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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6.17 담배
  2. 2010.09.25 '상주오복동(尙州五福洞)'을 다녀와서
글 - 칼럼/단상2012. 6. 17. 13:04

 

                                <신세대문화예술교류단의 금연포스터 모음(http://cafe.daum.net)에서 퍼옴>

담배
  
                                                                                                                                               백규

며칠 전, 운전 중이었다. 앞서 달리던 고급 외제차의 운전석 문이 스스로 열리고 섬세한 손가락들이 맵시 있게 움직이더니 담배꽁초[그것도 길쭉한 장초] 하나가 우아한 포물선을 그으며 길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것이었다. 살벌한 불티들은 사방으로 날리고, 자칫했으면 열려 있던 내 차 안으로 들어왔거나 내 차의 어딘가를 탁 때릴 뻔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담배를 피우는 내내 수시로 문을 열고 재를 떨어댔을 것인데, 마지막 꽁초를 처리하는 순간을 바로 뒤에서 내가 목격한 것이었다. 그렇게 능숙한 솜씨로 뒤처리 하는 모습을 보니, 그간 반들반들하게 포장된 도심의 길바닥을 재떨이 삼아 만인 환시리(環視裏)에 흡연의 쾌락을 만끽해왔을 그녀의 고약한 행태가 눈에 선했다. 일순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몰상식흡연운전녀’의 얼굴 좀 가까이 보려고 가속페달을 밟아 다가 간 즉, 도도하고 세련된 미모의 여인이 새초롬하게 앉아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게 아닌가. 설마 수 십 초 전의 일을 잊지는 않았겠지 생각하며 경적을 한 번 울렸으나, ‘어디서 들려오는 각설이타령이냐?’는 표정으로 힐끔 돌아보곤 저만치 앞서 달려가고 말았다. 어찌 그녀뿐이랴. 차를 몰다 보면 길바닥을 재떨이로 착각하는 운전자들이 ‘하수구 속 꽁초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것을.     

      ***

내가 관찰한 바로는,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여대생들 가운데 흡연자가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담배를 피우더라도 화장실에서 피우거나 누가 오면 숨기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당당한 포즈로 담배를 즐기는 여학생들이 부지기수로 늘었다. 멋진 자태로 담배를 ‘꼬나물고’ 생각에 잠기거나 남학생들을 그윽히 내려다보는 여학생들을 캠퍼스 구석구석에서 목격하는 요즈음이다. 물론 그 주변은 꽁초로 어수선하고, 벤치에 들러붙은 ‘연초 향’ 또한 대단하다. 그것 역시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이 그간 주창해온 ‘여권(女權)’ 투쟁의 한 전리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조만간 그녀들이 갖게 될 2세들이 걱정이다.

       ***

사실은 나 역시 담배의 처절한 피해자다. 내 아버지도 이른바 ‘체인 스모커’이셨다. 어린 시절 좁은 시골 방은 늘 매캐한 담배 연기로 자욱했었다. 초등학생 때 아버지 담배 심부름으로 학교 옆의 점방을 ‘풀 바구니에 생쥐 드나들 듯’ 해왔고, 외지에서 공부하다가 가끔 고향에 갈 때면 용돈 아껴 ‘괜찮은 담배 한 보루’를 사들고 가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모 사이에 생겨나는 불화의 90%가 아버지의 담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담배로 인한 부자간의 갈등도 생겨났다. 아들은 아버지의 단연(斷煙)을 끈질기게 읍소(泣訴)했으나, 폐암으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아버지는 담배를 끊지 못하셨다. 담배의 유혹조차 이기지 못하는 ‘인간 의지의 나약함’에 절망하게 되었고, 그 뒤로는 담배를 인간 판단의 잣대들 가운데 하나로 삼게 되었다. ‘오죽 못났으면 제 의지로 담배 하나 못 끊을까?’라는 안타까움으로 주변의 흡연자들을 바라보게 되고, 범죄의 혐의자로 오해 받는 사람들 가운데 흡연자들이 많다는 ‘편견’에 어쩔 수 없이 동조하게 되었다. 
 왜 흡연자들은 한사코 지하철 환풍구나 하수구에 꽁초를 던져 넣어야 후련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왜 그들은 호기롭게 꽁초를 던져 버리거나 기껏 발바닥으로 두어 번 짓눌러 버려 모두가 사용하는 길바닥을 더럽히는 것이며, 거리낌 없이 길바닥에 가래침들을 뱉는 것일까. 왜 그들은 뒤처리를 부실하게 하여 힘들여 가꾼 산림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드는 것일까. 그래서 흡연자들을 ‘잠재적 범죄자들’로 여기는 내 친구의 견해를 수긍하게 되는 요즈음이다. 바야흐로 담배를 끊어야 인간대접을 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2012. 6. 17.>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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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0. 9. 25. 15:49



'상주오복동(尙州五福洞)'을 다녀와서

                                                                 
해외에 입양되었다가 어머니를 찾아 이땅에 왔으나,
끝내 찾지 못한 채 좌절의 눈물을 흘리는 30대를 보았다.
TV화면에 안개처럼 번지는 슬픔의 무게를 나의 작은 가슴으로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 좌절의 색깔이 바래질 즈음, 그는 또 다시 자신의 근원을 찾아 헤맬 것이다.
지금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근원을 찾고 싶은 그의 욕망은 쉽사리 잠재울 수 없으리라.
살아가면서 ‘인연’을 버리라고 역설(力說)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
왜 그 인연을 못내 그리워하며 유한한 삶을 불태우고 있는지,
인연의 덫에 스스로 갇히고 싶어 하는지 알기 어려운 나날이다. 
   
