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4. 15. 16:53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아일랜드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이며 비평가인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의 묘비에 새겨진 문구라는데, 저는 오늘 어느 도당(徒黨)의 어리석음을 질타하고자 이 말을 살짝 바꿔 보았습니다. 머뭇거리다가 기회를 놓치고 만 자신의 후회를 강하게 드러낸 것이 버나드 쇼의 이 말이라면, 그 말을 패러디한 제 뜻은 (좀 비속하긴 하지만) ‘()지랄 떨다가 똥통에 빠지게 되었다!는 뜻을 갖습니다.

 

지금까지 길지 않은 삶을 살아오면서, ‘()지랄 떠는 인간들을 수도 없이 보아왔는데요. 지난 1년 가까이 이른바 친박 도당이 보여준 행태처럼 저급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 친박 도당의 꼭대기에 누가 앉아 있는지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삼척동자라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 지금의 현실이 목불인견(目不忍見)이어서 참을 수 없이 슬퍼집니다.

 

저는 베이비 부머 세대입니다여유롭지 못한 환경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풍요를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는 늘 박정희 전 대통령을 '하늘처럼' 숭배하셨지요. 그 분 덕에 이만큼이라도 먹고 살게 되었으니, 그 따님인 박근혜 대통령을 무조건찍어야 한다고 우리들에게 힘주어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박 전 대통령이 독재자였다는 사실을 말씀드려야 통하실 어른이 아니었기 때문일까요? “, 알았습니다. 어머니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그렇게 하지요!”라고 응수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박 전 대통령의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들 가운데 누가 나섰어도 오늘날 이보다 나아졌겠는가?’라고 가끔 자문해 보곤 했습니다만.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효도하는 셈치고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해보기로 한 것이지요. 그날부터 박빠가 된 것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남자들처럼 술자리에서 해롱거리며 측근들이나 친인척들 뒷배나 보아주면서 적당히 눙치는짓들은 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굳게 믿은 것이지요.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정치에는 그것 말고도 참 많은 것들이 있더군요. 무수한 이해 당사자들이 얽히고설켜 빚어내는 난리 통 속에 대통령의 길을 무리 없이 걷는다는 것이 제정신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머리 위엔 북한이라는 미쳐버린 집단이 존재하고, 우리 내부에도 이들과 공식비공식으로 연결된 수많은 세력들이 엄존한다는 현실까지 감안한다면, 미국의 한 개 주나 중국의 한 개 성만도 못한 크기의 '대한민국호'를 운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뚜렷이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적어도 박근혜 대통령이라면, 취임 즉시 널리 인재를 구하여나라의 중책을 맡기고, 정계의 이해당사자들을 수시로 만나면서 국사를 조율해 나가리라 당연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첫 단추인 장차관 인사부터 고개가 갸웃거려졌어요. 누구 말대로 상당수의 인사들이 듣보잡들이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까막눈인 제가 보아도 장관은커녕 동장 직분조차 감당 못할 인사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기 때문이지요. 실정법을 어긴 전과 기록들도 더러 보였고, 도덕적인 하자를 지닌 인사들도 적지 않았지요. ‘웬만하면 통과시켜 주지 그러냐?’고 야당의원들을 설득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일이 한 번 두 번 반복되다 보니 대통령의 통치능력에 대한 의구심(疑懼心)이 제 마음 속에 생겨나기 시작한 거지요. 인사의 난맥이 하도 빈번하게 일어나다 보니, 나중에는 정치가로서의 자질을 의심할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대통령은 인사는 비밀이 중요하다! / 자리가 사람을 만들지 사람이 자리를 만드느냐? / 이왕이면 나와 가까운 사람들을 써 줘야지!’라는 그 나름의 믿음을 갖고 있는 듯 했습니다만. 정말로 세상이 그럴까요? 인사 과정에서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면, 부득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는 게 최선이고, 좀 멀리 있는 사람을 선택한다 해도 검증의 잣대를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는 제한이 따르게 마련이긴 하지요. 그렇다면 넓은 세상에 널려 있는 강호의 인재들은 아예 대통령의 인재풀(pool)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겠지요. 사람을 대충 써도 그 자리가 결국 사람을 자리에 걸맞게 변화시킬 거라는 믿음은 더욱 황당합니다. 인사권자가 아마도 그렇게 한 데에는 내가 모든 걸 관장할 것이니(즉 '萬機親覽'할 것이니), 내 말에 고분고분 따르기만 하면 돼!’라는 잘못된 철학이 작용했을 겁니다. 그러나 엄청나게 분화된 현대 국가의 일들 모두를 어떻게 대통령 혼자서 친람할 수 있을까요? 나와 가까운 사람들만 쓰겠다는 것은 10명 이하 규모의 자영업에서도 금기로 여기는 일입니다. ‘세상은 넓고 인재는 많다는 상식만 갖고 있어도 자신의 주변에서만 인재를 찾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태평시대를 일군 옛날의 제왕들은 강호를 덮을만한 '인재찾기의 그물'을 갖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좋은 인재를 찾아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하기도 하고, 믿을만한 측근을 촉수(觸手)로 삼아 천하의 영재들을 발굴하기도 한 역사적 사실들을 알고 계시지요?

