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9. 1. 27. 05:10
 

똘레도를 출발하여 그라나다로 향하는 길. 드넓은 스페인의 평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가도 가도 산하나 보이지 않는 평원이었다. 들판은 정연하게 늘어선 올리브 나무들. 뿌리와 꼭지만 남아 새 계절의 발아(發芽)를 꿈꾸는 포도나무들, 장미의 농원, 그리고 푸른 보리밭이 전부였다. 과연 스페인은 농업의 대국, 풍요가 땅 전체에서 넘쳐 났다. 면적 505,955평방킬로미터, 남한 면적의 약 5배에 달하면서도 인구는 4,350만명에 불과했다. 1인당 연평균 소득 3만 5, 6천불에 이르는 부국의 기틀이 이처럼 평평하고 기름진 땅에서 이루어졌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구역이 바로 라만차 지방. 돈키호테의 고향이었다. ‘건조한 땅’을 이르는 아라비아어 ‘라만차’. 작은 나라 대한민국 백규의 눈에는 부럽기 짝이 없었으나, 보기에 따라서는  황량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곳곳에 심은 올리브 나무들은 이곳의 황량함을 덜어주고 있었다. 이곳을 배경으로 돈키호테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시대와 사회에 무언가를 말하고자 한 세르반테스(1547~1616)의 의중이 라만차를 달리는 내내 내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일으켰다. 그가 태어나 활약하던 시기는 이미 중세가 끝난 시점이었으나, 아직도 구체제가 남아 세력을 발휘하던 때가 아니었을까. 세르반테스로서는 새로운 질서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요구와 시대정신을 외면할 수 없었으리라. 돈키호테라는 정신 나간 인물을 등장시켜 구체제의 시대착오적 허구를 통렬히 웃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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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게소 벽에 붙어 있는 동키호테>

 버스를 타고 지나다가 풍차마을을 만났다. 캄포 데 크립타나(Campo de Criptana)! 복잡한 마을 이름이었으나 언덕 위엔 10개 정도의 풍차들이 서 있었다. 언덕에 올랐다. 거대한 풍차였으나, 이미 맥박은 정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언덕에 불어대는 바람은 사정이 없었다. 바람은 모자를 날리고 입을 얼려, 말을 이룰 수 없었다. 아, 이 바람. 이런 바람이라면 그 옛날엔 웅웅거리며 이 거대한 풍차를 돌릴 수 있었겠다! 어둑발이 내린 평원 저쪽을 걸어오던 돈키호테에게 언덕 위에서 소리 내며 돌아가는 풍차는 아주 도전적인 존재로 등장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장창을 비껴들고 풍차에 달려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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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의 등쌀을 견디지 못하고, 풍차 아래쪽의 작은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에 언 몸을 녹이며 라만차의 아랫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들이 정겨웠다. 저 동네 어느 골목에선가 로시난테에 몸을 맡긴 돈키호테가 산초 판사를 대동하고 뛰어나올 것만 같다. 아니나 다를까 시내에는 요소마다 돈키호테의 상이 서 있었다. 소설 <<돈키호테>>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었다.

 캄포 데 크립타나로부터 차를 달려 30분 만에 도착한 곳이 푸에르토 라피세(Puerto Lapice). 이곳에서 ‘벤타 델 키호테’를 만났다. ‘돈키호테의 정자’로 번역되는 이름의 허름한 주막 겸 레스토랑이었다. 돈키호테가 대관식을 가진 곳이 바로 이 집이라는 것. 우물도 있고, 장창을 곧추 잡은 돈키호테도 서 있었다. 가게에는 돈키호테의 캐릭터 상품들이 그득했다. 돈키호테를 뜯어먹고(?) 사는 스페인 사람들이었다.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를 갖고 있는 스페인과 스페인 사람들이 새삼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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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1. 26. 17:20
 

스페인 기행 2-1 : 똘레도의 감동, 그리고 질기게 따라붙는 동키호테



1월 24일. 호텔 레스토랑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똘레도로 출발했다. 인구 6만 정도의 소도시이지만, 한때 마드리드를 위성도시로 거느리던 스페인의 수도였다. 이슬람 시절에 쌓아올린 가파른 성벽을 금대(襟帶)처럼 타호강이 에둘러 흐르고, 복잡한 시가지 안에는 고급 문화유산으로 그득했다. 스페인이 보유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은 대충 헤아려도 39점이나 된다. 그 중 35점이 문화유산, 2점은 자연유산, 그리고 나머지가 복합유산이다. 이곳 똘레도는 시가지 전체가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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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는 똘레도 대성당의 대시계문, 아래는 정면>

