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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9.02 안철수가 아깝다!
  2. 2010.04.02 한국대학들의 '냄비근성'
글 - 칼럼/단상2011. 9. 2. 20:15

안철수가 아깝다!

 
                                                                조규익(숭실대 교수)

사람은 누구나 숨겨놓은 카드를 갖고 살아간다. 한 집안도 그렇고 사회나 국가도 그러하다. 집안이 망할 경우 털어서 가족들 목숨을 부지할만한 언턱거리 하나쯤은 갖고 있기 마련이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것이 보험이 되었든, 통장이 되었든, 조그만 땅뙈기가 되었든 최후의 순간까지 아껴가며 그걸 보호하려 안간힘을 써야 한다. 그걸 쓰지 않고 버티는 일은 고통이다. 그러나 그게 있다고 믿는 한 고통은 참을만하다.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인간은 절망하기 마련이다. 절망하는 자에게 내일은 없다.

***

며칠 사이에 서울시장이 물러났고, 교육감도 위태위태하다. 그러니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들을 탐낸다. 이념적 패거리에 따라 이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둥 저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둥, 속된 말로 ‘통밥 굴리기’에 여념들이 없다. 어제 오늘 사이에 안철수 교수가 거론되고 있고, 그 역시 흔들리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들로 어수선하다. 어중이 떠중이 가리지 않고 부나비처럼 정치에 뛰어들고 있는 지금, 안철수라고 언제까지나 ‘오불관언(吾不關焉)’할 수는 없을 게다.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여 지금은 때도 아닐뿐더러, 나설 자리도 아니다. 가난한 집 가족들이 최후의 순간에 자신들이 요긴하게 쓰려고 숨겨놓은 ‘보물’로 자리매김 되어 있는 존재임을 안 교수 스스로는 깨달아야 한다. 그것을 꺼내놓는 순간 공동체 구성원들은 더 이상 마음 붙일 희망의 끈을 잃어버리게 된다. 국민들의 상실감과 허무감을 안 교수는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가. 아직은 그 동네의 꾼들 가운데 쓸 만한 존재를 골라 일을 맡겨도 되는 단계다.

***

<<장자(莊子)>>에 이런 비유가 나온다. 어떤 임금이 장자를 초빙하여 나랏일을 맡기고자 했다. 장자는 임금이 보낸 사자(使者)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여, 제사 때에 희생[제물]으로 쓰이는 저 소를 보게나. 아름답게 수를 놓은 비단옷을 입고, 늘 맛있는 콩과 여물을 먹으며 소중하게 다루어지네. 그러나, 조상의 사당 앞에 끌려가 희생으로 쓰일 때가 되어서는, 그저 평범한 여느 송아지처럼 되고 싶어도 그렇게 될 수가 없다네.” 


그렇다. 지금 도덕과 정의에 둔감해진 이 땅의 정치꾼들은 자신들을 대신하여 희생 제단에 피를 뿌려줄 제물을 찾고 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불구덩이에 안철수같은 ‘깨끗한 영혼’을 집어넣고 ‘번제(燔祭)’를 드림으로써 자신들의 더러움을 일거에 씻어버리려는 앙큼한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안철수의 깨끗한 이미지를 자신들의 헌옷 위에 걸치고 백성들의 눈을 호려보고자 하는 검은 속내를 갖고 있다. 보라, 시장이나 교육감의 경우 그에 걸맞은 재목들이 있다! 소 잡는 칼로 닭의 목을 치려다가는 자칫 자신의 발을 다칠 수 있다. 그러니 닭을 잡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칼을 벼려야 할 것이다.

***

안 교수는 지금 자신을 향한 국민들의 눈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국민들은 ‘아껴야 할 인재’들을 아끼고 싶어 한다. 지금 도살장으로 보내기에 안 교수는 너무 아까운 존재다. 그를 도살장으로 보낸 뒤 우리 모두 겪어야 할 상실감과 허무를 생각해 보았는가. 최후까지 아낄 건 아껴야 한다. 인재란 매일 나타나는 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안 교수는 부디 자중하셔야 한다.

