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1. 21. 15:27

<추천의 말>

 

존재의 자각, 그리고 간절한 신앙고백

 

 

조규익 

 

조물주는 인간에게 영혼과 육신을 허락했으나, 영혼에 비해 육신은 덧없고 허망하다. 대부분의 인간은 영적으로 성숙되기 이전에 육신을 잃고 만다. 인간의 삶을 이끄는 주체는 영혼이고, 그 영혼의 완성이나 구제는 신의 영역이다. 육신은 욕망의 근원이므로 육신에 집착하는 자에게 육신은 굴레(bondage)’일 뿐이라는 것이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이다. 과연 인간은 육신의 욕망을 탈각하고 정결한 영혼의 세계에서 노닐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신의 손길을 갈망한다. 신의 손길만이 절망의 나락에 빠진 인간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머지않아 닥쳐 올 심판의 시간을 외면한 채 육신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방황하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보라.

 

 

지금 이 순간, 시인 백승철의 신앙고백이 눈물겹도록 귀하다. 그는 몸을 불사르며 영혼의 완성을 간구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삶은 구도자의 그것이고, 그의 시는 편편이 신앙고백이다. 종교 역사 상 가장 뛰어난 신앙고백 <사도신경>의 핵심을 그의 시에서 발견한다. 전능하신 조물주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빌라도의 박해 속에서 육신의 감옥을 벗어나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조만간 도래할 심판과 영생에 대한 믿음 등등. 그래서 그는 필사적이면서도 의연하다. ‘박해의 쓴 잔을 물리치지 않고 부활의 기적을 보이신 예수님만 바라보기 때문인가. 그 역시 육신을 짓부순 고통에 좌절하지 않고 영혼의 완성에 매진한다. 육신보다 영혼의 불멸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영혼의 구원에 대한 믿음이 그로 하여금 육신의 굴레를 간단히 뛰어 넘을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내뱉는 그의 말들 모두가 절절한 신앙고백인 것도 그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도신경>, 아니 성서 자체의 패러프레이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삶을 우러르며, 스스로의 삶 갈피갈피 묻어나는 고통과 회한을 순화시켜 가는 구도자의 고백이다. 그것이 바로 백 시인의 시편들이다. 다음과 같은 그의 시는 얼마나 처절한가.

 

 

그래

아무리 밉다 곱다 해도

된서리에 쪼그라들어

비굴해진다 해도

뿌리 하나만큼은

꿋꿋이 뻗치고 있으니

또 어찌어찌

견디게 되겠지

오롯이 살아지겠지

혹독한 겨울을 딛고

한 치라도 더 파고들어

이 세상

한 줌 흙이라도 되겠지

 

-<겨울나기> 전문-

 

 

우리는 흔히 겨울나기월동(越冬)’이라 말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두 말의 내포가 사뭇 다르다. 어쩌면 우리가 심상하게 일컫는 월동이란 겨울을 뛰어넘은 그곳에 당연히 기다리고 있을 봄을 상정하거나 기대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백 시인의 겨울나기는 절망의 심연 그 자체다.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면서도 어떻게 견디게 되겠지라는 실오리만한 희망을 가져보기로 한 것이다. 매서운 추위에 줄기와 가지는 얼어 죽어도, 뿌리는 남아 있기에 나무는 새로운 부활을 꿈꿀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결국 이 세상 한 줌 흙이라도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 희망은 믿음이다. 절망의 심연에 빠져 본 사람 만이 희망의 소중함을 알 수 있다. 백 시인은 지금 빠져 나오지 못할 줄 알았던 지난 시간대의 모진 겨울을 회감(回感)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백 시인의 그 희망이 도타운 신앙의 심지가 되어 커다란 횃불로 타오르고 있는 모습을 이 시는 내포하고 있다.

