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12. 21. 11:54

 

 

 

 

길 이야기

 

 

 

 

 

그대는 우울한 시절 햇살과 같아

그 시절 지나고 나와 지금도 나의 곁에서

자그만 아이처럼 행복을 주었어

 

~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고

아픈 시간들 속에서 어떻게든 가야만해

 

혼자서 걸어간다면 너무나 힘들 것 같아

가끔이라도 내 곁에서 얘기해 줄래

그 많은 시간 흐르도록 내 맘속에 살았던 것처럼

 

사랑도 사람도 나를 외면했다고 하지만

첫 새벽 공기처럼 희망을 주었어

 

오랫동안 소리 없이 내게 살아왔던

너를 사랑해

너를 사랑해

 

 

 

모처럼 접해 본 윤도현의 노래 <>이다. 행복한 사람도 상처를 입은 사람도 살아있는 이상 걸어가야 하는 것이 길이다. 길을 말하다가 너에 대한 사랑으로 끝맺는 윤도현의 노래가 좀 낯선가. 작사자는 누군가 먼 길을 가다가 문득 내 곁에서 함께 걷고 있는 길동무로서의 를 발견했을 것이다. 혹은 를 통해 함께 걸어가야 할길을 예감했거나 함께 해야 할운명을 깨달은 건 아닐까. 그래서 윤도현의 와 함께 함으로써 운명적 사랑이 구현되는 공간으로 해석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길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가. 아니다. 시작만 있고 끝이 없는 것이 길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시작도 없다. 길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면, 그건 길이 아니다. 언젠가 시작되었겠지만, 그저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어져 오는 것이 길이고, 끝 간 데 없이 뻗어가는 것이 길이다. 잘 찾아간 것으로 여겼지만, 곰곰 생각하면 잘 찾아간 길이 아닌 경우가 전부다. 그래서 다시 출발점을 찾지만, 그 찾으려는 출발점도 마치 끝인 양 잘 찾아지지 않는 것이 길이다.

 

어떤 사람들은 길이 길다의 형용사와 관계가 깊은 명사라 한다. 옛 사람들은 마장으로 그 길이를 가늠해왔고 현대인들은 kmmile로 그 길이를 재고 있지만, 그건 그냥 인간의 짧은 인식이 만들어놓은 편리한 단위일 뿐이다. 끝인 것 같은 곳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이 길인데, 그 길을 누가 어떻게 잴 수 있단 말인가. 길을 찾다 보면 시작과 끝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누구나 경험하지 않는가.

 

누군가 인생을 나그네 길이라 했다. 시작도 끝도 없이, 한시도 쉼 없이 걸어야 하는 길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휴게소에 들러 잠시 웃으며 쉬면서도 갈 길을 걱정해야 하고, 다 왔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도 다시 돌아갈 길을 걱정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갈 길과 돌아오는 길은 한 치도 끊어지지 않는 연속일 뿐이다. 사람들은 그걸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닌다. 인생의 험한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 사이에 부지런히 올레길을 찾고 둘레길을 찾으며 골목길을 헤맨다.

 

길 아니면 가지 말라고 했지만, 사람이 가면 길이 되고 길을 내면 사람이 다닌다. 그래서 인간세상에 길 없는 곳이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은 옳은 길그른 길을 구분하지만, 옳고 그름의 기준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또 어떤 길이 옳았는지는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판단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많은 시간의 기준도 명확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길을 찾아왔으나 제대로 찾은 사람은 많지 않고, ‘올바른 길을 통해 삶이 완성된다고 믿고 있지만, 올바른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길을 찾으러 길을 나서기가 두려워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고, 발로 밟을 수 있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길이나 찾아다니며 맛볼 따름이다.

 

***

 

미국에 체류하면서 휴일이나 휴가에는 반드시 길을 나선다. 남한 면적의 두 배가 넘는 오클라호마 주는 미국 역사의 양지와 음지를 모두 갖고 있다. 그 가운데 내가 크게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은 음지에 속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다'식민주의'가 백인들의 원죄라면, 그 원죄의 역사적 표본을 이곳에 만들어 놓은 그들의 진의는 무엇이었을까. 자신들의 새로운 삶터를 건설하기 위해 인디언들을 고향에서 쫓아낸 백인들.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쫓겨나 눈물의 장정[Trails of Tears]’이란 쓰라림을 맛보며 대부분 오클라호마의 한 구석에 강제로 정착당한 인디언들. 그들 두 부류의 인간들은 오늘날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오클라호마주 전역 교통도

