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2. 15. 07:15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부족 분포도

 

 

 


타오 시내 역사구역 도

 

 

 

 


타오 신 시가지 안의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교회'

 

 

 

 


타오 신 시가지 안의 장로교회

 

 

 

 


타오 신 시가지 안의 침례교회

 

 

 

 

 

 

 

 

부드러운 어도비, 완강한 타오 푸에블로인디언들

 

 

 

 

 

반델리어 유적지가 자리 잡은 프리욜레 계곡을 벗어난 시각이 오후 4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뉴멕시코를 벗어나기로 한 애당초 계획을 버리고 별 수 없이 로스 알라모스의 한 부분인 화이트 락(White Rock)에서 1박을 하며 반델리어의 감동을 정리하기로 했다. 창밖으로 산타페 산맥의 연봉들이 아스라이 보이는, 아름다운 호텔이었다. 다음날 호텔에서 챙겨주는 아침을 먹은 다음 프런트의 아가씨에게 일기예보와 타오(Taos) 에 관해 물었다. 눈 올 확률은 20%. 그러나 타오는 반드시 들러 가야 할 곳이라고 강추했다. 에라, 모르겠다. 눈이 쌓이면 며칠 묵어가지. 앞으로 언제 이곳에 또 올 것이냐. 그래서 산타페 쪽으로 다시 돌아가 I-40을 타는 대신, 그 반대편에 있는 타오(Taos)로 기수를 돌리기로 했다. 푸에블로 인들이 대대로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는 타오의 집단 거주지를 육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화이트 락에서 타오 가는 길은 지금까지의 어떤 구간보다 아름다웠다. 겉으로 낙후되어 보이긴 했으나 연도의 촌락들도 모두 평화로웠고, 황량한 산하는 그 나름의 정제된 미학을 갖추고 있었다. 군데군데 퇴락한 도회들도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것들이 갖고 있는 역사성은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멋지게 뻗은 502번 도로로 화이트 락의 호텔을 출발하여 잠시 가다가 30번으로 갈아탔고, 에스파뇰라(Espaňola) 턴파이크에서 68번으로 갈아탄 다음 두 시간 넘게 걸려 타오에 도착했다.

 

달리는 중간 중간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의 경관들을 만나면서 우리는 발걸음을 주춤거리기도 했다. 예컨대, 아리바 카운티(Arriba County)를 지날 때 길 가에서 녹슨 간판을 보고 찾아 들어간 작은 도시 벨라르데(Velarde)에서 과달루페 성모가 모셔진 작은 성당 과달루페 성모 교회[Iglesia de la Virgen de Guadalupe Mission Church]를 만난 기억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이다. 집도 몇 채 되지 않는 한적한 시골 동네 한 구석에 얌전히 앉아 있는 그 성당은 참으로 정결하고 가난해 보였다. 작은 나라에서 대형 교회들만 보아오던 내 눈에 큰 나라의 작은 교회가 주는 감동은 작지 않았다. 그런 감동을 안고 다시 먼 길을 달려 해발 2,124m의 높은 지역에 위치해 있는 면적 13.9 의 소도시 타오에 진입하게 되었다.

 

