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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8.21 일본 전통음악 집중강의를 듣고
  2. 2015.03.03 게리(Gary Younger)를 보내며...
글 - 칼럼/단상2015. 8. 21. 22:10

 


교토시립예술대학 일본전통음악연구센터

 

 


교토시립예술대학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Pendulum

 

 


기다유 샤미센

 

 


헤이케 비와

 

 

열강 중인 토키타 선생

 

 

칸사이 공항에 내린 것이 817일 오전 1045, 외국인 입국자들의 장사진에 끼어 입국수속과 짐 찾기를 마친 뒤 로비로 나오자 12시쯤이었다. 공항과 연결되는 JR 열차 매표소도 북적이긴 마찬가지. 간신히 1316분 발 열차로 신오사카 역에 닿으니 145. 다시 JR 선으로 갈아타고 가츠라가와 역에 도착하니 1445분이었다. 역 근처 작은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한 뒤 택시로 에미넌스 호텔(Hotel Kyoto Eminence)에 당도한 시간이 1540. 김포에서 칸사이까지는 1시간 반밖에 안 걸렸으나, 칸사이에서 교토의 호텔까지는 2시간 반이나 걸렸다. 그만큼 일본은 가깝고도 멀었다.

 

나는 진행 중인 연구 테마의 콘텍스트를 찾아 여기로 온 것이다. 우리 음악과 함께 일본음악, 중국음악은 그 핵심이었다. 그간 해오던 공부를 마무리하려니 그런 것들에 대한 무지가 나를 씁쓸하게 했다. 아무리 현란한 분석의 칼날을 들이댄들 콘텍스트를 고려하지 않은 텍스트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대충 덮어 둘까 고민하던 중 국악학회에서 이메일이 날아왔다. 교토시립예술대학 일본전통음악연구센타의 일본음악 집중강좌소식이었다. 매력적인 내용의 강의 소식이 그 연구소의 홈피에 일목요연하게 올라 있었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즉시 신청하고 센터의 디렉터이자 강의자인 앨리슨 토키타(Alison Tokita) 박사와 이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했다.[그는 토키타란 일본인과 결혼하여 토키타란 성을 사용하고 있었다. ‘토키타 센세이혹은 토키타 박사란 명칭으로 불러주길 원했다. 이하 토키타 선생이라 부른다.] 별 반응을 기대하지 않던 한국에서 누군가가 온다 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여러 가지의 내 물음들에서 다소간의 어떤 진지함이 느껴져서 그랬을까. 득달같은 답신 메일들로부터 갈수록 끈끈한 정이 묻어나왔다. 귀찮은 숙소 문제까지 슬쩍 떠넘기자, 학교 가까운 곳의 호텔을 찾아 예약과 확인까지 해주는 게 아닌가. ‘동양인으로 바뀐 서양인이다!’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만나보니 예상대로, 인자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여장부였다. 시종일관 변함없이 조용한 음조로 강의를 이어갔다. 까딱 졸음에 넘어갈 뻔도 했으나, 그럴 때마다 용케도 나를 불러 조 센세이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강의의 표제어를 펜듈럼(Pendulum)’으로 달고 있는 점이었다. 펜듈럼이란 좌우로 흔들거리는 진자(振子)’를 뜻하는데, 그렇게 명명한 이유를 묻자, 그는 특허 신청이라도 하려는 듯 그 말을 고안한 점에 대하여 강한 자부심을 보였다. 들어보니 그것은 바로 강의의 요지를 함축한 말이었다.

원래 진자란 하나의 기둥과 또 하나의 기둥 사이를 오가는 물건인데, ‘일본의 전통음악과 서양음악’, ‘중국음악과 일본의 토착음악’, ‘일본의 토착종교인 신도(神道)와 불교등이 그러하고, 서양음악이 우월한 현대 일본에서 학교의 음악교육이 전통음악으로 회귀하거나 서양음악과 일본음악을 결합하려는 젊은 예술가들의 실험을 확인할 수 있는 점도 그러하다는 것이었다.

