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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7.08 '박근혜는 바보여~!'
  2. 2010.07.19 소부⋅허유, 그리고 태공망
글 - 칼럼/단상2014. 7. 8. 11:28

'박근혜는 바보여~!'

 

 

 

맹자가 양혜왕을 뵙자 왕은 못 가에 서서 홍안[鴻鴈: 큰 고니와 기러기]과 미록[麋鹿; 고라니와 사슴]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어진 자도 역시 이런 것을 즐거워할까요?” 맹자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어진 자가 된 이후라야 이런 것을 좋아하지요. 어질지 못한 자는 비록 이런 것이 있다 해도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시에 '처음으로 영유[靈囿: 백성들이 문왕을 위해 지은 영대 밑의 동산]를 지으실 때에 이를 헤아려 경영하시니 서민이 몰려와 이를 꾸미어 하루가 못 되어 완성하였네. 급히 서둘지 말라 일렀건만 서민들은 아들이 달려오듯 찾아 왔다네. 왕이 영유에 나와 있으면 사슴은 번쩍번쩍 빛나고 백조는 하얗게 빛났다네. 왕이 이번엔 영소[靈沼: 백성들이 문왕을 위해 만든 연못]로 구경 나오자 물고기 가득히 뛰어 놀았네'라 하였습니다. 문왕이 백성의 힘으로 영대와 영소를 지었건만 백성들은 오히려 기뻐하고 즐겁게 여겼던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백성과 함께 즐겼기 때문에 능히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문왕이 백성들의 힘을 빌어 영대영소를 지었건만,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겁게 여긴 것은 문왕이 그것을 백성들과 함께 즐겼기때문이었다. ‘백성들과 함께 즐겼다는 것이 바로 소통의 본질이다. 문왕은 백성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백성들의 마음을 넘겨짚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끊임없는 대화를 통하거나 관념상의 자리바꿈을 통해서 그들의 생각을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왕은 내가 만약 백성이라면 임금에 대하여 어떤 바람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가상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늘 던졌음에 틀림없다. 거기서 나온 결론이 바로 백성과 함께 즐기자!’는 것이었고, 그게 바로 요즘 말로 소통이란 것이다.

 

 

50대인 나는 이 땅의 우리 세대가 갖는 시대적 징표들을 형틀처럼 짊어지고 사는 존재다.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로 대표되는 계몽가를 주문처럼 되뇌면서 꿈을 키웠다. ‘농경시대-산업화 시대-정보화 시대를 거쳐 지금 고도 정보화 사회의 말석에까지 이르렀으니, 다른 나라들에서 수 세기에 걸쳐 이룩한 발전의 과정을 단 몇십년만에 압축적으로 경험해온 셈이다. 그 과정에서 만난 박정희라는 인물은 가난과 무지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 선각자였고, ‘북괴는 민족 공동체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사탄들의 집단이었다. 그런 의식에 바탕을 둔 박근혜의 등장을 보며 질곡의 땅에서 자라난 50대 이상 세대들이 환호성을 내지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해방 이후 정권을 잡아온 남자들을 생각해 본다. 오고가는 술잔 속에 얼렁뚱땅 이루어지는 끼리끼리의 담합, 얕은 수로 당장의 이익을 챙기려는 밀실의 야합등등, ‘구린 남자들의 카르텔이 국가 권력의 이면구조였다. ‘정치(政治)라는 좋은 말이 이 땅에서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남자들의 야망을 합리화 시키는 미명으로 전락되고 만 것이다. 이 땅의 50대가 그런 남성들 사이에서 혜성같이 등장한박근혜에게 호감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여성인 박근혜는 적어도 그간 권력을 갖고 얼렁뚱땅 장난질을 쳐온 남성들과는 다를 것이라는 믿음이 무엇보다 컸다. ‘아버지 박정희가 갖고 있던 꿈에 '화룡점정'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그 무엇보다 크고 중요했다단순히 50대에 이르러 남성 호르몬이 현격하게 줄었다는 생리적인 이유 때문에 여성인 박근혜에게 공감을 갖게 된 건 아니란 말이다.

