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4. 30. 16:55

 

 

 


            원동지역으로부터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처음으로 도착하여 토굴을 파고 살던
   우쉬또베 교외의 황무지. 지금은 공동묘지로 바뀌어 있음.

 


고려인들이 최근까지 거주하다가 모두 떠나 폐허가 된 우쉬또베 인근의 모쁘르 마을

 

 


2002년 아리랑 극장의 가수 김막달레나

 

 


벨라루스 고려인협회에서 고려인들과 함께[수도 민스크에서]

 


카자흐스탄의 탁월한 고려 시인 '이 스따니슬라브'

 

 

우쉬또베의 바스쮸베 언덕에서 김병학 시인과 이 스따니슬라브 시인.
뒤쪽으로 보이는 하얀 시설물들이 고려인들의 공동묘지임.[2006년]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호텔 로비에서 소설가 블라지미르 김

 

 


카자흐스탄 고려인 극작가 한진 선생의 손녀 한율리아와 김병학 시인.[백규 연구실에서]

                                                                                 

 

 

*이 글은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 2013]의 머리말인데, 몇 분의 요청으로 이곳에 옮겨 놓습니다.

 

 

 

 

고려인들과 ‘고려인 문학’

 

 

긴 여정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오래 전의 고려인이 되어 그들이 겪어 온 ‘탈향과 이주’의 역정을 추체험하는 길이 간단치 않았다. 그들의 자취를 찾아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이른바 CIS[독립국가연합 :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에 속한 몇몇 나라들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곳들에 상상 속의 고려인들은 더 이상 없었다. 김경천 장군의 말발굽 소리도, 홍범도 장군의 신출귀몰도, 작가 조명희의 빛나는 문장도 사라지고 없었다.

 

굽이굽이 복잡하기만 한 디아스포라의 역정(歷程)에 지치고 힘들었던 것일까. 자신들이 지켜오던 우리 말 아니 고려 말이 현실 속에서 그리도 무거운 짐이었을까. 스탈린의 폭력적인 동화정책에 어쩔 수 없이 그 무거운 민족의 표지(標識)를 내려놓은 그들이었다. 외모와 약간의 생활양식, 그리고 ‘고려인’이라는 민족의 칭호만 뺀다면, 그들에게서 동족으로 생각할만한 요소를 발견하기란 어려웠다. 유창한 러시아어를 굴리는 그들의 혀 밑에 우리말이 깃들 틈은 더 이상 없었다. 말을 잃으니 문학과 역사를 잃고, 문학과 역사를 잃으니 민족정신을 잃어버리게 된 그들의 지난날들이 그들을 만날 때마다 그 옛날 가설극장 영사기의 낡은 필름 돌아가듯 반복적으로 눈앞에 어른거렸다. 민족의식의 희미한 끈이나마 이어보려고 무던히 애쓰던 1세대 고려인들은 고려극장의 창고 한 구석에 버려진 이름으로 쳐 박혀 있거나 우쉬또베 근교의 황무지에 녹슨 묘비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 고려인 2세와 3세들의 표정 너머에 아련히 남아있는 부모세대의 근심과 좌절을 읽어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모든 소수민족들은 러시아인이 되어야 한다’는 모토가 바로 스탈린이 표방한 동화정책의 핵심이었다. 흉포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마수를 피해 그 땅에 들어간 소수민족들 중의 하나가 고려인들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구소련의 다수민족에 의해 또 다른 식민지인으로 타자화 되는 역사적 폭력을 겪어야 했다. 일제의 끄나풀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아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로 쫓겨난 고려인들은 그곳에서도 ‘주변인’으로 낙인찍혀 제국의 공민 대우를 받지 못한 채 긴 세월을 견뎌야 했다. 일찍이 식민주의⋅억압과 피억압 등에 대한 비판적 대안을 내놓은 선구자 프란츠 파농의 ‘인종이 곧 계급’이란 말은 사실 고려인들에게도 들어맞는 명제였다.

 

그러나 구소련이 해체되고 각 공화국들이 독립된 이후에도 고려인들은 또 다시 ‘새로운 주변인’으로 타자화 되었다. 각 공화국의 주도민족에 밀려 또 다른 소수자로서의 설움을 맛보면서 새로운 식민화의 함정으로 빠져 들어간 것이다. 이처럼 탈식민의 조류 속에 ‘새로운 식민화’의 굴레에 갇히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그러던 그들이 우여곡절 끝에 그리던 할아버지의 나라를 찾았으나, 이곳 또한 그들에겐 비집고 들어갈 틈 없는 공고한 ‘중심부’일 뿐이었다. 말하자면 고국에서도 또 다른 주변인으로 타자화 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최근 3년 가까운 시간을 투자하여 한글로 기록된 1세대와 2세대 고려인들의 문학과 예술을 추적하는 고통스런 즐거움을 누렸고, 이 책이 바로 그 결실이다.