토키타 선생이 외국출생이긴 하지만 엄연한 일본인인 이상, 그들 음악의 뿌리나 영향의 근원을 우리에게 두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펜듈럼의 설명을 듣는 순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분명 우리 음악에서 찾을 수 있는 사실도 토키타 선생은 시종일관 중국에서 근원을 찾아 대곤 했다.[마지막 날 이자카야(居酒屋)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앞에 자리 한 토키타 선생에게 그 점을 물었다. “‘중국한국일본으로 문화나 예술의 전달과정을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시종일관 중국일본으로 직행했다고 한다면, 너무 불합리하지 않은가요? 한국에 증거들이 꽤 많이 남아있는데요?” 하고 묻자, “일본에서는 그 점에 관하여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있지요. 앞으로 언젠가는 자유로이 말할 수 있겠지요.”라고 매우 간단하면서도 함축적인 답변으로 빠져 나갔다. 시끄러운 이자카야의 분위기에서 주변의 누구도 그 말들을 듣지는 못했다. 나는 그 말을 통해 강의 내내 서양의 지식인답지 않았던 그의 진심을 알고 얼마간 안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의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일본인들과, 일본에서 일생을 보내며 일본식 사고로 학문을 해온 그의 생각을 단번에 바꿀 수는 없는 일. 가끔 한국에도 유사한 성향이 있음을 지적해두는 정도로 그치면서 경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래와 같이 강의는 강행군이었다. 하기야 몇 천 년의 일본음악사를 단 3일에 해치우는 것처럼 무모한 일도 없을 것이다.

 

화요일(8/18)

10:00~11:30 일본음악 개관/가가쿠(雅樂)

11:30~13:00 가가쿠와 쇼묘(聲明)

13:00~14:00 점심

14:00~15:30 지우타(地歌), 고토(), 샤쿠하치(尺八)

15:30~17:00 악기 연주 실습(고토 혹은 샤쿠하치)

 

수요일(8/19)

10:00~11:30 비파에 맞추어 노래하는 이야기: 헤이케(平家), 사츠마(薩摩)와 치쿠젠비와(筑前琵琶)

11:30~13:00 노우()

13:30~14:00 점심

14:00~15:30 어릿광대 극장에서의 죠우루리(淨瑠璃): 기다유부시(義太夫節)

15:30~17:00 악기 연주 실습

 

목요일(8/20)

10:00~11:30 가부키(歌舞伎) 극장에서의 죠우루리: 토키와즈부시(常磐津夫節)

11:30~13:00 악기 연주 실습

13:00~14:00 점심

14:00~15:30 나가우타(長歌/長唄<江戶長唄>)

15:30~17:00 나니와부시(浪花節)

18:00 연주회

 

샤미센(三味線)이 주 전공인 토키타 선생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설명 위주의 음악사보다 실연(實演)을 바탕으로 전승되는 음악정신이나 기교를 보여주려 한 듯하다. 주로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가무악(歌舞樂)의 실현태를 중심으로 일본음악의 바탕이나 줄기를 설명해 나간 것으로도 그런 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강생 중 노우와 가부키의 전문 배우를 직접 나오게 하여 연기를 보여주며 기교나 의미를 설명하게 하는 등 전통 음악이 현대로 이어지는 지속의 측면을 실감나게 보여주기도 했다.

마지막 날의 연주회는 강의를 종합하는 자리이자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전통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색다른 경험의 현장이었다. 각 분야의 전문배우들이 등장하여 2시간 30분 동안 이어나간 무대는 일본 음악의 힘과 음악사적 추동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몇 명만 빼곤 모두 젊은 연주자들이나 배우들이었다는 점은 일본에서 전통음악이 아직도 힘을 바탕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들이 서양음악에 젖어 전통음악을 잃어버리는 젊은이들의 짧은 생각을 개탄하고 있었지만, 그나마 우리보다 훨씬 잘 보존지속되고 있음은 분명했다. 샤미센을 연주하면서 괴성을 지르거나 도구를 집어던지는 등 관객들의 웃음과 호응을 유발하는 연주자가 있었다. 뒤풀이 자리에서 그 퍼포먼스가 당신의 즉흥적 창안이냐?’고 물으니, ‘언젠가부터 물려오는 대본에 적힌 대로 하는 것이란 대답이 나왔다. 짐작컨대, 문서화 된 대본들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터인데, 그렇다면 구전심수(口傳心授)되던 연기나 대사 혹은 노랫말들이 글자로 기록되면서 크게 정비되었을 것이고, 시대를 내려오면서 조금씩 달라졌을 것인데, 분명 그가 내지르던 괴성이나 함부로 지어낸 듯한 몸짓 또한 요즘의 성향에 맞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여 시대에 맞추어 변이시켜 오고 있는 일본예술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