 


이번에 여행을 하고 있는 치카샤 및 촉토 인디언 지역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이른바 '눈물의 여정(Trail of Tears)'

 

그런데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쉽지 않다. 그 그늘을 확인하기 위해 토요일과 일요일은 물론 각종 휴가나 방학 등을 활용하지만, 길이 너무 멀어서 쉽지 않다. 그래도 쉬지 않고 다니는 편이다.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은 길의 매력에 있다. 내가 지금 사는 곳과 가려는 곳이 엄청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지만, 그 연결고리로서의 길은 또 다른 가치와 의미를 지닌 공간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 미국의 길들은 넓고 곧다. 특히 가도 가도 산이 보이지 않는 오클라호마의 길은 약간의 과장을 보탠다면 솜씨 좋은 장인이 대지에 그은 미학적 직선처럼 보인다. 그저 자를 대고 종이 위에 쭉 긋는 선이 미학이나 철학을 갖기란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대지의 핏줄을 타고 심장을 직격(直擊)하는 선은 생명이나 미학, 혹은 철학과 직결된다. 그 생명성을 느끼게 하는 직선의 미학이 이곳 길들에는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한동안 내가 천착해온 ‘66번 도로와는 다른 차원의 의미가 직선으로 쭉 뻗은 오클라호마 주의 길들에는 들어 있다는 것이다.

 

 


Route 66 표지판

 


클린턴에서 스틸워터 오는 도중

 

땅이 넓으니 그런 것 아닌가라고 항변할 수 있겠는데, 사실은 그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다만 나는 이미 나 있는 길들의 해석적 의미, 혹은 내 나름의 생각이나 느낌을 강조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길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가장 큰 요소는 인공과 자연의 자연스러운 어울림이다. 길을 따라 형성된 도시나 주택 등 인공의 구조물들은 철저히 자연의 질서와 호흡을 함께 하는데, 그 점이 그 자연스러움을 해치지 않는 요인이다. 땅 넓이에 비해 사람 숫자가 턱 없이 적으니, 굳이 자연의 질서를 거스를 필요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미국 아니라 어떤 나라라도 이런 도로들을 갖고 있다면, 나는 그들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엘크에서 클린턴 가는 도중

 

6개월 가까운 기간 유럽을 자동차로 여행하면서 길의 아름다움에 반한 적이 있다. 자동차를 몰아 스위스의 산하를 건너고 오르내릴 때의 짜릿한 흥분을 잊을 수 없다. 하늘로 솟구쳤다가 바다 밑으로 잠기는 듯한 충격을 스위스에서 운전하는 동안 느꼈기 때문이다. 동쪽의 바리항에서 서쪽의 나폴리까지 이태리를 횡단할 때 느낀 평화로움과, 프랑스 남부로 가기 위해 몽블랑 산맥의 터널을 넘을 때 느꼈던 혼돈과 재생의 희열을 그 후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했다. 프랑스 중남부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하이웨이와 독일 로만틱 가도를 달릴 때의 편안함과 드라이버로서의 자긍심을 그 후 다시 느껴본 적이 없다. 동유럽 루마니아를 종단하면서 열악한 도로사정과 그들의 험한 운전 관습 때문에 흘린 땀과 긴장감을 그 후 어디에서도 다시 체험하지 못했다.

 

 


엘크 시 초입


치카샤에서 촉토로 넘어가는 길 어디쯤

 


OSU 중심을 가로지르는 먼로 길[Monroe Street]

 

***

 

15년 전 LA에 머물 때 간헐적으로 미국 안에서의 장거리 운전을 경험한 적이 있다. 아직도 그 때 달리던 캘리포니아 서쪽의 1번이나 101번 해안도로를 잊지 못한다. 캘리포니아와 워싱턴 주를 거쳐 캐나다 로키산맥을 종단할 때의 그 천상에 오른 듯하던기분도 잊지 못한다. 미국 서부지역 사막지대의 가물가물한 지평선을 바라보며 달리다가 난데없는 폭우를 만나 흔들거리던 차 안에서의 말 못할 두려움 또한 잊지 못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시도 잊을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것은 우리나라의 길과 운전자들이다. 땅은 좁은데, 사람도, 차도 많아 참으로 운전하기 어렵다. 시간은 없는데 도로가 막히면 짜증이 난다. 교통신호나 법규를 지키려다간 바보 취급당하기 일쑤다. 규정 속도를 지키려다간 뒤차 운전자에게 모진 욕설이나 듣기 십상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운전자들은 집단 스트레스에 걸려 있다고들 말한다. 그래서 평소에 점잖고 존경받는 사람도 일단 핸들만 잡으면 매우 거칠어지는 것이 우리나라라고들 말한다.

