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4. 10. 15:23

 


<뚜르꾸 대성당> 


<뚜르꾸 대성당의 천정과 파이프 오르간> 


<뚜르꾸 대성당의 제단> 


<뚜르꾸 대성당 박물관의 피에타상> 


<뚜르꾸 성> 


<올드 라우마(Old Rauma)의 인포메이션 센터가 들어 있는 고건물>

 
<라우마의 박물관>


<라우마 박물관의 자수 도구와 작품> 


<라우마 박물관의 요람> 


<라우마의 마렐라(Marela)> 


<마렐라의 서재> 


<마렐라에 전시된 옛날 교과서>


<라우마의 성 십자가 교회>


<라우마 성 십자가 교회 성전> 


<얼어붙은 Yyteri 해변에서 임미숙, 조경현 모자> 


<레포사아리(Reposaari)-조선소의 흔적> 


<레포사아리(Reposaari)의 루터 교회> 

 

 

교회와 고성(古城), 옛 도시에 살아 숨 쉬는 핀란드 정신을 찾아

 

 

 

 

라우마(Rauma)를 거쳐 뽀리(Pori)까지 가는 날. 그간 끝없이 펼쳐지는 수해(樹海)와 잘 보존된 자연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핀란드 인들의 행복을 훔쳐 보기 위한 일정의 연속에 지루해진 것일까. 방향을 약간 틀어 역사와 정신의 자취를 느끼기로 했다. 호텔에서 이른 조반을 마친 우리는 카우 광장의 동쪽 강변에 서 있는 뚜르꾸 대성당을 찾았다. ‘핀란드 루터 교회의 어머니’격인 뚜르꾸 대성당. 14세기에 착공하여 16세기에 완공되었다니, 200년 대역사(大役事)의 산물이 아닌가? 그로부터 5세기. 세월의 강을 묵묵히 건너가고 있는 성당은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며 녹청으로 아로 새겨진 시간의 허물을 뒤집어 쓴 채 고고하게 서 있었다. 정문 앞에 세워진 초대 비숍 미카엘 아그리콜라(Mikael Agricola) 상 주변을 쓸고 있던 성당 관리자로부터 자부심 묻어나는 설명을 들으며 성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성전 안 곳곳에 다양한 채플들[Tigerstedt-Wallenstierna Chapel/Mayor's Chapel/Chapel of All Souls/Gezelius Chapel/Tavast Chapel/Kijk Chapel]이 마련되어 있었고, 연륜과 달리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스테인드 글라스, 하얗게 빛나는 파이프 오르간 또한 강한 인상을 주었다. 분명 핀란드 정신과 역사는 이곳 뚜르꾸 대성당에 압축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이 아우라 강 하구의 뚜르꾸 고성. 600여년 핀란드를 통치하던 스웨덴이 세운 성채로,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외관을 갖고 있었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소박하면서도 견고한 인상을 갖추고 있어 몇 년 전 둘러본 슬로바키아의 오라바 성과 흡사한 모습의 요새였다. 그리고 그것은 핀란드 인들의 아픈 과거가 새겨진 역사의 물증이기도 했다.

 

***

 

뚜르꾸를 떠나 30분쯤 달렸을까. 옛 도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갖춘 라우마[Vanha Rauma/Old Rauma]가 눈앞에 닥친다. 199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통째로 등재된 ‘올드 라우마’. 라우마의 알트슈타트(Alt Stadt)는 걸어서 한 시간 안에 섭렵할 수 있을 만큼 작았지만, 상가와 주거를 겸한 600여 채의 목조주택에 8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중세 도시였다. 양파 모양 첨탑의 박물관, 성십자가 교회(Church of the Holy Cross), 19세기 생활사를 보여주는 마렐라(Marela) 등이 우리가 꼽은 이 도시의 핵심들이었다. 걸을 때마다 마룻바닥의 삐걱대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긴 했으나, 박물관 안에는 옛 주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정겨운 물건들이 그득했다. 이 박물관이 제공하는 감동의 포인트는 수백 가닥의 미세한 실을 바늘에 꿰어 짜 나가는 레이스 예술이었다. 여인들의 섬세한 손가락이 날듯이 오가며 한 땀 한 땀 짜 나아가는 환영(幻影)이 유리 케이스에 얼른거렸다.

