 삶의 원리로 사람들을 고양(高揚)시키게 되리라. 그 때를 기다리며 은인자중하며 살아가는 크릭 인들을 우리는 여기서 만난 것이다.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의 사제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 100주년[2008] 기념 표지

 

 


빠두아의 성 안토니 교회 내부

 

 


오크멀기 제일 장로교회

 

 


오크멀기 제일 장로교회 내부

 

 


오크멀기 연합 감리교회

 

 

 


무스코기 전몰용사 추모비[한국전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병사들 포함]

 

 


오클라호마시티의 '윌 라저스 공항' 인근에서 만난 석유채굴기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28. 13:18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2: 엘크 시티(Elk City)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National

Rt. 66 Museum Complex]’를 보고-

 

 

 

 

손 형,

 

2,400마일에 달하는 66번 길은 일리노이 주의 시카고에서 시작하여 캘리포니아의 산타모니카까지 8개 주[일리노이(Illinois)-미주리(Missouri)-캔자스(Kansas)-오클라호마(Oklahoma)-텍사스(Texas)-뉴멕시코(New Mexico)-애리조나(Arizona)-캘리포니아(California)]에 걸쳐 있고 시간대도 세 개나 들어 있으니, 이 도로의 길이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시겠지요? 이 길이 주변 사람들의 생활양식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문화를 꽃피우게 함으로써 미국의 간선도로[Main Street of America]’, ‘미국 도로의 어머니[Mother Road of America]’ 라는 별명들까지 얻게 되었지요.

 

 


66번 도로가 통과하는 8개 주

 

 

이 길은 숱한 질곡의 역사를 겪기도 한 것 같습니다. 길을 만들기 위해 전국 규모의 추진 기구를 만들어 각 주의 동의를 얻고, 길을 뚫고 포장을 하고, 각종 부대시설을 만드는 등 지난(至難)하고 복잡한 과정들을 거쳐 이 길은 태어난 것이지요. 그러나 산업과 교통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하이웨이가 뚫리고, 그것이 각 방면의 다른 길들과 연결되면서, 기존의 66번 도로는 버려지게 되었고, 그 도로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도시들과 주민들도 마찬가지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겠지요.

 


남 미주리주, 스프링필드 바로 남쪽 옛 철교와 길의
황폐화된 모습 


황폐화된 66번 도로 


66번 도로 가의 황폐화된 건물


66번 도로 가의 황폐화된 식당 간판

 

 

그러나 언제부턴가 버려진 채로 죽어가던 66번 도로의 가치가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었지요. 자연스럽게 그 길은 새로운 모습으로 회생하게 되었고, 주변의 도시들 역시 쇠락의 늪에서 빠져나와 다시 기지개를 켤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경험하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만, 그 과정들은 매우 극적이었겠지요?

 


국립 66번 도로박물관의 네온사인

 

 

66번 도로가 지나는 곳곳에 박물관이 세워져 있고, 여러 권의 책과 팜플렛,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이런 사연들이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그 사실을 이 자리에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어쨌든 애버리[Cyrus S. Avery]라는 사람이 AASHO[the American Association of State Highway Officials]의 회장이 되어 66번 도로를 완공했다 하여 그를 ‘66번 도로의 아버지[the Father of Route 66]’라 부르는 모양인데, 그가 오클라호마 주 털사 출신이라는 점은 66번 도로를 공유하는 다른 주들과 달리 오클라호마 주의 한 복판을 대각선으로 정확하게 관통하고 있는 사실과 흥미로운 연관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군요.

 


66번 도로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버리(Cyrus S. Avery)

 

 

사실 이 도로가 오클라호마 주와 일리노이 주만 중앙을 관통하고 있을 뿐, 나머지 주들의 경우 형식적으로 걸쳐 지났다는 것이 저 만의 느낌인지 모르겠네요. 미주리 주에서는 하단을 지났고, 캔자스 주에서는 살짝 건드리기만 하고 지났으며, 텍사스 주에서는 북부의 일부를 통과한 정도지요. 그나마 뉴멕시코와 애리조나가 북쪽으로 약간 치우치기는 했으나 관통한 경우로 볼 수 있고, 캘리포니아는 남쪽을 통과하여 산타모니카로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군요. 더구나 주도(州都)인 오클라호마시티를 통과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지요. 그는 어쩜 이 도로야말로 미래의 역사적 공간으로 영속될 수 있음을 깨달았고, 자신의 고향인 오클라호마 주에 긴 부분을 할당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네요.