 

***

 

그동안 많은 분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다 꼽을 수는 없으나, 물설고 낯 선 중앙아시아에서 밝은 눈과 귀가 되어 준 김병학⋅이 스타니슬라브⋅김 블라지미르⋅김 빅토리아 등 몇 분은 특히 잊을 수 없다. 그 가운데 김병학 선생으로부터 받은 도움은 결정적이었다. 젊은 나이에 카자흐스탄으로 건너 가 한동안 한글교사로 활약한 뒤 고려인 사회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해오고 있는 그를 능가할 만한 ‘중앙아시아 고려인 전문가’는 없다고 본다. 이 책에 반영된 귀한 자료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그의 손을 거친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그는 국내에서 여러 권의 고려인 관련 서적들을 출간함으로써,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화에 대한 우리나라 학계의 관심이나 수준을 괄목할 만큼 높인 사실도 강조하고 싶다. 이런 인재를 발탁해 쓰는 게 나라의 할 일이다.

 

감사하게도, 이 연구 작업을 위해 한국연구재단에서 연구비를 제공했고, 학자의 뜻을 세우던 시기에 손을 잡아주신 도서출판 태학사의 지현구 사장님을 27년 만에 다시 만났다. 연구 활동의 한 부분을 결산하며 세월의 덧없음과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은 망외(望外)의 소득이다. 고전문학도로 살아오던 중 우연히 ‘해외 한인문학’을 만나 탐구 영역을 넓히게 되었고, 그 한 부분인 ‘고려인 문학’을 수탐하여 미흡하나마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내게 된 점을 큰 행복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소담스런 책으로 만들어 주신 태학사 한병순 부장의 노고에 감사하며, 강호제현의 아낌없는 叱正을 고대한다.

 

 

2013. 6.

 

 

달마산 아래 백규서옥에서

 

조규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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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9. 2. 03:07


동아일보 기사보기

고려인 ‘계 니콜라이’의 21세기 민족운동


알마티에서 만난 50대의 계(桂) 니콜라이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에게 뚜렷한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로서 한일강제합방 뒤 북간도로 망명하여 이동휘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한 계봉우(桂奉瑀·1880∼1959)의 손자다. 현재 독립유공자 후손회 회장인 그가 보기에 중앙아시아의 한민족 공동체는 이미 와해됐다고 할 만큼 이 지역 고려인에게 민족정신의 상실은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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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농장에 서 있는 니꼴라이 선생>

한민족의 표지(標識)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이 말과 글이다. 말과 글을 잃은 세대 사이에 역사나 문화가 이어질 리 없다. 말과 역사를 잃은 경우, 본질적인 의미에서 민족공동체의 일원일 수 없다. 그런 이유로 말과 글이 민족 정체성 회복의 관건이라는 계 니콜라이의 관점은 해외동포의 교육이나 계몽에 관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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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장을 배경으로 서 있는 백규와 니꼴라이 선생>

많은 고려인처럼 ‘편하게 잘 먹고 잘살아 오다가’ 나이 50이 넘어서야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우쳤다는 그는 지배자 일본에 붙어 편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바쳐 투쟁한 독립투사의 삶을 보면서 자신의 관점을 바꿨다고 했다. 요즈음도 한국어교육원에 나가 우리말을 익히고 있을 만큼 말과 글에 거는 그의 기대는 크다. 무엇보다 자금 마련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박봉의 대학교수 직을 접고 농장을 경영하며 고려인에게 우리말과 역사를 보급하는 일에 나선 그의 삶은 계몽 중심의 독립운동을 주도해 온 조부의 행적과 흡사하다.

