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대 국어국문학과'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0.08.25 제자로부터 받은 큰 선물
  2. 2019.05.22 학술답사 혹은 보물찾기
  3. 2018.05.23 학술답사 후기-왜 '학술답사'인가?- 2
글 - 칼럼/단상2020. 8. 25. 14:09

 

 

에코팜 농막의 마무리 작업, 풀과의 전쟁, 한없이 밀리고 있는 집필 작업 등으로 심신이 피로한 나날이다. 그것뿐인가. 코로나가 잦아들기는 고사하고 근래 들어 부쩍 치성(熾盛)해지는 양상을 보여주니, 안팎으로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 그래도 게으름 부릴 수는 없는 일.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신착 이메일을 검색하려니 낯익은 이름 하나가 뜨는 게 아닌가. 홍정현! 아, 오래 전에 졸업한 제자가 보내 온 소식이었다. 잽싸게 메일을 열고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옆에 있는 아내에게 큰 소리로 읽어주니, 그녀도 감동한 듯 울먹거린다.

 

98학번이라? 우리가 미국에 있던 해에 국어국문학과의 새내기로 들어온 그녀였다. 2002년도에 졸업, 올해로 벌써 18년 세월의 강이 흘러내린 것이다. 졸업 후 편입한 춘천교대를 졸업,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40 가까운 나이에 한국교원대에서 석사・박사과정을 마치고, 바로 어제 교육학박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내어머니교사로서의 현실적인 삶을 꾸려 나가며 절치부심 공부에 매진해온 그녀의 쉽지 않았을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내 눈앞에 펼쳐졌다.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공부하면서 ‘힘들고 외로웠다’는 말의 의미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리라. 아직도 이 땅의 젊은이들 대부분은 세상 사람들의 후진적 편견과 싸워야 한다. 프리미엄 없는 자들이 유형무형의 유산을 갖고 있는 자들과 적어도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고통스런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홍정현 박사. 이제 어엿한 국어교육학박사로서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한 사람의 삶에서 매 순간은 늘 새로운 출발선’이라는 점. 그건 내 스스로 삶의 경험에서 깨달은 진리다. 다만 어떻게 출발할 것이며 다시 어떤 출발선에 서게 될 것인지는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인간승리의 모범적 사례를 내 제자에게서 확인한 오늘. 그간의 피로가 말끔히 사라졌으니, ‘제자만 못한 선생’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시 신발 끈을 조여 매어야 할 것이다. 홍 박사 만세!^^

 

*첨부: 홍정현이 보내온 메일

 

 

교수님,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인사 드립니다.

저 98학번 홍정현입니다.

너무 오래전이라 교수님께서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2002년에 졸업했으니 벌써 1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졸업 후에 제가 춘천교대로 편입하여 졸업하고,

춘천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세은이와 함께 찾아 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에 처음으로 연락을 드립니다.

뵙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면서도 그 흔한 전화 한 번을 못 드리고

백규서옥에서 교수님의 글을 읽으며 그리워하기만 하며 지냈습니다.

 

잘 지내셨지요?

 

저는 춘천에서 3년을 근무하고,

천안에 직장이 있는 사람을 만나 결혼 하면서 천안으로 근무지와 주거지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연년생 남매를 낳아 키우다가

40이 가까운 나이에 청주에 있는 한국교원대학교에서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8월 24일자로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하였습니다.

 

논문을 쓰는 인고의 과정 내내

논문이 완성되면 꼭 교수님께 논문 들고 찾아뵙고 싶다는 생각으로 힘든 시간을 버텼습니다.

비록 상황이 좋지 않아 당장 찾아뵙지는 못하겠지만, 졸업하는 날 교수님께 메일로라도 꼭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언젠가 제게,

공부란 할 수 있을 때 다부지게 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멋지게 해냈어야 했는데.... 다부지게 공부할 수 있는 시기를 모두 지나 보내고

부끄럽지만 아이들을 노모께 전적으로 부탁드리고 뒤늦은 공부를 했습니다.

 

제가 어떤 분야를 공부했는지 말씀을 안 드렸네요.

비록 초등교사이지만 문법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교원대 사범대 국어교육학과에서 문법을 전공했습니다.

 

사범대에 속한 대학원이다보니 중등교사들이 많고,

초등교사라는 제 직업이 주는 편견의 굴레가 제게 늘 씌워져있어 서러움도 있었습니다.

