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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1.01 경자년 첫 단상 2
카테고리 없음2020. 1. 1.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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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규

 

 

기해년이 뒷산으로 넘어가고 경자년이 앞산에서 넘어왔다. 돼지해가 가고 쥐해가 된 것이다. 돼지도 풍요와 다산(多産)의 동물이지만, 쥐는 거기에 ‘근면성’까지 더하는 동물이다.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쥐에 관련되는 경험과 일화들을 적지 않게 갖고 있다. 우리는 1년 내내 쥐와의 신경전을 벌였다. 추수가 끝나는 늦가을부터 곡식을 두고 그들과 전쟁을 벌였고, 이른 봄에는 소중한 씨앗들을 지키기 위해 더욱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종자를 심고 나서도 쥐와 새는 우리의 변함없는 주적(主敵)이었다. 그토록 미운 존재가 쥐였지만, 관점을 약간 바꾸면 그들은 우리가 배워야 할 ‘선생’이었다. 바로 근면성과 민첩성 때문이었다. 그들은 항상 가족단위로 움직이며 부지런히 먹이를 훔쳐내는 ‘기술 좋은 꾼들’이었다. 다산의 동물이니, 많은 자식들을 먹이려면 몸이 부서져라 ‘도둑질’에 나설 수밖에 없는 그들이다. 부성애와 모성애가 출중하고 삶에 대한 집착과 적응력이 누구보다 강한 그들이다. 쉴 새 없이 갉아대고 물어뜯으며 먹을 것을 찾는 그들을 보라. 쥐의 군단이 달려들어 갉아대면 철옹성이라도 단번에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만큼 강한 어금니와 전투력을 갖고 있는 그들이다.

 

지금 나는 쥐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쥐의 ‘다산성과 근면성’에 기대어 올 한 해 나 스스로를 고무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내 처지이기 때문이다. 올해 나는 재직 중인 대학으로부터 생애 마지막 연구년을 얻었다. 대부분의 대학 교수들은 별 문제만 없으면 6년에 1년씩은 연구년을 받을 수 있지만, ‘말년 병장’인 나로서는 참으로 긴요하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대를 앞두고 이것저것 할 일도 많다. 옛날 같았으면, ‘당근!’ 이 귀한 연구년을 해외로 나가 연구활동에 몰두할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제대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 하는 ‘놓칠 수 없는’ 기회. 내 삶터를 잠시도 떠날 수 없다. 문득 지난 세 번의 연구년을 생각해본다. 첫 연구년엔 LG연암재단으로부터 ‘해외연구교수’ 프로젝트의 '따뜻한' 연구비를 받아 미국 UCLA에서 스스로 개안(開眼)하며 '비교문학'의 진수를 익힐 수 있었고, 두 번째 연구년엔 동서유럽 20여 개 나라들을 돌며 ‘유럽문명의 보편성’을 답사∙체험했으며, 세 번째 연구년엔 풀브라이트(Fulbright) 재단의 지원으로 미국 OSU에서 자아를 확장∙심화시키며 '미국내 소수민족의 문학'을 연구할 수 있었다.

 

이제 마지막 연구년. 겸허하고 조신한 자세로 치밀하게 지난날들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삶을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다.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멋진 농막’을 완성하는 일이다. 그간 잡초 무성하게 방치해 두었던 에코팜에 작지만 의미 있는 내 ‘마지막 집’을, 정말로 튼튼하고 순조롭게 완성해야 한다. 2월 20일 착공하여 6월 10일 완공할 수 있으려면, 계획과 다짐에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하리라. 두 번째는 그동안 진행해오던 ‘한중일 악장문학 비교연구’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일이다. ‘문학사 집필’을 현역 마지막 과업으로 삼아 진행해오다가, 5~6년 전 문학사 집필을 뒤로 미루고 앞당긴 과업이 바로 이것. 제대와 더불어 깨끗이 정리하려던 내 연구실을 에코팜으로 고스란히 옮기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 내 시대의 마지막 문학사를 풀 향기와 흙 내음 섞어 마무리하는 것도 의미가 남다르지 않겠는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향리로 돌아간 도연명과는 처지가 다르겠지만, 주경야독(晝耕夜讀)의 패기나 철학이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고, 그 준비를 제법 ‘옹골차게’^^ 해보려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이다.

 

아, 사람에게 주어진 물리적 시간이야 부귀빈천(富貴貧賤)을 가리지 않고 동일할 것이나, 그것들을 ‘내 것’으로 재창조하는 일만큼은 천만 가지로 다를 것이다. 공자는 삼계(三計)를 설명하며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고, 일년의 계획은 봄에 있으며, 일생의 계획은 근면함에 있다’[一日之計在晨 一年之計在春 一生之計在勤]고 했으며, 송나라 학자 주신중(朱辛中)은 인생오계(人生五計)로 ‘생계(生界)∙신계(身計)∙가계(家計)∙노계(老計)∙후계(後計)’를 들었다.[<<독서기수략(讀書記數略)>> 권 24] 지금의 나는 이 가운데 무엇을 따라야 하는가. 공자의 이른바 ‘근면’을 좇아야 하고, 주신중의 이른바 ‘후계’를 좇아야 하리라. 공자 말씀대로 근면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삶을 마쳐야 후손들에게 남기는 것이 있고, 죽을 때까지 건강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며, 주신중 선생의 말씀대로 ‘후계(後計)’[“60 이상 된 사람이면 안으로 마음을 살펴 추호라도 부끄럼이 없게 해야 한다”]에 따라야 후회가 남지 않을 것이다.

 

아, 이제 막 새로운 도전의 경자년이 시작되었다!

‘공자의 말씀대로 근면하게, 주신중 선생의 말씀대로 후계(後計)를 철저하게’ 준비할 일이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