 

박 대통령의 비극은 바로 인재 풀과 정치적 역량의 빈곤에서 빚어졌다고 보는데, 동의들 하시나요? 지금 여당을 보세요. 여당 내의 이른바 내부자 그룹이라 할 수 있는 친박 집단을 보세요. 그들의 무기는 뭘까요? 대통령께서는 진심을 말하지만, 그 진심의 잣대는 무언가요? 보스가 잘못 된 길을 가고 있음에도 제대로 된 충언(忠言)이나 고언(苦言)을 올리지 못하는 예스맨들진실한 사람들로 생각하는 건가요? 제가 생각할 때 대통령이 생각하는 진실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부류로 판단됩니다. 보스가 가야 할 올바른 길이 무언지 애당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 하나이고, 알면서도 눈앞의 영달을 도모하기 위해(즉 자리에서 떨려나지 않기 위해) 모른 척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 둘이지요. 그런데, 지금 친박 도배들의 행태를 보면, 두 경우 모두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무지 인재가 보이지 않아요. 그나마 인재인 듯 보이는 인간들도 바른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대통령 주변의 인사들은 아무 쓸모없는 허깨비들뿐입니다. 그러니, 대통령이 잘 될 수 있겠어요?

 

국어 선생으로 일생을 살아온 사람이 바로 저예요. 이번 비극의 단초가 된 유승민 의원 건에 대하여 한 말씀 해볼까요? 물론 대통령과 유 의원의 관계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섣부른 생각인지는 모르겠습니다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 했던가요? 그가 대통령과 관련하여 공식적으로 천명한 의견들 가운데 제가 가장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말이 그겁니다. 그 말이 나가자 대통령은 배신자 운운하며 삼척동자도 그 대상이 누군지 알 수 있게 노발대발했지요. 그 말이 어째서 배신의 내포를 갖는지에 대해서 지금까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대통령께서 애당초 세금을 늘이지 않고 복지를 확충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취임 이후 재원 문제로 복지 분야의 조정이 국정의 가장 큰 이슈가 아니었나요 약속한 복지를 위해 긴요한 다른 분야들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던 경우도 있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국정의 책임을 공유한 여당의 원내대표가 그런 점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해결책을 모색하자고 말한 것이 그리도 잘못 된 일인가요? 혹시 대통령에게 미리 허락받지 않고 야당의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뜻이었을까요? 백보를 양보하여 설사 그렇다 해도, 그것이 배신이란 극악한 어휘로 재단할 일인가요? 대통령인 자신과 미리 상의하지 않은 점이 못내 서운했다면유 의원을 몰래 불러 조용히 식사라도 함께 하면서 그의 생각을 들어 보았어야 하는 일 아닌가요? 소주잔이라도 기울이면서 국정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협조를 당부했다면, 오늘날 사태가 이렇게 커졌을까요? 대부분의 국민들이 대통령 스스로 유 의원을 배신자로 낙인찍었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설사 배신했거나 배신하려는 사람이 있다 해도, 개인이든 집단이든 최선을 다하여 그들을 내 편에 머물러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도, 전략상으로도 맞는 일 아닌가요?

