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 ‘차마 보지 못할 것’을 보고야 말았다. 인천 연수구의 한 어린이집에서 33세의 보육교사가 우악스런 손으로 네 살짜리 여자아기의 얼굴을 쳐서 쓰러뜨리는 광경. TV는 나를 고문하듯 그 잔인한 광경을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이제 11개월 된 내 손녀, 겨우 ‘엄마 아빠’ 소리를 되 뇌이며 세상을 익혀가는 내 손녀의 얼굴이 그 아이에게 오버랩 되며 마음 속에 뜨거운 것이 솟아올랐다. TV 화면을 시커멓게 꽉 채운 그 '악녀'의 뒷모습을 향해 무언가 집어던지고픈 충동을 가까스로 참으며, 하는 수없이 TV를 끄고 말았다. 그 아기가 김치를 남겼다든가? 도대체 김치가 뭐 길래?
맹자가 말씀하시길 “인간에게는 누구나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써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를 편다면, 천하를 손바닥 안에서 다스릴 수 있다. 사람마다 누구나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지금 어떤 어린아이가 곧 우물로 빠져드는 모습을 갑자기 발견하게 되었다면, 누구나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이는 안으로 그 어린아이 부모와 사귀고자 해서 그런 게 아니오, 마을의 친구들에게 칭찬을 듣고자 해서도 아니며, 구해내지 않았다는 오명(汚名)을 싫어해서도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요.(…)
<<맹자>> 「공손추 장구(상)」에 나오는 인성론(人性論)이다. 어린 아이가 아장아장 샘으로 걸어 들어가는 걸 그냥 구경만 하고 있거나 ‘옳지 잘한다!’고 손뼉 치는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천하의 날강도라 해도 달려가 아이를 잡아 구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측은지심을 갖추지 못했다면 인간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 맹자의 말씀이다.
맹자의 말씀에 비춘다면, 그 어린이집의 ‘악녀’는 교사는 고사하고 이미 인간이길 포기한 존재다. 인간의 탈을 썼으되 ‘인간이 아닌 존재’다. 단맛 나는 먹을 것들이 넘쳐나는 시절이다. 대부분의 네 살 짜리 어린아이라면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 게 정상이다. 그래도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여 김치를 먹여야겠다면, 우선 김치의 상태와 어린아이의 마음부터 살폈어야 한다. ‘왜 이 아이는 김치를 싫어할까? 혹시 김치에 무슨 문제는 없는가? 이 아이에게 조금씩이라도 김치를 먹게 하려면 무슨 방법을 써야 할까?’ 등등. 교사라면 그런 것들부터 생각했어야 한다. 천사 같은 네 살 짜리 어린아이의 동기를 유발할 수 있는 방법들이야 도처에 널려 있지 않은가? 그녀도 그런 것들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귀찮았겠지. 내 아이도 아닌데. 우선 무엇 때문인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풀 생각부터 했을 것이고, 그 순간 불행하게도 그 어린아이가 희생물로 걸려들었을 것이다. 그 손찌검은 자식에게, 제자에게, 더더욱 네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건넬 수 있는 그것이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달려드는 적군의 숨통을 끊기 위해 내지르는 ‘최후의 일격’ 바로 그것이었다.
이런 일이 어찌 이 어린이집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며, 이 교사만의 일이겠는가. 문밖에만 나서면 강변의 모래알처럼 박혀 있는 어린이집들을 무슨 재주로 다 감시할 수 있단 말인가. 칭얼대는 아이를 간신히 어린이집에 떼어놓고 하루 종일 직장에 갇혀 일에 시달리면서도 아이 걱정에 늘 마음이 편치 않을 이 땅의 젊은 부모들. 잠시라도 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이 정녕 없단 말인가. 인구 줄어드는 것만 걱정할 뿐, 최소한의 보육 대책조차 세워주지 않는 이 나라의 원시성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단 말인가. 여성 대통령을 뽑아 놓아도 이런 원시적인 상황이 전혀 개선되지 않는 것은 그녀가 아이를 낳고 키워 본 경험이 없어서인가?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에서, 초‧중등 교단에서, 대학 강단에서 심심치 않게 만나는 ‘악마들’을 몰아내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교육의 현장에서 바야흐로 전 국민적인 '퇴마의식(退魔儀式)'이라도 한 판 벌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