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2. 6. 04:25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 안내소 및 입구
[여기서 암각화 현장까지는 자동차로 10분 이상 달려가야 함]

 

 

 

 


건너편 길에서 잡은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 탐방로 입구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에서 암각화들을 열심히 살피고 있는
미국인 부부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의 벼랑길 탐방로

 

 

 

 

 

돌에 새긴 푸에블로 인들의 꿈

 

 

 

 

 

 

우리나라 울산의 천전리 각석[국보 147]과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를 가보신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수렵에 의존해 살던 수천 년 전인 선사시대의 우리 민족이 만들어낸 생활예술이 바로 그것들이다. 고래, 호랑이, , 멧돼지, 거북, 사슴, 토끼 등 바다와 육지 동물들이 두루 등장하고, 20여명이 작지 않은 배를 타고 고래를 사냥하는 모습도 그려져 있다.

 

근처의 천전리 암각화에는 좀 더 추상화된 그림들이 등장한다. 연구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마름모꼴이나 동심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데, 그것들에 내포된 의미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대상의 세밀 묘사에 치중한 사실화와 함께 내재된 의미를 암시하는 기호의 형상에 치중한 추상화가 같은 지역에 공존한다는 것은 선사시대에 이미 우리 조상들의 미학이 대단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

 

 

 

 


울산 천전리 암각화[왼쪽의 동심원을 유심히 보아 두시지요.]

 

 

 

 

세계문화사적 관점에서 우리민족의 우수성이나 문화적 자존심을 선양하기 위해 그것들을 잘 보존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인데, ‘그냥 깔아뭉갤 것이냐 보존할 것이냐를 두고 벌이는 말씨름에 귀한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런데, 이곳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에서 나는 그와 유사한 암각화들을 만났다. 물론 화질이나 형상화의 수준으로 우리나라 것들보다는 훨씬 못하지만.

 

***

 

앨버커키 도착 사흘 째 되던 날, 빛나는 햇살은 시가지에 서린, 찬 기운을 녹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앨버커키를 따라 17마일[27km]이나 이어진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를 찾았다. 안내소를 통과하여 한참을 운전해 가니 앞쪽으로 푹 파인 분지가 나타났고, 분지의 뒤로 병풍처럼 생긴 고원(高原)이 펼쳐져 있었다. 총 넓이 7,236 에이커[29.28]의 분지와 고원은 그로테스크의 미학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있었다. 화산작용으로 생긴 분지는 시가지의 주택가를 향해 열려 있었고, 그 주변을 길게 둘러싸고 있는 가파른 벼랑엔 화산활동으로 생긴 현무암들로 뒤덮여 있었다. 분지 위쪽은 공사로 인해 폐쇄되어 있어 부득이 분지 앞쪽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저 시커먼 돌 더미들 사이에 무슨 의미 있는 것들이 숨어 있을까. 참으로 단순 소박한 황량함, 그리고 침묵만이 검은 돌들과 함께 그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 구역도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의 모습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의 모습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의 모습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 공간인 국립 암각화 유적지’. 다섯 개의 화산 분화구, 수백 개의 고고학적 현장, 고대 푸에블로 인들과 스페인 정착자들에 의해 그려진, 대략 24,000여 점의 그림들을 포함한 문화와 자연 자원들을 포함하고 있는 살아있는 박물관이었다.

 

정문을 통과하여 수백 미터를 전진, 산길 바로 앞의 작은 주차장에 차를 댔다. 나무다리를 건너 돌산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푸에블로 인들이 그 사이에 숨어 있기라도 한 듯, 수많은 중얼거림이 돌들 사이에서 울려 나왔다. 그곳에 있는 돌들은 일종의 낙서장, 일기장, 혹은 소중한 게시판이자 광고판이었다. 푸에블로 인들이 돌에 새긴 자신들의 생각이나 소망이 바로 엊그제 올망졸망 유치원생들이 화판에 그린 그림들처럼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림 가운데는 뱀이나 새 등 동물들도, 사람들도, 십자가도 있었으며, 알 수 없는 기호들도 적지 않았다. 어쩌면 그린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만큼, 그것들에 대한 의미의 해석이 쉽지 않았다. 예컨대 다음의 그림 같은 것들은 매우 복합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보였다.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첫째 그림[본문 설명]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둘째 그림[본문 설명]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셋째 그림[본문 설명]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넷째 그림[본문 설명]

