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쇠락’이라는 절망적 징후의 고문 속에 지난해를 보냈다. 논문을 쓰고 학회에 참여하고 강의실을 들락거리는 등 습관화된 생활인의 자세를 견지하며 '늘 삶은 이런 거야!’라는 자조적(自嘲的) 자기암시에 길들여지고 있는 나날이다. 해가 바뀌면서 뭔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날이 갈수록 바뀌는 해가 결코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을 수 없다는 또 하나의 절망적 명제로 개칠되어가고 있음을 절감하는 요즈음이다. 학장직에 도전하면서 감히 ‘인문학의 부흥’을 선언했지만, 학장이 되고나서 어느 순간 스스로 인문학의 말살에 참여하고 있는 나를,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변의 교수들에게 그 대열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는 나를 발견하곤 더 깊은 절망과 회의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젊은 시절 나를 학문으로 이끌어주신 선생님은 '오래도록 썩지 않을 책'으로 승부할 것을 힘 주어 말씀하셨다. 그러나 지금 연구실에서 밤늦도록 ‘썩지 않을 책’ 아닌 ‘곧 썩어 문드러질’ 학진 등재 학술지 논문들의 작성에 정력을 불사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내 논문을 심사할 가능성이 많은 동학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 주장에 서 있는 날을 갈아대는 ‘약삭빠름’을 배운다. 그들의 ‘그다지 빛나지 않는’ 논문들을 참고문헌에 집어넣는 교활함도 익혀본다. 학회지의 정해진 규격에 맞추기 위해 ‘맛있는’ 부분들을 죄다 잘라내고 건조한 뼈다귀들만 남겨둔다. 혹시나 탈 잡힐까봐 ‘논리’라는 미명 하에 전혀 맛없는 문장으로 다듬어낸다. 그걸 학문이랍시고 매달려 사는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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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본부에서 학과평가를 하겠다는데, 학문의 독자성이나 절대적 가치성은 평가 기준에 들어있을 리 없다. 평가기준들의 바탕은 도구적 실용성, 적나라하게 말하면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경제성’이다. 그 뿐인가. 중점연구소란 제도를 만들어 예산과 공간을 지원해주는 제도에서는 ‘배금주의’의 극치를 발견하게 된다. 연구소가 아무리 훌륭한 논문집과 학술연구서들을 내도, 아무리 중요한 학술발표를 해도 평가점수에 큰 의미가 없다. 오로지 외부로부터 얼마나 많은 돈을 수주해 왔느냐가 평가의 결정적 기준일 뿐이다. 논문집이나 학술총서 한 권 내지 않아도, 학술발표회 한 번 하지 않아도, ‘큰 거’ 한 건만 수주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 분야의 연구소가 ‘돈 잘 버는’ 분야의 연구소들을 이길 수 없다. 단언컨대, 이런 대학에서라면 조만간 학문은 죽어버릴 것이다. 물론 이런 사례가 이 대학만의 일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나라의 모든 대학들이 이런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다시 한 번 단언컨대, 이 나라의 대학들이 허우대는 얼마간 살아 남을지 모르나, 정신 격인 학문은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취업에 도움이 되는 학과들은 학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고, 그런 학과에는 투자도 많을 것이니 교수들의 연구비 수주액 또한 높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평가 척도를 아무리 바꾼다 해도 인문학 분야의 학과들은 적빈(赤貧)을 면할 수 없다. 지금 우리나라의 대학들은 학문적 수월성(秀越性)의 구현을 위해, 존경받는 아카데미즘의 표상이 되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줄어드는 입학생들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원시적인’ 생존경쟁 그 자체에 몰두하는 현실이다. 지방대학들은 이미 사투를 벌이고 있으며, 수도권이나 서울의 대학들도 조만간 그런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애를 더 낳을 가능성은 아예 없으니 상황은 갈수록 나빠질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중국 학생들을 유치하고 있지만, 중국도 언제까지나 사람 수가 넘쳐나지 않을 것임은 현지의 교수들을 만나보면 알 수 있다. 더구나 그들의 생활수준이 나아지면서 일본이나 미국으로 방향을 돌릴 경우 우리나라 대학들이 누리는 ‘중국학생 특수’도 길어봐야 10년이 고작이다. 이제 목 좋고 산수 좋은 명당에 위치한 대학들의 건물은 양로원이나 위락시설로 용도 변경해야 할 날이 도래할 것이다. 그 때쯤 인문학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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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CEO들을 모아다가 인문학 강좌를 열거나, 심지어 노숙자들까지 불러 모아 인문학을 가르치기도 한다. 인문학의 생활화나 저변확대란 측면에서 바람직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이면을 들여다보면 열악한 인문학의 상황이 도사리고 있다. 죽음을 앞둔 인간만이 가장 순수해지고,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거리의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문학의 임종에 이르러서야 깨달은 셈이다. 사실 잘 나가던 시절의 인문학도들은 밀려드는 대학생들을 감당하기에도 일손이 모자랐다. 그러나 학생들도 외면하고 대학의 재단이나 본부조차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하는 지금, 인문학의 남아나는 일손들을 제대로 관리할 방도가 없다. 대학 외의 수요 창출에 기대를 걸어보지만, 그 역시 한계가 있는 일이다. 옛날에는 글을 읽어 벼슬을 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벼슬자리는 한계가 있고 수요자는 많으니,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당쟁도 바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에서 출발했다. 지금도 젊고 실력 있는 인문학도들이 대학에 입성하지 못한 채 거리를 방황하며 울분을 삼키고 있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이들의 생활을 우리 모두가 책임 질 일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청춘을 바쳐 ‘돈 안 되는’ 학문의 길을 선택한 지식인들이 최소한의 기본생활조차 해결할 수 없는 문제적 현실이 어째서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니란 말인가. 어떻게 수수방관만 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로 방책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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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날이 저문다. 연구실 책상에 앉아 머리를 굴려 보아도 이데아는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작정 거리로 나설 수도 없다. 이 방 어디엔가 내가 찾아 헤매는 이데아는 숨어 있겠지만, 우둔한 인문학 교수의 머리통으로는 자취조차 찾아낼 수 없다. 따스한 방 안의 공기가 행복감보다는 절망감으로 느껴지는 것은 조만간 떠오르는 햇살 아래 참새 같은 새내기들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작은 희망의 끈이라도 건네기 위해 이 겨울 인문학 교수는 무슨 지혜를 어떻게 찾아내야 할지 고민이다. 내 손이 비었다는 걸 안다면 그들 역시 풀솜에 물 젖듯 재빨리 절망의 포로가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인문학 교수에겐 암흑의 시대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