인생은 ‘찾기’의 연속일까.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근원을 찾는 것도,
자신이 직면한 문제의 해답을 찾는 것도,
앞으로 살아갈 방도를 찾는 것도,
친구가 나를 멀리하는 이유를 찾는 것도,
세상이 잘못되고 있는 원인을 찾는 것도,
모두 ‘찾기’에 인생의 본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철 든 이후 지금까지 내겐 많은 문제들이 닥쳤고, 나는 그 해결책을 찾아 헤매왔다.
찾은 것보다 찾지 못한 것들이 더 많고, 찾지 못한 것들 중에서도 더 이상 찾기를 체념한 것들이 더 많다. ‘배움⋅가르침⋅연구’를 직업으로 선택한 이후, 내가 주력하는 ‘찾기’의 대상은 좀 더 좁혀지게 되었다. 요즈음은 옛 문헌들과 그에 관계되는 갖가지 사실들이 주로 그 대상이 되었다. 학창시절 존경하는 은사 나손 선생은 늘 ‘발로 뛰는 공부’를 권하셨고, 그 공부의 100%가 ‘삶 속에서의 찾기’였다. 전국을 누비시던 그 분 활동의 대부분은 바로 ‘찾기’에 있었다. 이제 꿈과 의지가 퇴색하여 ‘연구실 물림’으로 몰락하고 말았지만, 한때는 나도 그 분처럼 많은 것을 ‘찾아내리라’ 마음먹고 동분서주했던 적이 있었다.

***

올 추석 연휴를 틈타 경북 상주에 가기로 했다. 남들이 귀경할 즈음, 한산한 고속도로의 하행선을 타기로 한 것. 얼마 전 입수한 자료를 읽다가 ‘이 글을 지은이는 상주 화령에 사는 공선생(칠십이세)’이라는 후기(後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경북에는 ‘상주오복동(尙州五福洞)’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그 상주가 지금의 상주인지 알 수는 없으나, 첩첩산중 자연을 보니 그 상주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었다. 옛날 옛날 한 옛날, 나무꾼 한 사람이 사슴을 좇아 산중으로 깊이 들어가다가 굴을 발견했단다. 그 굴속에 들어가니 자그마한 촌락이 나왔고, 거기서 그 마을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옛날 난리를 피하여 산중으로 들어와 이 마을을 건설했으며 다시는 세상과 교류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자자손손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노라는 그 사람의 설명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무꾼이 다시 그곳을 찾고자 했으나 다시는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 마을이 바로 ‘상주 오복동’이다.
면사무소에서 정보를 얻어 만나본 사람이 바로 내가 찾던 분의 후손이었다. 그 집으로 초대되어 맛있는 ‘국시’로 점심대접까지 받으며 자료의 기록을 따져보았으나, 해답은 종시 찾을 수 없었다. 내가 간절하게 ‘찾고 있던’ 그 분은 쉽사리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상주 내 수십km 상거(相距)의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수탐했으나, 이번 행차에서 ‘그 분을 찾는 일’은 접어야 했다. 서울로 대구로 이웃 마을로 연신 전화기를 돌리며 ‘해답찾기’를 도와주려는 주인어른의 친절을 마음에 새기며, 나는 그 오복동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찾아내지 못할 것만 같은 그 선경을 말이다.

***

늘 ‘찾는 일’은 수월치 않았다. 지금 벌어지는 일도 알기 어려운데, 작은 단서 하나로 지난 시절의 일들을 찾는 일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이번 행차에 수확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평소 손바닥만 하다고 생각되던 우리 땅에서 ‘상주오복동’을 발견했고,^^ 그곳에 살고 있는 소박하고 다정한 사람들을 만난 일이다. 무엇보다 오랜 옛날 무릉도원(武陵桃源)으로 알고 이곳에 찾아들어 아름다운 후손들을 남겨둔 ‘공선생’을 만난 일이다. 그 후손들이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 있으니, 조만간 좋은 소식을 보내줄 것이다. 그리하여 ‘찾아 헤매는’ 내 수고를 덜어줄 것이다. 꼭꼭 숨어있는 오복동도 찾아낼 수 있는 ‘네트웍의 힘’을 믿어보기로 했다. 이거야말로 장땡과도 같은 추석선물 아니겠는가.

                                            2010. 9. 23.

                                          전라북도의 한 모텔방에서  백규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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