저의 열등감인지는 모르겠으나

초등교사이니 국어의 제반 분야를 제대로 알지 못할 거라는 편견이

함께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에게도, 또 일부 교수님들께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시선들에 부딪혀 아플 때마다

"나는 숭실대 국문학과 출신이야."를 마음 속으로 새기며,

또 한편으로는 교수님께서 학문에 쏟으셨던 열정적인 모습과 학문을 대하시던 진지한 자세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교수님,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도록 저의 사표(師表)가 되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언제 뵙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힘든 시기가 좀 지나면 꼭 찾아뵙겠습니다.

 

전화를 먼저 드려야 하나 고민을 했는데,

연구실로 불쑥 전화를 드리기가 겸연쩍어 메일을 먼저 올립니다.

 

뵙는 날까지 부디 평안하고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20년 8월 24일

 

제자 홍정현 올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9. 5. 22. 11:41

 

 

학술답사 혹은 보물찾기

 

                                                                                                                           조규익

 

내 어린 시절 소풍날의 가장 가슴 뛰는 행사는 ‘보물찾기’였다. 파릇파릇 돋아난 나물더미 속이나, 하찮아 보이는 돌덩이 밑에 감쪽같이 숨겨진 쪽지를 찾아내곤 환호성을 지르던 친구들의 얼굴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쪽지 하나 찾아 봐야 연필 두어 자루, 공책 두어 권 주어지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 시절엔 보물을 찾아낸 아이들이 왜 그리도 부럽고 샘이 나던지. 쪽지 한 장 찾지 못한 채 소풍이 끝날 무렵이면, 늘 아쉽고 허전했다. 그 뒤부터 이날까지 내 삶은 대부분 ‘실패한 보물찾기’의 연속이다.

 

철이 들면서 국문학에 뜻을 두었고, 학부와 대학원 시절의 답사에서 얻는 설화나 민요, 귀한 자료들이 보물임을 저절로 깨닫게 되었다. 촌로들로부터 약간 이색적인 설화 한 편이라도 얻어 듣는 날엔 가슴이 뛰었다. 비슷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천하에 없는 이본(異本)이라도 얻은 듯 흡족함을 느꼈으니, 그게 보물 아니고 무엇이랴. 그 뿐인가. 가끔 ‘고서답사(古書踏査)’를 떠났다가 희귀본 소설 자료나 노래 자료라도 얻을라치면, 가슴이 설레어 여러 날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그러니 그것들은 분명 보물이었다.

 

나이를 먹고 삶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현장에서 만나는 보물들은 보다 깊고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 채 내 앞에 나타나곤 했다. 14년 전 ‘기독교 확산과 중세문명의 자취’를 확인하기 위해 6개월 간 유럽의 20개국 120개 도시들을 자동차로 여행한 적이 있었다. 다양한 민족과 국가들이 모여 있으나 동유럽을 제외하곤 국경이 따로 없는 그 지역을 돌며, EU의 현존재가 갖는 역사적 필연성이 기독교로부터 나왔음을 덤으로 깨닫게 되었다. 전공 공부는 잠시 뒤로 미룬 채, 곰브리치의 <<세계사 이야기>>를 비롯한 각종 유럽 중심의 세계사 저술들을 샅샅이 뒤져 읽으며 ‘보물찾기’의 도구로 갖춘 것은 물론이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유럽에서 만난 보물들은 내 협소한 세계인식의 폭을 거의 무한대로 넓혀 주었다.

 

몇 년 전 미국의 오클라호마주립대학에 6개월 정도 머무를 때였다. 미국에 인디언들이 많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오클라호마 주에 39개의 인디언 부족과 그들의 보호구역이 있다는 사실은 그곳에 가서야 알게 되었고, 틈 날 때마다 그들을 찾아 다녔다. ‘인디언 종족・역사・문화 답사’에 나섰던 것이다. 드넓은 대초원과 계곡 속에 숨은 듯 살아가고 있는 그들을 만나보면서 문득 옛날의 ‘보물찾기’가 떠올랐다. 현장에서 만나는 인디언들을 통해 미국 역사의 그늘을 발견했고, 세상살이의 한 단면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 답사여행이 대학시절 학술답사체험에서 길러진 내 습벽(習癖)의 발현이었음은 물론이다. ‘무언가를 추구하는’ 삶 자체야말로 답사로부터 체득한 결과라 할 수 있으리라.