 

 

학창 시절의 백 시인은 과묵했다. 말을 걸어도, 빙긋 웃을 뿐 끝내 말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그의 말은 시가 되어 나왔다. 누에고치에서 비단실 풀려나오듯 그의 시들은 늘 빛나고 단정했다. 교단생활을 거치며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시의 폭은 넓어졌고, 신을 발견하면서 신앙고백으로 상승했다. 자아성찰을 바탕으로 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안(詩眼)이 견고하다. 흡사 <사도신경>을 자신의 말로 풀어내려는 듯 그의 필치는 거침이 없다. 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고, 결국 신을 의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고, 고통 속에서만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에게서 확인한다. 고민과 고통 속에 허우적대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백 시인의 시를 읽으며 막힌 가슴을 뚫어볼 일이다. <2015. 12. 30.>

 

 


백승철 시집 표지

 

 


약력

 

 


아름다운 삶이고 싶다

 

 


식장에서 백 시인

 

 


발표와 낭송을 하고 있는 백 시인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1. 12. 16:42

내 등짝을 내려친 출판사 사장의 죽비

 

 

 

 

오늘 두 사람의 출판사 관계자가 내 연구실에 찾아왔다. 언제나 출판사 사람들이 방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내 가슴은 출렁 내려앉곤 한다. 당장 필요도 없는 책을 사야 하거나 그들의 푸념을 들어야 하고, 내 가슴에 그득 들어 있는 탄식을 쏟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은 오늘도 마찬가지였지만, 또 다른 의미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최근에 나는 나 자신이 알 수 없는 우울증에 빠져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작년 전반기에 두 권의 책을 냈고, 미국 체류를 끝내고 돌아온 올해 들어 두 권의 책을 냈으며, 비록 공저와 공편일망정 연말까지 두 권의 책이 더 나올 예정이니, 그런대로 쏠쏠한(?) 수확이라 할 만한데, 왜 이리 마음이 무거운 걸까? 내가 책을 내면서도 우울해지는 것은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 이 시절의 우울한 현실’ 속에서 ‘또 하나의 민폐를 끼치고 말았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작년에 책을 낸 그 출판사에 전화 한 통화 걸어볼 엄두를 못낸 것도 보나마나 내 책들이 ‘재고’의 딱지를 붙인 채 창고 한 켠에 그득 쌓여 있으리란 확신 때문이었다.

 

 

 

 

책 내는 일이 수월하지 않던 지난 시절. 책을 내고자 하던 젊은 나이의 누구나 그랬으리라. 자신이 갖고 있는 원고로 책을 만드는 출판사는 ‘대박’을 치게 될 거라는 착각과 환상이 바로 그것이다. 이른바 그 옛날 ‘낙양(洛陽)의 지가(紙價)를 올린 일’이 자신으로 인해 이 시대에 재현되리라는 행복한 착각 속에 며칠을 보내게 된다는 것. 중국 진나라의 좌사(左思)가 10년을 고심참담하며 완성한 명문 <삼도부(三都賦)>를 낙양 사람들이 다투어 베끼자 종이 값이 오르게 된 그 사건이 자신에겐들 일어나지 말란 법이 있겠느냐는 ‘병아리 셈’으로 숱한 밤을 곱게 지새우는 책상물림들이 좀 많았으랴.

 

그러나 시절은 무섭게 변했다. 코흘리개부터 백두옹(白頭翁)에 이르기까지 ‘자라목 증후군’이 세대를 초월한 병증으로 자리 잡을 만큼 스마트폰 중독시대에 이르자 책은 한갓 귀찮은 쓰레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세상의 시름을 말끔히 풀어주는 온갖 소문과 기문(奇文/奇聞)들이 사각형의 오묘한 기계 속에 그득한데, 신국판ㆍ국배판의 무겁디 무거운 종이책들을 지고 다니는 오기를 부릴 만큼 미련하지 않다고 스스로 착각들을 하고 있는 것이 요즘의 우리들이다. 오늘 아침에도 쓰레기를 버리러 쓰레기장에 나갔다가 쓰레기로 버려진 수십 권의 멀쩡한 책들을 만났다! 8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진입한 국민소득 1만불의 산업화 단계에서 이른바 3S(SEX. SPORTS, SCREEN)의 우민화 정책이 빛을 발하여 책은 우리의 삶에서 자꾸만 멀어져 갔고, ‘정보화-고도정보화’ 시대의 격랑을 지나면서 ‘도(독)서 소외’는 우리 사회 문화적 퇴행의 한 현상으로 고착된 것이다.