 

논어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葉公問政 子曰 近者說 遠者來섭공이 정치를 묻자, 공자 말씀하시길, 가까이 있는 자도 기뻐하고, 먼데 있는 사람들도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정치란 가까운 사람들도 즐거워하고, 먼 데 있는 사람들도 (덕을 흠모하여) 모여 들게 해야한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저는 좀 달리 해석하고 싶군요. “가까운 사람들이 기뻐하면, 먼 데 있는 사람들도 모여 든다고 말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로서는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한때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사람들이 얼마 후에 보면 모두 다른 곳으로 떠났거나 적이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삼척동자도 잘하는 어장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사람들이 속속 떠나는 것이며, 떠난 후엔 예외 없이 적으로 바뀌는 것일까요? 만일 대통령 주변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면 그들이 다른 곳으로 떠날 일도 없을 것이고, 설사 다른 곳으로 떠났다 해도 최소한 적이 되지는 않을 것이며, 그러다 보면 반대로 다른 동네 사람들도 몰려들 것 아닌가요? 도대체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멘트가 무엇이기에 전 국민을 상대로 배신자 운운하시며 멀쩡한 원내대표를 쫓아내게 만드셨고, 그것도 모자라 아예 공천에서까지 배제하는 무리를 자행하게 함으로써 이런 비극적 파국을 초래한 것일까요?

 

이번 총선의 과정에서, 진짜로 내팽개쳐야 할 인간들은 이른바 진실한 사람들진박 패거리이고, 소중히 어루만지며 키워야 할 인물들은 유 의원 같이 철학이 분명할 뿐 아니라 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임이 가려졌다고 봅니다. 지금 유권자들은 더 이상 어리석은 백성들이 아닙니다. 적어도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멘트를 배신의 잣대로 휘두르는 대통령이나 측근들을 꾸짖을 만큼 상식적 통찰력을 지닌 사람들이 다수임을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새누리당에게 그다지 인색하지 않을 만큼의 표라도 준 것이지요. 새누리당의 이른 바 진실한 사람들은 이번 결과를 참패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던데, 천만에요! '선전(善戰)'으로 보아야지요. 사실은 국민의당이 얻었다는 30여석 이하를 얻는 데 그쳤을 수도 있습니다. 국민들이 아직은 따스한 온정을 갖고 있기에, 그 정도라도 안겨 주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른바 진실한 사람들은 누구 말대로 이제 (좀 비속한 말이긴 하지만) ‘()지랄들을 그만 떨고조용히 물러가 자숙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들의 유치한 행동들을 바라보며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혀를 차는 국민들이 열에 일곱 여덟은 된다는 사실을 부디 명심하기 바랍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3. 19. 15:53

 

'Giral'[각주:1]떠는 친박도배(徒輩)

 

 

 

특정 정치이념으로 뭉친 결사체가 정당이라면, 한국의 정치 결사체들을 정당이라고 부르기가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다. 그 안에 수많은 소그룹들이 있어서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데, 대부분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모임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다양한 규모의 도당(徒黨)들끼리 치고받는 싸움들을 통해 결사체의 헤게모니를 잡아가는 것이 현재 한국 정당들의 모습이니, 그런 결사체들을 붕당(朋黨)’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리라.

 

새누리(붕)당에는 크게 친박과 비박이란 소그룹이, ‘더불어민주(붕)당에는 친노와 비노란 소그룹이 각각 패권 다툼을 벌이는 중이다. 억지스러움에서 난형난제이긴 하나, 새로운 수장 아래 별 잡음 없이 총선이란 전쟁터를 향하고 있는  친노에 비해 친박은 훨씬 더 밉상이다. 국정을 담당하고 있는 여당으로서 온갖 꼼수를 부리며 패권을 잡으려는, 그 유치찬란하고 미련스러운 작태는 구토를 참기 어려울 만큼 혐오스러운 게 사실이다.