 

2011. 9. 2.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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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0. 4. 2. 11:27

한국 대학들의 ‘냄비근성’

 

 

최근 교육부는 업적평가에서 논문의 수보다 질을 중시하고 융복합 연구에 가산점을 주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얼마 전에는 ‘강의 잘 하는 대학들’에 많은 돈을 지원하겠다는 정책도 내놓았다. 그에 따라 대학들은 학생들의 교수평가 점수를 공개한다거나 좋은 점수를 받은 교수들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하기도 한다. 이제 대학도 ‘논문보다는 강의’를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는 느낌을 줄 정도다. ‘강의 잘 하기 경쟁’을 통해 교수들에게 돈을 지급하겠다는 것인데, 얼핏 그럴 듯해 보이지만 곰곰 따지고 보면 대학에 대한 곱지 않은 편견이 그 속에는 들어있다.

  인센티브를 주건 안 주건 대학의 목표는 ‘잘 가르치는 일’이었고, 그 점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더구나 대학 존립근거의 두 축은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어느 한 쪽을 헐어서 다른 한 쪽을 보충할 수 있는 행위들도 결코 아니다. ‘교수의 연구업적과 강의평가점수가 반비례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도 아닌데, 연구에 들이는 품을 강의준비에 돌리는 게 좋다는 암시를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열심히 하는 연구가 좋은 강의로 연결된다’는 사고에 익숙한 교수들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다.

  최근 대학사회를 둘러싼 움직임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학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가고 있다. 대학의 개혁이 교수개혁이며, 교수개혁을 위해서는 교수들을 엄정한 잣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은 지당한 논리다. 그런데 한국의 대학들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기결정권’을 가져본 적이 없는 점은 비극이다. 정치적 자유가 크게 신장되었다고 하는 참여정부를 거쳐 현 정부에 접어들었어도 대학들은 타율과 통제의 터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도한 교육열 등 사회적 현실을 이유로 대학들을 타율의 터널에 가두어두고자 하면서도 대학정신의 발현을 요구하는 것이 우리 사회다. 학문의 균형 발전을 고창(高唱)하다가 새삼 ‘경쟁’을 들고 나선 일, 논문쓰기 경쟁을 시키다가 교육부가 돈을 제시하자 ‘논문보다는 강의’라는 팻말을 들고 나선 일, 논문의 수를 중시하다가 제대로 계량할 잣대의 마련도 없이 질을 중시하겠다고 나선 일 등은 외부적 여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우리 대학사회의 ‘냄비근성’일 뿐이다.

  독일의 철학자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가 대학의 원리로 제시한 ‘자유와 고독’을 우리도 한때는 신봉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대학을 ‘실용적인 목적을 초월한 자기 도야의 공간’이라거나 ‘자유로운 학문연구와 교육이 이루어지는 이상 공간’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이제 대학 안에도 없다. 시장주의나 효율성이 만능의 잣대로 활용되는 현실이 신자유주의라는 탈을 쓰고 대학의 공간을 장악하게 된 오늘날이다.

  그러나 시장이란 늘 바뀌는 곳이다. 같은 물건이라도 어제의 값과 오늘의 값이 다르고, 사람들의 이목은 보다 높은 값의 물건에 쏠릴 수밖에 없다. 사실 경조부박(輕佻浮薄)한 세상의 논리일 뿐, 더 이상 사람들이 믿고 따를 만한 이정표가 될 수 없는 것이 시장의 논리다. 이에 비해 인간의 삶터는 잠시 흔들림이 있다 해도 변함없이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는 공간이다. 세상의 일부인 시장의 원리를 흡사 삶의 원리인 듯 내세운다면, 사람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공동체는 표류하게 된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대학의 줏대만큼은 바꾸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조규익(숭실대 교수/인문대 학장)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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