 

 

 

 

 


여덟개의 주를 통과하는 66번 도로

 

 

오클라호마 주 안에 배당된 66번 도로의 길이도 시기마다 약간씩 달라지는데요. 1926년의 추정 거리는 415.4 마일이었는데, 1936년에는 383.7 마일, 1944년에는 381.7 마일, 1951년에는 368 마일로 점점 줄어들었어요.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길을 고치거나 포장을 새로 하면서 굽은 길을 펴기도 하고 지름길을 찾아내면서 그렇게 된 것이나 아닌가 합니다만. 어쨌든 총 연장 2,400 마일의 8개 주 산술평균이 300 마일인데, 400마일 가까이 차지했다는 것은 이 도로의 큰 몫을 오클라호마 주가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보여지네요.

 

 

이 도로가 지나는 오클라호마 주의 큰 도시들만 헤아려 보아도 열 개가 넘어요. 아래 텍사스 주 쪽부터 꼽는다면, 에릭(Erick)-세이어(Sayre)-엘크(Elk)-클린턴(Clinton)-웨더포드(Weatherford)-엘 르노(El Reno)-오클라호마시티(Oklahoma City)-아카디아(Arcadia)-챈들러(Chandler)-스트라우드(Stroud)-새펄파(Sapulpa)-털사(Tulsa)-클레어모어(Claremore)-빈타(Vinta)-마이애미(Miami) 등으로 연결되지요. 물론 이 도시들 사이사이에 촘촘히 박혀 있는 작은 도시들까지 포함하면 이 도로에 연결된 도시들은 무수하지요.

 

 


오클라호마 주 내의 66번 도로

 

 

 

글쎄요. 우리는 이들 가운데 몇 군데나 둘러보았을까요? 맨 처음 오클라호마시티와 아카디아를 들렀고, 그 다음이 털사와 유콘, 그리고 최근 엘크 시티와 클린턴을 들렀네요. 사실 오클라호마시티를 다녀오는 길이면 특별한 일이 없을 경우 66번 도로를 탔다가 177번을 만나 스틸워터로 방향을 틀곤 했으니, 66번 도로는 우리에게 꽤 낯이 익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몇 군데도 못 돌아 본 주제에 무슨 66번 도로를 말하려 하느냐?’고 책망하신다면,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만. 어디 한 솥의 국물을 다 마셔야 국 맛을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글을 쓸 용기를 내게 된 겁니다.

 

 


오클라호마주의 66번 도로 지도

 

 

저는 이미 아카디아의 라운드 반[Arcadia Round Barn], 털사(Tulsa)의 길크리스 박물관(Gilcrease Museum), 유콘(Yukon City)의 유콘 역사박물관[Yukon Historical Museum] 등을 둘러보고 그 공간들이 갖는 의미나 느낌들을 적어 이곳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앞쪽에 올린 미국통신 10, 12, 27을 참조해 주세요].

 


66번 도로 가에 있는 아카디아(Arcadia)의 라운드 반(Round Barn)

 

 

엊그제 우리는 텍사스의 달라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66번 도로를 통과하게 되었지요. 달라스로부터 포트워쓰(FortWorth)를 경유하여 오클라호마 주 66번 도로 상의 엘크 시티에서 1박을 하고, 그로부터 멀지 않은 클린턴 시티를 둘러본 다음 이곳 스틸워터로 귀환했지요. 그래서 이곳에 엘크와 클린턴의 뮤지엄 방문기를 중심으로 66번 길에 관한 인상을 남기려 하는 겁니다.

 

달라스 가는 길도 엄청나게 멀었지만, 달라스를 탈출하여 엘크로 돌아오는 길도 그에 못지않더군요. 달라스를 빠져나오는 데만도 스무 번 가까이 길을 바꿔 탔으며, 완전히 빠져 나온 후에도 십여 개나 다른 길을 거쳤으니, 미국의 길들이 넓고 곧으며 길게 뻗어 있긴 하지만 길을 한 번 잘못 들면 한참 고생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요. 어쨌든 달라스의 숙소로부터 계산하여 5시간 가까이 걸려 엘크시에 들어왔습니다.