 

 

 

 

첫 번째, 두 번째 그림의 소재는 모두 독수리다. 그러나 첫 그림이 비교적 사실적임에 비해 둘째 그림은 약간 추상적이다. 일부 미국인 학자들은 이것을 앵무새[parrot]라 한다하나, 내가 볼 땐 턱없는 생각이다. 이들이 이 황야에서 살아가던 무렵에는 사냥이 주업이었을 것이다. 그럴 경우 그들이 바라본 독수리 같은 맹금류야 말로 사냥의 귀재가 아니었을까. 그간 돌아 본 10여 인디언 네이션들 대부분이 독수리를 상징동물로 채택하고 있었으며, 추장의 옷이나 모자 장식에도 독수리의 깃털이 주된 재료로 사용되고 있는 점을 확인했는데, 그건 그들이 독수리의 사냥 능력을 숭배해 왔다는 증거이리라. 어떤 인디언은 지금 미합중국의 상징 새가 독수리인데, 그것도 자기들의 것을 본뜬 결과라고 강변하며 웃었다.

 

우리가 바위에서 독수리 그림을 보고 있는 사이에도 하늘에는 독수리 한 마리가 유유히 선회하며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 아래 왼쪽에는 작은 동물 한 마리가 들어 있는 네모 칸이 그려져 있다. 내 생각엔 이 그림은 아마도 땅 위의 작은 짐승들을 귀신같이 잡아내던 독수리의 사냥능력이 자신들에게 전이되기를 기원하며 행하던 유감주술[類感呪術, homeopathic magic]’ 행위의 소산일 것이다. 두 번 째 그림에는 독수리와 동심원이 함께 등장한다. 그 동심원은 사실적이기만 한 다른 그림들에 비해 비교적 추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과연 무엇을 형상한 것일까. 동심원은 자아를 중심으로 번져가는 형상이다. 말하자면 자아 중심의 세계 인식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독수리로부터 받은 자신들의 힘과 권능이 주변 지역을 거쳐 결국 온 세상을 지배하게 되리라는 믿음이나 기원을 드러낸 것은 아닐까.

 

약간 복잡한 구도로 이루어져 있는 세 번째 그림에는 거북이, , 물고기, 작은 짐승들, 새 등이 등장한다. 말을 타고 땅 위의 짐승들을 사냥하던 모습이 그 내용인데, 집에 있던 부녀들이나 노인들이 사냥 나간 부족의 전사들이 풍성한 포획을 안고 돌아오길 기원하며 그린 그림으로 보인다. 네 번째 그림은 앞의 것들에 비해 추상도가 더 높은 경우다. 두 명의 인물과 알 수 없는 형상 등 세 개의 존재가 등장하는 것이 이 그림의 내용인데, 일종의 추장 추대식혹은 대관식을 형상한 내용으로 보인다. 즉 머리카락 한 올을 달고 있는 맨 왼쪽의 인물은 모자를 쓰지 않은 인물이고, 가운데 인물은 풍성한 머리칼 혹은 모자를 쓰고 있는 인물이며, 왼쪽의 추상적 존재는 독수리의 상징적 의미[아름다운 깃털, 밝고 지혜로운 눈, 용맹한 발톱]를 부각시킨 모습을 하고 있다. 즉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는 부족의 원로가 새 추장으로 선출된 인물에게 독수리의 권능이 실린 추장의 모자를 그에게 씌워 줌으로써 부족 통솔의 전권을 맡기는, 일종의 대관식 현장을 그린 내용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가 하면 방울뱀[rattlesnake]을 그려놓은 단순화도 등장한다. 사막지대인 이 지역에 많이 서식하던 방울뱀으로부터 피해를 입는 주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일종의 경고표지로 그려 놓았을 가능성이 크고, 독수리가 방울뱀을 잡아채는 그림에도 독수리의 힘으로 방울뱀을 제어해주길 기원하는 주민들의 염원이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의 방울뱀 그림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의 뱀을 잡은 독수리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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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에 깔린 검정 일색의 화산암들은 천연의 캔버스였다. 일찍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살던 푸에블로 인들에게 이 산은 커뮤니티의 단합이나 시공을 초월한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현장이었다. 글자가 없던 시대에 이들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인 형상이었고, 그것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던 훌륭한 기호였다. 구체적인 그림들 속에 동심원 등 추상화 단계의 기호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미루어, 그들의 발전이 순조로웠다면, 글자의 고안에까지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페인 인들의 도래로 인해 자체의 발전은 종말을 고하고, 결국 거대 권력의 품 안으로 스며들게 됨으로써 푸에블로의 문화적 정체성은 한갓 돌멩이들 위의 낙서로 남아 백규 같은 호사가들을 위한 상상의 자료로나 기여하게 된 것이다.