 

다음으로 찾은 곳이 마렐라. 마렐린[Abraham Marelin]이 18세기 후반에 살았던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그들이 남긴 생활사의 자료들을 전시한 곳이었다. 옷, 책, 책상, 타자기, 장신구, 교과서, 요람, 침구, 그릇 등등 지난 시대 이곳 주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거기서 몇 골목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니 성십자가교회가 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뜰에는 아씨시의 프란체스코 성인이 비둘기를 안은 채 교회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터 교회로 바뀌었지만, 원래 15세기에 프란체스코 수도원으로 세워졌던 곳이다. . ‘성삼위 교회(Church of the Holy Trinity)’가 1640년의 화재로 파괴된 뒤 루터 교회로 되었으며, 작년에 500주년 기념식을 가졌을 만큼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였다. 정갈하면서도 고요한 성전에 들어가 앉았을 때 비로소 지금껏 지속되는 올드 라우마의 정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간의 격랑에 휩싸여 사라지는 것이 역사는 아니며, 삶의 모습이 바뀐다하여 사라지는 게 정신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올드 라우마는 성십자가 교회의 고적한 성전, 그 울림을 통해 나그네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

 

올드 라우마로부터 4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이 바로 지금 이곳 뽀리(Pori)다. 라우마와 마찬가지로 평원을 그득 채운 목조주택들이 햇살에 산뜻한 모습을 드러낸 곳. 호텔이 여의치 않아 펜션으로 개조한 뽀리 주민의 집 한 채를 빌려 하루를 묵게 된 것이다. 정갈하게 꾸민 침실과 주방, 화장실 등에 선진국 핀란드 인들의 안목은 묻어나고, 말없는 주인장의 미소에서 핀란드 인들의 정이 피어난다. 오후 늦게 찾은 핀란드의 최장[6km] 모래해안 Yyteri. 트레킹이나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즐기는 핀란드 인들만 간혹 오갈 뿐 꽁꽁 얼어붙은 바닷가의 텅 빈 모래사장엔 얼음만 가득하고, 모래사장을 출발 자작나무 숲을 지나 도착한 레포사아리(Reposaari)의 해변에는 옛 조선소의 영광을 증언하는 스크류 하나만이 훈장처럼 내 걸려 찬 기운에 떨고 있었다.

 

그렇다. 역사와 정신은 함께 가는 것이다. 우리가 짚어나가는 곳곳에 그 둘은 손에 잡힐 듯 배어 있었다. 그것들을 바탕으로 핀란드의 정신이나 역사의 속살을 느껴보려는 우리가 만용을 부리는 것일까. 대강 지나며 곁눈질로 바라보는 우리의 여행을 ‘장님이 코끼리 더듬듯 한다’는 이유로 웃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국 맛을 알기 위해 한 솥의 국을 모두 마실 필요가 있겠는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4. 9. 13:38

 

 


<올해 6월에 개장하는 로바니에미의 산타 파크> 


<산타마을 매장에서> 


<산타마을에서> 


<산타마을에서> 


<산타 파크에서>


<산타마을에서> 


<각국의 시민들이 산타에게 보낸 편지들, Etela-Korea, South Korea> 


<지도에 표시된 북극권> 


<산타마을의 위도> 


<로바니에미에서 헬싱키 가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핀란드 산하>  


<뚜르꾸 시가지> 


<뚜르꾸의 아우라 강> 


<뚜르꾸 시립도서관> 


<뚜르꾸 시립도서관> 


<뚜르꾸 시립도서관> 


<뚜르꾸 시립도서관>


<뚜르꾸 러시아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정문에 놓인 종> 
<뚜르꾸 Art Museum> 


<뚜르꾸 Art Museum>에서 


<뚜르꾸 Art Museum에 내걸린 작품> 


<뚜르꾸 Art Museum으로부터 시내를 관통하는 도로> 


<Art Museum hill에 위치한 레닌 흉상-레닌 망명시절의 집터>


                                                                             <4월 8일 1박을 한 래디슨 호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든 산타마을, 영욕의 역사 현장 뚜르꾸(Turku)

 

 

사흘간의 로바니에미 체류를 마무리하기 위해 산타마을에 들렀다. 산타클로스! 꿈과 기대로 아이들을 설레게 하여 어렵던 시절을 무사히 넘기게 했던 환상 속의 존재였다. 산타를 대망(待望)하던 아이들이 자라나 지금 세계 곳곳의 중추로 자리 잡고 있으며, 또 그들의 아이들이 산타를 기다리며 자라고 있다. 누구는 만개(滿開)한 상업정신의 대표 장소로 산타마을을 꼽지만, 마냥 비판만 할 일은 아니다. 찬 공기 넘나드는 전나무와 소나무, 자작나무들이 주변을 둘러 있고, 단 몇 달을 뺀 나머지 기간엔 늘 눈과 얼음에 덮여 있는 이곳. 그나마 산타 할아버지의 인자한 얼굴을 형상하는 것 외에 무슨 희망이 있었을까. 그 환상을 세계 아이들과 공유하며 그들과 함께 성장기의 고뇌들을 넘어 미래에의 꿈과 희망을 갖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상업화된다 한들 무슨 상관있단 말인가. 가게 진열대들을 그득 채우고 있는 산타 관련의 온갖 캐릭터 상품들,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할만한 각종 동물 형상들과 의상들, 산타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 각국에서 보내온 크리스마스 카드들[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보내온 카드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미리 써서 보낼 수 있다는 우체국 서비스가 재미있었다. 이곳을 여행하는 사람이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보낼 카드를 미리 써서 부치면 산타클로스 우체국 마크를 찍어 크리스마스 즈음에 전달해준다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발상들에 잠시 세상의 번뇌를 잊어보는 순간이었다.