 

고층빌딩들 중심의 다운타운을 갖고 있는 대도시를 제외한 미국의 어느 도시나 그렇습니다만. 이곳도 평탄한 들판에 넓은 중앙로와 주변도로들을 중심으로 양 옆에 띄엄띄엄 집들이 들어서서 시가를 형성하고 있더군요. 다만 나름대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어서 거리에 따라 약간씩 고풍이 느껴지는 곳들도 있고 새롭게 형성된 신시가지나 상업지구들이 있어서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모습을 갖고 있는 점은 아주 좋았어요.

 


엘크 시에 들어오며

 

 

엘크 시티가 언제 출발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은 것 같아요. 1541년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코로나도(Francisco Vásquez de Coronado)가 이 지역을 통과한 첫 유럽인이긴 했으나, 실제로 엘크 시티의 역사는 오클라호마 서부 지역에 셰이옌-아라파호족 (Cheyenne-Arapaho)의 보호구역이 문을 연 1892419일을 출발로 보아야 한다는 설이 유력하다는 군요. 이 때는 첫 백인 정착자들이 모습을 드러낸 때이기도 하지요. 따라서 이 도시 역시 아메리칸 인디언과 인연이 깊은 곳임은 말할 것도 없어요.

차를 몰고 시내에 진입하자 낮은 건물들이 듬성듬성 깔린 시가지가 눈에 들어왔고, 보자마자 걷고 싶은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러나 갈 길이 바빠 먼저 박물관을 찾기로 한 우리는 잠시 달려 신시가지 끝부분에 넓게 조성된 박물관을 만났지요. 그곳엔 여러 종류의 박물관들이 하나의 부지 안에 세워져 큰 단지를 형성하고 있었지요. 이 도시의 작은 규모에 비하여 꽤 큰 박물관 단지라고나 할까요? 여기서는 이 단지 이름을 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National Route 66 Museum Complex]’라고 부릅디다. 이 안에 옛 동네 박물관[Old Town Museum]’,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National Route 66 & Transportation Museum]’,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Farm & Ranch Museum]’, ‘대장간 박물관[Blacksmith Museum]’ 등이 들어 있었어요.

 


엘크시 '옛 동네 박물관'의 건물과 입간판

 

 

우선 옛 동네 박물관[Old Town Museum]’에 들어갔지요.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할머니 큐레이터가 우리를 안내하여 가정생활의 모습을 복원해 놓은 코너와 각종 생활사 자료들을 둘러 보았지요. 초기 오클라호마 주 개척자들의 생활상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어요. 1층에는 초기 개척자의 삶, 성조기들, 아메리칸 인디언 갤러리, 1981년 미스 아메리카로 선발된 수잔(Susan Powell)의 사진과 의상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2층에는 초기 카우보이와 로데오에 관한 모든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사실 2층에 전시된 많은 것들은 유명한 로데오 증권 도입자인 뷰틀러(Beutler) 형제들이 기증한 것들이라네요. 참 대단합디다.

 


 '옛 동네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가정의 모습(거실 및 식당)


 '옛 동네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가정의 모습(아이들 방)


옛날 생활용품들


당시 피아노


엘크시티의 역사를 보여주는 휘장


생활사 자료실


1981년 미스 아메리카로 선발된 엘크시티 춣신의 수잔(Susan Powell)


로데오로 유명한 뷰틀러(Beutler) 형제들


로데오 회사 지분 일부를 뷰틀러의 아들에게 결혼선물로
양도한다는 증서


로데오 관련 포스터와 의상 및 소품들


당시 카우보이 관련 자료들


당시 카우보이 관련 자료 및 랜드런을 소재로 한 그림


로데오 경기 포스터


로데오 경기 포스터


로데오 경기 포스터


당시 카우보이를 묘사한 그림

 

그 다음으로 들른 곳이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이었어요. 그곳에 들어서자 길 가는 이들을 유혹하기 위해 길 주변에 흔히 있던 것들이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되어 있습디다. 옛날 풍의 차들, 주막, 레스토랑, 자동차 번호판 등과 미국 하이웨이의 서사적인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문건들로 전시장 안이 가득 차 있었어요. 특히 1955년도에 만들어진 핑크색 캐딜락, 자동차 영화관에서 고전적인 쉐보레의 임팔라(Impala)를 타고 앉아 감상하던 흑백영화 등이 압권이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전시된 각종 자동차들은 애들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눈길을 잡아 두는 효과를 발휘하는 듯 했어요.