멀리 타오 마운틴이 서 있고, 그 앞으로 시가지가 비교적 널찍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길은 좁았으나, 도시를 채우고 있는 어도비 양식의 집들은 따스해 보였다. 무엇보다 성당과 교회 및 공공건물들 대부분이 어도비 양식인 점이 좋았다. 번쩍이는 빌딩 식 교회들보다는 어도비의 그 따스함 속에 구원의 손길이 깃들 것만 같았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타오 푸에블로(Taos Pueblo)’까지는 타오 신도시[Modern City of Taos]에서 북쪽으로 1마일이나 더 가야 하는데, 도시에 들어가자마자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St. Francisco de Asísi Church]’이 매혹적인 자태로 서 있는 것 아닌가. 안 들를 수 없는 일. 앞쪽으로 가보니 말문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건축미가 돋보였다. 이 지역의 교회들을 들르면서 느끼는 것은 종교적인 경건함보다는 건축미가 먼저 마음을 흔든다는 점이다. 교회 문을 살짝 밀고 들어서니 누가 죽었는지 장례미사가 집전되고 있었다. 경건하고 슬픈 분위기를 해칠까 저어되어 살그머니 되돌아 나왔으나,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은 자꾸만 우리의 발걸음을 지척이게 하였다. 거기서 몇 블록을 전진하자 이번에는 어도비 양식의 장로교회와 침례교회 등이 참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비록 문은 잠겨 있었으나, 외양을 감싼 고즈넉한 분위기가 세상의 번잡함을 정화시키고 있는 듯 했다. 역시 그곳의 자연환경과 일치되는 분위기의 교회가 사람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쉽게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 전체에서 풍겨나는 따스한 느낌 때문인가 이 지역의 교회를 볼 때마다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 폭 안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생소한 모습으로 번쩍이는 교회로부터 구원의 희망을 찾기란 어려운 일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주변에 널린 갖가지 유혹들을 물리치고 가까스로 도착한 곳이 타오 푸에블로. 타오 마운틴을 뒤로 하고 먼지 풀풀 이는 벌판에 그득하니 서 있는, 어도비 양식의 집단 거주지였다. 밝고 따스한 주택의 색깔이 주변의 붉은 흙빛, 뒤에 버티고 선 타오 산의 푸른빛, 마을을 뚫고 흐르는 리오 그란데 강의 옥색 물빛 등과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출입문을 통해서 들어가니 단층도 있고, 복층의 경우 5층까지 올린 집들도 있었다. 하나로 되어 있는 외벽 안쪽에 각자의 집들이 조합된 건축방식으로 이루어 진 것이 기본구조였다. 이 공동체에는 1,900명 이상의 푸에블로 인들이 속해 있는데, 그들 중 일부는 근처에 현대식 집을 짓고 살다가 시원해지면 푸에블로의 자기 집에 머물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 년 내내 그곳에서 지내는 사람들도 대략 150명 정도 된다고 한다.

 

타오 푸에블로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역사 문화 유적으로서 199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바 있다. 집들의 외양,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사다리들과 집 앞의 빵 화덕들은 스카이시티나 마찬가지였다. 사철 물이 흘러내리는 냇물을 보니, 그들이 이곳에 자리 잡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주거지는 냇물을 경계로 나뉘어 있었으며, 왼쪽 주거지의 중심부에 멋지게 지어진 가톨릭 교회도 있었다. 앞에서 누차 언급했지만, 이들이 자신들의 전통신앙을 거의 포기하고 가톨릭을 받아들인 점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스페인에 의해 식민 지배를 받은 결과라고 보지만, 신교 보다 가톨릭 쪽이 자신들의 전통신앙이나 가치관을 더 용인해준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여러 면에서 폐쇄적이었다. 가옥의 내부는 전혀 공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함께 사진 찍는 일도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집 앞 화덕에서 구운 빵을 판다고 하여 들어가 보았으나, 페치카에 장작 한 올 겨우 넣고 간신히 추위를 참고 있던 할머니는 아예 카메라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끝까지 지키고 싶은 자신들만의 세계라도 있는 듯, 이들의 구역에 들어가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경계의 눈빛을 쏘아대는 그들이었다.

 

 

 


타오 푸에블로 입구

 

 

 


타오 푸에블로 경내의 어도비 주거지

 

 

 


타오 푸에블로 경내의 어도비 주거지. 앞 쪽의 반타원형 구조물은 빵을 굽는 화덕.

 

 

 

 


타오 푸에블로 경내의  공동묘지를 갖춘 가톨릭 교회터

 

 

 

 

타오 푸에블로 경내의 가톨릭 교회

 

 

 

타오 푸에블로 왼쪽 주거지와 리오 그란데강 지류

 

 

 


타오 푸에블로에서 만난 푸에블로 소년과 검은 개

 

 

 

 


타오 푸에블로의 빵 굽는 화덕

 

 

 


타오 푸에블로 주거지

 

 

 


차양 밑에서 보호받고 있는 화덕

 

 

 


리오 그란데 강물과 나무 다리

 

 

 