 

공관위인지 공천위인지 알 수는 없지만, 위원장의 완장을 차고 험상궂은 표정으로 이빨 빠진 개작두를 둘러멘 이 모 의원을 보노라면, 한 줌 권력이 무언지 참으로 딱하기만 하다. 온갖 영화로운 작위(爵位)를 거친 그 나이의 인물이라면, 단 한 낱의 덕망이라도 표정에 나타나야 정상일 것이다. 툭하면 짜증스런 말투로 주변 사람들과 부딪치기만 하는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뿐이니, 그는 지금껏 어떤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남을 평가하고 내치려면 공명정대한 기준과 원칙이 있어야 한다. 평가의 공정성과 점수의 정확성에 평가자의 원만하고 따뜻한 인격이 포함될 때 비로소 공명정대함의 가치는 구현된다. 꼼수는 꼼수를 낳고, 둔사(遁辭)는 또 다른 둔사를 낳는다. 멀쩡한 사람에게 현미경을 들이대고 흠을 찾으려 하고, 흠투성이의 사람에게 망원경을 대고 눈까지 감으려는 꼼수 앞에 할 말을 잊는다. 최고 권부의 밀명(密命)을 받았다고 모두들 추측하는데, 본인만은 한사코 원칙대로 한다고 강변한다. 매에 쫓겨 도망가는 까투리가 부리만 땅에 박으면 안전한 줄 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도당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는데, 자신들만은 속내를 들키지 않았다고 희희낙락하는 꼴이다.

 

멀쩡하다 못해 훌륭하기까지 한 인물들을 공천에서 배제해 놓고, 배제한 이유를 대지 못한다. ‘최고 권부의 미움을 샀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붕당의 정체성 운운으로 둘러대려 한다. ‘붕당에 무슨 정체성이 있을 것이며, 정체성이 있다한들 붕당의 정체성정당의 대의명분과 어찌 같을 수 있단 말인가.

 

제대로 자격을 갖춘 사람만이 판관(判官) 노릇을 할 수 있다. 그 때의 자격이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이다. 거기에 더하여 최고 권부가 가당찮은 압력을 가할 때 바른 소리로 깨우치려는 용기와 지혜까지 갖추면 금상첨화다. 좋은 사람을 뽑는 것이 바로 선거(選擧)’. 지금 여당이라고 자처하는 새누리붕당이 보여주는 작태는 골목 깡패들의 행태 바로 그것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북한의 김정은이는 핵을 만들어 우리의 심장에 쏘려 하고, 중국과 미국은 패권을 다투는 중이며, 간사한 일본은 식민시대의 영화를 못 잊어 발광하는 중이다. 그 뿐인가. 우리의 아들딸들은 직장을 못 찾아 좌절하며 헤매고 있다국민들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서 떨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형국이다.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인간들이 이 시대의 과제가 무엇이며, 무슨 아젠다(agenda)’를 가져야 하는지 등을 알지도 못하면서 권력의 단맛만 추구하고, 최고 권부에 아부나 하려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명하노니,

그대들은 이제 향리로 물러가 부디 자숙하며 수양하기 바라노라.

 

 

 

 

 

  1. 본의 아니게 뒷골목의 비속어를 쓰게 된 점, 사과드립니다. 백규서옥 주인 드림 [본문으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8. 7. 21:23

이른바 국회의원이란 자의 천박한 입

 

                                                                                                                                                         백규

 

