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7. 26. 17:45

싸드(THAAD)와 중국의 커밍아웃

 

 

 

 

근자 싸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우리 사회의 이슈로 떠오르면서 우리 모두 그간 잊고 있던 중국의 정체와 본질을 아프게 깨닫는 중이다. 유사 이래 우리는 단 하루도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무슨 논리로 합리화하려해도, 중국과의 관계는 항상 침략과 굴종/지배와 피지배의 식민주의적 패러다임에 갇힌 채 지속되어 왔다. 그들이 자신들의 족속을 우리의 왕으로 세운 적도, 우리 땅을 봉토(封土)로 활용한 적도 없건만, ‘사대(事大)’라는 중세적 외교의 명분 아래 그들은 식민주의자들 이상의 폭압과 전횡을 부려 온 것이 사실이다.

 

혹자는 그들로부터 한자와 한문을 들여왔고, 유교불교도교 및 제자백가 등 사상이나 사유체계를 도입했으니, ‘가르침과 배움이란 선한 관계가 바탕에 깔려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역시 크게 보아 지배와 억압을 정당화 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굴종의 역사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전혀 바뀌지 않고, 오히려 진화하는 양상을 발견하게 된다625 때 마오쩌뚱이 김일성을 도와 한반도의 통일을 결정적으로 막은 항미원조(抗美援朝)’의 타산적 명분이야말로 지금까지 이 지역의 정치적이념적 지형을 주도해온 굴종적 역사의 또다른 구도라 할 수 있다.  

 

항미란 무엇인가. 자신들의 눈앞에서 통일 한반도를 재현시킬만한 힘을 지닌 미국에게 대항하겠다는 것이다. ‘원조가 말만으로는 자신들의 괴뢰인 북한을 돕겠다는 것인데, 처음부터 그 말의 이면에는 북한을 살려서 미국에 대항하는 주구(走狗)로 삼겠다는 뜻이 들어 있었고, 그 해석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이미 마오쩌뚱 당시부터 북한의 효용가치는 미국에 대한 견제 카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대규모 원군(援軍)을 출병시켜 망하기 일보직전의 김일성을 구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한반도 전체를 김일성 치하에 놓이도록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좀 더 확실한 대미 병참기지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 625에 참전한 마오쩌뚱의 원대한(?)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중국은 시종일관 북한의 후원자 혹은 후견인 노릇을 하면서 독점적으로 열매를 따왔다. 그런 그들의 행태는 개혁 개방 이후라고 달라질 것이 없었다. 오히려 물건 팔고 돈 벌어오는 새 시장 남한과 거래를 시작했으니, 그들로서는 이제 한반도에 관한한 알 먹고 꿩도 먹는단계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냉전시대에는 냉전시대대로, 탈냉전시대에는 탈냉전시대대로 한반도는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일 뿐이다.

 

그로부터 몇 발 더 내디딘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이 바로 시진핑의 행보와 2006년부터 본격 거론되기 시작한 대국굴기(大國崛起)’의 결합이다. 최근 중국은 '샤오캉(小康)'에서 '화평(和平)굴기'를 거쳐 비로소 '대국굴기'의 본심을 단계적으로 만방에 드러내 왔다. 그것이 시진핑 체제의 등장과 함께 떠오른 '중국몽(中國夢)'과 직결되는 말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Chinese Dream! 일견 멋진 듯하지만, 주변의 소국들을 아연 긴장시킬 만큼 고약한 것이 바로 그 말이다. 만주벌판도, 한반도도, 일본도, 동남아도 모두 손아귀에 쥐고 호령했던 그 옛날 '천자의 나라' 즉 중화제국을 복원하는 것. 바로 그것이 지금 중국의 전권을 거머쥔 채 실질적으로 황제 행세를 하고 있는 시진핑의 꿈이자 중국 지배계층의 꿈이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의 집권세력도 '한국 따위'는 애당초 안중에 두고 있지 않다. 늘 중원의 정치적 향배를 예의주시하며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워온 게 조선이었고 한국 아니던가. 모처럼 실용외교를 추구하던 광해군을 당당하게(?) 제거하고 인조를 옹립한 서인 반정세력이 향한 곳은 망해가는 명나라였다. 서슬 퍼렇게 중원을 먹어가던 누르하치를 애써 외면하며 한사코 망해가던 명나라에 빌붙고자 한 반정세력의 눈에는 오직 작은 한반도 안에서의 보잘 것 없는 권력만이 관심사였을 뿐 민족이나 국가, 백성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백성들이야 그들의 말발굽에 짓밟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식의 어이없는 패거리들, 힘을 가진 어느 누가 중원의 지배자가 되어 우리에게 압박을 가해오든 그에게 빌붙어 자신들의 목숨과 권력만 부지하면 그만인 '망종(亡種)'들이었다. 그들과 단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군상이 바로 지금의 이른바 '정치인들'이다. 아무런 식견도 밸도 없으면서 알량한 이데올로기의 허울을 뒤집어 쓴 채 권력과 돈만 탐한다는 점에서 17세기의 그들과 정확히 부합하는 한심한 '불량배'들이다. 국민들을 편 갈라 싸움질시키는 행태를 보면, 오히려 당시의 그들보다 훨씬 더 사악하고 음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중국은 중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우리를 얕보고 덤비는 것 아닌가.