빵을 굽고 있는 듯 연기가 피어오르는 타오 푸에블로

 

 

 

 

이들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쭉 살아갈 것 같은 그들만의 주거지를 간신히 돌아본 다음, 우리는 타오 외곽으로 리오 그란데의 강줄기를 찾아 차를 돌렸다. 30분 정도 황야를 달렸을까. 엄청난 규모와 높이의 다리 리오 그란데 죠지 대교[Rio Grande George Bridge]’를 만났다. 저려오는 오금을 달래며 다리 한복판까지 걸어갔다. 비행기 창문으로 땅바닥을 내려다보듯 갑자기 고소공포증이 밀려들었다. 멀리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고 나서야 이 다리가 없던 시절엔 타오가 강과 산으로 둘러싸인 고립지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런 고립지에 주거지를 건설하고 살았을까. 아마도 외부와 단절된 곳에 주거지를 건설하는 것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리라. 지역들이 사통팔달로 이어지는 오늘날 그들이 외부인들과의 접촉을 꺼려하는 것도 그런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서 나온 본능적 반응일 것이다.

 

대략 1천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타오 푸에블로는 뉴멕시코 북쪽의 여덟 개 푸에블로들 가운데 하나로서, 가장 비밀스럽고 보수적이며 사적인 영역을 많이 갖고 있는 부족이었다. 서기 1,000년부터 1,450년 사이에 세워져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거주 공동체인 타오 푸에블로. 그곳에서 우리는 화석처럼 살아가는 그들을 만났다. 외부세계와 단절되고 싶긴 하지만, 적빈(赤貧)을 해결하기 위해 외부인들의 접근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그들과 섞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들의 현실이었다. 아직도 지킬 만한 것이 있다고 믿는 그들이었지만, 외부인들로서는 그 점을 용납할 수 없는 현실이 안쓰럽게 생각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속물화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은 자신들의 원래 모습을 지키려는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훌륭한가?

 

타오 푸에블로 인들의 고집스런 표정을 대충 마음에 담아둔 채 우리는 뉴멕시코를 재빨리 벗어날 지름길 엔젤 마운틴의 산길로 접어들었다.

 

 

 


리오 그란데 강줄기와 계곡을 가로질러 만들어진
'리오 그란데 죠지 다리[Rio Grande Jeorge Bridge]'

 

 

 


광야를 가르며 죠지 다리 밑을 지나는 리오 그란데 강

 

 

 


리오 그란데 죠지 다리 부근에서 바라 본 광야

 

 

 


산타페 광장과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보여주는 타오 중앙광장

 

 

 


타오 광장 주변의 상가들

 

 

 


타오 외곽에서 만난 갤러리 'Happy Trails'

 

 

 


자료사진-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집단무용 '콘 댄스(Corn Dance)'

 


 


타오 카운티를 비롯한 뉴멕시코의 영역도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2. 13. 03:58

 

 


터키 괴레메 지역의 오픈 에어 뮤지엄(Open Air Museum)

 

 

 

 


터키 괴레메 로즈밸리(Rose Valley)의 한 암벽 동굴집을 찾아
현장에서 만난 베컴, 허이준, 허이훈 형제 등과 차를 마시며[2005년 12월]

 

 

 

 


터키 괴레메의 로즈밸리 지역

 

 

 

 


터키 괴레메 인근 언더그라운드 시티(Underground City)의 거실에서 만난 맷돌 아래 짝

 

 

 

 


터키의 셀르메 지역에서 만난 암벽 동굴들

 

 

 

 


터키 우흘라라 계곡의 암벽동굴 집에서 만난 프레스코화

 

 

 

 

 

 

 

암굴 속에 서린 생존 의지,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Bandelier National Monument]’의 말 없는 외침

 

 

 

 