 박근혜가 들고 나온 신뢰와 원칙이란 우리 세대의 소망적 사고를 결집시킨 슬로건이었다. 취임 초기 걷잡을 수 없이 올라간 지지율도 나를 포함한 50대 이상 세대의 굳건한 믿음을 발판으로 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걸 믿었다. 적어도 박근혜라면, ‘신뢰와 원칙의 정치를 우리 정치에 착근(着根)시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 지혜였다. 꽉 막힌 고집이 아니라 누구도 승복할만한 방법론을 개발해내는 것이 바로 지혜였다. 내 생각이 비록 100% ‘진리여서 그 실현에 대한 100%의 자신감을 갖고 있다 해도, 갈래갈래 흩어진 민심의 밭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섬세한 방법론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 내 생각의 옳음에 대한 확신보다 그 확신에 대한 설득과 지지가 더 중요하다는 깨달음이 있었어야 했다.

 문왕도 처음에는 내 궁전에 멋진 정원과 연못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제왕의 궁전을 제대로 갖추는 것이 왕국의 체면으로 보아 좋을 것이고, 무엇보다 제왕 자신이 원하는 바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왕은 아주 섬세한 방법을 동원했다. 그 일만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즉위 당시부터 백성들과 함께 하는 면모를 보여준 그였다. 그 과정을 통해 백성들은 임금의 표정만 보아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백성들이 스스로 나서서 문왕의 정원과 연못을 만들고 기뻐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바로 그게 문왕이 보여 준 치자의 지혜였다.

 

 

소통이 그렇게 힘 드는 일인가. ‘즐거운 마음으로탁자 위에 차 한 잔 마련해놓고 정치의 파트너들을 불러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게 그렇게도 어려운 일일까. 손가락 몇 번 움직여 여당이나 야당 의원들에게 전화라도 걸어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일이 그렇게 터부로 여길 만한 일일까. 사방에 우글거리는 기자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거나 자신의 시책을 설명하는 일이 그렇게도 번거로우며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는 일일까. 어찌하여 세상의 평판이나 의견을 들어보지도 아니한 채  하나같이 문제투성이의 인간들만 찾아서 국가 대사를 맡기려 한단 말인가. ‘동네 반장이나 이장을 맡기에도 버거운 인물인지, 한 나라의 정승을 맡을만한 인물인지몇 마디 이야기만 나누어 봐도 알 일인데, 무슨 이유로 한사코 그런 문제적 인간들만 찾아 내 놓아서 정적들의 비웃음을 자초한단 말인가. 

 

 

물론 항간의 소문이나 사람들의 평판이 매번 맞는 것은 아니고, 줏대 없이 그에 따르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없지 않은 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러나 세평(世評)을 무시함으로써 당하게 되는 어려움은 더 크기 마련이니, 양자를 적절히 배합하는 게 바로 지혜다. 그걸 잘 하면 좋은 정치가가 되는 것이고, 못 하면 줏대 없는 허수아비대책 없는 독불장군이 되는 것이다. 좋은 정승 감들을 찾아내고도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해 버리고 마는 지도자를 누가 따를 것이며, 세상에 좋은 정승 감들이 있음에도 그들이 혹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까봐 발탁조차 하지 못하는 소심함과 속 좁은 욕망의 소유자를 누가 지도자로 섬길 것인가.

 

 

만족의구불안실망절망으로 초심의 급격한 변화를 체험하고 있는 이 땅의 50대들은 만사 제쳐두고 투표장에 달려가 한 표를 행사한 집단이다. 그래서 이들 마음의 변화는 현실 정치의 잘 되고 못됨을 평가하는 바로미터인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만한 기준은 경험이다. 이 땅의 50대들은 공허한 이론이나 편견을 바탕으로 하는 이념의 투사들이 아니라, 맵짠 인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판의 건전한 대안을 모색해온 집단이다. 많은 시행착오들을 거치며 가까스로 찾아낸 대안이 바로 현 대통령이다. 힘들여 찾아냈다고 자부하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 대안에 대하여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였다는 판정을 내리는 순간, 그 대안 또한 역사의 쓰레기통에 쳐 박힐 수 있음을 왜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오늘 만난 동향 친구의 박근혜는 바보여~!’라는 평가를 이 땅의 장삼이사들은 절실하게 공감하고 있는데, 정작 대통령이나 그 주변의 인사들만 모른다면, 이 문제야말로 조만간 민족사의 비극이나 수치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정말 걱정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0. 7. 19. 10:28