마드리드에서 버스에 오르니 1시간 10분 만에 똘레도의 웅장한 성채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좁은 언덕길에 올라 버스에서 내리니 붉은 색 벽돌집들이 골목에 빽빽했다. 타호강은 허리띠 혹은 오그린 두 손바닥처럼 사람들의 삶과 온갖 문화유산들을 감싼 채 흐르고 있었다. 그 가운데 굵직한 것들만 꼽아도 대성당, 엘그레코 산또 토메 교회, 산후안교회, 의사당, 산타크루즈 미술관, 알카사르 요새 등등 숨이 차오를 정도. 우리가 찾은 곳은 대성당과 엘그레코 산또 토메 교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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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 그레코 산토 또메 교회>

 예상대로 대성당은 똘레도의 중심에 있었다. 대성당을 중심으로 광장이 이루어져 있고 그 주변에 상가와 주택가가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모습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확인한 대로였다. 똘레도가 이슬람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227년 페르디난도 3세가 착공하여 1493년 알폰소 8세가 완성한 전형적인 고딕식 건축물이 대성당이다. 길이 120m, 폭 60m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정면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90여m의 두 탑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 18톤에 달하는 종이 매달려 있다 한다. 수리 중이라 들어갈 수 없는 이 탑은 스페인이 낳은 위대한 화가 엘 그레코의 아들 조르쥬 마누엘(Gorge Manuel)이 세웠고, 내부의 프레스코화나 스테인드 글라스 등은 엘 그레코와 고야 등 거장들의 작품이라고. 

 수리 공사 중인 정문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고, 뒤쪽의 대시계문(Puerta del Reloj)으로 입장한 우리는 장엄한 내부에 또 한 번 놀라게 되었다. 내진(Capilla Mayor), 성가대석(Coro), 참사회 회의실(Sala Captular), 보물 보관실(Tesoro), 성구실(Sacristia), 예배당(Capilla), 회랑(Claustro) 등으로 이루어진 내부는 고전적이면서도 화려했다. 스페인 천주교의 중심인 수석 대교구 성당이 바로 이곳이었다.

 성구실에는 엘 그레코의 <성의의 박탈>, 고야의 <그리스도의 체포>, 모랄레스의 <슬픔의 성모> 등 대작들이 전시되어있어 질적으로 큰 미술관에 못지않았다. 그 옆의 의상실에는 중세 성직자들이 입었던 수직(手織)의 화려한 미사복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역사와 시간을 뛰어넘은 그 모습이 우리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소예배당의 보물 보관실에 전시된 성체 현시대는 또 하나의 놀라운 물건이었다. 금은보배로 장식된 구조물이 대성당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성현일에 이 성체 현시대를 둘러메고 거리를 순례하는 행사는 지금도 반복된다니, 놀라운 일이다.

 대성당을 나온 우리는 꼬불꼬불한 골목길들을 돌아 산또 토메 성당으로 갔다. 엘 그레코의 명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을 친견하기 위해서였다. 이 성당을 재건한 오르가스 백작. 그의 장례식에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과 스테파노 성인이 오르가스 백작의 시신을 안장하는 모습, 그 뒤에 배열한 참배객들의 슬픈 표정들, 정면을 응시하는 화가 자신의 모습, 그림의 뒤쪽에 천국에서 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백작의 영혼을 맞이하는 모습 등 매우 인상적이며 감동적이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둘러싸고 천국으로부터 두 성인이 강림하고, 하늘나라에서 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죽은 자의 영혼을 영접하는 모습 등은 오르가스 백작의 죽음을 둘러싸고 일종의 기적을 염원하는 독실한 신심의 발현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오르가스 백작이 재건한 산토 또메 성당은 이 그림이 있어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똘레도는 중세정신이 살아있는 보물 창고였다. 성채를 빠져나와 바라보니, 타호강 너머에 앉아있는 똘레도 자체가 하나의 요새요 금성철벽이었다. 사실 똘레도의 존재를 전투와 관련시키려면 알카사르 요새를 들지 않을 수 없다. 1538년 카를로스 1세에 의해 개축이 시작하여 1551년 요새의 원형이 이루어졌고, 1936년 스페인 내란 당시 프랑코 파의 주둔지가 되었던 곳. 프랑코파가 인민 전선군에 강하게 저항하던 곳이 바로 알카사르 요새였던 만큼 똘레도는 종교와 함께 정치, 군사적으로 의미가 큰 지역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스페인 역사의 영욕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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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으로 하몽(돼지 넓적다리를 염장한 식품)을 먹은 식당 라 쿠바나는 타호 강을 경계로 똘레도 요새의 맞은편에 있었다. 딱딱하고 맛깔스러운 스페인 빵과 짭짤하고 고소한 하몽 한 점으로 스페인 역사의 질곡을 맛보게 되었다면, 과장인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