9년 전 유럽 여행 중 터키 카파도키아의 괴레메 지역에서 만난 암굴 주거지는 지금까지도 큰 충격으로 남아 있다. 화산활동으로 생긴 다양한 모양의 암석과 암봉들에 침식작용으로 구멍이 뚫려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 안에 거주한 흔적들이 그 때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특히 카이마클르의 지하도시와 으흘라라 계곡, 셀르메 계곡 등 네브셰히르 코스에는 바로 어제까지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듯 온기까지 느껴졌다. 페르시아와 아랍인들의 침입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6세기부터 10세기까지 8층 깊이[높이가 아닌]로 뚫린 카이마클르의 언더그라운드 시티(Underground City)에는 각 층을 연결하는 가파르고 좁은 통로가 설치되어 있었고, 각 세대마다 거실과 침실은 물론 와인을 제조하고 저장하던 시설, 공동 주방 및 식당, 교회 등은 물론 까페도 있었다. 으흘라라와 로즈 계곡 등 지상에 서 있는 암굴 주택들의 벽과 천정에는 기독교 관련 프레스코화들이 그득했다.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 놀라움을 미국에서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산타페의 박물관들을 주마간산 격으로 스킴하고 멋지게 꾸민 이탈리아 식당에서 시장기를 달랜 후 우리는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Bandelier National Monument]’를 향해 쾌속으로 달렸다. 욕심도 과하지! 그곳을 본 다음 우리는 부랴부랴 멀고 먼 귀로에 올라 뉴멕시코를 벗어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산타페에서 반델리어 가는 길은 지금까지의 어떤 길보다도 만만치 않았다. 84[285] 하이웨이를 타고 산타페로부터 한 시간 가까이 사막지대를 달리다가 퍼와이키(Pojoaque) 턴파이크에서 502번으로 갈아탄 다음 더욱 높아진 산록 도로를 통해 몇 십 분을 더 달렸다. 제법 큰 도시의 모습을 갖춘 로스 알라모스(Los Alamos)부터는 가파른 산길이었다. 길은 그런대로 넓었고 노면 상태 또한 괜찮았으나, 왼쪽은 천 길 낭떠러지! 잔뜩 구름 낀 하늘엔 커다란 독수리가 선회하고 있었다.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의 음산한 분위기가 계곡 아래쪽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그 옛날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등짐을 진 어른들과 올망졸망 어린 것들이 길도 없는 이 등성이들을 넘었겠구나! 넘다가 실족하여 저 아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린 삶들도 좀 많았으랴!’ 생각하니, 삶에 대한 집착과 허무 사이의 드넓은 간극에 갑자기 콧마루가 시큰해졌다.

 

구불구불 산길을 넘어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비지터 센터에 도착했다. 추운 겨울, 비수기라서인지 우리를 포함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긴 코스와 짧은 코스가 있었지만, 시간 때문에 우리는 짧은 코스를 택했다. 사실 짧다 해도 충분히 둘러보려면 1시간 반 정도나 걸리는 코스였다. 비지터 센터를 떠나 본격 트레일에 접어드니 거대한 넓이로 땅 밑을 파낸 두 종류의 유허(遺墟)가 나타났다. 이른바 빅 키바(Big Kiva)’ 즉 푸에블로 인들의 지하 예배장이 아래쪽에 있었고, 그 위쪽에는 음식 저장고로 쓰이던 400개의 방을 가진 2층 구조물 즉 츄웨니[Tyuonyi]가 있었다. 그 주변에는 가옥으로 추정되는 지상 건축물들의 터가 많이 남아 있고, 거기서 올려다보니 주택 혹은 주택의 일부로 사용되던 벌집 모양의 암봉이 거대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었다그곳이 바로 푸에블로 인들의 암벽 주거지[Cliff Dwellings]’였다.

 

이 구역의 암벽 주거지는 두 군데였다. 하나는 짧은 코스에 있는 것들이고 또 하나는 그 위쪽의 긴 주택[Long House]’들이었다. 우리는 짧은 코스의 것들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미 터키에서 정교하게 꾸며진 암굴(巖屈)들을 자세히 본 바 있는 내 입장에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으나, 미국에도 이런 유형의 집들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화산암[volcanic tuff]에 뚫린 동굴들은 그 자체가 좋은 집이나 안락한 방의 역할을 한 공간들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안에 들어가니 대부분의 벽들은 불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까맣게 그을려 있어 누군가 이 안에서 불을 피우고 살았음이 분명했다. 암벽을 둘러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작은 구멍들이 나 있었는데, 이것은 통나무들을 그 구멍에 끼운 다음 암벽에 의지하여 지어낸 푸에블로 전통가옥들의 흔적이었다. 구멍의 숫자로 보아 전성기 때는 매우 많은 세대의 집들이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 가는 교통망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의 위치