 

그간 지속해온 연구를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콘텍스트의 확충이 필요했고, 그 목적으로 낯선 이곳까지 찾아왔지만, 몇 천 년의 음악사를 뭉뚱그려 3일 만에 주파하고 나니 타임머신을 타고 먼 길을 달려 온 듯 멀미 기운이 느껴졌다. 분명 음악제도의 면에서 일본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다른 면이 많았다. 그러나 노래나 춤을 보면서 또 사이사이의 재담들을 듣고 표정이나 몸짓을 보면서 많이 유사하다는 사실을 분명 깨닫게 되었다. 중국과 한국에 비해 아악은 크게 차이를 보이고 있었으며, 쇼묘(聲明) 같은 불교음악은 이미 우리에게도 익숙한 범패(梵唄)의 일종인데, 자신들의 민속음악으로 분류해 넣고 있었다.

이어받은 것과 그것을 바탕으로 바꾸어 나온 것, 달리 말하면 지속과 변이의 원리는 다른 모든 지역들과 같은 양상을 보였겠지만, 그 중 어떤 것들을 자신들의 역사적문화적예술적 소산으로 내세우느냐는 연구자들의 엄정한 분석과 고찰에 달린 문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 자신들만의 예술이라 주장해도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납득할 수 없다면, 그런 주장의 의미는 없어진다. 역사를 날조하거나 공작(工作) 차원으로 분석해명하려는 시도가 언젠가는 바로잡힐 수밖에 없는 것도 역사정신은 인간의 얄팍한 지식으로 훼손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삼국 간 비교 연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앞으로 아시아 3국이 교차로 이런 강의를 마련하고 상대국 학자들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조만간 역사의 왜곡문제는 자연스레 정리되어 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도 큰 수확 아닌가.

 

 

 
                                         샤쿠하치

 



                                   일본전통음악연구센터에서 토키타 소장과 함께

 

 



                           일본전통음악연구센터에서 다케노우치 교수와 함께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3. 3. 17:01

 


떠나기 전날 찾아온 게리와 함께 숭실교정에서

 

 

 


어느 여름날 찾아온 두 사람.
왼쪽부터 게리, 백규, 세바스티안(시조를 전공하는 독일인) 

 

 

 

게리(Gary Younger)를 보내며

 

 

 

작년 9월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차세대 한국학자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6개월을 보낸 게리(Gary Younger)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간 한국말을 열심히 배운다고 했는데, 30여년 모어(母語)인 영어만 쓰다가 처음으로 한국어를 접해서인가. 귀국 인사차 연구실로 찾아온 그의 한국어 실력을 테스트하다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참 외국어를 익히는 것이 이렇게도 어렵구나!’란 깨달음과 함께, 나이 들 만큼 든 지금도 영어 책을 놓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 그에게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 없다.

 

***

 

201391일부터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 역사과에서 나는 한 학기 예정의 풀브라이트 방문학자(Fulbright Visiting Scholar)’ 생활을 시작했다. 맨 처음 공항으로 픽업 나왔던 중국인 두 교수(Du, Yongtao), 학과의 비서인 수잔(Susan Oliver)과 다이아나(Diana Fury) 등이 일상적으로 만나던 사람들이었고, 연구실로부터 가까운 우편함이나 복사실 혹은 간식이 준비되어 있던 휴게실에서 만나는 교수들이 주로 접하는 대학인들의 대부분이었다. 사실 두 교수도 강의실-연구실-복사실등을 통통거리며 굴러다니듯 바쁘게 지내는 바람에 대면할 틈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곳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쯤이나 되었을까. 두 교수가 메일과 전화로 강사 중 누군가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보내 왔다. ‘한 공간에 살면서 그냥 찾아와 문을 두드리면 되지, 중간에 누구를 넣는 건 뭐란 말인가?’라고 생각하면서도 ‘Any time okay!’라는 답신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도 한 주일이나 되어서야 그는 조심스럽게 내 연구실로 찾아왔다. 전형적인 코카서스 인종의 미국인이었다. 말을 들어보니, ‘예의 바르다고 할 수도, 낯을 가린다고 할 수도 있는 그의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있다가 사직한 뒤, 이곳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미 외교사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젊은이였다.