 

울산의 반구대나 천전리의 예술을 주도했던 선사인들이 이곳까지 진출한 것으로 밝혀지길 기대하는 한국인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 어느 곳에서나 만날 수 있는 암각화나 동굴화를 두고 동일 기원설을 주장하는 것도 사실 무리일 것이다. 글자의 바로 앞 단계가 추상화된 기호이고, 그 앞 단계가 구체적인 그림이었음을 감안하면, 어느 지역의 종족이나 부족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문화발전 단계의 보편적인 현상일 뿐. 굳이 이 지역의 그림에서 울산의 암각화를 떠올리며 흥분할 일만은 아니리라.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에서 바라본 앨버커키 외곽의 주택가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에서 바라본 앨버커키 외곽의 주택가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의 암석과 암각화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의 바위산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의 십자가 그림.
스페인 사람들이 온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보임.

 

 

 

 

 


'국립 암각화 유적지[Petroglyph National Monument]'의 동심원 그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29. 15:15

 

 

 


애코머 푸에블로 등 앨버커키 인근 도시들이 표시된 지도

 

 


스카이 시티 이정표

 

 


스카이 시티 가는 길

 

 


스카이 시티 입구의 돌기둥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

 

 


스카이 시티 문장(紋章)

 

 


컬츄럴 센터에서 스카이 시티로 출발하는 셔틀 버스들

 

 

 


밑에서 올려다 본 메사의 주택들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와 스카이 시티, 그리고 푸에블로 인디언

 

 

내 나이 또래의 한국인으로서 푸에블로(Pueblo)’란 이름을 기억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참 오만했던 북한이 간첩들을 활발하게 남파하여 우리나라를 흔들다가 급기야 청와대 폭파와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김신조 등 무장공비들을 내려 보낸 것이 1968117. 그 바로 일주일 후인 1968123일엔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정보 수집함 푸에블로 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되었다. 필자 나이 당시 11. 간첩들이 내 고향 동네의 훌륭한 청장년 두 명을 밤에 죽이고 내뺀 사건으로 몸서리치고 있던 차, 김신조와 푸에블로 호 사건은 북괴에 대한 불신과 증오의 대못을 내 마음에 박고 말았다. 푸에블로란 명칭의 원조를 미국에 와서 만난 것이다.

 