 

 

 


반델리어 지역 표지판

 

 

 


반델리어 지역 푸에블로 인들의 합동 예배장 유허

 

 

 


동굴집들이 있던 거대한 암벽

 

 

 


동굴집들이 있던 거대한 암벽

 

 

 


동굴집들이 있던 거대한 암벽

 

 

 


동굴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설치한 사다리

 

 

 


암벽 동굴집들과 벽에 잇대어 집을 지었던 흔적으로 남아 있는 작은 구멍들,
그리고 암벽화[pictograph]

 

 

 


암벽동굴집들과 그 주변에 덧붙여 지은 집의 유허

 

 

 


암벽 동굴집 아래쪽에 있던 주택가의 유허

 

 

 


암벽 동굴집 아래쪽에 있던 주택가와 각종 시설들의 유허

 

 

 


암벽 동굴집 아래쪽에 있던 주택가와 각종 시설들의 유허

 

 

 


암벽 동굴집 내부[벽이 온통 그을려 있음]

 

 

 


암벽 동굴집에서 내다 본 바깥 풍경

 

 

 

 

그렇다면 그들은 이 깊고 척박한 산중에서 무얼 먹고 살았을까. 대략 12세기 중반에서 16세기 중반에 걸쳐 이곳에서 살았던 () 푸에블로[Ancestral Pueblo]’ 인들은 메사(mesa)의 위쪽에 있던 들판에 농작물들을 재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옥수수, , 호박 등은 그들의 주식이었으며, 자생식물들과 우리가 현장에서 발견한 사슴, 토끼, 다람쥐 등의 고기도 영양분을 보충하기에 요긴했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의 집 주변에서 기르던 칠면조로부터는 깃털과 고기를 얻었을 것이며, 개를 이용한 사냥도 가능했던 것으로 보였다.

 

반델리어에 인간이 깃들기 시작한 세월은 10,000년이 넘는다. 메사와 계곡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야생 조수(鳥獸)들을 따라 다니던 수렵채취 부족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서기 1,150년에야 선 푸에블로인들은 반영구적인 주거지를 짓기 시작했고, 1550년에는 이곳을 떠나 리오 그란데(Rio Grande) 강가로 주거를 옮겼다. 코치티(Cochiti), 산 펠리페(San Felipe), 산 일데폰소(San Ildefonso), 산타 클라라(Santa Clara),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등이 그들의 새로운 주거지역이었다.

 

그 후로 4백여 년 간 이 땅에는 사람들이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심한 가뭄까지 닥쳐오게 되었다.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들의 구비전승[口碑傳承, oral tradition]에 의하면, 리오 그란데 강을 따라 남쪽과 동쪽에 위치한 코치티 푸에블로와 산 일데폰소 푸에블로가 프리올레 캐년에 집을 짓고 살던 이들의 가장 가깝거나 직접적인 후손들로 보인다고 한다.

 

비지터 센터에는 박물관과 함께 이들의 생활사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관이 있었다. 거기서 확인하게 된 흥미로운 사실들 중의 하나는 이들이 구비전승을 통해 조상들과 연결했고, 그에 의존하여 삶의 지혜를 얻거나 적응해 나왔다는 점이다. 푸에블로의 구비전승은 자신들의 믿음, 이야기, 노래, , 생활 속의 기술 등 모든 것을 포괄한, ‘옛날과 현재의 대화E.H. 카아의 말대로 역사였다. 따라서 구비전승은 선대 푸에블로의 생존에 기본적인 텍스트였고, 오늘날에도 푸에블로로 하여금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게 하는 필수적인 지식의 창고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푸에블로의 이야기들에는 그들의 활동이 묘사되어 있기도 하고 교훈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여, 대대로 그것을 가르쳐 왔음은 물론 그 안에 들어 있는 생생한 정보들을 공유하기도 했다. 대부분 구비로 전승되어 왔지만, 개중에는 그림, 암각화, 혹은 춤으로 묘사되기도 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들의 주거지 주변에서 목격한 암각화도 그 사례들 가운데 하나였다.