 

출판사 사장은 울상이었다. 제작비를 맞추기 위해 300부만 찍는데, 그 반도 안 나간다는 것이다. 심지어 교재도 안 나간다고 했다. 학생들 몇이서 교재 한 권만 돈 주고 산 다음 PDF 파일로 만들어 공유하고 그 때 그 때 필요한 부분만 각자 출력하여 강의시간에 갖고 온다는데, 그런 세대에게 교재를 사라고 권할만한 강심장은 더 이상 없다. 출판사 사장은 내 체면을 보고 책을 내준 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는 대학에 있으니 적어도 기본 부수는 팔리지 않을까 하여 책을 내 준 것 같은데, 내 책에 대한 시장의 반응을 물어볼 엄두도 못 내는 나로서는 우울해질 수밖에 더 있는가. 그래서 적어도 내게 ‘책을 내는 일’은 ‘민폐’였다. 그래서 앞으로 원고가 완성된다 해도 책은 내지 않겠노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 생각을 연구실로 찾아온 사장에게 말했다. 그저 완성된 원고의 부분 파일을 홈피에 올리고 필요한 사람은 출력해 가도록 하겠다는 것이 내 아이디어였다. 그러자 그 사장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럼 우리 일을 접으라고요? 그나마 안 팔리는 책일망정 만들며 근근이 연명하고 있는 상황인데, 아예 책을 안 쓰시겠다니, 우리 보고 문을 닫으라는 말씀인가요?”

 

 

 

 

 

다급한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배부른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괴기’일지언정 그래도 먼 훗날 언젠가를 위해 이들은 책을 만들고 있었다. 그저 책짐을 짊어지고 다니며 팔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는 이유로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는 나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래, 스피노자는 왜 ‘내일 세상이 망한다 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을까. 앞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에서도 내일엔 뭔가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갖는 것이 이 땅의 우리 세대가 견지해야 할 삶의 태도 아니겠는가. 비록 내 책이 후세인들의 간장 병 마개나 펄펄 끓는 라면 냄비의 밑받침으로나 쓰인다 해도 지금 그걸 당겨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시대의 나는 이 시대의 논리에 충실하며 살아갈 따름이다. 모름지기 학자라면 힘이 남아 있는 한 고심참담 저술을 해야 함을 내게 깨우쳐 주고 그 출판사 사장은 황황히 떠났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6. 26. 13:34

저질 언론과 저질 정치인들의 비극적 코메디

 

 

 

 

이른 아침. 책상에 앉아 밀린 교정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까톡!’ 소리가 나를 부른다. 급한 연락인가 열어보니, 친구 재영이가 한 번 읽어보라며 보내 준 저잣거리의 우스개였다. 참으로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예지가 번뜩이는 구구절절이었다. 급한 교정은 밀어두고 한 마디 소감을 보태지 않을 수 없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수 : "죄없는 자,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

언론 : "잔인한 예수, 연약한 여인에게 돌 던지라고 사주"

 

예수 : 위선적 바리새인들에게 분개해 "독사의 자식들아!"

언론 : "예수, 국민들에게 새끼 막말 파문"

 

석가 : 구도의 길 떠나...

언론 : "국민의 고통 외면, 제 혼자만 살 길 찾아나서"

 

석가 : "천상천하 유아독존"

언론 : "오만과 독선의 극치, 국민이 끝장내야"

 

소크라테스 : "악법도 법이다"

언론 : "소크라테스, 악법 옹호 파장"

 

시이저 : "주사위는 던져졌다"

언론 : "시이저, 평소 주사위 도박광으로 밝혀져"

 

이순신 : "내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언론 : "이순신, 부하에게 거짓말 하도록 지시, 도덕성 논란 일파만파"

 

김구 : "나의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통일입니다"