 

강의실이나 연구실은 삶의 현장을 최소화시킨 공간이고, 교과서나 참고서는 삶의 현장에 널린 자료들을 모아 가공하거나 조리한 음식 같은 것이다. 강의실과 연구실에서 잘 만들어진 텍스트를 보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공부에도 가끔은 야성(野性)이 필요하다. 엄마 젖을 뗀 뒤 얼마동안 이유식을 먹다가 이빨이 솟기 시작하면서 ‘날 것 그대로’를 씹어 먹고 싶어 하는 아가들을 보라. 학생들이 강의실 아닌 현장에서 ‘거칠지만 날 것 그대로의 자료’를 찾아 공부하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성장의 원리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전통 마을들을 찾아, 그 정신적 자료들을 수집하는 일은 잦을수록 좋다. 강의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표준화된 공부’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언가를 찾아 현장에 나가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남들과 달리 ‘쉽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이 큰 공부다.

 

***

 

우리는 ‘백제’라는 이름으로 과거・현재・미래가 함께 숨 쉬는 ‘카오스의 시공’ 공주와 부여를 찾았다. 학생들로 하여금 그곳에 사는 백제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들의 언어와 문학, 역사를 분석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분들의 어떤 것이 오늘날의 우리를 만들었는지 그들 스스로 느껴보았으면 하는 마음도 컸다.

 

부여에 도착하여 궁남지에서 서동(薯童)을 만나 건강한 생명력을, 부소산에 올라 백마강을 내려다보며 소름 끼치는 망국의 한을 확인했다. 그 뿐 아니다. 얼마 전까지 민중의 저항의식을 거침없이 시로 뱉어내던 신동엽(1930~1969)을 만났다. 지금도 그는 고즈넉한 부여의 한 모퉁이에 앉아 ‘껍데기는 가라!’고 쉼 없이 외치는 중이었다. 옛날의 껍데기를 밀어내고 등장한 새로운 껍데기들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현실을 젊은이들이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보물이었다. 어둘 녘 동학군의 피비린내가 아직 가시지 않은 ‘우금치’를 넘어 공주의 숙소에 도착했다. ‘웅진 백제→사비 백제’를 역으로 밟아온 것이다. 계룡산 산록에 자리 잡은 숙소, 그 앞엔 작은 호수가 거울처럼 앉아 흘러가는 시간과 역사를 정화시키는 중이었다. 신동엽의 ‘금강’이 거세게 흐르는 민중의 삶을 그려내려 했다면, 이곳 호수는 조용조용 ‘껍데기들’을 갈앉히는 중이었다.

 

시간을 거스르느라 피곤한 몸을 맑은 공기와 바람으로 정화시킨 다음 날, 공주대학교를 찾았다. 잘 만들어진 국제회의장에서 국어교육과 송재일 교수로부터 ‘공주-부여의 문학과 역사’ 특강을 들었다. 조근조근 짚어가며 공주와 부여의 역사를 깔고 그 위에 문학으로 수를 놓는 송 교수의 말씀. 소문대로 명 강의였다. 강의 전 학생들에게 송 교수를 소개하며 나는 울컥하고 말았다. 자리에 앉아있는 19학번 새내기들 사이에서 45년 전 74학번으로 초라하게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발그레한 19학번 새내기들과 당시의 내 모습이 오버랩되는 순간, ‘금강 물처럼 흘러간’ 45년 세월이 허무해서였을까. 갑자기 목이 메었던 것이다. 45년 전의 그곳은 논밭뿐이었고, 지금 이 학교의 한쪽 구석에 간신히 남아있는 돌 건물 한 채와 체육관, 연구동(지금은 박물관)이 전부였다. 지금은 종합대학이지만, 당시는 단설(單設) ‘공주사범대학’이었다. 읍내의 자취방에서 진창길을 걸어와 강의실에 자리를 잡으면, 한숨이 새어나오곤 했다. 점심 걱정, 강의 뒤 금강 백사장에서의 막걸리 파티 걱정, 과제 걱정, 저녁 걱정 등등. 지금 같았으면 목가적이었을 당시, 작은 몸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그런 추억의 찌꺼기들이 한 번에 몰려들어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으리라.