소부⋅허유, 그리고 태공망


허유(許由)는 천하나 구주(九州)를 맡아달라는 요임금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더러운 말을 들었다고 생각하여 흐르는 영수(潁水)에 자신의 귀를 씻었다. 그 모습을 본 소부(巢父)는 허유가 은자(隱者)라는 소문을 냄으로써 명성을 얻게 된 점을 비판하고, 자신의 망아지에게 허유가 귀 씻은 물을 먹일 수 없다하여 망아지를 끌고 상류로 올라가 버렸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한 사람이 태공망(太公望)이다. 주나라 문왕이 위수(渭水)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던 여상(呂尙)을 발탁했으니, 그가 바로 태공망이다. 그는 문왕의 초빙을 받아 왕의 스승이 되었고, 무왕을 도와 상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한 인물이다.


 최근 대통령은 지방선거의 결과로 나타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청와대 안의 인물들을 바꾸었고, 조만간 내각도 개편할 것이다. 어느 나라나 비슷하겠으나, 특별히 연줄의 문화가 강한 곳이 우리나라다. 연줄 즉 혈연, 지연, 학연은 지금도 인사철만 되면 힘을 발휘한다. 연줄이 닿는 범위 안에 출중한 인사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연줄은 본질적으로 제한적이기 때문에 그 범위를 벗어나는 곳에 방치된 인사들은 더 많다.

 
 이왕이면 ‘내 부류의 사람을 써야 한다’는 고질적인 인습 탓에, 인사철을 앞두고 ‘이런 저런 면에서 촉망 받는 인사들’은 임명권자와 연결되는 줄을 찾아 헤맨다. 인사철만 되면 임명권자로부터 부름이 올까 전화통 앞에 붙어 앉아 있는 캐리커츄어(caricature)들이 약방의 감초 격으로 언론에 등장하곤 하던 것이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의 일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청와대 고위직의 제의를 거절한 유진룡 전 차관의 경우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현 정권에서 제의하는 고위직을 마다하는 모습을 보며, 지난 정권에서 자신의 자리를 걸고 윗선의 청탁을 막아 낸 결기가 가식이 아니었음을 국민들은 깨닫게 되었다. 자리의 성격이나 자신의 능력을 따지지도 않고 덤벼드는 사람들과 달리 ‘그 자리가 자신에게 맞지 않다’거나 ‘정치할 생각은 없다’고 간략하게 잘라내는 어조에서 사람들은 일종의 ‘멋스러움’을 읽어낸 것이다. 허유나 소부의 현대적 버전이라고나 할까.

 
 현재 ‘세종시’ 건으로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정운찬 총리 또한 임명 당시 여러 차례 고사(固辭)하는 바람에 임명권자의 애를 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중한 능력과 비전으로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그의 입장에서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직에 나아가 최선을 다했다. 제의를 거절한 사람이나 제의에 응하여 직에 나아간 사람이나 이런 경우들은 인재 발탁과 등용의 좋은 사례로 기록될 수 있다.

 
 사실 특정한 직에 쓰일 만한 세상의 현자들은 대체로 허유나 소부, 혹은 태공망에 속하고, 현자를 자처하는 나머지 부류는 직책의 명예만을 탐한다고 보면 정확하다. 그러나 능력과 비전을 갖고 있음에도 모두 소부나 허유의 입장만을 고수한다면, 책임 있는 태도라고 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나서서 세상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데,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세상을 향한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태공망은 요즈음의 상황에 걸맞은 인재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지만, 탁월한 재능과 비전에 도덕성까지 갖춘다면 세상을 다스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재다.

 
 연줄을 동원하여 등용되기를 도모하는 것보다 실력을 갖추고 조용히 기회를 기다리는 일이야말로 도덕적 행위 그 자체다. 사실 연줄을 동원하는 것은 재능이나 비전이 남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임명권자가 연줄을 통해 사람을 발탁하려 한다면, 그 역시 인물의 능력이나 비전보다 끼리끼리 무리 짓고자 하는 현실적 욕망 때문이다. 연줄로 인재를 등용했을 경우 일을 그르친 후에 책임을 물을 데가 없다. ‘인재가 없다’고 한탄하는 임명권자는 대부분 자신의 시야가 연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함을 스스로 드러낸다. 세상은 좁아도 연줄의 구속을 벗어나기만 하면 한 나라의 살림이나 한 부서의 책임을 맡길 만한 인재들이 제법 많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인문대 학장)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