언론 : "김구, 통일에 눈 멀어 민생과 경제 내팽개쳐"

 

소크라테스 : "너 자신을 알라"

언론 : "소크라테스, 국민을 바보 취급하며 반말 파문"

 

클라크 :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언론 : "클라크, 소년들에게만 야망가지라고 심각한 성차별 발언하며 대놓고 쿠데타 사주"

 

스피노자 :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겠다"

언론 : "스피노자, 지구멸망 악담, 전세계가 경악 분노"

 

최영 :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언론 : "최영, 돌을 황금으로 속여 팔아 거액 챙긴 의혹 "

 

전두환 : "전재산 29만원"

언론 : "현정권 국가원로 홀대 극치, 코드인사 보훈처장 경질해야"~

 

링컨 : "국민의, 국민에, 국민을 위한..."

언론 : "국민을 빌미로 하는 국가 정책에 국민은 피곤"

 

니체 : "신은 죽었다."

언론 : "현정권, 신이 죽도록 뭐 했나?

 

 

얼마나 도를 닦고, 공부를 얼마나 해야 이 정도의 순발력이 길러질 수 있을까? 수십 년 동안 문학을 공부한답시고 강호의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강설을 듣고 서재에 앉아 고금의 서적들을 뒤져왔건만, 이제 겨우 고리타분한 논문 몇 편 끄적거리는 방법이나 간신히 터득했을 뿐이다. 그런데 대체 누가 얼마나 도를 닦았기에 이리도 오묘한 논설을 베풀어 놓을 수 있단 말인가.

 

총리후보 문창극 선생의 등장과 퇴장 사이에 이 땅의 저질 언론들과 저질 정치인들이 벌이는 코메디를 보며 자못 분개한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기록하여 후대에 전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온 것이 사실이다. 처음 언론에 뜬 동영상을 들어본 뒤 문 선생이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바탕으로 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젊은 시절 감명 깊게 읽은 함석헌 선생의 말을 뒤집어 저질 언론들에 한 펀치 던져주려고 마음 먹었을 때, 내 생각을 미리 짚어낸 듯한 <동아일보> 송평인 논설위원의 글을 접하게 되어, 그마저도 포기하고 앙앙불락(怏怏不樂)하던 차 이 경구(警句)’를 접하게 된 것이었다.

 

편 갈라 싸우는 이 땅의 저질 언론들과 저질 정치인들의 꼼수’,  그 얕디얕은 근저를 어쩌면 이렇게도 명쾌하게 파헤칠 수 있을까.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각종 꼼수들과 부조리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 장강대하의 언설이나 논문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배가 맞아 돌아가는 언론과 정치인들. 그들이 함께 몸을 담그고 있는 저질성의 근원이라야 한 치 깊이도 안 되는 것을. 그걸 분석하기 위해 무슨 정치학이나 인문학의 심오한 이론이 필요할 것이냐!

 

저질 언론들의 숲속에서 한 치도 안 되는 필봉을 조자룡의 헌 칼 쓰듯휘두르는, 이른바 논객들은 부끄러움을 알고 조용히 붓을 거두는 것이 옳다. 이 경구를 음미하면서 당신들이 농하는 현학의 허세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의 심기만 불편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강호에 숨어 빙긋이 웃으며 넌지시 던지는 현자의 발언에 더 이상 토를 다는 일이야말로 대단히 옳지 못한일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12. 29. 13:52


추천의 말

존재의 자각, 그리고 간절한 신앙고백


                                                 조규익(숭실대 교수/한국문예연구소장)