 


매점 등이 들어 있는 건물


66번 도로 표지판들


66번 도로 표지판 도안들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소장된 당시 차량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소장된 자동차와 도로 상황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인디언 가게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의 트럭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생활사 자료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차량 번호판들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1940년 셰보레에서 출시한
당시 최고급 자동차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화물적재 트럭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주유소와 군용 지프

 

 

거기서 나와 길을 건너니 붉은 색의 창고 형 건물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데요. 오른쪽이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Farm & Ranch Museum]’, 왼쪽이 대장간 박물관[Blacksmith Museum]’ 이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만 보기로 했지요. 박물관에 들어서자 그곳을 지키시는 노인이 우리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대뜸 물으시는 거예요. 한국에서 왔다니까 자신이 21살 때(1954) 부산에 미군으로 주둔해 있었다고 하시네요. 그 후 원주, 강릉 등으로 주둔지가 바뀌었던 모양인데, 고령으로 말씀은 어눌하셔도 우리나라에 대한 기억들을 분명히 갖고 계셔서 아주 반가웠어요. 그런데 이 박물관에는 서부 오클라호마주 초기 농업과 축산업자들의 생활에 쓰인 도구들이 광범하게 수집, 전시되어 있었어요. 대장간의 실제 모습, 각종 풍차 콜렉션, 트랙터의 각종 시트, 각종 수수 탈곡기, 가시철망 콜렉션 등이 이채로웠어요.

 


왼쪽은 '대장간 박물관', 오른쪽은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에서 만난 80대의 노인 관리자[21세 되던 1954년
한국에 파병되어 부산, 강릉, 원주 등지에서 근무했다 함)


박물관에 전시된 풍차


트랙터


농기구 전시장


밭을 갈던 트랙터의 일종


당시 주유기


당시 전화기들과 전화선 수리공의 모습


각종 농기구들의 전시장


당시의 각종 공구


당시의 각종 공구

 

 

농업과 축산 박물관 밖에는 미처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풍차들이 늘어서 있었어요. 농업에 바람을 이용한 이들의 지혜를 보여주는 증거물들이었지요. 지금도 이런 모습의 풍차들은 들녘에 많이들 서 있었어요. 말하자면 삶의 역사가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모습이었지요. 농업과 축산 박물관을 나와 길을 건너자 철로와 역사(驛舍)가 재현되어 있고, 당시 사용되던 엄청난 증기기관도 생생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어요.

 


농업과 축산 박물관 밖에 전시된 각종 풍차들


엘크역에 근무하던 역장의 모습


당시 열차의 증기기관


재현해 놓은 당시의 오페라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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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 주를 기점으로 할 경우 66번 도로상에서 엘크는 에릭(Erick), 세이어(Sayre) 등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나게 되는 거점도시인 셈인데, 우리가 둘러본 박물관 역시 규모나 내용상 그에 걸맞은 것들이었어요. 우리는 특히 박물관들을 둘러보면서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함께 느꼈지요. 이곳에 전시된 물건들은 대부분 1980년대 말에서 1920~1930년대의 것들이었는데, 특히 자동차와 농업기계들에서 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그 시기 우리는 어땠나요? 사실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 우리의 농촌에서는 꼬박꼬박 지게로 짐을 져 나르고, 괭이와 쟁기로 논밭을 갈아 왔거든요. 그 경험을 저도 아프게 한 사람입니다. 어렸을 적 어머니와 함께 목화밭에 나가 한 송이 두 송이 여린 손으로 목화를 따 앞자락에 담던 기억들이 왜 그렇게 가슴을 저리게 하는지요? 그런데 이들은 당시에 모든 일들을 기계로 해내고 있었어요. 목화 따는 일은 물론 목화로부터 솜을 뽑아내는 일까지 일관작업으로 해내는 기계를 이 박물관에서 목격하고 말았답니다. 하기야 끝이 보이지 않는 농토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기계가 필수적이었겠지만, 우리와 너무도 대비되는 이들의 풍요로움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마냥 편치만은 않더군요. 요즘 아이들 말대로 이들과는 잽도 안 되는우리가 이제 기술이나 무역의 면에서 이들과 경쟁을 벌이는 위치로까지 올라섰으니, 장하지 않아요? 가끔은 우리 스스로 자랑도 하고 살아봅시다. 어쨌든 다음 날 클린턴(Clinton)을 거쳐야 하는 우리는 조용히 깊어가는 엘크의 밤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었지요.<나머지는 다음번에 계속됩니다>