본인에게는 약간 미안한 말이지만, ‘이종걸’이란 국회의원[통합민주당]이 있었는지 오늘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트위터에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를 ‘그년’으로 지칭했다 하여 언론매체들이 떠들썩하다. 네티즌 가운데 몇 사람이 표현의 지나침을 지적하자 ‘그년’이 ‘그녀는’의 준말이라고 강변했다니, 더욱 기가 찰 일이다. 30년 가까이 국어선생을 하고 있지만, ‘그년’이 ‘그녀는’의 준말로 일상 언어생활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서야 알게 되었으니, 나도 문제적 인간인가?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지난 번 김용민이란 사람이 막말파동으로 국회의원 후보 자리에서 쫓겨난 지 채 몇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같은 당에서 또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런 걸 보면 바야흐로 이제 정치의 계절은 시작된 것 같다. 5년 전 선거철에도  정치인들의 험한 말은 차마 들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정치인들의 언어순화를 요구하는 내용의 칼럼을 쓴 적이 있었다.[조선일보 바로가기] 그러나 상황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지금, 반복되는 ‘역사의 법칙’이나 씁쓸하게 떠올릴 뿐이다.

 

                           ***

 

그렇다면 왜 이렇게 험한 말들이 속사포처럼 튀어 나오는 것일까. 그 이유를 요즈음 사람들이 ‘없으면 단 한 시도 못 산다’는 SNS 즉 ‘사회적(사교적) 연결망 서비스’에서 찾게 된다. 긴 문장 대신 짧은 문장으로 수시로 일어나는 상황이나 생각을 전달하는 메커니즘이 바로 그런 서비스이다. 어떤 사실을 목도하거나 말을 들었을 때, 또는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 때 잠시잠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돌멩이 던지듯 뱉어내는 것이 바로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다.

 

참 가관인 것은 나이가 지긋이 들었다고 생각되는 서울시장도, 정당의 대표나 국회의원도, 상당수 대학교수들도 여기에 목을 매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그 말의 진위를 따져 볼 겨를도 없이 그냥 쏘아대고 만다. 그 말은 즉각 팔로워(follower)들에게 전달되고, 그들은 또 자신들의 팔로워들에게 리트윗(retweet)함으로써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간다.

 

일단 트윗 혹은 리트윗된 말들은 주워 담을 수도 없다. 옆에 있는 단 한 사람에게 속삭이듯 건넨 말도 주워 담을 수 없거늘 하물며 수십만 수백만에게 전달된 말을 무슨 수로 주워 담는단 말인가. 그런 말들은 진위에 관계없이 여론이란 허울을 쓰고 나라를 흔들어 놓기 일쑤다.

 

                          ***

 

박원순 서울시장도, 서울법대 조국 교수도, 소설가 이외수 씨와 공지영 씨도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SNS 애용자들이다. 엄청난 팔로워들을 거느린 그들이 부러워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사실 이들의 한 마디 말이 갖는 의미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가. 자신들의 말 한 마디에 따라 대중들이 쉽게 움직인다고 생각한다면, 그 말들을 가볍게 SNS로 던져댈 일은 아니다. 그래서 SNS에 의존하는 요즈음의 정치인들이나 사회운동가들, 문화인들이 그렇게 천박스러워 보일 수가 없다.

 

한 마디 말을 꺼내기 위해 수십 번 되 뇌이고 고민하는 과정을 이들은 아예 생략해 버린다. 일단 던져놓고, 나중에 잘못이 드러날 경우 수정하면 된다는 배짱들일 것이다. 그래서 늘 강호에는 무책임한 말들로 인한 혼란 때문에 단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참으로 한심한 인사들이 아닌가. SNS를 애용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흡사 ‘고자질하는 애들’ 같다. 무슨 문제만 생기면, 일단 자신이 곰곰 생각하며 해결하거나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의 팔로워들에게 큰 소리로 떠들고 본다. ‘그들이 어떻게 해주겠지’ 하는 심산일까.

 

팔로워들 가운데는 얼마나 단세포적이며 생각 없는 어린애들이 많은가. 이 사회의 어른을 자처하는 인간들이 자신들이 해결해야 할 공공의 일들을 ‘아가들’에게 고자질하여 들고 일어나게 만드는 격이다. 그래서 나는 툭하면 SNS에 의존하는 현대의 정치를 ‘고자질의 정치’라고 생각한다.