조물주는 인간에게 영혼과 육신을 허락했으나, 영혼에 비해 육신은 덧없이 짧다. 대부분의 인간은 영적으로 성숙되기 이전에 육신을 잃고 만다. 인간의 삶을 이끄는 주체는 영혼이고, 그 영혼의 완성이나 구제는 신의 영역이다. 육신은 욕망의 근원이므로 육신에 집착하는 자에게 ‘육신은 굴레(bondage)’일 뿐이라는 것이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이다. 과연 인간은 육신의 욕망을 탈각하고 정결한 영혼의 세계에서 노닐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신의 손길을 갈망한다. 신의 손길만이 절망의 나락에 빠진 인간을 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머지않아 닥쳐 올 심판의 시간을 외면한 채 육신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방황하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보라.
     ***
지금 이 순간, 시인 백승철의 신앙고백이 눈물겹도록 귀하다. 그는 몸을 불사르며 영혼의 완성을 간구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삶은 구도자의 그것이고, 그의 시는 편편이 신앙고백이다. 종교 역사 상 가장 뛰어난 신앙고백 <사도신경>의 핵심을 그의 시에서 발견한다. 전능하신 조물주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빌라도의 박해 속에서 육신의 감옥을 벗어나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조만간 도래할 심판과 영생에 대한 믿음 등등. 그래서 그는 필사적이면서도 의연하다. ‘박해의 쓴 잔’을 물리치지 않고 부활의 기적을 보이신 예수님만 바라보기 때문인가. 그 역시 육신을 짓부순 고통에 좌절하지 않고 영혼의 완성에 매진한다. 육신보다 영혼의 불멸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영혼의 구원에 대한 믿음이 그로 하여금 육신의 굴레를 간단히 뛰어 넘을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내 뱉는 그의 말들 모두가 절절한 신앙고백인 것도 그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도신경>의, 아니 성서 자체의 패러프레이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삶을 우러르며, 스스로의 삶 갈피갈피 묻어나는 고통과 회한을 순화시켜 가는 구도자의 고백이다. 그것이 바로 백 시인의 시편들이다. 다음과 같은 그의 시는 얼마나 처절한가.  

그래
아무리 밉다 곱다 해도
된서리에 쪼그라들어
비굴해진다 해도
뿌리 하나만큼은
꿋꿋이 뻗치고 있으니
또 어찌어찌
견디게 되겠지
오롯이 살아지겠지
혹독한 겨울을 딛고
한 치라도 더 파고들어
이 세상
한 줌 흙이라도 되겠지
       -<겨울나기> 전문-

우리는 흔히 ‘겨울나기’를 ‘월동(越冬)’이라 말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두 말의 내포가 사뭇 다르다. 어쩌면 우리가 심상하게 일컫는 ‘월동’이란 겨울을 뛰어넘은 그곳에 ‘당연히 기다리고 있을 봄’을 상정하거나 기대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백 시인의 ‘겨울나기’는 절망의 심연 그 자체다.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면서도 ‘어떻게 견디게 되겠지’라는 실오리만한 희망을 가져보기로 한 것이다. 매서운 추위에 줄기와 가지는 얼어 죽어도, 뿌리는 남아 있기에 나무는 새로운 부활을 꿈꿀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결국 ‘이 세상 한 줌 흙’이라도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 희망은 믿음이다. 절망의 심연에 빠져 본 사람 만이 희망의 소중함을 알 수 있다. 백 시인은 지금 빠져 나오지 못할 줄 알았던 지난 시간대의 ‘모진 겨울’을 회감(回感)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백 시인의 그 희망이 도타운 신앙의 심지가 되어 커다란 횃불로 타오르고 있는 모습을 이 시는 내포하고 있다.
     ***
학창 시절의 백 시인은 과묵했다. 말을 걸어도, 빙긋 웃을 뿐 끝내 말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그의 말은 시가 되어 나왔다. 누에고치에서 비단실 풀려나오듯 그의 시들은 늘 빛나고 단정했다. 교단생활을 거치며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시의 폭은 넓어졌고, 신을 발견하면서 신앙고백으로 상승했다. 자아성찰을 바탕으로 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안(詩眼)이 견고하다. 흡사 <사도신경>을 자신의 말로 풀어내려는 듯 그의 필치는 거침이 없다. 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고, 결국 그에게 기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고, 고통 속에서만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에게서 확인한다. 고민과 고통 속에 허우적대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백 시인의 시를 읽으며 막힌 가슴을 뚫어볼 일이다. <2011. 12. 17.>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