그간 틈 날 때마다 인디언들을 찾아 다녔으나, 시간부족역부족을 느낄 뿐이었다. 미국 전역에 564, 오클라호마에만 39개 종족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데, 나 혼자 어느 세월에 그들을 다 만난단 말인가. ‘문명화된 5개 종족[The 5 Civilized Tribes/체로키(Cherokee), 치카샤(Chickasaw), 촉토(Choctaw), 세미놀(Seminole), 크리크(Creek)]’을 포함 10개 정도의 인디언 종족들을 만나면서 힘과 의지의 소진(消盡)을 절감하게 되었고, 바깥으로 눈을 돌리던 중 뉴멕시코에 푸에블로 인디언이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사실 오클라호마에서 만나는 인디언들은 그들의 정체성[identity]을 의심할 정도로 미국화[Americanization]되었다는 것이 그간 내린 내 판단이다. 내 느낌으로 이 점은 이른바 문명화되었다는 5개 종족 뿐 아니라 여타 종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영어를 사용하고 미국인들의 생활양식으로 살며 미국 정치체제 속의 일원으로서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의 실현을 추구하는 인디언들에게서 그들만의 종족적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인디언들을 만난다면서 박물관이나 찾아다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좌절을 느낀 것은 그런 깨달음의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물론 박물관은 한 종족이나 민족, 국가의 과거현재미래가 통합되어 숨 쉬고 있는 생명의 공간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긴 하다. 그러나 분명 주변에 인디언들이 살아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왜 나는 한사코 화석화된 것처럼보이는 박물관만 찾아다니는가. 그런 회의가 엄습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미국화 된 인디언들은 외모만 인디언의 모습을 띠고 있을 뿐, 문명사회나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이 누구보다 강하다. 그건 미국사회의 여타 마이너리티들인 유색인들이 그런 욕망을 갖고 노력하는 것과 똑 같다. 재미 한인들에게 미국화 되지 말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견지(堅持)하라는 정신 나간 주문을 할 수 없는 것은 인디언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인디언 문화와 역사의 탐사에 나선 내 행로가 암초를 만난 것은 분명하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필요가 절실할 때 홀연 나타난 것이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인디언들이었다.

 

그들을 만나러 앨버커키로 가는 하이웨이의 주변은 키 낮은 식물들과 크고 작은 돌들이 깔린 사막지대였다. 그리고 몇 마일씩 간격을 두고 다양한 이름의 푸에블로 인들이 살고 있는 구역이 우리의 시야를 거쳐 지나갔다.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종류가 이렇게도 많단 말인가. 뉴멕시코에 오기 전만 해도 푸에블로는 단일민족인 줄 알았던 내 무지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장이었다. 오밤중이나 되어서야 앨버커키에 도착, 호텔에 1박을 하면서 다음 날 가기로 한 스카이 시티의 기록들을 점검했다. 그 동안은 매혹적인 이름에 정신이 팔려 그곳이 애코머 푸에블로(Acoma pueblo)’ 인디언들만의 거주구역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그곳에 가면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하나만 갖고 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차를 타고 오면서 많은 푸에블로 인디언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스카이 시티에 살고 있다는 애코머 푸에블로도 그들 중 하나일 뿐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 지역에서는 스카이 시티의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나는 것에 초점을 두기로 한 것이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은 앨버커키에서 서쪽으로 60 마일쯤 떨어진 곳의 스카이 시티, 애코미터(Acomita), 맥카티스(McCartys) 등 세 마을에 살고 있었다. 원래 푸에블로가 점유해온 땅은 500만 에이커에 달하는데, 실제로 현재는 그 면적의 단 10%만 소유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스카이 시티가 바로 올드 애코머(Old Acoma)’의 원래 거주지다. 미국정부의 2010년 통계에 따르면, 5000명 정도의 애코머 인들이 종족적 정체성을 갖춘 사람들로 확인되며, 그들이 이 지역을 800년 이상 계속 점유해온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푸에블로애코머란 말들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앨버커키에 와서 들은 바에 의하면, ‘푸에블로마을[village]’이나 작은 도시[town]’를 가리키는 스페인 말이며, 미국 서남부의 사람들 혹은 그곳의 독특한 건축을 가리키는 뜻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애코머란 말도 스페인어에서 나왔는데, ‘항상 있었던 장소[the place that always was]’ 혹은 화이트 락의 주민들[People of the White Rock]’을 뜻한다고 한다. 뉴멕시코 샌 후안 카운티(San Juan County)의 나바호(Navajo) 인디언 정착지가 바로 화이트 락 캐년(White Rock Canyon)인데, 그렇다면 원래 그곳에 살던 애코마 푸에블로 인들이 나바호 인들을 피해 이곳으로 온 것인지 현재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애코머 푸에블로 사람들은 건축물이나 농사짓는 양식, 혹은 도자기 등에 나타나는 예술성으로 미루어 아나사지(Anasazi), 모골론(Mogollon), 기타 다른 고대 부족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종족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메사(mesa)에서 내려다 본 경관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메사의 주택가 골목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모습

