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의 탄식
최근 기획재정부 윤증현 장관은 ‘지식의 빈곤을 절감한다’, ‘세계의 중심이 되기에 우리의 지식수준은 어림없고, 너무나 모자라다’는 요지의 한탄을 기자들에게 털어놓았다. 자존심을 생각한다면, 한 나라의 경제수장으로서 쉽게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래서 그의 말은 그간 세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고 목에 힘을 주던 국민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폭탄선언’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국제회의에 자주 참석, 선진국의 경제계 인사들과 대화를 나누던 그였다. 그들의 대화에는 예술이나 문화 등 폭 넓은 교양에서 전문적인 경제정책까지 두루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객관적인 면에서 윤장관의 소양을 의심할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해외 유수의 대학에서 공부를 했고, 재무부와 재정경제원의 요직들을 두루 역임했으며 금융감독원장을 거쳐 이 정부에서 기획재정부 장관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그 스스로가 ‘무식함’을 토로했다면, 그 고백 속에는 우리의 문제적 현실을 아프게 지적하려는 복합심리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아는 게 없는 것이 ‘무식’이고, 지혜롭지 못한 것이 ‘무지’다.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도 지혜롭지 못할 수 있고, 배운 게 없어도 지혜로울 수 있다. 따라서 그의 말은 우리의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강하게 요구한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하루 중 밥 먹고 쉬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를 깡그리 배움에 쏟아 붓는다. 그런 지옥 같은 관문을 통과한 사람들 중 일부가 엔진역할을 하며 이끌어가는 게 우리나라다. 그런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윤장관이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고 일갈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자녀교육에 열성인 나라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우리나라만큼 공교육, 사교육에 많은 재원을 투입하는 나라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국격(國格)의 향상’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모두가 무식하다면 무언가 잘못되었음에 틀림없다. 육체적, 심리적으로 심한 압박을 받을 정도로 아이들이 공부에 몰두해온 것이 우리의 현실임에도 그 결과가 ‘무식’이라면, 우리는 대체 공교육과 사교육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고 배웠단 말인가.
현재 유치원부터 중등학교까지의 교육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준비 단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듯 ‘중등학교는 대학에 골인하기 위한 관문’에 불과하다. 따라서 ‘좋은 인간’을 만드는 것보다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학교 당국이나 학부모 모두의 유일한 목표일 수밖에 없다. ‘폭 넓은 교양과 훌륭한 인성의 바탕 위에 지식을 쌓는 것’이 교육의 보편적인 목표라면, 바탕을 도외시한 채 도구로서의 지식 획득에만 주력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일단 대학만 들어가면 그런 바탕은 저절로 마련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필수 영양소처럼 인간 성장의 단계마다 필요한 것이 교양교육과 인성교육인데, 우리는 대학에 들어가서 한꺼번에 그런 영양소들을 공급해도 되는 것처럼 착각한다. 아이들의 교육실조(失調)가 대학에 들어왔다고 치유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스스로 찾아서 공부할 수 있는 훈련을 받지 못한 아이들, 입시에만 초점을 맞추어 요령껏 자라온 아이들이 대학에 적응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국가나 사회가 아닌 학생들이 수요자라고 착각하는 대학들은 그들 나름의 생존법을 강구하고 애를 쓴다. 학생들의 마음이 떠나가면 대학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수들로 하여금 거친 지식을 ‘말랑말랑하게 씹어서’ 학생들의 입속에 넣어 주길 요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걸 대학들은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라고 강변한다. 그런 대학들이 학생들에게 어린 시절 받지 못한 예술이나 교양교육을 제대로 시켜 줄 리 없고, 학생들 또한 부족한 영양소를 스스로 찾아서 보충할 리는 더더욱 없다. 지금처럼 교수들이 입으로 잘근잘근 씹어준 전공지식을 간신히 받아먹고 자란 학생들이 졸업 후 사회의 중추를 이룰 때, 우리들의 입에서 ‘우리는 무식하다’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무식함에 대한 자성을 많이 할수록 상황이 개선될 가능성은 크겠지만, 국민들 스스로가 무식하다는 사실 조차도 알지 못하는 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심각한 문제다.
조규익(숭실대 교수/인문대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