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초코와 동네 한 바퀴 산책을 마치고 거실에 들어오는 순간, ‘까톡!’소리가 울렸다. 대학 동기들 단톡방에 스크랩된 신문기사 한 건이 친구 이대구[전 충남교육청 정책개발담당 장학관]의 멘트와 함께 올라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안경을 찾아 쓰고 찬찬이 살펴보니, 경현이에 관한 기사였다. 삼성에서 제정한 ‘AI 연구자상’의 첫 수상자로 경현이를 포함한 다섯 명의 세계 학자들이 선발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유일한 한국인 수상자 조경현’이 중심에 들어 있는 것은 한국 신문의 기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내 놀라움은 컸다. 그간 열심히 노력하여 AI 분야[특히 딥러닝을 이용한 자연어 처리]의 ‘탁월한 연구’로 인정받아 온 것은 사실이고, 그 덕분일까. 세계적인 명문대학 NYU[뉴욕대학교]에서 불과 4년 만에 테뉴어십[종신교수 직위]을 받는 영광도 누린 바 있다. 그러나 세계적인 기업 삼성이 ‘AI 분야의 전도유망한 연구자들에게 주는 상’의 첫 수혜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친구들의 제보로 알게 된 것이 우선 어이없는 일이려니와, 무엇보다 불과 이틀 전의 통화에서도 부모에게 전혀 귀띔조차 하지 않은 녀석의 ‘무심함’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정신을 차리고, 친구들의 축하인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다음 여러 매체들에 실린 기사들을 검색해보고 나서야 그것이 매우 영광스러운 상임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점심 무렵 간신히 전화 연결이 된 녀석으로부터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답변을 받고서야 그동안 부모에게 한 마디의 귀띔도 없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좀 쑥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페이스북에 올렸다.
나도 초년 교수 시절 몇 건의 상들[성산학술상/한국시조학술상/도남국문학상]을 받은 일이 있어서, 그 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사실은 그 때의 나도 그다지 흥분하지 않았었다. 솔직히 흥분보다는 오히려 부담이 컸다. 내가 상을 받을 만큼 ‘충분히 훌륭한가’에 대하여 자신이 없었고, ‘이런 기조를 얼마나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자신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내게 상을 안겨주셨던 학계의 어른들은 내가 ‘완성되었다’는 판단보다는 ‘약간의 싹이 보이니 좀 더 노력해보라’는 다그침의 뜻을 갖고 계셨을 것이다. 그런 깊은 속을 알지도 못하고, 으레 ‘상이란 완성된 자에게 주는 것’이라는 짧은 생각에 마냥 부담스러워 했던 것이 사실이다. 내 경우를 비추어 보니, 경현이의 반응도 충분히 납득할만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단순하게 생각하면, 상 받는 것처럼 기분 좋고 신나는 일이 어디에 있으랴. 작게는 한 집단의 발전을 이루는 데서, 크게는 문명의 진보와 고양을 꾀하는 데서 상이라는 제도가 발휘하는 힘이야말로 그 얼마나 큰가. 상을 받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일의 놀라운 진척이나 발전에서 동기부여의 힘이 절대적이고, 동기부여의 가장 큰 수단이 상이라는 사실은 동서고금이 다를 수 없고, 미래세라고 지금과 달라질 수 없다. 그래서 상은 많이 줄수록 좋고, 많이 받을수록 좋은 것이다. 아들이자 학계의 동료인 조경현 박사에게 진심어린 축하의 말을 보내고 싶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2020. 1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