 

이종걸이란 국회의원도 아마 그 SNS의 마력에 빠져 있는 인물인 듯하다. 박근혜 후보에게 잘못이 있다면 기자회견을 하든 칼럼을 쓰든, 아니면 만나서 항의를 하든 방법은 많을 것이다. 어쩌자고 ‘그년’이란 상말 호칭을 사용하여 수많은 팔로워들에게 뿌려댄단 말인가. 그러고도 스스로가 국회의원임을 내세울 수 있는가? 국회의원으로서의 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

 

“구설자(口舌者)는 화환지문(禍患之門)이요 멸신지부(滅身之斧)라[입과 혀는 화가 들어오는 문이고 몸을 망치는 도끼다]”, “상인지어(傷人之語)는 환시자상(還是自傷)이니 함혈분인(含血噴人)이면 선오기구(先汚其口)니라[남을 해치는 말은 도리어 스스로를 해치니 피를 머금고 남에게 뿜으려 하면 먼저 자신의 입을 더럽히게 되느니라]” 등의 말들은 모두 옛날에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과서 <<명심보감(明心寶鑑)>>에 기록되어 있다. 아무리 몹쓸 시대로 변했다 한들, 환갑 진갑 다 지냈거나 그에 가까운 어른들이 옛날 열 살 남짓되던 아이들만도 못해서야 쓰겠는가? 정치인들이여! 부탁하노니 반성하는 뜻에서라도 당분간 제발 그 입들에 자물쇠 좀 채워주기 바란다.

 

<2012. 8. 7.>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8. 1. 09:29

중국은 무도(無道)한 깡패국가, 세계 평화의 최대 걸림돌이다.

 

                                                                                                                                           백규

 

근자 중국의 마수(魔手)로부터 가까스로 풀려나 귀국한 김영환 씨에 의해 중국의 치부가 만천하에 폭로되었다.

 

중국을 다녀 왔거나 그들과 공식적인 거래를 해본 사람들은 대충 알고 있겠지만, 그들이 아직 원시적 야만의 의식수준에서 헤매고 있음은 분명하다. 세계에서 국가 공권력이 공공연하게 고문을 자행하는 나라의 대표적 사례가 북한과 중국이다. 공자와 맹자, 주자와 같은 훌륭한 선조를 모시고 있는 나라의 못난 후손들이 벌이고 있는 야만적인 폭거는 그들의 행태로 미루어 앞으로 몇 세기가 흘러도 청산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미개국을 이웃으로 두고 있는 대한민국.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해야 할까. 툭하면 잡아다 고문을 해도 모르는 척 하면서 '잡혀 들어간' 우리 국민의 '기민하지 못함'만 탓해야 할까. 어떻게든 덩치만 큰 '깡패국가' 중국의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아야겠는데, 당장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없다. '정신 바짝 차리는 것'만이 그나마 그런 깡패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 모두 함께 지혜를 짜 내야 한다.

 

2005년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지금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김문수 지사가 국회의원으로 있던 당시였다. 그가 중국에서 탈북자 문제인가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그 현장에서 무도한 중국의 공권력으로부터 테러 비슷한 폭행을 당했다. 한 나라의 독립된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은 어느 나라에 가서든 최소한 외교관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김 의원을 잡범 다루듯 한 일은 국제법의 관례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김 의원을 탓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무도함을 먼저 탓했어야 할 이 땅의 정치인들 혹은 지식사회가 억울한 김 의원을 비난한 것은 뿌리 깊은 '노예근성'의 발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종북주의자들'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필자는 당시 분노를 금치 못하고 아래와 같은 칼럼을 <<조선일보>>(2005. 1. 17.)에 기고한 바 있다. 그 글을 통해 위정자들에게 '민족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최소한의 방책이라도 마련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 나라를 이끌어 간다고 하는 위정자 그룹의 '대책없음'이 우리를 분통 터지게 만드는 요즈음이다. 지금 여야를 막론하고 대권을 꿈꾸는 이른바 잠룡(潛龍)들은 무엇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갖고 있어야  한다. 깡패국가의 볼모로 전락한 국민이나 국가의 대통령이 된들 무슨 영광이겠는가? 얻어 맞으면서도 배만 부르면 그만인 '돼지'로 만족할 것인가?

