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9. 3. 9. 01:20


 아쉬움 속에 구엘공원을 떠난 우리는 길쭉한 수세미 모양의 수도국(아그바르) 건물이 멀리 바라보이는 도로를 달려 몬주익(Montjuïc)에 도착했다. ‘몬주익’이란 원래 ‘유대인들이 살던 언덕’에서 나온 말로 복잡한 역사적 맥락이 얽힌 곳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명 속에는 역사의 우여곡절이 배어 있기 마련. 이곳에서도 유태인 핍박의 역사가 있었던 모양이나 자세한 건 생략하기로 한다.

 우리는 스페인 광장을 출발, 무역 전시장과 분수대, 카딸루냐 미술관을 거쳐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렸던 주경기장에 도착했다. 주경기장은 산 조르디 스포츠관(Palau d'Esorts Sant Jordi), 기념공원 등과 함께 있었고, 올림픽 기념관은 주경기장 뒤편에 있었다. 주경기장 도로변엔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의 모습이 석판에 부조되어 있어 감회를 새롭게 했다. 주경기장의 현재 이름은 루이스 콤파니스 올림픽 경기장 (Estadi Olímpic Lluís Companys). 1929년의 엑스포를 대비하여 1927년에 최초로 만들어진 이 경기장은 1936년 하계 올림픽을 위해 보수되었고, 1992년 하계 올림픽의 주경기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1989년 재보수되었다. 경기장 수용 인원은 7만명. 체육경기 뿐 아니라 가수들의 콘서트장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롤링스톤즈, 티나터너, 마돈나, 본조비 등은 그 대표적인 가수들이다. 

 주경기장 뒤쪽으로 걸어 올라간 자리에 몬주익 성이 있는데, 그곳에 들어가자 군사박물관이 있었고, 발 아래로 바르셀로나 시가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과연 과거와 현재가 적절히 배합되어 있는 바르셀로나의 모습은 윤택과 풍요 그 자체였다.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바르셀로나. 그 속에서 예술과 문화, 전통과 현대를 함께 호흡하고 있는 시민들의 여유가 나그네의 부러움을 자아냈다. 

  ***

 언덕을 내려온 우리는 람불라스 거리(Las Ramblas)를 걸었다. 콜럼버스 기념탑에서부터 까딸루냐 광장에 이르는 널찍한 보도(步道).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길 양쪽으로 늘어서 있고, 길바닥엔 돌이 깔려 있었다. 길옆으로 ‘움직이는 동상’이라 불리는, 꽤 많은 수의 거리공연자들이 갖가지 행색으로 나그네의 눈길을 끌었다. 꽃 가게, 신문이나 잡지의 가판대들이 줄지어 있고, 거리 양쪽에는 각종 레스토랑, 숙박시설, 선물가게, 옷 가게 등이 즐비했다. 람블라스를 걷다가 옆의 상가로 들어가니 어물전, 식품점, 적나라한 고깃집, 반찬가게 등이 한 골목 그득했다. 껍질 벗긴 염소머리, 토막 난 생선, 소세지, 각종 야채 등 우리나라 재래시장에서 봄직한 음식의 1차 재료들이 진열대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람블라스 거리를 부랴부랴 빠져나온 우리는 어둑발이 진 치고 있는 거리를 뚫고 가우디의 또 다른 작품 카사 밀라(Casa Mila)를 찾았다. ‘라 페드레라(La Pedrera, 채석장이란 뜻)’라고도 불리는 이 고품격 맨션은 바르셀로나 중심가인 그라시아의 거리를 마주보고 있었다. 각 층 4 가구, 가구 당 400㎡의 공간을 갖고 있는 이 저택은 가우디의 예의 컨셉대로 꾸불텅거리는 외관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 보아도 ‘기괴한 미학’이라 할 수 있는데 한 세기 전엔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니, 이 작업 후에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는 말도 결코 과장이 아니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

 바르셀로나는 넓고 깊었다. 단순히 물리적인 면적이 아니라 문화와 역사, 아름다움이 어울려 빚어내는 도시의 정신적 깊이와 넓이가 그렇다는 것이다. 가우디가 차지하는 면적이 그리 넓지는 않았으나, 가우디와 바르셀로나가 동일시되는 것은 그의 미학이 범상치 않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바르셀로나의 모든 것들을 대충 지나쳤으면서도 가우디의 모든 것을 보기 위해 한사코 애를 쓴 이유도 그 점에 있었다.