 

북위 66도 32분 35초. 북극의 추위에 다져진 때문일까. 라플란드 지역의 핀란드인들은 다소 무뚝뚝한 표정 속에 성실하고 다감한 내면을 감추고 있었다. 형상을 가진 모든 것들은 얼어붙어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따스한 난로가 하나씩 갖추어져 있음을 여행 중 여러 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추위 속에서 빛나던 그 난로 하나를 마음으로 얻은 우리는 찾아온 길을 되짚어 헬싱키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구도(舊都) 뚜루꾸로 가기 위해서였다.

 

***

 

예상했던 대로 뚜르꾸는 참하고 한적한 도시였다. 대(大) 화재로 모두 부서진 뒤, 1800년대에 새로 지었다는 도심의 건물들은 나름대로 고풍(古風)을 간직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러시아의 쌩뜨 뻬쩨르부르그나 동유럽 도시들에서 가졌던 느낌이 되살아났으나, 그 이유를 딱히 짚어낼 수는 없었다. 호텔[Radisson] 뒤편의 아우라 강 (Auranjoki) 도 꽁꽁 얼어 레스토랑이나 까페로 쓰이는 큰 배들이 제자리에 묶여 있지만, 넘실대는 여름날의 푸른 물 위에 불야성을 이룰 모습들을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강 건너에 높은 언덕 중턱에 박물관이, 그 너머엔 뚜르꾸 대학이 있었으며, 자그마한 옛 성도 있었다. 아우라 강을 따라 발트 해로 연결되는 뚜르꾸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한 지배자 스웨덴 인들과, 스웨덴을 멀리 하려 헬싱키로 통치의 중심을 옮겨버린 또 다른 지배자 러시아인들의 갈등이 눈에 보이듯 도시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최신식 건물에 따스하고 안락한 분위기였다. 독서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이 신기하고 부러웠다. 무엇보다 몇 권의 책을 안고 들어와 반납한 뒤 새로 대출해가는 점잖은 신사들의 모습이 이채로웠다. 아마 퇴근 후 들른 것이리라. 우리나라에서 퇴근 후 몰려드는 직장인들 때문에 예산을 들여 도서관을 증축할 수밖에 없다는 소식이 각 지방자치단체들로부터 들려오는 날은 그 언제일까. 우리의 진정한 르네상스는 그런 날로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점을 이곳 뚜르꾸의 시립 도서관에서 깨달았다.

 

***

 

도서관을 나와 ‘손바닥 만한’ 뚜르꾸 시가지를 체험하는 도중 언덕 위에 우뚝 선 ‘Art Museum'을 만났다. 문이 잠겨있어 들어갈 수는 없었으나, 건물의 모습은 물론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위치가 범상치 않았다. 뮤지엄이 서 있는 언덕 아래로 시원하게 뚫린 대로(大路)가 그대로 도시를 관통하여 아우라 강을 자르며 맞은편 언덕으로 이어지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란 건 그 뮤지엄 바로 밑에 레닌의 흉상이 서 있는 일이었다. 아, 그곳이 바로 10월 혁명 이전 몇 차례의 거사에 실패하여 짜르에게 쫓긴 레닌이 망명생활을 하던 곳 이었다! 이상한 열기가 몸에 전해진다 싶었는데, 혁명가의 열정이 아직도 살아남아 벌떡거리는 박동을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혁명의 와중에 유일하게 적군이 백군에게 패한 곳이 핀란드였는데, 레닌이 바로 그곳에 망명해 있었다니!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어, 귀국하면 그 역사를 다시 들춰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핀란드와 가까운 곳에 레닌그라드[현재 쌩뜨 뻬쩨르부르그]가 있고, 도시 전체에서 미미하나마 러시아나 동유럽의 기풍을 감지한 내 첫 느낌이 그 사실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섣부른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내일 이곳에서 가장 크다는 교회와 박물관을 찾아 이 느낌의 합리성을 따져 보기로 한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