 

 


스카이 시티의 주택들

 

 


전통 어도비 양식의 주택들

 

 


메사에서 내려다 본 황야

 

 


스카이 시티의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과 앞 뜰의 공동묘지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의 내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마을 앞 좌판에 팔려고 늘어놓은 도자기들

 

 

아침 일찍 앨버커키의 숙소에서 나온 우리는 복잡한 산길 60마일을 달려 넓게 펼쳐진 분지 속의 스카이 시티에 산다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을 찾았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Sky City Cultural Center)’에 당도하여 긴 시간을 기다리고 난 11시 반에야 가이드 투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살아온 메사(mesa) 꼭대기가 평평하고 주위가 벼랑인 돌 잔구는 높이가 365피트[111.3m]나 되는데, 길은 잘 나 있었지만, 관광객들이 개인적으로 그곳에 접근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셔틀버스로 이동하여 가이드의 안내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셔틀버스를 타고 센터로부터 돌덩어리들 사이를 10분 정도 달려 올라가니 오랜 옛날부터 있어 온 듯 메사 위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전통 주거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모든 집들이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것은 물론이고, 대체로 33층으로 이루어진 아파트 양식의 건물들이었는데, 모두 남향이었다. 이 건물들을 보며 이른바 어도비 양식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즉 서까래, 풀 짚, 회반죽 등으로 덮은 지붕을 대들보가 가로질러 밖으로 삐죽삐죽 나오게 한 다음 어도비 벽돌로 벽면을 마무리하는 공법이었다. 1층 집의 지붕은 2층 집의 바닥이 되고, 2층 집의 지붕은 3층 집의 바닥이 되니, 실로 멋진 상호의존적 건축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집들의 사이사이에 조성된 광장에서 각종 전통 행사들이 열렸으리라. 

 

2층이나 3층집을 오르내릴 땐 반드시 나무 사다리를 사용했다. 만약 위에서 사다리를 치워버리면 그 집에 올라갈 수 없으니, 그것은 일종의 외적에 대한 자위(自衛) 수단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기 전에는 평지에서 메사를 오르내리던 통로라 해야 기껏 돌 표면을 파서 만든 가파른 계단뿐이었을 것이니, 그곳만 막으면 외적들이 메사 위의 주택가로 올라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집들 앞에는 그들의 전통 빵을 굽는 흙 화덕이 만들어져 있고, 개중에는 최근에 빵을 구은 듯 그을음이 밖으로까지 번져 나온 경우도 보였다. 서남쪽 벼랑 위엔 엄청난 크기와 규모의 어도비 건축물 성 이스테반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이 있고, 그 앞마당엔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사진은 성당의 겉면만 찍을 수 있었고, 그나마 공동묘지 근처에서는 카메라를 조작조차 못하게 막는 것으로 보아, 성당 내부나 공동묘지가 그들에겐 성역(聖域)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종교나 신앙에 관한 궁금증은 전형적인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인 가이드의 설명으로 대부분 해소되었다. 그는 애코머 인들의 전통 신앙은 인간의 삶과 자연 사이의 조화를 강조한다는 것, 태양은 창조주 신을 대리하는데, 공동체를 둘러 싼 산들과 그 위에 떠 있는 태양 그리고 그 아래의 땅이 균형을 이루어 애코머의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 전통 종교 의례는 충분한 강우를 비는 데 중심이 있었으므로 날씨에 많이 좌우된다는 것, 그런 제의에서 카치나(kachina) 댄서들이 춤을 춘다는 것, 푸에블로 거주지에는 종교 의례를 행하는 방 즉 카이바(kiva)들이 있다는 것, 각 푸에블로의 지도자는 공동체 종교의 지도자이거나 추장의 지위를 갖고 있는데, 추장은 태양을 관찰하여 종교의례의 스케줄을 짜는 지침으로 사용한다는 것, 많은 애코머 인들이 가톨릭 신도들이며 그들의 행사에 가톨릭 정신과 전통 종교가 혼합된 모습이 보인다는 것, 아직도 많은 제의들이 살아 있는데, 9월에는 그들의 수호신인 스테판 성인(Saint Stephen)을 기리는 축제가 있다는 것, 그날에는 메사가 대중들에게 개방되어 2천명 이상의 순례객들이 축제에 참여한다는 것등을 열심히 설명했다.

