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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1.23 박근혜 대통령을 보며
  2. 2007.11.06 석학(碩學)이 돈 몇 푼으로 만들어지나
글 - 칼럼/단상2015. 1. 23. 12:30

박근혜 대통령을 보며

 

 

 

‘군자는 말은 어눌하게 하나 행동은 민첩하게 한다’[子曰 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 <<論語>> <里仁>]는 공자의 말이 있다. 군자라면 ‘말수가 적고 좀 느려도 행동만큼은 민첩하게 해야 한다는 것’. 달리 말하면 ‘쉽게 말하지 말아야 하고 일단 말했으면, 반드시 재빨리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을 것이다. 번지르르한 말들을 속사포처럼 내 쏘면서 하나도 실천에 옮기지 않는 달변가들을 꾸짖은 말씀이었을 텐데, 공자 시대의 그런 사정이 오히려 심화 되고 있는 요즈음이다.

 

박 대통령은 누가 보아도 달변가는 아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늘 조마조마한 것이 사실이다. 한 마디 내뱉는 데도 그렇게 힘이 든다면, 도대체 무슨 수로 ‘만기친람(萬機親覽)’을 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어쩌면 대통령이 소통을 싫어하는 이면에는 말에 대한 콤플렉스가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달변가인 참모들과 정치인들, 기자들을 대하는 일이 끔찍하게 생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나이 또래의 우리나라 아줌마들을 한번 생각해 보라. '석학 할아비'라 한들 말로 해서야 누가 그들을 이길 수 있을까? 그런 걸 생각하면 박 대통령의 언변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 말 실력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대단하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바로 그것이 ‘대선 승리의 한 요인’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우리 속담에 ‘말 못하는 사기꾼 없다’는 말이 있다. 대개 앞에 인용한 공자의 말을 보거나 ‘말과 실천’을 결부시켜 온 동양적 사고를 생각해 보아도 ‘말 잘하는 것’이 늘 장점만은 아니었다. ‘깡촌’의 흙 속에서 꼬물거리던 내 코흘리개 시절, 그 때까지 본 적 없는 ‘말끔한 양복’을 갖춰 입고 우리 마을에 내려와  ‘말끔한 달변의 서울말’로 사기 치던 토지 브로커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사기꾼에게 넘어가 몇 십 년을 고생하시던 농사꾼 내 부모의 한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대부분 박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다는 내 친구들의 마음속엔 다른 세대가 쉽게 이해 못하는 그런 공감영역이 있다.

 

자라면서 ‘말만 말끔하게 잘 하는 인간들’을 자주 만났고,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기꾼들이었음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판들을 여러 번 접해오는 중이다. 참, 말 잘하는 사기꾼들이 많았다. 최근 10년 이내 두 번의 선거판을 말로만 본다면 ‘눌변 : 달변’으로 요약된다. 지금의 50대들이 누구인가? 대부분 어려움 속에서 근근이 살아남아 이제 은퇴기에 도달한 연령대다. 전통 교육 속에서 자라나 ‘농경사회→산업화사회→정보화사회→지식기반 고도정보화사회’의 고비들을 용케도 탈 없이 거쳐 온 사람들이다. 어쩜 비슷하게 고단한 환경과 의식 속에 성장했다는 ‘연대감’으로 뭉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국회에서 사자후를 토하던 달변가도 보았다. 당시 나는 그가 대통령이 되면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는데, 과연 그는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 달변이 이른바 ‘종북’이나 ‘극좌’와 합쳐지면 나라로서는 재앙이라는 판단이 들었는데, 나 말고도 그런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일까. 그는 결국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나라를 위해서 천행이었다.

***

지금 50대의 민심이 대통령으로부터 이반(離反)되고 있다고 북악산 언저리에 수심이 가득하다. 50대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불리던 그 50대가 민심이반을 추동(推動)하고 있으니, 당하는 심정으로선 적잖이 당혹스러울 것이다. 오늘 아침 인적 쇄신책이라고 내 놓았으나, 그 역시 ‘격화소양[隔靴搔癢: 신발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다]’의 미봉책일 뿐이다. 참, 답답하다.

 

대통령이 자신의 신조나 철학으로 주변의 개인들을 신뢰하거나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게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으로서 갖는 신뢰와 대통령으로서 가져야 할 신뢰는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대통령은 만인을 상대로 하는 공인이지 개인은 아니다. 두 사람 이상을 상대로 할 때 작동하는 것이 ‘정치 논리’다. 하물며 5천만의 생령(生靈)들을 상대로 하면서 정치논리를 도외시하고, 어찌 개인의 소신이나 철학을 판단의 잣대로 들이댄단 말인가?