 

특강 후 그곳 교수들(송재일, 권대광, 송홍규, 정형근)과 학생들이 함께 단체 촬영을 했다. 두 학교 학생・교수의 멋진 만남의 자리였고, 공주대 국어교육과 교수들이 베풀어준 감동적인 호의의 현장이었다. 그곳 교수들과의 식사를 마친 뒤, 학생들은 분과별 답사의 현장으로 흩어졌다. 고전・민속분과는 곰나루 전설의 현장과 박동진판소리전수관으로, 현대분과는 나태주문학관 및 공산성으로, 언어학분과는 방언채록을 위해 정안면 월산2리 마을회관으로... 저녁 무렵, 숙소에 돌아온 학생들은 가벼운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새로운 것을 배운 뒤에 경험한 흡족함이 그들의 표정에 역연했다. 그 뿐 아니었다. 이구동성으로 가는 곳마다 만난 공주 사람들의 ‘너그럽고 고운 심성’에 놀랐다고 했다. 그래서 공주라는 지역에 정이 간다고 했다. 사실 그건 덤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선물이었다. 가슴 속에 보이지 않는 선물을 듬뿍 안고 숙소로 돌아온 학생들은 모닥불 타오르는 광장에서 끝없이 울려 퍼지는 풍물소리로 피로를 풀었다. 아마도 그들은 꿈속에서 낮 동안 마을회관에서 만났던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을 다시 만났을 것이다. 미진했던 대화를 다시 이어가며 그 분들의 모습을 마음속에 다시 새겼을 것이다. 지워지지 않을 추억 속의 영상으로...

 

***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임을 갈파한 카아(E.H.Carr)처럼 부여와 공주에서 백제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들만의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해 분주한 학생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학술답사를 통해 현재에 숨어있는 과거를 찾아내고,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복원하며, 미래를 창조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다시 강조하건대, 인생은 ‘보물찾기’의 역정이다. 그 보물들은 삶의 현장 구석구석에 ‘과거’라는 시간의 탈을 쓴 채 숨어있음을 그들은 깨달았으리라. 그래서 과거는 버려진 폐기물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창조하는 바탕 아니겠는가. 숭실동산에서 출발한 버스는 그들을 과거의 시공으로 이입시킨 타임머신이고, 그들은 과거∙현재∙미래를 통합하는 ‘시간여행’을 잘 마친 뒤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온 ‘시간 여행자들’인 것이다.

 

멋진 젊음들에게 내 사랑을 보내며...

 

2019. 5. 22.

 

백규서옥에서 45년 전의 공주사범대학 새내기 백규 씀

 

 

궁남지로 향하는 숭실 국문인들

 

궁남지와 포룡정

 

포룡정의 현액(<서동요>)

 

백제역사에 대한 설명을 듣는 학생들

 

고란사 극락보전 앞에서 대학원생들과 교수들

 

고란사에서 내려다 본 백마강

 

고란사에서(왼쪽부터 임채훈 교수, 백규, 이경재 교수)

 

신동엽 시인 생가

 

신동엽 시인

 

신동엽 시인 생가(시인의 방 앞 현판의 시-부인 인병선 작)

 

신동엽 시인의 방

 

신동엽 시인의 육필

 

신동엽 시인 앞에서

 

숙소 사계절펜션의 뜰(커플상)

 

숙소 앞 호수

 

숙소 앞 호수

 

공주대학교 송재일 교수 특강

 

특강이 끝나고 학생들과 교수들(앞줄 왼쪽 다섯번째부터 공주대 권대광 교수, 정형근 교수, 송홍규 교수, 임채훈 교수, 송재일 교수, 백규, 이경재 교수)

 

고마나루 곰사당

 

고마나루 숲을 걷다가 만난 노송

 

박동진판소리전수관의 김양숙 관장

 

<사랑가> 학습을 마치고

 

국립공주박물관

 

월산2구 마을회관에서 방언채록 중

 

방언채록을 마치고

 

무령왕 부부가 잠들어 있던 목관(재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의 신발

 

공주 송정리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

 

청양 본의리에서 출토된 백제 시대 사찰의 대좌

 

청춘의 열기마냥 타오르는 불꽃

 

그 옛날 학창시절의 강의동이자 본부건물이었던 돌건물. 50여년의 세월 속에 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궁남지에서 대학원생 이은란, 이다온

 

부여의 식당 앞에서 숭실 국문의 젊은 피(임선우, 이경재 교수,장현태, 이찬희, 라힘, 박일)

 

신동엽문학관의 김형수 상임이사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 5. 23. 19:52

하회 별신굿 탈놀이 다섯째 마당의 파계승

 

하회마을의 아름다운 초가들

 

하회마을 초가들 사이의 골목길

 

하회마을에서 만난 장독들

 