 

우리나라 운전자들은 누구나 세계 어딜 가도 최고의 운전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끼어들기 천재, 앞지르기 천재, 신호위반 천재, 차선 안 지키기 천재, 경적 심하게 울리고 라이트 번쩍거리기 천재, 창유리 내리고 욕설 퍼붓기 천재 등등. 우리나라 사람들은 목숨을 건 곡예운전의 달인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내가 운전을 그만 두어야 그나마 제 명대로 살지!’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

 

미국에서는 길, 특히 오클라호마 주와 같은 전원지역의 길들 덕분에 행복해진다. 야산 하나 보이지 않는 드넓은 들판 사이를 달리다 보면, 가슴이 뻥 뚫리고 휘파람이 저절로 불어진다. 길 좌우에는 목장이 이어지고, 한가로이 풀을 뜯는 검정 소들이 가끔 고개를 들어 달려가는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도 한다. 목초지에서 베어낸 풀들을 말아놓은 건초뭉치들도 흡사 십대 남자 아이 얼굴의 여드름처럼 아름답게 돋아 있다.

 

 


킹피셔 인근 지역도로

 


킹피셔 인근지역에서 포착한 지평선 위의 소들

 


치카샤에서 촉토로 가는 도중, 산중의 한 목장을 지나면서 만난 소들. 이들을 가까이 보려고
길가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더니 글쎄 이 녀석들이 웅얼거리며 걸어와 우리를 유심히
쳐다 보더군요. 우리가 그들을 구경한 게 아니고, 그들이 우리를 구경하는  형국이었지요.
      사람 보기 어려운 산 속의 목장에서,동양인을 보기란 더더욱 어려웠을 겁니다. 
    신기한 눈초리로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들의 모양을 보며
내심 얼마나 멋쩍던지요.

 


촉토 인디언 지역[이곳은 오클라호마 주에서 유일한 산악지역임]에서 만난 길

 


치카샤 지역의 길을 달리다가 만난, 어떤 목장 입구

 


토우손(Towson) 포트(Fort) 근처 길가에서 만난 농장입구[아마 주인 부부의 이름이겠지요?]

 

그 뿐 아니다. 땅 속에서 원유를 퍼내는 검은 색 채굴기들이 도처에 널려 있고, 그것들은 흡사 사마귀처럼 끄덕거리며 원유를 길어 올린다. 흡사 까치집처럼 생긴 겨우살이들이 다닥다닥 붙은 교목들이 길 좌우에 즐비하고, 다운타운을 벗어난 도시 외곽의 나무숲에는 멋지게 지은 집들이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마을마다 하얀색의 교회들이 하늘 높이 첨탑을 높이 올린 채 서서 마을의 역사를 대변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합쳐져 흥미로운 서사구조들을 만들어내고 끊임없이 이야기들을 이어간다. 그래서 길은 단순히 지나가는 통로가 아니고, 각종 사건을 재료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발효의 공간이다. 그래서 나는 길을 사랑하고 길 위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애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역마살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글로벌 시대에 누군들 역마살을 피해갈 수 있으랴. 그리고 어쩌면 역마살이 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의 매력에 심취한사람들일 것이다. 역마살이 끼었대도 좋으니, 의미를 찾아 방황할만한 좋은 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스틸워터로 돌아오는 길에 잡은 한 컷[주택 옆에 목장이 있고,
그 곁에서 원유채굴기가 작업을 하고 있음].


아무 보는 사람 없어도 끄덕거리며 혼자서 열심히 원유를 길어 올리는 장한 채굴기

 


177번 도로를 달리다가 발견한 소규모 인디언[Iowa Tribe] 집단 거주지의 표지판

 


오클라호마주 길 위에는 늘 태양이 빛난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23. 09:05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1-

 

 

손 형,

 

참 오랜만입니다. 그간 본의 아니게 격조했었군요. 오늘은 형께 모처럼 길 이야기를 건네 볼까 합니다. 뜬금없이 웬 길 이야기를 하느냐고 타박하지 말아 주세요. 우리가 작은 발과 짧은 다리를 움직여 꼬박꼬박 넘어 다니던 그 옛날의 시골길이 생각나시나요? 고갯길, 원둑길, 논둑길, 고샅길, 신작로 등 갖가지 길들이 이어져 우리의 시골길을 이루고 있었지요. , 혹시 박목월의 시 <나그네>를 기억하시는지요? 함께 감상해 보실까요?