 

인사를 말끔히 쇄신하라는 국민의 명령이 있다면, 그간 쓰고 있던 개인의 안경을 국민의 안경으로 즉각 바꿔 써야 한다. 박 대통령이 아직도 개인의 안경을 쓰고 있다면, 그건 공자가 말한 군자의 ‘눌변’ 차원이 아니라 김 모 전 대통령이 언급했다던 ‘칠푼이’의 수준에 머무는 일이다. 누가 보아도, 비서실장이나 ‘문고리 3인방’은 깨끗이 물러나야 한다. 누가 쫓아내기 전에 스스로 물러서는 게 맞다. 누구 말대로 ‘인간적 신뢰를 지킨답시고’ 그들을 껴안고 간다면, 그런 상태에서 아무리 강호의 현사들을 등용한다 한들 그게 어찌 ‘쇄신’이란 말인가? 그래서 국민들, 특히 50대들은 대통령이 답답하다는 말이다. 그의 입을 쳐다보기에도 지쳐 있는데, 행동마저 이리 굼뜨다면 참으로 절망이다.

 

지금 대한민국 호는 ‘북핵, 경제, 안전’의 불안이란 삼각파도에 휩싸여 있다. 판단력이 흐리고 굼뜬 조타수에게 어찌 대한민국 호의 순항을 맡길 수 있겠는가. 즉각 비서실장과 3인방을 내치시라. 팔팔하고 번뜩이는 감각의 30~50대 초반의 명망가들이 강호에는 넘치고 넘친다. ‘삼고초려’라도 해서 그들을 모신 뒤, 만기친람하려 들지 마시고 그들에게 국정을 맡기시라.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지금 그 시대정신을 거스른다면 대통령 스스로를 파괴할 뿐 아니라 이 민족에게 재앙을 안겨 주게 된다는 사실을 부디 명심하시라.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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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11. 6.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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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碩學)이 돈 몇 푼으로 만들어지나

                                                               조규익(숭실대 교수)

우리나라 지식사회의 중심인 대학과 교수집단을 무참하게 짓밟아버린 신정아 사건. 한 계절이 다 가도록 그 본질이 명쾌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 사건이야말로 지식인들의 무사안일과 허위의식, 그로 인한 지식사회의 부패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이런 와중에 교수 정년보장심사에서 신청자들을 대거 탈락시킨 KAIST의 사례가 이른바 ‘교수 철 밥통 깨기’의 전조(前兆)로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 번 임용되면 정년이 보장되는 기존의 관습을 깨야 한다’는 이구동성(異口同聲)의 사회적 구호가 당위로 인식되는 분위기 속에서 상식을 갖춘 교수들이라면 무슨 항변인들 보탤 수 있겠는가.

근래 들어 우리 사회에서 ‘석학’의 언급이 부쩍 늘어나는 것도 이런 현실에 대한 반작용일 수 있다. 말하자면 쭉정이들 틈에서 ‘제대로 된 알맹이들’ 몇몇이라도 키워 지식사회의 건전화를 선도해보자는 발상일 것이다. 학계의 저변을 튼실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상식적 처방을 잠시 외면한 채 이른바 소수의 ‘스타교수, 스타학자’들을 찾아내어 ‘석학’이란 명함을 부여해보자는 발상은 한정된 재원을 투자하여 ‘일시적이나마’ 한국 지식사회의 저급성을 모면해보자는 고육책일 것이다.

그렇다면 석학이란 무엇인가. 과문의 소치이겠으나, 동양권에서는 예로부터 십여 년 이상 저술에 몰두해 온 ‘대학자’를 석유(碩儒)라 했고, 석유는 석학과 동의어로 쓰인 말이다. 근대 이후 학문이 다양하게 분화되면서 어느 분야에서나 석학들은 나타나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석학이란 말 속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해당 분야의 전문적 식견과 사회적 책무의 인식이나 실천이라는 복합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탁월한 학문적 깊이와 함께 지도적 인격이 구비되어야 비로소 ‘석학’의 영예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석학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며, 그런 이유에서라도 스스로가 석학이라고 나설 수 없는 것은 더더욱 당연한 일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학문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는 ‘국가석학’이란 명목으로 ‘우수학자’를 ‘모집’하고 있다. 자격을 갖춘 학회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는 단서를 달고 있긴 하나, 그 추천을 받기 위해서는 학자들 스스로가 자신이 석학임을 입증해야 한다. 몇몇 전공분야의 경우 수백명이 신청했다는 후문이고 보면 우리나라에는 ‘스스로 석학들’이 매우 많은 셈이다. 특정 연구계획으로 2~3년 간 매년 기천만원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연구를 마무리한다고 석학이 된다면 조만간 이 나라는 석학으로 가득 차게 될 것 아닌가.

조나라의 평원군(平原君)에게 스스로를 천거하여 일을 성사시킨 전국시대 ‘모수(毛遂)’의 예도 있긴 하지만, 긴 세월이 필요한 학문은 ‘단박의 술수’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차라리 권위 있는 학회들에 위탁하여 기존의 명망 있는 학자들이나 장래 ‘석학의 가능성을 지닌’ 학자들을 발굴·추천하는 일을 맡겨서 국가 예산을 효율적으로 쓰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다. 해마다 한 두 번씩 수백 명의 학자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석학이라 내세우며 어리석음을 범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백년대계를 책임져야 할 국가가 범하는 최대의 잘못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공무원들이 탁상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석학이란 단박에 돈 몇 푼으로 만들어지는 ‘물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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