고려인은 사실 오랫동안 가족과 소비에트 국가만을 위해 일했다. 모국어 학교의 폐쇄를 강요당하면서도 변변히 저항 한번 못했다. 모국어 극장이나 신문이 지리멸렬해지는데도 손 한번 써보지 못하는 것이 고려인이다. 모국어가 탄압받고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한 상황에서 그 언어로 쓰인 모국의 역사를 전승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 활동 모두가 ‘민족을 위한 일’이라면 언어의 상실과 함께 사실상 민족운동은 막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점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고려인 단체의 현실인식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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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인들의 미래에 대하여 담론하고 있는 세 사람. 좌로부터 김병학 시인, 백규, 니꼴라이 선생>

그는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를 개척하지 못하고 외부의 도전에 너무 쉽게 자신을 접어온 원인으로 ‘노예근성’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잘 먹고 잘살아 온’ 그간의 삶은 철저한 순응의 역사였다. 구소련의 동화정책에 맞서지는 못했다 해도 최소한 민족의 정신을 지키려는 가정 단위의 개별적 노력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았느냐는 그의 주장을 순진한 생각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역경 속에서도 민족공동체의 미래를 내다보며 현실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선각자의 고난을 그는 매 순간 떠올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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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책에 서명하고 있는 니꼴라이 선생>

이런 일에 착수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새로운 한글 신문을 제작하겠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다. 우리 민족의 언어 문화 관습 정보 등 모든 것을 묶어 무가지(無價紙)로 배포하겠다고 한다. 그는 5, 6년간만 고려인 가정에서 우리의 말이나 역사에 관한 담론이 오갈 수 있다면 궁극적으로 민족에 대한 인식이나 관점도 살아날 수 있다고 본다. 잘 먹고 잘사는 차원을 벗어나 가치 있는 삶을 모색할 때임을 강조하는 그가 있으므로 고려인 사회엔 아직도 희망이 있다.

조규익 숭실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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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8. 9. 17:18

바스러져 가는 고려인들의 목소리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의 공연 대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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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 국립 고려극장의 외관> 

‘탈식민(脫植民)’이 시대의 핵심적인 코드로 정착된 지금, 새삼 민족 정체성을 운위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러나 디아스포라(diaspora ; 離散)의 한복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아직도 그것은 절실한 문제다. 이산의 시련 속에서 우리의 민족문화나 민족정신의 현장은 중심부와 주변부로 분리되어 왔다.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변화되고 있는 중심부에서 살아있는 민족정신의 맥을 잡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일제나 구소련의 시기가 우리 민족에게 물리적 디아스포라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정신적 방랑 혹은 방향성 상실의 관념적 디아스포라 시대다. 우리에게 탈식민이 요원한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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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위는 고려극장 중앙무대, 아래는 객석>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짐짝처럼 실려가 내동댕이쳐진 존재가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다. 그로부터 70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카자흐스탄에만 10여만 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 그 고려인들의 문화적 전통과 언어 보존의 핵심 기지 역할을 해온 고려극장. 1932년에 설립되었으니, 올해로 무려 77년 고난의 역사를 장하게 견뎌온 고려극장이다. 지금 이곳에서 한국 근현대사 혹은 민족정신사의 ‘노다지’가 썩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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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 창고>

고려극장에서는 1932년부터 올해까지 한 해도 빼놓지 않고 연극이 공연되었다. 단순히 즐거움을 주기 위한 ‘놀이’로서의 연극이 아니라,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지사(志士)들이나 고려인들의 삶, 「춘향전」ㆍ「심청전」ㆍ「홍길동전」ㆍ「흥부전」같은 우리 고전들의 수용을 통해 민족정신을 환기시켜온 고려인들의 육성이다. 이들은 그런 연극을 통해 수시로 민족 정체성을 공유하고자 했다. 구소련 시절 ‘대러시아’의 구호 아래 강요된 동화정책으로 고려인들의 정체성은 크게 붕괴되었고, 구소련 붕괴 이후 이 지역에서 불고 있는 민족주의의 바람은 또 다른 방향에서 고려인의 문화를 위축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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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극장의 대본들과 대본 모습>

이제 고려 말을 구사하는 몇몇 고려인들이 사라지고 나면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할 만한 한 가닥 정신적인 끈마저 놓게 될 것이다. 사실 그동안 고려인들은 ‘아무데도 쓸 일이 없는’ 고려 말을 용케도 유지해왔다. 그런 고려 말을 재료로 문학작품을 쓰기도 하고 노래를 지어 불렀으며, 연극도 상연했다. 그러나 이제 이곳에서 고려 말은 임종을 앞둔 환자의 형국으로 변했다. 고려말로 연극을 공연할 배우도 없고 들어서 이해할 수 있는 관객도 없는 현실에서 고려말 연극은 존속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어디서 그 끈을 찾아낼 수 있는가. 77년간 이어온 고려극장의 찬란한 전통과 역사를 되살리는 것만이 그 유일한 길이다. 연선용, 태장춘, 채영, 김기철 등 당시의 뛰어난 극작 및 연출가로부터 최영근, 송 라브렌지 등 현재의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빛나는 고려인 연극의 맥을 되살려야 한다. 그러자면 우선적으로 고려극장의 창고에서 썩어가는 대본들의 먼지를 털어내고 그것들에 내재된 의미를 끄집어내야 한다. 200건이 훨씬 넘는 대본들에는 연극을 통해서 그들이 절규했던 ‘고려인들의 함성’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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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청전 공연 포스터>
 