 

당시의 글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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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자존심

 

 

▲ 조규익 교수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중국의 공권력에 폭행을 당했다. 국가 간의 이해(利害)가 개입된 문제라고는 해도 ‘때린 놈’이나 ‘맞은 놈’ 모두 우습게 되었다. 더욱 희한한 일은 때린 놈의 역성을 드는 집단이 우리들 속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점잖다 해도 ‘불량배에게 맞고 들어온 자식’을 꾸중하는 부모는 없다.

 


사실 중국을 지렛대로 북한을 움직이려면, 중국과 우리의 이해관계가 맞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란 어렵다. 북한의 체제를 유지하도록 도와주면서 남한으로부터 경제적 이득까지 챙기려는 중국인들의 계산법은 천하공지(天下共知)의 사실이다. 분단된 우리 민족을 뒤에서 조종하며 실익을 챙기자는 그들의 ‘꼼수’를 우리는 민족사 최대의 수치로 받아들여야 정상이다.

 

따라서 이번 일을 국제화 시대의 나라들 간에 일어날 만한 외교적 사건으로 단순화 시킬 수는 없다. ‘민족적 자존심’의 원칙적 잣대는 어느 나라와의 관계에서도 최우선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특히 중국에 대해서는 그 잣대가 좀더 복잡하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80년 전의 일을 떠올려 보자. 반정(反正)으로 인조(仁祖)를 옹립한 서인(西人) 정권은 정통성을 인정받아야 했다. 중국으로부터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받지 못하면 국내에서 반대파를 누르고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누르하치의 기세가 바야흐로 명(明)나라의 숨통을 끊어갈 무렵이었다. 이덕형(李德泂)을 정사(正使)로 하는 주청사(奏請使)가 명나라 조정에 파견되었고, 그들은 넉 달 가까이 북경에서 온갖 수모를 겪는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정사가 ‘시랑(侍郞)’ 정도의 관리들에게 농락을 당하기 일쑤였고, 자신들의 뜻을 요로에 전하기 위해 뇌물을 밥 먹듯 써야 했다. 북경의 혹심한 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새벽부터 길거리에 꿇어 엎드려 출근하는 각로대신(閣老大臣)들에게 손을 비비던 노구(老軀)의 정사는, 바로 역사 속에 그려진 우리 민족의 자화상이다.

 

 

그뿐인가. 천신만고 끝에 각로들을 만난 정사. 그들의 괜한 트집으로 섬돌에 내동댕이쳐져 울부짖던 그 참상을 다시 무슨 말로 표현할까.


 

역사에서 가정(假定)은 부질없다지만,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무자비하고 철저하게 ‘농락해 온’ 저들의 무례함을 제때 제대로 징치(懲治)했더라면 현대사는 좀더 다른 방법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징치’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우리가 ‘자존심’을 세우는 방법만이라도 강구했었다면 지금 이렇게 온 국민이 참담함을 되씹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망해가는 명나라에게 빌붙어 국내에서 권력을 장악하려던 일부 무리들의 ‘꼼수’는 결국 민족의 자존심을 망치고 그후 조선에 잦은 전란을 초래한 원인의 하나가 된 것만 보아도, 통치 집단의 지혜로움은 분명 민족사 전개의 향방을 가르는 지표로 작용하는 게 사실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세상사,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겉모습은 달라져도 본질은 변할 리 없다. E H 카(Carr)의 말처럼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가 역사임에도, 우리는 역사로부터 배운 것 없음을 만천하에 보여주고 말았다. 특히 21세기 초입의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집단들이 매우 우매(愚昧)하고 게으르다는 점, 국민으로서는 그것이 못내 통분하다.

 

 

역사책의 한 쪽만 넘겨 보아도 우리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진실은 그득하다. 지금 중국은 남북의 분단 상황을 지렛대로 삼아 그 사이에서 철저히 이익을 취하고 있다. 그 와중에 농락당하는 건 남북한 모두의 자존심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조선일보, 2005. 1. 17.>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