 


목화를 수확하는 기계


당시의 우물


농기구 전시장에서 


오클라호마 지역의 가축 우리 모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22. 12:58

 

 

미국에서 풀브라이터(Fulbrighter)’로 지내기

 

 

 

#1 세관 검사나 입국심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시카고 오헤어 공항[O'Hare International Airport]. DS-2019 서류와 비자를 내밀자 그 여성 심사관은 , 풀브라이트, G-1, 팬태스틱!’하며 서류를 대충 훑어 보고 기본적인 사항만 확인한 뒤 선선히 통과시켰다.

 

#2 스틸워터(Stillwater)에 도착하여, OSU의 역사학과 사무실을 찾은 때는 섭씨 40도가 넘는 한여름 대낮이었다. 학과 비서 수잔(Susan Oliver)이 연구실로 나를 안내했다. 연구실 문 옆에 ‘Dr. Cho, Kyu-Ick/Visiting Fulbright Scholar’라고 선명하게 쓰인 명패와 깨끗하게 청소된 연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며칠 뒤에는 풀브라이트 방문학자라고 명시한 학과의 명함도 찍어 주었다. 정중하게 환영받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풀브라이트의 수혜자로서 이 학과를 연구기관으로 선택한 것은 내가 처음이란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지금껏 나는 그들이 내게 베풀어주는 호의에 감사하고 있었는데풀브라이터가 그들을 선택한 것이 어쩌면 그들에게도 영예일 수 있다는 점을 비로소 느껴 알게 되었다.

 


연구실 명패


한국에서 연구기관 신청의 메일을 보내자 마자 환영의 답신을 보내 준 대닐로위츠 학장

 

#3 미국에 도착하고 나서 셋업이 진행되는 과정에 소셜 시큐리티 넘버[Social Security Number]가 필요했다. 한국에서 주민등록이 되어 있어야 보험계약이나 은행계좌 개설을 할 수 있듯이, 이곳에선 그게 필요했다. 15년 전 LA에서의 기억으로 미루어 보면, ‘소셜 시큐리티 사무소는 불친절하고 고압적인 곳이었다. 당시 내 앞의 어떤 사람은 사무원의 질문에 대답을 잘못하여 퇴짜를 맞는 경우도 보았다. 그런 기억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았으나,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를 맞이한 나이 든 여성 사무원은 참으로 고상하고 친절했다. 시스템을 검색하더니 아내의 번호는 남아 있으나, 내 기록은 아예 없다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풀브라이트로부터 받은 편의 요청공문과 미 국무성이 보증한 비자[U.S. Department of State (Fulbright Scholars Bearer Is Subject To Section 212(E)]를 보여주자, 놀란 표정으로 여기서 풀브라이트 학자를 만나게 되어 영광이라고 말하며 간단한 인적 사항만 확인한 후 일을 처리해 주었다.

 


친절한 직원을 만난 스틸워터의 소셜 시큐리티 사무소

 

#4 거쓰리 시티(Guthrie City)답사하다가 박식하고 교양이 풍부한 찻집 주인을 만났다. 이야기가 무르익어 가는 도중 서로의 연락 정보가 필요하여 학교 명함을 건넸다. 명함을 펼쳐 보더니 풀브라이트 학자시군요!’하며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대화를 끝내고 나가며 커피 값을 계산하려 하자 극구 사양했다. 우리는 팁이라 우기며 간신히 5불을 놓고 나왔다.