병산서원에서 숭실국문 학생들과

 

병산서원에서 집행부 학생들과

 

병산서원에서 외국인 유학생들과

 

병산서원에서 임채훈 교수, 엄경희 교수, 소신애 교수 등과

 

 

학술답사 후기

-학술답사인가?-

 

                                                                                                                  조규익(숭실대 교수)

 

내 학창 시절 은사 한 분은 늘 논문은 발로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논문을 발로 써라? 처음엔 그 말씀이 몹시 낯설었다. 당시 엉망진창인 번역을 발 번역이라 부르던 나였지만, ‘발 논문이란 조어(造語)의 진의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이가 들고 공부가 좀 익어지면서 깨달았다. 자료를 찾아 발로 뛰는학자가 좋은 논문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일까. 팔도 어디든 내가 필요로 하는 자료의 소장 자()를 찾아다니는 일이 연구 작업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가 꽤 된다. 그렇다고 내가 좋은 논문들을 쓰는 건 아니지만, 그나마 큰 실수 없이 어쭙잖은 글들이나마 엮어 낼 수 있는 건 전적으로 그 때 익힌 현장 중시의 습관 덕분이리라.

 

국어국문학의 현장은 우리 전통사회다. 십 수 년 전만 해도 그런 공간들이 제법 남아 있었다. 어느 마을 논두렁이나 밭두렁에만 가도 생생한 자료제공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말들이 방언이었고, 힘들거나 즐거울 때 질러내는 소리들이 민요였다. 어릴 적부터 어른들로부터 물려받아 기억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 둔 이야기들은 좀 많았나. 그런 걸 찾으러 틈나는 대로 방방곡곡 누비고 다니며 국어국문학도들은 자긍심을 지닐 수 있었다. 사라지는 우리의 전통과 정서를 글자로 잡아놓고 분석하여,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민족문화의 파수꾼이 될 수 있다는 믿음 덕분이었다.

 

이제, 세월은 마구 변하여 외견상 전통사회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국어국문학도들의 임무나 사명을 고도로 세련시켜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사실 변화는 잔존(殘存)을 전제로 하는 개념일 뿐 사라짐이 아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여 찾는 일을 포기할 순 없다. 변화의 근거들이야 하다못해 DNA에라도 남아있을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집요함은 공부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최종병기. 문학이나 언어의 생산자이자 사용자인 사람들을 만나 보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을 키워 낸 자연과 문화적역사적 잔존물들을 현장에서느껴보지 못한다면, 강의실에서 펼쳐지는 담론들의 공허함을 무슨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으리오.

 

우리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관광여행을 본받으려 하지 않는 것도 답사지역이 우리의 또 다른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밤을 새워 그곳 인물들의 문학을 찾고, 무형 문화재의 뿌리를 가늠하며, 숨은 역사를 캐는 일은 이 시대의 국어국문학도에게 부여된 사명이자 특권이다. 2018년도 숭실 국문인들이 그 사명과 특권을 오롯이 수행하고 누릴 수 있도록 지역선정-계획 수립-사전답사-자료집 준비등으로 학생회장 김태호를 비롯한 집행부원들이 진한 땀을 흘렸다. 그 덕에 멋진 자료집이 나왔고, 모두 참여하여 현장 공부의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고마운 일이다. 이제 우리 모두 귀한 공부여행에 적극 동참하여 하나라도 더 얻어오는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

 

위 글은 2018학년도 숭실대 국어국문학과 학술답사 자료집에 실은 나의 인사말이다. 나는 교수 초년병 시절부터 몇 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학술답사에 참여하여 학생들과 고락을 함께 해왔다. 그동안 사회의 변화와 함께 학술답사의 양상도 많이 바뀌어 이젠 일반인들의 여행과 구분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지역과 방문 대상이 역사나 전통문화로 한정되고 강의실 교육의 연장이라는 점에서나 국문과의 학술답사는 일반인들의 관광여행과 구분될 따름이다. 그러나 오늘날 목적과 테마를 우선적으로 고려할 만큼 일반인들의 관광여행도 많이 세련되었다. 오히려 문화답사 동호인들끼리의 여행일 경우 대학의 학술답사보다 더 전문적인 경우도 적지 않다. 이제 일반인들의 안목이나 교양 수준은 많이 높아진 반면, 대학 교육은 거의 완벽하게 대중화보편화되었다. 따라서 앞 시대엔 전문인들이나 예비전문인들이 주로 수행하던 학술답사가 이젠 교양의 심화나 지적인 욕구의 충족을 지향하는 일반인들의 문화관광 여행과 구별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대학 내에서 학술답사는 국어국문학과의 고유활동으로 굳어지다시피 했다. 그 분야의 교수 로 30년 넘게 재직해오면서 깨달은 시대의 변화는 매우 크고 의미심장하다. 인터넷의 무한한 확장, 기계화를 통한 전통사회의 변화, 교통통신의 발달을 통한 전국의 1일 생활권화 등으로 현장 조사나 학습의 중요도가 많이 저감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국어국문학과 학생들을 데리고 역사와 전통의 맥이 살아있는 현장을 둘러 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신나는 일이다.