 

1,700년대 중반 스페인 정부가 불하해준 땅을 소유한 스페인 정착자들은 프리욜레 캐년(Frijoles Canyon)에 자신들의 주거지를 만들었고, 1880년 코치티 푸에블로의 호세 몬토야(Jose Montoya)는 고고학자 반델리어[Adolph F. A. Bandelier, 1840. 8. 6.~1914. 3. 18.]를 프리욜레 캐년으로 데리고 가 조상들이 살던 고향땅을 보여주었다. 그 때부터 반델리어는 이 지역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반델리어는 스위스 베른 출신의 미국 고고학자인데그의 이름을 따서 이 유적지의 명칭으로 삼았을 정도로 그는 이 지역에 관한 전문가였다. 그는 젊은 시절 미국으로 이주하여 노동을 하며 힘들게 살았다. 당시 대단한 인류학자 모건(Lewis Henry Morgan)의 지도 아래 그는 미국 남서부, 멕시코, 남아메리카 등지의 미국 원주민들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멕시코의 소노라(Sonora),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지에서 연구를 시작하여, 이 지역 연구를 선도하는 권위자가 되었고, 쿠싱(F. H. Cushing) 및 그의 후계자들과 함께 선사 문화 분야의 선도적인 학자가 되기도 했다. 그의 이름을 딴 곳이 바로 이 구역이었다.

 

1916반델리어 국립 유적지법령이 만들어지고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이 서명했으며, 1925년에는 에벌린 프라이(Evelyn Frey)와 그의 남편 죠지(George)가 이곳에 도착하여 1907년 애벗 판사(Judge Abbot)가 건립해온 ‘10 엘더스 랜취(the Ranch of the 10 Elders)’를 이어받게 되었고, 1934년과 1941년 사이에 민간 자원 보존단[Civilian Conservation Corps]’의 노동자들이 프리욜레 캐년에 만들어진 캠프에서 작업을 하는 등 최근까지의 노력으로 지금의 유적지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암벽 주거지를 거쳐 내려오는 길은 지난여름 이 일대를 휩쓸었던 것으로 보이는 홍수의 현장이었고, 근년에 일어나 아름드리 소나무들을 태워버린 무서운 자연 화재의 현장이기도 했다. 무수한 나이테들을 몸에 새기고 벌렁 누워있거나 아직 청청하게 버티는 소나무들은 그 옛날 이곳에서 살아간 푸에블로 인들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이 계곡에서 먹고 자고 사랑하며 생존의 나날을 버텨내던 푸에블로 인들은 벌써 오래 전에 이 계곡을 떠났다. 그러나 리오 그란데 강줄기를 따라 새로운 터전들을 일군 그들은 변함없이 옛날이야기들 속에 숨어 있는 조상들의 지혜를 이어가며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는 프리욜레 계곡의 거센 냇물 소리를 기억하며...

 

 

 


당시 이곳 주민들이 잡아먹고 살았을 다람쥐

 

 

 


당시 이곳 주민들이 잡아먹고 살았을 사슴들[Mule Deer]

 

 

 


당시 이곳 주민들이 따 먹고 살았던 잣나무 열매[piňon nuts].
지방과 단백질의 공급원이었음.

 

 

 


당시 이곳 주민들에게 비타민과 무기질을 공급했을 선인장 열매들

 

 

 


당시 이곳 주민들이 동굴집 주변에 남긴 암각화[pictograph]

 

 

 


스페인 이주자들로부터 받은 영향을 암시하는 암벽 위의 십자가

 

 

 


열매를 갈아 식량을 확보하던 당시 여인들의 삶[비지터 센터 박물관 그림]

 

 

 


당시 이곳 주민들이 사용하던 바구니와 갈돌, 그리고 화살촉[비지터 센터 박물관]

 

 

 


당시 이곳 주민들이 사용하던 도자기와 각종 생활 도구들[비지터 센터 박물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