 


Guthrie City의 찻집에서 만난 지성적인 주인 셰릴(Cheryl)

 

#5 털사(Tulsa)에서 열린 ‘2013년 풀브라이트 방문 학자 발전 세미나[2013 Fulbright Visiting Scholar Enrichment Seminar]’가 끝나던 날, 주최 측에서 스틸워터까지 나를 태워 줄 자원봉사자를 주선해 주었다. 그는 OSU 털사 캠퍼스 행정부서의 고위직 인사였고, 털사에 살고 있었다. 나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미국인으로부터 라이드 서비스를 받기가 부담스러웠지만, 그는 자기의 즐거움이라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한 시간이 훨씬 넘는 거리를 운전해 왔다가 다시 돌아가셔야 하니 내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자, 그는 풀브라이트 학자에게 이런 봉사를 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부연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편했고, 그 역시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털사에서 나를 태우고 스틸워터까지 왔다가 돌아간 Dr. Ron Bussert

 

#6 텍사스 주의 달라스(Dallas)시에 갔을 때였다. 끝없이 펼쳐진 광야를 달려 겨우 도착한 달라스는 오클라호마와 달랐다. 미국에서 다른 주로 넘어가는 것을 우리나라에서 다른 도로 넘어가는 것쯤으로 착각한 우리였다. 오클라호마 주만 해도 면적이 우리나라의 두 배였다. 그러니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것과 오클라호마 주에서 텍사스 주로 넘어가는 것이 같을 리 없었다. 가보니 시내의 교통체계도 오클라호마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의 것이었다. 간신히 주차해놓은 다음, 아무래도 불안하여 막 떠나려는 어떤 중년 부부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들은 차에서 내려 주차방법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자기네 차도 한국 차라며, 얼마 전 부산에 다녀왔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의 차종은 기아 소울이었다. 하도 반가워 함께 사진을 찍었다. 찍고 나서 그의 이름과 주소 혹은 이메일을 물어보기 위해 내 명함을 건넸더니, 보고는 풀브라이트 학자라며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날 밤 그[Mr. Carl Smith]에게 사진을 보냈고, 그는 내게 정중한 답신을 보냈다. 그 답신 메일 가운데 우리는 당신을 만나게 되어 기뻤고, 더더욱 풀브라이트 학자를 만나서 감격했습니다![We were delighted to meet you and thrilled to have met a Fulbright scholar!]”라는 문장이 있었다. ‘thrilled’란 말 속에는 전율을 느끼다, 기쁘다, 감격하다등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그가 어떤 기분으로 이 말을 썼는지 분명치는 않으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매우 긍정적인 뜻으로 쓴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달라스의 한 주차장에서 만난 칼[Mr. Carl Smith] 선생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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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아칸사(Arkansas) 주의 새내기 상원의원이던 풀브라이트(J. William Fulbright)가 입안하고 다음 해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이 사인함으로써 법안으로 성립된 것이 바로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쟁의 잉여 자산들에 주목한 풀브라이트 의원은 그것들을 팔아 교육, 문화, 과학 분야 학생이나 학자들의 교류를 통해 국제 친선을 증진시키는 자금으로 활용하자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고, 1년 뒤 트루먼 대통령이 여기에 사인하여 확정을 본 것이 바로 이 법이다.

 

풀브라이트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인정받고 있는 국제 교류 프로그램으로 성장할 수 있었지만, 사실 미국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매년 미국 의회의 세출 승인을 받아 미 정부가 예산을 출연하고, 미국 이외의 국가들도 이에 상응하는 돈을 부담함으로써 문화 및 교육 교류를 위한 국제적인 협력 프로그램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한국 내 Fulbright Commission한미교육위원단의 경우 한국과 미국 정부의 예산 출연으로 운영되며, 이 기구가 장학생 선발 및 프로그램 운영에 관한 모든 정책을 결정한다. 여기서 선발된 한국인 수혜자들은 미국에서 강의나 연구, 대학원 학위과정 이수, 중등교사 영어 연수 등에 참여하며, 미국인 수혜자들은 한국에서 강의 혹은 연구를 하거나, 중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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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느낌으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한국인들과 달리 미국인들은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을 학생이나 연구자가 누리는 최고의 영예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색도 모른 채 연구비 주는 것만 고마워하다가 미국에 와서야 풀브라이트에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내게 주어진 영예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면서 지내야겠다고 새삼 결심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남들의 인식을 통해 풀브라이트의 진면을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으니, 그동안은 풀브라이트 수혜라는 영예가 내겐 일종의 개 발의 편자였던 셈이다. 아는 자만이 혜택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곰곰 생각하게 되는 요즈음이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