 

그 때부터 우리는 간간이 만났다. 주로 내 연구실에서, 가끔은 학교 안팎의 식당들에서. 대화의 주제는 그와 내가 번갈아 정했다. 나는 한국의 정치 외교적 이슈들에 관해 주로 Korea Herald에 실리는 칼럼들을 소개했고, 그는 NYTWP 등에 실리는 미국의 정치 외교 관련 기사들을 준비해왔다. 내가 말하는 한국의 사정, 그가 말하는 미국의 사정은 수산시장의 새벽 경매에 나온 물고기들처럼 늘 싱싱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항상 종횡무진이었다. 그는 내게 최고의 미국 선생님, 나는 그에게 최고의 한국 선생님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가끔 호기를 부리며 여기서 나를 몇 달 동안 만나고 직접 한국으로 가서 공부하게 되면, 머지않아 당신은 미국 최고의 한국 전문가가 되리라!”고 큰소리치며 그에게 용기를 불어 넣었다. 사실 그는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고, 그런 이유로, ‘돈 한 푼 안들이고’, 아니 오히려 약간의 돈이라도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한국에 체류하며 한국을 배우고 싶어 했다. 내 분야이든 정치 외교 분야이든 외국인의 한국 연수에 관한 정보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하던 나로서 약간 켕기기는 했지만,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대책도 없이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러나 내 미국 체류 예정기간이 점점 줄어들면서 그도 내 눈치를 보는 듯 했고, 나 역시 뱉어놓은 말들때문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등에 연락을 넣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답이 왔다. 게리에게 맞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차세대 한국학자 프로그램으로, 외국의 젊은 학자 혹은 학자 지망생이 돈을 받으며 공부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목 말라오던 차에 발견한 오아시스가 바로 이런 것인가. 다음날 게리를 만나 상세한 정보를 넘겨준 다음, 두 주의 여유를 줄 테니 양식에 맞추어 작성한 프로포절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득달같이 프로포절을 작성하기 시작하여 지도교수의 확인을 거친 다음 약속날짜 이전에 건네주는 게 아닌가. ‘한국전쟁 이후 한-미 외교 현안들의 이념적 기조라는 제목의 글. 아마 그가 박사논문으로 쓰려고 준비하던 내용의 일부인 듯, 논리가 매우 치밀하고 온당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기대지평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라 판단했는데, 과연 그는 선정되어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그는 처음 넉 달 동안 연구원 내에서 한국어를 열심히 수강했고, 나머지 두 달 동안은 국립중앙도서관을 오가며 자료수집에 몰두했다. 간혹 내게 찾아와 삼겹살에 소주를 즐기며 자신의 한국생활을 말하곤 했다. 작별의 인사를 하러 온 날. 그의 턱과 볼을 에워싼 멋진 수염을 보게 되었다. 객지에서 매일 수염 깎는 일이 귀찮아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무언가 자신의 변화를 가시화 시키고자 하는 뜻이 들어 있었으리라.

 

많은 말들을 남긴 채, 또 멋진 수염을 통한 모종의 암시를 남긴 채, 그는 떠났다. 난생 처음 겪는다는 해외 체류이자 한국 체류 6개월. 그는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까. 내가 큰소리 친 것처럼, 머지않은 장래에 그는 미국 내 최고의 한국 전문가가 될 수 있을까.

 

 

 


    추석 지난 뒤 문현 선생의 작품 발표회에서. 왼쪽부터 세바스티안, 게리, 문현 박사, 백규, 
송지원 박사(국립국악원 연구실장), 케이트 교수(영국 런던대 음악과) 등과
숭실대 국문과 학생들(이수빈, 박문성, 리아, 최연, 권리나) 

 

 


2014년 추석날의 멋진 모임.
선무치료학의 대가 이선옥 박사 자택 뒷산의 '노래와 담소 모임'에 합류한 게리와 세바스티안.
왼쪽에서 두번째 인사가 이선옥 박사, 그 다음이 범패의 대가 범진 스님, 백규.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