 


목월 시인의 젊은 시절 모습<동리목월기념관>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이 시 속의 나그네가 단순한 존재는 아니겠지요. 아마도 그는 어떤 복잡한 사연을 갖고 길을 떠난 게 분명하군요. 물론 무작정 길을 떠났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달처럼 미끄러지듯 남쪽을 향해흐트러짐 없이 가고 있는 모양으로 보아 속으로는 어떤 목적과 사연이 있을 겁니다. 그가 가고 있는 길 또한 단순한 도로가 아니겠지요. 그래서 시인도 남쪽지방으로 삼백 리나 벋어 있는 외줄기 길을 말했을 겁니다.

 

~길에는 온갖 사연들이 스며들어 있었겠지요. ‘사랑, 미움, 믿음, 배신, 약속등등 몇몇 기호로 요약되는 복합적 인간사가 이 길바닥에는 깔려 있을 겁니다. 길목 마다 조롱박처럼 매달려 있는 주막에는 늘 술이 익어가고, 그런 술독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인간사가 좀 복잡합니까? 얼굴 반반하고 몸매 고운 주모라도 있는 경우라면 더 복잡해지겠지요. 고속도로와 철길이 생기면서 옛길은 사라졌지만, 우리의 목월 선생은 그 옛길을 잘도 찾아내서 우리에게 힌트로 던져 주신 것이지요.

 


엘크시티에서 스틸워터로 오는 길

 

 

우리에게도 삼백 리나 되는 남쪽 길이 있었다는 걸 알려 주려는 노 시인의 마음 씀씀이가 제겐 감동 그 자체입니다. 아마도 서울에서 저 전라남도 혹은 경상남도 바닷가 어디쯤까지 이어지는 길이었겠지요. 그걸 찾아내어 복원하라는 것이 목월 선생의 묵시(黙示) 아니겠는지요?

 

요즘 제주도에서 시작한 올레길이 뜨면서 그와 유사한 둘레길도 나타난 모양입디다만. 숲이 있는 곳이면 마구잡이로 파헤쳐 길을 만들어 놓고는 사람들을 유인하는 모습이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습디다. 말하자면 요새 만들어지는 길은 스토리 혹은 히스토리가 없는 무미건조한 공간일 뿐이지요. 걷는 자들이 무언가를 갖고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물리적인 길이라는 점에서, 그것들은 목월 선생이 발견하신 남도 삼백 리와는 비교될 수 없지요.

 

 


이중섭의 <길>(이미지 갤러리)

 

 

***

 

이곳에 와서 지낸 몇 달 동안 여러 가지를 목격했습니다만, 가장 가슴 뛰는 일은 ‘66번 길을 발견한 일입니다. 처음엔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요. ‘참 할 일 없는 미국인들이라고 빈정거리면서 말이지요. ‘넓은 땅덩어리에 필요하면 길을 뚫고, 그 길이 불편하면 뭉개버리고 새 길이나 다른 길을 뚫는 게 예사이지, 그 무슨 길을 가지고 이리도 호들갑을 떠는가?’ 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한 번 두 번 지나다니면서 이게 예사 길이 아니라는 점, 길이란 그저 다니는 것만으로 소임을 다하는 단순 공간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지요.

 


여덟개의 주[일리노이-미주리-캔자스-오클라호마-텍사스-뉴멕시코-애리조나
-캘리포니아]를 통과하는 66번 도로 

 

다니면서 적지 않은 걸 경험하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 에드몬드 시티(Edmond City) 근처의 아카디아(Arcadia)에서 발견한 POPS를 볼까요? 66번 도로를 달리다가 멀리 앞을 바라보니 '빨대 꽂은 음료수 병' 하나가 우뚝 서 있는 게 아니겠어요? 지나면서 보니 주유소였는데, 미국에는 주유소에서 음식도 팔고 물건도 팔지 않아요? 주유소라면 그 흔한 이른바 폴 사인(pole sign)’을 세워 놓든가 영 뭣하면 주유기 표시라도 세워 놓을 것이지 대체 '빨대 꽂은 음료수 병'을 세워 놓은 건 참으로 요상했어요.