 

성당에 이르기 전 중앙 광장에는 세 개의 흰 색 통나무들을 엮고 위쪽에 가로막대를 댄 사다리 모양의 제구(祭具)’ 두 개가 가옥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었는데, 가이드에게 용도를 물으니 일종의 기우제의(祈雨祭儀)’에 쓰이는 물건들이라고 했다. 즉 세 개의 통나무는 빗줄기, 위쪽에 댄 가로막대는 비구름을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사막지대에서 늘 물이 모자라 고통을 받던 그들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제구였다. 말하자면 가톨릭과 전통 제의가 공존하던 신앙의 형태를 현장에서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가족 형태는 어떨까. 모계사회인 애코머 인들에게는 대략 20개의 클랜(Clan)들이 있었고, 오늘날에는 19개의 클랜들이 살아 있으며, 각각의 클랜에 따른 상징동물들이 있었다. 클랜의 상속에 대하여 물으니 서로 다른 클랜 출신의 남녀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을 경우 모계사회인 만큼 아이의 클랜은 어머니의 것을 따른다고 했다. 이들의 결혼은 모노가미(monogamy) 즉 일부일처제로서 이혼은 매우 드물며, 사람이 죽은 경우 4일 낮밤을 새운 뒤 매장한다고 했다.

가이드를 따라 이동하는 곳곳에 애코머 여인들이 좌판을 벌이고 앉아 있었다. 주로 그들이 직접 구은 도자기와 비드(bead) 및 수예 등 전통 수공예품들이었다. 아이들도 자신들이 만든 아기자기한 도자기들을 갖고 나와 파는 것을 보며, 공예기법이 부모로부터 자녀들에게 전수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요는 하지 않았으나, 이들 좌판에 연결되도록 가이드의 이동경로는 교묘하게 짜여 있었다. 카지노 등의 독점 사업으로 쉽게 돈을 버는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술을 바탕으로 자립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가 매우 바람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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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코머 인들에게서 미국화(Americanization)의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다. 물론 현재 메사의 전통가옥에 사는 주민들은 극히 일부분이고 도시로 나가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가이드가 보여준 것처럼 그들 역시 미국인인 만큼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긴 하지만, 자신들의 정체성만큼은 어떻게든 붙잡고 있으려는 그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스페인이 지배하던 멕시코의 한 부분이었으므로 미국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이 지역은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였다. 그들의 지배를 받아 가톨릭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전통 신앙을 버리지 않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었다. 인근 부족들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자신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메사의 고지대에 거주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다. 어도비라는 건축양식을 통해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생활미학을 구현하고 뉴멕시코의 지역 미학으로 승화시킨 점은 무엇보다 먼저 강조되어야 할 그들의 공로였다. 그들은 아름다운 도자기와 각종 수공예품들을 직접 생산하여 지금도 외부인들에게 팔고 있었다. 또한 아직도 5천에 가까운 애코머 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이 지역 혹은 그 인근에 살고 있으며, 외부와의 통로를 열어놓은 채 자신들의 미래를 가꾸고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비록 이 사회 마이너리티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삶의 의지와 미래지향적 성향을 확인하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기우제의에 사용하던 도구[세 개의 기둥은 빗줄기를 가로막대는 구름을 상징함]

 

 


이 도시의 전형적인 어도비 양식 주택

 

 


메사에서 내려다 본 아래쪽 경관

 

 


메사의 주택가 좌판에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진열하고 있다.

 

 


컬츄럴 센터의 식당

 

 


식당에서 주문한 푸에블로 전통음식[멕시코 풍 음식이었음]

 

 


애코머 스카이 시티 가는 길 표지판

 

 


애코머 스카이 시티 건너편 언덕에서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