 

2005년 탈북자들에 대한 부당한 횡포를 항의하기 위해 중국 본토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김문수 전 의원이 무도한 중국 공안들에 의해 폭행을 당한 사건을 기억들 하시는지? 나는 1624년 혹독한 겨울 명나라의 관원들에게 수모를 당하던 주청사행의 정사(正使) 죽천 이덕형(李德泂)의 사건을 김문수 의원의 사건과 비교하며 민족의 자존심이란 제목의 글을 조선일보(2005. 1. 17.)에 기고한 바 있고, 중국 당국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김영환 씨의 사건을 통해 김문수 의원 사건이후 전혀 바뀌지 않은 중국의 태도를 간파하고 중국은 무도(無道)'깡패국가', 세계 평화의 최대 걸림돌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이 블로그(2012. 8. 1.)에 올린 바 있다. 통탄스럽게도, '1624년2005년2012년'을 거쳐 드디어 2016년의 싸드까지 오게 된 것이다. 한국이 제 나라 제 국민을 지키겠다고 싸드를 배치하려는데, 못하도록 위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 중국이다. 그들의 눈에 한국은 자기네 나라의 한 성()에 불과할 뿐, '독립된 국가'가 아닌 것일까. 그간 핵을 개발하겠다고 광분하는 북한을 제재하겠노라고 선언한 것은 그야말로 제스처였고, 어떻게든 북한을 살려서 미국에게 달려드는 사냥개로 만들겠다는 것이 진정한 속내였던 것이다. 뼈다귀 몇 개 던져 놓으면 저희들끼리 물고 뜯는 싸움질로 날들을 지새울 게 뻔한 남한 쯤 굴복시키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라는 판단도 저들 내부적으로는 이미 서 있으리라.

 

***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를 선언한 미국이 일본, 한국과 손을 잡으면서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된 것은 시진핑의 이른바 '중국몽'이다. 바야흐로 자신들의 품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는 한국. 이미 품에 안겨있는 북한과 남한을 동시에 집어 삼키면, 일본쯤이야 큰 문제 아니라는 계산이 서 있었으리라. 이처럼 중국몽의 실현을 통해 세계의 중심 즉 '중화대국(中華大國)'으로 굴기해야겠는데, 일이 하나로 뭉치면 그 꿈은 자칫 '백일몽(白日夢)'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어려운 현실과 마주친 것이다. 제재를 이행하는 척 적당히 세계의 눈을 속이며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개발하여 미국에 맞서게 하려는 중국으로서는 그런 꼼수까지 간파되고 말았으니,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 당황함과 분노를 누구에게 옮길까. <<논어(論語)>>옹야편(雍也篇)'불천노(不遷怒: 이쪽에게 성낼 것을 저쪽에게 옮기지 말라)'는 남한을 향해 수백기의 미사일을 배치해 놓았다는 산동성 노나라 출신의 공자께서 하신 말씀이다. 땅덩어리만 크다고 대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주먹만 세다고 리더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유교의 핵심은 도()와 덕()이다. 무도(無道)하고 부덕(不)한 개인은 깡패나 강도일 수밖에 없고, 그런 나라는 깡패국가나 강도국가일 수밖에 없다. 중국이 중국몽을 실현하려면 우선 깡패국가의 굴레를 벗고 주변 국가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존경 받을 만한 도와 덕도 없으면서 아무리 미사일을 많이 만들고 항공모함이나 전투기를 많이 만든들, 종당에는 고철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는 진리. 지금 당장 시진핑 주석과 중국의 지도층은 그 간단한 진리를 역사로부터 배우기 바란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5. 6. 20:45

 


두 교수 부부와 처음 만나던 날, 저녁식사 자리

 

 


자신의 연구실에서 두 교수

 

 


필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교수

 

 


초대 받아간 두 교수의 집에서

 

 


두 교수의 요리솜씨

 