 

올해는 안동지역을 답사 대상으로 잡았다. 첫날(517)은 하회마을에 도착, 하회별신굿 탈놀이를 함께 관람한 뒤 하회마을의 정취를 음미하고 병산서원(屛山書院)에 들렀으며, 풍산읍에 있는 안동 펜션 & 게스트에서 1박을 했다. 다음 날은 분과에 따라 고전문학학회와 민속문화학회는 가송리 농암종택(聾巖宗宅)을 방문한 뒤 한국국학진흥원 및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에, 현대문학회는 권정생 동화마을과 이육사문학관 및 농암종택에 각각 들렀으며, 언어학회는 가구1리 마을회관에서 방언을 채록하고 영호루와 안동 문화의 거리를 답사했다. 셋째 날에는 전원이 함께 도산서원(陶山書院)과 소수서원(紹修書院)을 들러 서원문화를 체험한 뒤 오후에 서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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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이 지역의 문화와 정신을 받아들이기에 23일은 매우 짧았다. 그러나 학생들의 표정에서 작지만 어떤 변화의 조짐을 읽어낼 수는 있었다. 물론 학생들 각자의 내면적 수준이나 성향에 따라 감수(感受)한 것들은 달랐으리라. 어쨌든 늘 복잡한 도심에서 각자의 삶을 살다가 함께 한국의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불리는 안동에 찾아가 선비문화를 체득한 것은 이들의 삶에 큰 정신적 자산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나는 답사 기간 내내 서원을 중심으로 펼쳐진 이 지역의 사림문화(士林文化)를 제대로 볼 것을 학생들에게 주문했다. 농암종택 안 쪽에 위치한 분강서원(汾江書院)의 입교당(立敎堂)에 학생들을 앉히고 농암 선생의 풍류와 자연 친화의 삶을 강의했고, 도산서원의 전교당(典敎堂)에서는 퇴계 선생의 시가와 도학적 세계관을 강의했다. 병산서원, 도산서원, 농암종택, 소수서원 모두 자연과의 조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심성 수양의 공간이었음을 학생들에게 이해시키고자 노력했다.

 

그 분들이 추구한 도()자연 속에서 읽어낸 불변의 길이라고 보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늘이 천성으로 부여한 생태의식이 바로 도학의 바탕이었던 것이다. 주어진 세상의 삶을 마치고 뛰어난 생태 공간인 안동의 땅에 스며든 위대한 스승들. 일찍이 퇴계 선생은 <도산십이곡>의 제9곡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지 않았던가.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古人) 못 뵈

고인(古人)을 못 뵈어도 가시던 길 앞에 있네

가시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가고 어찌 할꼬

 

그렇다. 신재(愼齋), 농암(聾巖), 퇴계(退溪) 등 우리 스승들의 걸어가신 길을 뒤쫓아 가면 잘못 될 일 없을 터인즉, 이제라도 따라가 보자. 학생들을 지도하겠노라 나선 길이었으나, 나 스스로 배움만 가득 안고 온 23일의 학술답사였다.

 

농암종택에 들어서며

 

농암종택 안쪽의 넓고 안온한 풍경

 

농암종택의 분강서원

 

분강서원에서 강의를 듣는 학생들

 

멀리서 잡은 농암종택

 

안동 한국국학진흥원

 

안동 박실에서 구미 일선리로 이건한 삼가정의 현판

 

퇴계 선생에게 내린 교지

 

도산서원의 안온한 모습

 

도산서원 전교당 앞에서

 

도산서원 전교당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며

 

도산서원 시사단(試士壇)

 

순흥의 죽계루 앞에서

 

근재 안축(安軸)의 <죽계별곡(竹溪別曲)> 현판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학술답사집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