자신들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활자나 소리 아닌 연극을 매체로 선택했다. 그들이 연극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은 일제와 스탈린의 철권통치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불굴의 정신이다. 그걸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도 적은 돈이나마 확보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고려극장의 보물을 건지기 위한 최소 비용조차 추렴하지 못한다면, 우린 문화국민의 타이틀을 내려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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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7. 15. 10:32

최근 들어 러시아어 권의 국가들을 자주 찾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동족들을 수시로 만난다. 미국이나 일본, 혹은 중국에서 만나는 50대 60대 동포들은 대부분 한국어에 능숙하니 불편함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구소련 권은 사정이 다르다. 최근에 이주한 사람이 아니라면, 모두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다.

 구소련의 엄혹했던 ‘동화정책’은 대부분의 동포들을 철저한 러시아인들로 만들고 말았다. 진짜 속이야 어떤지 알 수는 없으나, 타고난 제 말 혹은 조상의 말을 버리고 러시아어를 모어 혹은 모국어로 삼게 함으로써 내면까지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말이 다르면 생각도 달라진다고, 그들이 2대, 3대를 지나면서 바꾸어 가진 말 때문에 의식구조 역시 완벽하게 달라지고 말았다. 구소련 권의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말과 민족성의 문제를 새삼 다시 인식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서는 한 가지 사례를 소재로 두 가지의 말을 하고자 한다. 말에 따르는 소외감, 말과 민족의식 등이 그것들이다.

       

   하나   


이번 여행 중 알마티에서의 어느 점심시간. 70대, 60대, 50대 등 고려인 3명과 함께 하는 자리였다. 모두 고려인 3세들이나, 70대는 우리말과 러시아말에 유창한 이중 언어 구사자, 나머지 둘은 러시아말만 할 줄 아는 지식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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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의 한국식당들 가운데 하나인 '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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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인들과 함께 점심을>

 두 언어에 능통한 70대가 본의 아니게 나와 나머지 두 사람 사이의 통역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말만 능하다고 통역이 수월한 게 아님을 그는 여실히 보여주었다. 통역이란 언어능력과 순발력을 요하는 업무임을 분명히 깨닫게 된 자리이기도 했다.

 통역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대화 판은 대부분 둘로 나뉘게 된다. 특히 통역해야 할 상대 언어 구사자가 단 한 사람이라면 그는 필경 본의 아닌 ‘왕따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사람이란 어쩔 수 없이 의사소통이 되는 사람끼리 대화를 나누게 되고, 그에 따라 통역이란 징검다리를 거쳐야 하는 상대는 소외되기 마련이다. 행인 앞에 두 갈래 길이 있다 하자. 한쪽은 탄탄대로, 또 한 쪽은 차가운 시냇물에 덩어리 덩어리 던져놓은 징검다리라면 그가 어느 쪽으로 길을 잡아들지는 묻지 않아도 분명해진다.

 우리의 모임이 그랬다. 4명이 합석한 자리였는데, 3명이 같은 러시아어, 1명인 나는 한국어 구사자였다. 더구나 3명 중 2명은 러시아어 외에 영어 등 구사할 수 있는 다른 언어가 전혀 없었다. 반면 나는 한국어와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지만, 그 자리에서 영어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 3명 중 1명은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구사했지만, 수시로 통역의 임무를 망각했다. 말하자면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그룹의 일원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그들과의 대화에 몰입하는 것이었다. 연로한 때문인지 전혀 순발력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힘겹게 대화에 끼어든 내가 “이 말 좀 통역해 주시오!”라고 소리쳐야 겨우 통역을 하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러시아 말이란 얼마나 소란스럽고 수다스러우며 안하무인적(眼下無人的) 언어인가. 그들이 자신들의 일에 관해 요란한 러시아어로 떠들어댈 때 나는 우두커니 앉아 음식만 씹어댈 수밖에 없었다. 대화 판에서 사람이 외로움을 느낀다거나 일상생활에서 소외를 당하는 일이 사실은 다른 게 아니다. ‘자기들만의 언어로 자기들 끼리 만 소통함으로써 남을 문 밖에 세워두는 일’이야말로 현대사회의 비참한 소외현상이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같은 언어’를 쓰느냐의 여부는 큰 문제가 아니다. 같은 언어를 쓰는 동족끼리도 서로 간에 얼마나 비참하게 소외시키는지를 보면 그 점을 잘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자기들만의 언어’를 쓰는 것이 소외의 가장 큰 조건임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계유지의 어려움에 몰려 어쩔 수 없이 떠난 초기 이민들이나, 비슷한 이유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동남아의 새댁들을 생각해 보라. 언어 때문에 그들이 겪어야 했던 소외감이 어떠했을까를. 그럼에도 심지어 우리 중의 몰지각한 어떤 인사들은 우리말을 못 알아들을 거라는 지레짐작으로 그들을 같은 자리에서 돌려세워놓고 험담을 하기도 한다. 차별의식으로부터 나온 우리 민족의 못된 습성이다. 같은 동족끼리도 말을 통해 소외시키기를 밥 먹듯이 하는 민족인데, 하물며 우리와 피부색과 사고가 다른 외국인들에 대해서야 오죽할까.