 


POPS 주유소 마당에 세워진 '빨대 꽂은 병' 

 

그래서 우리는 그 다음번에 작정하고 이 주유소에 들어가 보았지요. 과연 레스토랑의 유리창이나 벽에는 온갖 음료수 병들로 또 한 겹을 이루고 있습디다. 사람들은 음식을 주문해 놓고 벽 쪽으로 가서 마음에 드는 걸 하나씩 들고 오는 거지요. 그러고 보니 밖에 서 있는 거대한 병 모양의 조형물은 바로 이 음료수 병들을 바탕으로 디자인한 것이더군요 글쎄.

 


POPS의 내부 앞쪽 창 

 

종업원을 통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여기에도 내력이 있더군요. 이게 바로 체사피크 에너지(Chesapeake Energy)라고,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천연가스 생산 회사이자 원유와 액화천연가스의 11번째 큰 생산회사로서 오클라호마 시티에 본부를 두고 있는 그 회사의 CEO 오브리 맥클레돈(Aubrey McCledon)이 아이디어를 내고, 건축가 랜드 엘리옷(Rand Elliot)d이 디자인한 것이라네요. 2007년 여름에 문을 연 뒤 급속하게 66번 도로 관광의 매력포인트로 부상했다는군요. 66번 도로 주변을 돋보이게 하는 66피트 높이의 소다 병이 바로 이것이지요. 그리고 이 POPS는 주유소 편의점 안에 비치되어 있는 수백 종의 소다 향들과 각종 브랜드들을 자랑하고 있지요. 이 뿐 아니라 이 편의점과 함께 각종 버거, 소다, 셰이크 등 다양한 식당 음식들도 갖추어져 있구요. 여기서 우리는 66번 도로가 살아날 수밖에 없는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지요. '이미 존재하는 66번 도로', 이 도로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 그리고 그들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바로 66번 도로를 살려 낸 힘의 원천이었어요.  

 


POPS 내부 마트 

 

또 하나 예를 들어 볼까요? 이 주유소에서 멋진 음료수 하나를 골라 목을 축인 다음 다시 길에 올랐지요. 한참을 가다가 루터(Luther)라는  지역의 경계에 들어오자마자 길가에서 주차장인지 마굿간인지 버려진 폐가인지 언뜻 분간이 가지 않는 허름한 건물 하나를 발견했어요.

 

차를 세우고 보니, ‘66번 도로의 경계선 레스토랑[The Boundary Restaurant on Route 66]’이란 멋진 이름의 식당이었어요. 버려진 길가 건물을 외부는 그냥 두고 내부만 수리하여 레스토랑으로 개업한 경우이겠지요. 내가 보기에 내부는 온갖 앤틱 풍의 재료들로 덕지덕지 혼란스러웠지만, 미국인들의 성향은 잘 반영하고 있었지요.

 


66번 도로 Luther에서 만난 길가 '바운더리 레스토랑'


'바운더리 레스토랑' 의 문 


옛날 화폐를 이용한 이 식당의 인테리어 디자인이 눈에 띈다.

 

 

바비큐, 핫독, 소세지 등을 팔고 있는 그 집 음식의 맛은 그저 그랬지만, 중동계 이민의 후예로 자신을 소개한 주인은 자신의 요리와 식당의 인테리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어요. 식대가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은 끊임없이 들어 왔지요. 그들이 만약 속도와 시간의 경제성에 충실한 현대인이었다면, 이 길로 접어들어 오지도 않았겠지요. 경제성에 충실한 사람들 사이에 살다보니 많이 피곤을 느낀 사람들이 옛날의 66번 도로를 찾아 여행을 하는 것이고, 입맛이나 분위기 또한 지난 시절의 그것을 추구하게 된 것이겠지요.

 


'바운더리 레스토랑'의 주방장 겸 주인이 요리하는 모습 


'바운더리 레스토랑'의 음식. 옛날 식 음식이라 함.


 '바운더리 레스토랑'에서 주인과 함께

 

 

그런 분위기, 복고풍이랄까요? 실제 삶에서는 절대 옛날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현대인의 일반적 성향 아니겠어요? 그런 현대인들이 가끔씩 자신의 공간 밖에서 순간적인 일탈을 꿈꾸는 것이고, 그런 일탈의 욕망이 66번 도로에 대한 향수로 표출되는 것이겠지요. 66번 도로를 복원시킨 사람들도 일반인들의 그런 심리를 간파한 것이겠고요. 그래서 이 길을 현대인의 경제논리를 넘어서는[beyond economic logic of modern people]’ ‘수퍼 하이웨이 66번 도로[Super Highway Route 66]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 제 생각입니다. <나머지는 다음번에 계속됩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