 스페인을 정리하기 위해 이제 우리는 마드리드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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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로 부터 몬주익 경기장, 몬주익 경기장, 몬주익 경기장 밖 대한민국 기념물, 달리는 황영조, 몬주익 경기장 성화대, 몬주익 경기장 뒤 몬주익 성, 몬주익 성 위에서 바라본 바르셀로나 시내, 몬주익 경기장 옆 고고학박물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2. 9. 01:52
 

스페인 기행 5-3 : 깔끔한 백색과 지중해의 만남, 그 청아한 미학 - 말라가, 미하스, 론다의 정열과 신선함


미하스에서 두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곳은 인구 3만여명의 아담한 도시 론다(Ronda). 투우와 협곡의 도시였다. 버스에서 내려 잠시 공원을 가로지르니 절벽이 나타나고, 절벽 아래로 한 줄기 강이 흐른다. 과달레빈강(Rio Guadalevin)은 협곡 타호(Tajo)를 만들었고, 론다는 협곡 사이의 바위산에 위치해 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절경이었다. 협곡을 사이에 두고 시가지는 둘로 나뉘어 있었다. 구시가와 신시가를 연결하는 것은 뿌엔떼 누에보(Puente Nuevo), 즉 새 다리였다. 과연 장관이었다. 1793년에 만들어진 다리의 높이는 90~100m에 달하고, 교각에는 감옥으로 쓰인 공간들도 보였다. 내려다보기에도 아찔한 이런 규모의 다리를 18세기에 건설했다니 놀라운 일이다. 다리 앞의 스페인 광장에는 레스토랑과 까페 등이 있어 협곡을 감상할 만한 곳들이 즐비했다. 다리를 건너 헤밍웨이가 잠시 거처하던 집을 구경했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 <천년의 고독>의 작가 마르께스의 생가를 만나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문화와 역사가 서려 향기를 내뿜는 곳이 론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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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론다 구 시가지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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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론다에서 내려다 본 협곡 아랫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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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론다의 신 구시가지를 이어주는 푸엔테 누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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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께스 생가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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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밍웨이가 잠시 머물던 집>

 다리를 건너 구시가인 시우다드(La Ciudad)로 오니 15세기 후반까지 이어진 이슬람 왕조 지배의 흔적이 도처에 남아 있었다. 마르께스 살바티에라 궁전, 이슬람 목욕탕인 바뇨스 아라베스 등이 있고, 산타 마리아 라 마요르 성당도 보였으며, 옛날 성벽도 일부나마 남아 있었다. 협곡 아래에 남아 있는 로마시대의 유적들도 우리로 하여금 시간의 흐름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인 사실은 론다가 투우의 본산지라는 것.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 된 바로크 양식의 투우장과 투우박물관이 있었다. 이곳이 바로 근대 투우의 발상지였다. 동상으로 세워져 지금도 추앙을 받고 있는 로메로와 그 일가를 비롯한 많은 투우사들이 이곳 출신이었다. 투우박물관에는 스페인의 걸출한 화가 고야(Goya)가 그린 투우그림도 전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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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우장 앞 황소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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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우장 내부>

 협곡 사이 바위산에 세워진 작은 도시 론다. 그러나 그 도시는 아름다웠고 역사와 전통의 숨결 또한 단순치 않았다. 옛날 것들은 그것들대로, 지금의 것들은 그것들대로 존재의 의미를 마음껏 발산하고 있는 도시가 바로 론다였다. 역사의 갈피마다 사소한 것들도 그냥 흘려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가꾸는 도시가 바로 론다였다. 시간의 흐름에 등떠밀려 떠나야 하는 우리의 마음에 론다가 강렬하게 각인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문화와 역사의 도시 세비야로 간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