  

그 식사 자리에서 ‘고려 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사실은 60대나 된 사람들이 우리말을 한 마디도 모르는 게 눈에 거슬리던 차였다. ‘고려인들은 고려 말을 좀 배워야 하고, 젊은 세대는 더욱 그래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의 요지였다. 그러자 대뜸 ‘우리는 러시아 말을 하고 있고, 외국어를 배우려면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현실로 따진다면야 옳은 말일 것이다. 그러나 늘 애틋하게만 생각해오던 동포들의 입에서 망설임도 없이 이런 말이 튀어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나였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한국말을 배워서 어디에 써 먹느냐?’는 대답이었다. 한국말 배울 시간에 영어를 배우는 것이 훨씬 더 유용하다는 것이었다. 더더욱 기가 막힌 것은 ‘고려인의 후예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카자흐스탄 사람들이 고려 말 배우기에 열성적’이라는 말을 덧붙인 점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한국말을 배워야 한국의 정신을 배울 수 있고, 한국의 정신을 익혀야 뿌리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설득의 말을 건넬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미 구소련 혹은 카자흐스탄을 조국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한국은 독일이나 중국과 같은 먼 외국일 따름이었다. ‘비록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의 피붙이들에게 잘 해 준 건 없어도 늘 애틋하게 생각해왔는데, 이럴 수가 있는가!’라는 한탄은 이미 그들에게 통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었다. 그동안 혼자서 이들을 짝사랑해왔음을 그 순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생김새는 분명 나와 별로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뚜르르~’ 굴러가는 러시아어를 술술 구사하는 그들, 한국에 가서 며칠간 한국음식을 먹느라고 죽을 뻔 했다는 그들을 보며,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하다는 앤더슨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옮겨 심은 나무처럼 그저 그 땅에 적응하면 그 땅의 나무가 되는 것 아닌가. 누구의 말대로 ‘줄기와 뿌리는 이파리를 잡고 있으려 하나, 이파리들은 한사코 나무를 떠나려’ 하는 이치가 바로 이것 아닌가. 모체를 떠난 이파리인 그들은 결코 모체를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본향 회귀를 염원하는 1세대의 정신적 자장(磁場)으로부터 멀리 벗어난 그들이었다. 그들에겐 돌아갈 본향도, 그리워할 음식도, 붙들고 울어야 할 피붙이도 없었다. 그저 기름 줄줄 흐르는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의 음식들을 먹으며, ‘뚜르르~’ 굴러가는 러시아어로 수다를 떨며, ‘바로 지금 이곳’을 사는 이곳 사람들일 뿐이었다.


  ***


민족이란 무엇인가. 아니 가족이란 무엇인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우리는 그간 ‘피붙이’라면 끔찍이 생각해왔다. 준 것도, 줄 것도 없지만, 정 하나만큼은 나누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해온 것이 해외의 우리 동포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분명히 깨닫자. 그들에게 자신들의 나라는 카자흐스탄이요, 러시아일 뿐 대한민국이 아니다. 잘 나가는 대한민국을 특별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의무도 그들에게 없고, 고국을 잊지 말하고 강요할 권리도 우리에겐 없다. 너와 나는 그저 ‘바로 지금, 여기’에 충실해야 할 생활인들일 뿐임을 잊지 말자. 이런 바탕 위에서 해외 교민들에 대한 정책도 재조정되어야 한다. 민족의 실체 또한 새롭게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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