 


스틸워터의 중국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미국의 중남부에서 아시아 역사를 가르치는 젊은 학자: 용타오 두[Yongtao Du/杜勇濤] 교수

 

 

작년 827. 미국에 도착한 우리를 오클라호마 시티 윌 라저스[Will Rogers] 공항으로 픽업 나온 사람이 용타오 교수였다. 한국인인 우리는 젊은 그를 아시아식으로 두 교수라 불렀지만, 미국의 교수들과 학생들은 용타오라 불렀다. 그의 중국 이름은 두용도(杜勇濤)’. 그의 출생지인 중국 화중(華中) 지역의 하남성(河南省)은 중원문화의 발상지로서 빛나는 인물들이 배출된 곳이다. 도가(道家)의 시조 노자(老子), 동한(東漢) 시절의 과학자 장형(張衡), 당송팔대가 중에서 첫 손가락으로 꼽히는 문장가 한유(韓愈),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의 저자인 승려 현장(玄獎), 남송의 영웅 악비(岳飛)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당나라의 큰 시인 두보(杜甫)를 빼놓을 수 없으니, 두 교수야말로 바로 그 두보의 후예 아닌가.

 

두 교수와의 인터뷰

 

 

OSU 역사학과의 유일한 동양인 전임교수인 그는 늘 통통통’ 연구실과 강의실을 오가며 분주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는 하남대학교(Henan Univ.)에서 학사학위를, 베이징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일리노이 대학교[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일리노이 대학교와 와쉬번 대학교(Washburn Univ.)에서 강의를 하다가 2009년부터 이곳 OSU의 역사학과로 옮겨 재직하는 중이었다.

 

부의 교훈: 명나라 말기 혜주(惠州)의 상업문화와 지방주의”, “초지방적(超地方的) 혈통과 고향 애착의 로만스”, “경쟁적 공간 질서: 명나라 말기의 상업지리학등 탁월성과 독창성을 보여주는 논문들을 발표했고, ‘하바드 옌칭의 논문 작성을 위한 현장 연구 지원’, ‘탁월한 지리학사(地理學史) 학자에게 수여하는 리스토우 상’, ‘리칭 학술상등 여러 번의 학술상과 연구지원의 수혜를 받고 있는, 촉망받는 신진학자가 바로 그였다. 미국의 여타 지역들과 중국을 오가며 부지런히 논문을 발표하는 그의 모습이 돋보였다. 중국 역사 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 역사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면서 동양에 관한 미국 학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는 점도 좋아보였다.

 

미국 도착 뒤 시차적응도 되지 않은 나에게 한국사에 대한 물음들을 끊임없이 던졌다. 신라의 왕통, 삼국 간 정치제도의 차이, 왕건의 출신, 문벌귀족, 양반, 본관 등등. 사실 나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즉석에서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쉼 없이 건네는 그였다. 자신의 전공인 중국사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라도 주변국의 역사를 알아야겠더라는 그의 말은 그간 한국인이나 일본인을 만나지 못함으로써 겪을 수밖에 없던 자신의 지적 갈증을 명증하게 드러냈다.

 

우리는 잠깐씩 수시로 만나면서 --의 역사적 접촉과 현실을 논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중국말을 한 마디도 못하고 그 또한 한국말을 한 마디도 못했지만, 고맙게도 영어가 우리 사이의 간격을 메워주었다. 그러다가 갈증이 도지면 서로가 가끔씩 알고 있는 한시들을 써 보여주며 정서적 공감대를 확인했을 뿐 아니라, 근대 이전 동아시아에 정착되어 있던 중세적 보편주의의 실체와 힘을 확인할 수도 있었으니, 제대로 쓰인 역사에 대하여 무한한 신뢰를 갖고 있던 나로서는 감동적인 체험이었다. 조선과 중국의 지식인들이 북경의 유리창이나 그들의 사저(私邸)에서 필담으로 교유하던 그 시절의 광경을 우리 또한 제3국 미국의 한 구석에서 제법 재현한 셈이니, 참으로 희귀한 일 아닌가.

 

중국인인 그에게 나는 중화주의(中華主義)’의 협소함에서 벗어나라는 주문을 누차 건넸고, 그 역시 마오쩌둥을 좋아하지만, 미래지향적 행동지표로서의 글로벌리즘을 잊지 않고 있다는 말로 화답하곤 했다. 학문의 바다 미국에서 조만간 그는 아시아사의 최고 전문가로 성장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는 분명 민족주의의 편협한 굴레에서 벗어나 완벽하게 균형 잡힌 미래의 지식인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으리라 믿어본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